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췄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굳어 있던 탓인지 몸이 비명을 지른다. 안대라도 씌여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순간 공포에 휩싸여 이리저리 날뛰어 본다. 하지만 팔다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제서야 어딘가에 묶여있다는 걸 깨닫는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심호흡이라도 해보지만, 입 주변을 휘감은 천 같은 것 때문에 숨을 쉬기도 힘들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 상황을 파악하려 하지만 목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그것을 방해한다.


화상이라도 입은 것 마냥 뜨거운 통증. 그와 함께 무언가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설마.



무슨 영화도 아니고. 말도 안 되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나쁜 생각들을 부정하며 미친 듯이 난리를 친다. 움직일수록 되려 조여오며 느껴지는 아픔도, 삐걱거리며 근육통을 호소하는 몸도 무시한다. 이렇게 몸을 괴롭게 하지 않으면 자꾸 이상한 상상이 떠오르니까.


남이 보면 겁을 먹을 정도로 발광을 한다. 그 성과가 없지는 않았는지 갑자기 내 몸이 뒤로 넘어간다. 큰 소리와 함께 충격이 느껴지고 근처에 있던 물건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방금 있었던 넘어짐으로 알게 된 사실은, 나는 등받이가 푹신한 의자에 묶여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혹시나 넘어졌을 때 머리가 깨지지 말라고 머리받침대도 달린.


누워있는 자세로는 더 날뛰기 힘들어서, 결국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보니, 내 몸에서는 제법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아챘다. 아마 씻겨주기까지 한 모양이다.


다칠까봐 걱정도 해주고, 씻겨주기도 하고. 참으로 친절한 납치범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친절한 납치범은 자기가 잡아온 사람이 다치는 꼴은 못 보겠는지, 멀리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저벅.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 소리가 어쩐지 두려워져 제발 오지 말라고 간절히 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소리는 점점 커지고, 이윽고 문이 벌컥 열린다.


순간 흐르는 정적. 잠시 가만히 있던 그 사람은 말없이 나에게 다가와 의자를 일으켜 세워줬다. 그 세심한 손놀림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서웠다. 천천히 귀로 손을 뻗는 것이 싫어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를 달래려는 듯 목을 장난스럽게 두드리는 손이, 안대를 벗기기 위해 귀에 닿은 다른 한 손이, 누구 것인지 알 것 만 같아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무의미한 저항 끝에 안대가 벗겨졌다.


환하게 내리쬐는 빛 때문에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저절로 찡그려진다. 얼마 안 가 빛에 적응한 눈에 보이는 건 누군가의 손에 들린 눈물로 얼룩진 안대. 그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잘 잤어? 깼으면 말을 하지. 왜 혼자 넘어지고 그래."



환하게 웃는 예쁜 얼굴.



"아, 내가 이거 씌워놨었지. 미안..."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



"그건 그렇고, 잘 잤어?"



정윤아.



"으읍!!!!!"



말이 안 되야 하는 일이, 말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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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미안해. 말 좀 해봐, 응?"


나를 보며 간절히 애원하는 윤아. 재갈을 풀어준 덕에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입을 꾹 닫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불만스럽다는 내 나름의 의사 표현이였다. 


또 안대가 벗겨진 직후에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나는 아마 지하실 같은 곳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창문도 없이 빛이라곤 가끔씩 깜빡거리는 낡은 형광등이 다인, 영화 속에서 보던 전형적인 지하실이였다.


그 외에 눈으로 확인한 건 정말로 머리받침대가 달린 부드러운 의자였다는 것과 케이블 타이로 묶인 팔다리, 그리고 날 보며 우물쭈물 하고 있는 윤아가 다였다. 얼마 안 가 바닥만 보게 됐지만.


"내가 잘못했어... 나 좀 봐봐..."


축 쳐진 윤아의 목소리에선 슬픔이 묻어나왔다. 그럼에도 내가 바닥만 보고 있자 윤아는 초조한지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내 앞에 서서 습관처럼 목을 어루만졌다. 윤아는 생각할 게 있거나 반대로 아무 생각이 없을 때, 혹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을 때 이렇게 내 목을 만지곤 했다.


나는 일부러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손을 떼냈다. 윤아와 나는 이렇게 평범한 스킨쉽을 하기엔 너무 먼 관계가 됐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알았는지 윤아도 다시 나를 만지진 않았고, 나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내 의지를 더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무거운 공기가 주위를 감쌌다. 그렇게 5분 쯤 있었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깨졌다. 바닥에 보이던 윤아의 그림자가 무릎을 꿇으며 나는 소리였다. 윤아는 나를 올려다보며 볼을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강제로 눈을 맞췄다.


예전부터 윤아는 이랬다. 도망갈 구석이 없게 나를 몰아넣고는 대답이나 행동, 다시 말해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 지경이 되고도 바뀌지 않는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바뀌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된건가. 어느 쪽이든 우스운 일이였다.


하지만 윤아는 내 웃음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자기 혼자 들떠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방금 웃은거야? 역시 오빠도 내가 없으면 안되는구나? 응, 당연히 그래야지. 오빠는 예전부터 칠칠치 못한..."


그러고는 제멋대로 옛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 때 어수룩해 보여서 답답했다, 근데 같이 일하다 보니 의외로 괜찮아서 반하게 됐다, 힘들어서 울고 있을 때 위로해줘서 고마웠다... 몇 번이고 들은, 과분할 정도의 사랑이 담긴 얘기였다.


참 밝은 애다. 이렇게 순진한 애를, 내가 망가뜨렸다. 헤어지자는 남자 친구를 납치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쓰라렸지만 그래도 이 상황은 선을 넘었다. 윤아는 나를 납치했고, 이건 범죄다.


"...그래도 그 땐 멋졌는데. 오빠, 듣고 있어?"


"윤아야."


"응?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아직도 무릎을 꿇은 채로 올려다보는 윤아. 그렇지만 지금은 윤아의 무릎을 걱정하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귀엽다고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 좀 풀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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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입에 천 같은거 있으면 진짜 소리 안 나나 궁금해서 이불로 입 덮고 소리 내봤는데 잘 안 나긴 하더라

짧아서 미안 아마 야스는 좀 있으면 나오지 않을까 싶어

오타나 어색한 부분 있으면 꼭 말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