자결투표(自決投票)

 

(1) https://arca.live/b/yandere/19195399

(2) https://arca.live/b/yandere/19250159

 

 

0.

 

문이 열린다.

그 너머에 비치는 것은 침실의 풍경.

 

백이란은 조심스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러나 그 순간 전신에 오한이 들고 만다.

손목이 마구 욱신거렸다.

 

그것은 통증보다도 격렬한 뜨거움에 가까웠다.

 

백이란은 이 방에서 손목이 잘려나갔다.

주최자로 추정되는 자의 조언에 따라 서랍에 팔을 뻗은 순간,

손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잃고 그대로 떨어져나갔다.

 

판단력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뒤늦게 고통이 몰려왔다.

살면서 처음 느껴본 신체의 절단에 손목을 붙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이 너무 심한 고통을 받으면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른다던데 그것이 사실이었다.

목에서 바람 새는 소리만 잔뜩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백이란은 보았다.

시커먼 덩어리가 절단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와 떨어져나간 손에 달라붙는 장면을 보았다.

 

그것은 이내 손목을 끌어당기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백이란의 손을 원래대로 돌려주었다.

 

눈물범벅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이란은 그 자리에 한참 주저앉아 있었다.

 

겨우 제정신을 차린 것은 식사시간이 되기 10분 정도 전의 일이었다.

 

이어서 찾아든 감정은 경악과 분노가 뒤섞인 것이었다.

그 호박 괴인은 분명 초능력을 증명해주겠답시고 이런 짓을 벌였으리라.

상식을 벗어난 그 행동에 뒤늦게 공포 역시 찾아온다.

 

백이란은 이내 피투성이가 된 옷을 갈아입었다.

안 그래도 감금된 상황인데 괜히 남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갈아입은 옷가지로 바닥에 묻은 피까지 대충 닦아내고 침실을 나섰던 것이 대략 1시간 전.

 

식사를 끝마친 백이란은 다시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한동안은 방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절단의 기억이 떠올라 아무리 해도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본디 사람은 같은 통증에는 금세 무뎌지는 법인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날 무렵에는 긴장이 꽤나 풀려왔다.

 

그리고 그제야 백이란은 실내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피를 닦고 내팽개쳐둔 옷─아니, 이쯤 되면 사실 걸레였지만─이 사라져 있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옷에 발이 달려서 혼자 걸어나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 방에 들어왔다는 소리일 테다.

 

대체 누가?

 

그리 한참을 생각해봐도 짚이는 점이 없었다.

 

애초에 플레이어 여섯 사람 중에 범인이 없을 수도 있다.

그 괴인 본인, 혹은 그녀에게 협력하는 누군가가 와서 나름 청소를 해준 걸지도 모른다.

남한테 초능력을 주고 본인도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는 양반이면 청소한다고 순간이동해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한다고 답이 나올 의문이 아니었기에 결국 백이란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있으니 갑자기 문 근처에서 경보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흘끗,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바라본다. 아홉 시였다.

안내문에 따르면 분명 이때부터 개인실의 문이 잠긴다고 했었다.

 

문을 열려고 시도해보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말로 내일 아침 여섯 시까지는 잠겨있을 모양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찰나 백이란은 의문이 들었다.

 

매일 규칙을 추가하는 건 10시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전부 격리시키면 어떻게 진행하려는 걸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뒤를 돌아보니 책상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면 책상의 일부가 마치 스크린처럼 변해있었다.

 

방이 닫히는 9시부터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며 백이란은 의자에 앉았다.

 

스크린에는 세 개의 항목이 떠올라 있었다.

‘통화’, ‘규칙’, ‘구입’.

 

통화는 안 봐도 뻔했다.

격리된 상황에서도 대화를 할 수 있게 만들어둔 것이리라.

 

규칙 버튼을 눌러보니 아무 것도 없는 화면만이 나왔다.

아마 이건 10시가 되어야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구입 항목을 선택했을 때 스크린이 보여준 것은 인터넷 쇼핑몰 같은 이미지였다.

우측 상단에 50,000이라는 숫자가 있었다.

아마 그에게 허락된 구매 한도일 것이다.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구입해서 쓰라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당장 필요하다 느껴지는 건 없었다.

일단 나중을 위해 돈을 아껴두는 게 나을 성 싶었다.

 

활기발랄한 멜로디와 함께 화면이 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휴대전화의 착신 화면과 비슷한 이미지.

다만 거기 떠오른 이름은 이곳에 갇힌 전원의 이름이었다.

 

[좋아. 이란이도 연결 됐고…….]

 

수신 버튼을 누르자 들려오는 것은 미술교사 이시연의 목소리.

뒤이어 왁자지껄하게 여러 사람의 인사가 겹친다.

 

통화 기능을 확인도 안 하고 있던 그와는 달리 이쪽을 먼저 체크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단체 통화도 될 줄은 몰랐는데.

 

“무슨 일이에요? 기능 테스트?”

 

[뭐, 그것도 있긴 한데. 나중에 규칙도 정하고 하려면 얘기를 해봐야 하잖니?]

[그때까지 혼자 있기엔 심심하기도 하고!]

 

이어서 끼어드는 것은 여동생의 목소리였다.

 

[은하야. 일단 놀러온 건 아니거든?]

 

뒤이어 박선정이 한숨을 짓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잖아요?]

[은하 말이 맞아요. 좀 마음 편하게 있는 게 어때요?]

[문희 언니도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의 여자친구까지 끼어들어선 백은하를 두둔하자 목소리에서부터 기세가 등등해진다.

 

옛날부터 이 둘이 붙으면 신나서 방방 뛰어다니곤 했다.

박선정도 그것을 알아서인지 포기하고 금세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그 성란인지 뭔지 하는 년은 왜 안 받아.]

 

그러고 보니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박루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이쪽은 확실히 통화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냥 대화에 끼어들기 힘들어하는 성격인 듯 했다.

 

[화장실이나 욕실에 있다가 돌아올 시간을 놓친 거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바보는 아니지 않을까?]

 

“아니면 뭐, 그냥 일찍 자는 걸지도 모르고. 그럴만한 애니까.”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 백이란은 별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생각해보면 성란은 꽤나 마이페이스적인 성향이 있었다.

TV에 나올만한 부잣집 아가씨의 스테레오타입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술부 활동을 같이 하다보면 그런 모습이 자주 보였다.

다짜고짜 자신을 그려달라고 한다든가, 주말에 심심하니까 외출 약속이나 잡자든가.

…후자는 연인이 생긴 이후여서 거절하니 금세 수긍해주긴 했지만.

 

애초에 혼자 그림 그리기 심심하니 친구에게 온갖 미술도구를 쌓아다준다는 것부터가 평범한 발상이 아니었다.

딱히 금전감각이 없어서 펑펑 쓰고다니는 타입도 아니었다.

정말 진지하게 자신에게 그만큼 필요한 거니까 투자한다는 느낌이었다.

 

성란의 수면시간은 알지 못하지만 그녀라면 분명 납치된 이 상황에서도

강제로 정해진 규칙에 맞춰 자기 잠드는 시간을 미룰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고등학생 치고는 많이 이른 시간이니까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도 생각했지만.

 

[그건 여러모로 심각하지 않냐?]

“원래 그런 애라니까.”

[역시 그다지 마음엔 안 드네.]

[언니. 뒷담은 나쁜 거예요.]

[그년도 깠어.]

 

아무래도 그녀는 박선정의 기준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마구 툴툴대면서 말을 잇는다.

 

[애초에 여친 있는 애한테 꼬리치는 것부터가 거슬리지 않냐?]

[언니. 걔 진짜 착해. 그냥 이란이 그림 그리는 거 도와주려는 애라니까.]

[너 진짜 그러다가 큰일 난다. 남친 관리 네가 해야 돼.]

[선정이 언니!]

[…그래, 내가 괜한 소리 했다.]

 

결국에는 강문희가 소리를 치며 그녀의 불평이 끝났다.

꽤 화가 났다는 게 목소리에서부터 전해져왔기에 박선정도 잠깐 물러난 것이리라.

 

“누나. 문희 슬퍼할 짓은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성란이랑도 어느 정도 거리 두고 있으니까.”

[그래, 네가 그리 말하면 그런 거겠지…….]

 

잠시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진정된다.

그것을 파악하고서 이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오늘 규칙 제정할 거 이야기나 해보자.]

 

이쯤 되면 그녀는 거의 사회자 느낌이었다.

유일한 어른에다가 교사니 당연한 전개였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규칙이 좋을지 정도는 생각해보는 게 좋겠지?]

[뭐, 상식적인 걸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내 강문희의 목소리가 섞여든다.

그리고 늘어놓는 것들은 정말 상식적인 요소들이었다.

 

폭력 쓰지 말기.

남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지 말기.

식사당번 로테이션 정하기…

그런 것들이었다.

 

[괜히 이상한 규칙 넣어서 복잡해지는 것보다는 누구나 지킬 수 있는 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나는 문희 말에 찬성인데 너희들은 어떠니?]

“괜찮은 거 같은데요?”

[뭐, 그 정도면 나도.]

[좋아요.]

[……찬성.]

 

이윽고 전원의 수긍이 돌아온다.

 

[그럼 일단 오늘은 ‘폭력 금지’로 하자.]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그때 호박 괴인은 규칙이 하루에 하나씩 추가된다고 했다.


반드시 하나만 추가해야 하고, 반드시 하나는 추가해야 한다.

아마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유용한 것들을 먼저 추가해야 했다.

 

모두가 폭력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고 있겠지만

그걸 아는 것만으로 제어할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에서 싸움은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특히 이런 감금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다보면 가벼운 일로도 폭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식사당번 정하기보다 폭력 금지가 우선되어야 하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째깍째깍.

시계바늘이 어느덧 10시를 가리켰다.

 

스크린은 저절로 규칙 항목을 눌렀을 때의 화면으로 변했다.

다행히 통화는 끊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내가 입력하는 거구나.]

 

다만 조금 차이가 있다면 빈 화면이었던 그곳에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

 

가장 처음 규칙을 제안하는 건 강문희라는 것.

아마 이것도 가나다순인 모양이었다.

 

이내 그녀가 무언가를 했는지 화면에 커다란 문장이 떠오른다.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작게 몇 개의 문장 역시 나타났다.

 

우선 투표에 필요한 카드는 책상 서랍에 있다는 것.

다들 그것을 확인했는지 통화 너머로 드르륵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다만 백이란만큼은 조금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몇 시간 전에 책상 서랍에 손을 댔다가 손목 째로 잘려나간 기억이 있는 탓이었다.

 

그에게 초능력이 주어졌음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니 이번에는 괜찮을 거라고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아무래도 몸에 각인된 절단의 공포는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이번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백이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랍 안에는 다섯 개의 검은색 카드가 들어있었다.

카드를 들어서 확인해보니 반대쪽은 완전히 흰색이었다.

 

다시금 시선을 스크린의 안내문으로 향했다.

바로 앞쪽 벽에 있는 투입구에 흰색이 위로 가게 집어넣으면 찬성표,

검은색이 위로 가게 집어넣으면 반대표인 모양이었다.

 

투표권은 48시간마다 다섯 장이 되도록 추가로 지급되고,

탈락 투표를 개시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투표도 이것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또, 규칙이 통과되었을 때 찬성에 투표한 만큼 소지금이 증가한다는 듯 했다.

 

거기까지 읽고 벽을 바라봤더니 정말로 카드 한 장이 들어갈 만한 틈이 하나 있었다.

 

틈에 카드를 흰색이 위로 가도록 꽂고 주욱 밀어본다.

카드는 자판기가 지폐를 삼키듯 스르르 들어갔다.

 

강문희가 규칙을 제안하고 정확히 5분이 지나자 또 화면이 바뀐다.

 

[찬성] 7

[반대] 0

 

…표를 보아선 아무래도 성란 역시 통화만 하고 있지 않을 뿐 방에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내 원래의 빈 화면으로 돌아온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빈 화면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조금 전 가결된 규칙이 적혀 있었다.

 

[…흠,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구나.]

[쉬운 건지 복잡한 건지 모르겠네요.]

 

뒤이어 들려오는 이시연과 백은하의 목소리.

 

[아, 그럼 이제 자러 가도 돼?]

[선정이 언니는 새나라의 어린이니까 항상 일찍 잔단 말이지.]

[문희… 너 방문 잠겨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그리고 이내 다들 헤어지는 분위기가 되어 하나둘 인사를 남기고 통화를 끊기 시작했다.

 

의외로 마지막에 남아있던 사람은 박루미였다.

잠시 봐온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냥 먼저 전화를 끊는다는 걸 주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잘 자.”

[응… 이란이도.]

 

딱히 매몰차게 대할 필요는 없나 싶어서 그녀에게도 인사를 건네며 연결을 끊었다.

 

마지막에 들려온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첫인상은 조금 기분 나쁜 아이였지만 생각보다 좋은 애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백이란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평소라면 조금 더 깨어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좀 쉬고 싶었다.

 

눈을 감자 금세 졸음이 몰려온다.

 

이내 백이란의 의식은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1.

 

전신에 느껴지는 희미한 열기.

 

땀이 잔뜩 배어나온다.

처음에는 식은땀인가 싶었는데 그것과는 명백히 다른 감각이었다.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신체에 저릿한 쾌감이 내달린다.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잠에서 막 깨어난 머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후끈하고 간지러운 감각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

 

그러다가 전신을 관통하는 쾌감과 함께 단숨에 의식이 돌아온다.

착각할 리 없는 사정의 감각.

 

그것에 깜짝 놀라 백이란은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에 희미한 조명.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의 위에 올라탄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풍만한 여성의 육체.

실루엣만으로도 육감적이라는 감상을 품어버리는 라인.

 

뒤늦게 이해가 상황을 따라잡는다.

알몸의 여성이 그에게 올라타 자지를 삽입하고 있었다.

 

“윽…!”

 

뇌가 지금까지의 자극을 성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파악한 순간 판단을 보류해왔던 감각이 단숨에 쾌감으로 몰려들었다.

 

하반신에 올라탄 여성은 사정 직후임에도 페니스를 꾸짖듯 허리를 연신 흔들어왔다.

녹아내리는 듯한 쾌락이 덮쳐온다.

 

“깨워버렸네요? 미안해요.”

 

그리고 그제야 초점이 맞춰진 눈이 상대의 모습을 제대로 인지한다.

 

“서, 성란아…?”

 

어깨를 조금 넘도록 기른 머리가 부드럽게 웨이브치듯 굽은 소녀.

성란이 하반신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보면 모르시겠나요? 이란 씨와 섹스를 하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윽, 일단 멈춰…!”

 

아무튼 연인도 있는 그로서는 지금 상황을 제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성란은 반쯤 취한 표정으로 히죽 웃고 있을 뿐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백이란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체구가 작은 그였기에 힘으로 밀어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시도는 해봐야 했다.

 

“……어?”

 

그러나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성란이 버티는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아예 그의 팔을 무언가가 짓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억지로 움직이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정말 그랬다간 팔이 부서지리라는 것을 본능이 경고했다.

 

“남을 억지로 밀치는 것도 폭력이랍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은 가벼운 비웃음이 섞인 그녀의 눈동자.

 

“조금 전에는, 하아, 이란 씨가 저항도 하지 않았고 상해를 입히는 행위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저를 밀쳐낸다면, 그건 폭력… 앗, 방금 거기 엄청 기분 좋았어요…….”

 

어처구니가 없는 해석이었다. 폭거에 가깝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게임의 시스템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규칙의 틈을 비워두는 것이 그 호박에게 있어서

‘더욱 재미있는 전개’를 불러올 것이었기 때문에…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하윽, 당신이 나쁘다고요? 조금 오래 지내왔다고 그런 여자한테 홀랑 넘어가서는!”

“너, 설마…….”

“제가 정말로 우정 같은 거 때문에 그 돈을 들여가며 당신이랑 같이 있을 시간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허리를 마구 들썩이며 말해오는 성란의 모습에는 희미한 광기까지 느껴졌다.

또다시 순식간에 사정감이 몰려왔다.

 

“사랑해요, 이란 씨. 정말로 사랑해요.”

 

그러나 성란은 자비 없이 더욱 속도를 높일 뿐이었다.

 

결국 백이란은 다시금 그녀의 질내에 사정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아, 들어오고 있어요. 당신의 정액이, 잔뜩…….”

 

성란 역시 뱃속에 들어오는 액체의 감촉을 느끼며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

고개를 치들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입가는 가볍게 녹아내린 듯 풀어졌다.

 

한참 그렇게 여운을 느끼다가 성란은 시선을 내려 사랑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지친 것인지 엉덩이를 딱 붙인 채 허리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아… 조금 쉬다가 다시 계속하도록 하죠.”

 

한 번이라도 삽입을 풀었다간 다시 행위에 들어가는 데

‘폭력’을 쓰지 않으면 안 될 테니 이대로 있으려는 것이리라.

 

미약하지만 꾸준한 쾌감이 페니스를 덮쳐온다.

그의 성기는 아직도 빳빳하게 선 채였다.

 

그래도 겨우 조금이나마 정신을 바로잡을 틈이 생긴 백이란이 거센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너… 이거 강간이야.”

“알아요.”

“이러면 제일 먼저 탈락할 거라고.”

“알아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성란의 눈동자가 희미한 조명에 번득였다.

 

“저도 알아요. 곧바로 폭주해버리는 멍청이는 몰표를 받고 탈락하겠죠.”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대로 가면 언젠가 탈락할 것도 알아요.”

 

만약 완벽한 개인전이라고 해도 우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미 한 사람을 밀어주기로 협의된 상황이라면 안 그래도 낮은 가능성이 급락한다.

 

“저희 집안 아시죠? 저는 재력이고 권력이고 다 가까이서 보면서 자랐어요.”

 

유명 기업 수준이 아니었다.

잘은 모르지만 정치에도 유의미하게 힘을 쓸 수 있을 정도일 터였다.

 

“그러니까 알아요. 알아버린다고요. 그 호박 머리의 뒷배가 얼마나 대단한 수준인지.”

 

성란은 속에 품어둔 것을 토해내듯 말했다.

 

“당신을 빼앗겼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어떻게든 다시 가져올 생각이었어요.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 게임이 끝나고서 당신이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버리면…

무슨 수를 써도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질 않아요.”

 

성란은 이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행위가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서.

 

“어차피 강문희 그 여자랑 잔뜩 했잖아요. 한 번 정도는 나눠주란 말이에요.”

“그…….”

 

백이란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방구석의 옷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옷장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식사를 제일 빨리 마쳤던 그녀는 아마 그때부터 줄곧 저기 숨어있었으리라.

 

그러나 딱히 그것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머릿속을 물들였던 탓이었다.

 

“……처음이야.”

“네?”

 

얼굴이 화끈했다. 아마 잔뜩 붉어져 있을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녀의 눈은 아마 그것을 알아차렸겠지.

 

“…방금 그게 처음이었다고.”

 

사실이었다.

강문희와의 연애에 있어서 평가를 내리자면 결코 진도가 빠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활력 넘치는 고등학생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고도 할 수 있었다.

 

백이란에게 있어 최대의 스킨십은 아직 팔짱을 낀 정도였다.

물론 더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즐거움만으로도 흘러넘칠 정도로 기뻤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이란 씨.”

“…왜.”

 

이윽고 그녀가 이름을 부르기에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지은 그녀의 표정에는 약간의 당황마저 느껴졌다.

 

그녀 역시 그를 바라본다.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으며 눈가에는 아주 조금이지만 눈물도 맺혀 있었다.

 

“이번엔 진짜 이란 씨가 잘못했어요.”

 

눈이 마주치고 잠시, 성란의 눈매가 이내 날카롭게 변한다.

그러면서도 눈동자에는 뜨거운 열망이 잠들어 있었다.

 

성란은 가볍게 돌리던 허리의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흐윽?!”

 

그리고 순식간에 허리를 들어올리더니 지금껏 했던 것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엉덩이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렇게, 페로몬을 뿌리고 다니니까! 다른 여자들이 꼬이는 거잖아요!”

“흐으, 자, 잠깐만, 그마안…”

“안 돼요. 못 멈춰요. 참을 수가 없다고요.”

 

음란한 물소리가 좁은 방에 반향하듯 울려퍼졌다.

 

“또, 또 싸버려…”

“싸세요. 자궁에 싸지르라고요! 당신이 욱신거리게 만들었으니까 당신이 책임지세요!”

“싫어, 그건…….”

 

쾌락에 빠져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그에게 성란은 입을 맞추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구 혀를 집어넣어 구강을 범하듯 훑는다.

 

백이란은 하반신을 녹일듯한 쾌감에 차마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그것을 그저 받아들였다.

아직 연인과도 섞지 못했던 입맞춤이 그녀에게 게걸스럽게 탐해진다.

 

입을 완전히 막힌 채 다시금 행해지는 사정.

허리가 뽑혀나가는 것만 같은 감각과 함께 정액이 마구 토해내진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허리를 움직이길 멈추질 않아 서로 뒤섞인 남녀의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전신에 퍼져나가는 탈력감과 쾌락의 여운.

 

백이란은 몸에 완전히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침대의 푹신한 감각이 등을 감싼다.

 

“흐윽?!”

 

그리고 성란은 입술을 떼어내더니 다시 허리를 들어올렸다.

자지를 훑으며 오르는 쾌감에 무심코 신음이 흘러버린다.

 

“아, 아니지? 이제 빼려고 하는 거지…?”

 

이 이상의 쾌락은 위험하다고 본능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우리 조금만 쉬자. 많이 지쳤잖아?”

 

반쯤 애원하듯 그는 그리 말했다.

성란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다시 허리를 찍어내렸다.

 

“흐, 아, 아아…….”

 

사내의 손발이 파들파들 떨린다.

그의 벌어진 입에서 침이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성란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입술을 맞댄다.

 

…밤의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

 

『게임 1일차』

 

[규칙]

1.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탈락자]

없음

 

[백이란]

- 소지금: 60,000

- 투표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