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결정 사항

 

부잣집 외동 딸로 사는 건 어떤 느낌이야?

최악.

반쯤 감은 눈동자에 깃든 붉은 빛을 애써 모른 척하려는 듯 시선을 돌린 그는 나의 단호한 대답에 부들거리는 입술을 끌어올린다. 누가 봐도 억지 웃음을 지으려는 귀여운 속셈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주기엔 지금 나의 기분이 몹시 좋지 못하다.

악! 아프다고!

조용,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별로 좋지 않아.

힘껏 꼬집은 팔뚝을 매만지며 그는 금세 울상을 짓는다. 그런 표정이 쉽게 변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밝고 상냥하고 무엇보다 나를 바라보는 저 흑요석 같은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에 눈치채지 못한 사이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힘껏 가진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사양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를 손에 넣는 과정은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주변을 맴돌던 별 것도 아닌 쓰레기들을 치우는 일은 역시 번거롭긴 했지만 그렇게 투자한 시간이 단 둘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면 충분히 남는 장사다. 예전에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께 여러가지 가르침을 받은 것은 결론적으로 좋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공공장소라기에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운이 좋았어.

그는 눈치가 빠르다.

늘 완벽하게 살아야 했던 나의 아주 작은 틈을 손 쉽게 비집고 들어올 정도로, 내가 쳐 놓은 흔적 없는 거미줄을 가볍게 뛰어 넘을 정도로 그는 도무지 쉽게 내게 잡혀주지 않았다. 그렇게 애달프게 만들어 놓고 어느새 곁에 다가와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게 된다.

운이 좋은 수준이 아닌데, 일단 너네 회사에서 운영하는 곳이고 손님이 적으면 기분 나쁘지 않아?

쓸데 없는 걱정이야. 주인이 괜찮다고 하면 그런 줄 알라고.

다시 한번 그의 팔뚝을 힘껏 꼬집는다.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올리고 얌전히 있으라는 신호를 더하자 부들거리는 입술을 꼭 깨물고 그는 조금씩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를 감추려 애썼다. 사람이 없다고는 해도 이런 곳에서 교육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무언의 반항을 더해 허락 없이 내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짓을 나는 관대하게 용서해준다.

그의 손이 닿는 내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다. 기분 좋은 따스함, 인상을 찌푸리고 있음에도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여기까지 길들이는 것도 상당히 고생했기에 나는 기쁘게 그가 주는 은은한 쾌락을 즐기며 가볍게 뜨거운 숨을 내 쉬었다.

그의 귓가에

…”

장소도 가리지 않고 발정나는 개는 교육을 피할 수 없을 거야…”

가볍게 귓바퀴를 핥아주고 선명한 손톱 자국이 남은 팔뚝을 쓰다듬어준다. 딱히 그가 고통으로부터 기쁨을 느끼게 되는 건 바라지 않는다. 이렇게 내가 남긴 흔적이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을 확신할 때마다 마음이 한 가득 채워지며 더욱 그가 사랑스럽게 보이게 되는 것뿐.

그래서, 어제 오후 1시 30분 29초부터 2시 5분 21초까지 함께 있었던 여자는 누구?

그의 어깨에 옅은 떨림이 앉았다.

누구?

다시 한번 귓바퀴를 문다. 이번엔 더 힘껏 잇자국이 남아 피가 흐를 것 처럼 깊은 상처가 나도록. 한 손으로는 그의 입술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옆구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건 경고다.

움직이지 말고, 소리내지 말고, 반항하지 말라는 경고.

대답.

별일 아니었어…”

그걸 묻는게 아니야.

이번엔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가 거칠게 내 흔적을 새겨 넣는다. 부르르 떨리는 그의 몸에서 내가 뿌리는 향수의 흔적이 가시질 않는다. 옆구리에 있던 손을 움직여 그의 허벅지를 가볍게 꼬집는다. 붙잡은 입술 사이에서 옅은 고통과 쾌락의 흔적이 흘러내린다.

같은 수업…”

후배?

맞아…”

이름.

그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빼 낸다. 입술에서 손을 떼고 눈물 맺힌 그의 눈가를 가볍게 쓸어 달콤함을 맛본다. 같은 수업의 후배, 그것도 여자아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이 과정은 내 변덕이자 사랑의 확인이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

영상학부 B.

어?

아니면 유아교육학과의 D일까? 어때? 어느쪽이야, 바람 상대는?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힘껏 손을 휘젓는다.

바람이라니! 그런 일 없어!

알아, 나는 널 믿고 있으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 말고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가 좋아하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속삭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잔에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반지가 끼워진 그의 왼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었다.

윽.

널 믿지만그 년들은 믿음이 안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눈동자 속에 비치는 사람은 나 뿐이다. 그의 약점도 강점도 장점도 단점도 귀여운 점도 나쁜 점도 모두 나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자꾸 몇 번이고 주인 있는 보물에 관심을 가지는 멍청한 도굴꾼들이 꼬이는 걸까.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가둔 채 오직 나의 사랑만을 한 가득 그의 몸과 마음 속에 전부 새겨 넣고 싶은 욕망을 근래 자제하기 힘들었다. 하다못해,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그때까지만 기다리자는 다짐으로 억지로 감춰두었는데.

왜 그렇게 새파랗게 떠는 표정을 짓는거야?

가까이 와.

어?...어…”

어서, 빨리 가까이 와.

그의 팔을 잡아당겨 가슴에 묻는다. 그를 붙잡을 수 있을 만큼 풍만한 가슴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러웠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 만큼은 걸린다. 도저히 마음에 걸려서 용서할 수 없어.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섣불리 손을 댄다면 이번만큼은 분명 그가 눈치채겠지.

그는 가볍게 자신을 속박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남기면서도 사랑한다 말하는 여성이 취향이라고 은연중 이야기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평범한 선에서의 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평범이라는 것을 잘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평범이 어떤 의미인지는 안다. 그에 대해서 모르는게 없는 나는 그가 뭘 바라는지 안다.

아직은 그에게 내 독점욕을 들켜서는 안된다.

초등학교 시절, 그에게 부끄럼을 타며 다가갔던 여자아이의 왕따를 사주하고 전학시킨 것도.

중학교 시절, 그에게 편지를 남겼던 한 학년 위의 선배가 교통사고를 당하도록 했던 것도.

고등학교 시절, 그와 수줍게 이야기를 나누던 같은 도서부의 여자아이의 눈동자를 뽑아버렸던 것도.

절대 절대 아직은 들켜서는 안된다.

팔을 붙잡힌 그는 일부러 셔츠 윗 단추를 풀어 놓아 보이는 나의 가슴골을 힐끔거리고 있다. 지금 만큼은 그에게 내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일부러 더 밀착해서 그의 팔을 가슴 골에 파묻었다.

움찔거리는 모습, 잔뜩 풀어진 입술도 역시 귀여워.

혼이 빠진 것처럼 침을 삼키는 저 목덜미에 내 흔적이 새겨져 있음을 다시 확인하고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그 몰래 조작한다.

아마 이틀 정도 지나면 B도 D도 갑작스러운 집안 사정으로 부득이한 자퇴를 하겠지. 잠깐 수군거림이 지나면 그 누구도 그녀들이 사라진 자리를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도 그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고,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안정된 운명의 길을 선물할 수 있게 되겠지.

부잣집 딸로 살아가는 기분이 어떤지 그는 물었다.

나는 최악이라고 대답했고, 그건 어느정도 사실이겠지만

사실 나는 내가 부잣집 딸이라는 사실이 참 감사했다.

세상은 돈과 권력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는 돈과 권력을 쥐고 그토록 바라던 운명의 그의 목에 나와 연결된 목줄을 걸었다.

사랑해.

그의 귓가에 속삭인 말은 내가 전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마음의 형태.




순애(메가데레)와 얀데레는 종이 한장 차이.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눈에 띄여서 하나 살짝 두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