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책에서 재밌는 내용은 읽은 적이 있다.


 자연계에서 힘이 센 수컷은 여러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고,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 수컷은 암컷과의 교접을 허락받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수컷이라는 존재가 기본적으로 자연에게 소비재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수컷은 하나만 있어도 수백 수천의 암컷들을 임신시킬 수 있다. 반면, 수컷은 아무리 많아도 암컷이 없다면 후손을 남길 수 없다. 그 때문에 자연은 수컷들에게 경쟁을 시키고, 그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존재만이 자연도태의 법칙을 뛰어넘고 우월한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딸들을 사랑해서 능력 없는 남자가 자기 딸을 취하는 걸 싫어한다나? 그런 내용이었다.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약간 아쉬웠다. 


 남자의 수가 적고, 여자의 수가 많아도 개체 수를 유지하는 데에 별 무리가 없다면, 유전자에 문제가 생겨서 남자의 수가 계속 감소했어도 그 종은 계속 대를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그런 식으로 진화했다면 여자를 꼬시는 게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한 1:2정도만 되도 지금보다는 훨씬 낫겠지. 그래 한 1:2 정도만 되도...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찌를 듯한 두통이 엄습해왔다.


 두개골을 가르고 그 안의 뇌를 주물럭 거리기라도 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다. 


 "아 씨발..."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고등학교 때부터, 이십 대 중반이 되기까지 지긋지긋하게 겪어온 숙취건만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지금 이 정도인 걸 보니 내일 아침 일어나면 진짜 조지겠구나. 개 좇같은 인생.


  몇 시간을 클럽에서 죽치고 있었던 덕분에 귀에서는 삐-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한 보람도 없이, 오늘도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5시. 오늘도 새구나. 비식 비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진짜 남자 대 여자 비율이 1:2만 되도 이렇게 좇같진 않을 텐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니, 슬슬 집으로 가려는 지 택시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술 기운 탓인지 지나다니는 여자들이 다 예뻐 보인다. 그러면 뭐하냐, 내 게 아닌데.


 고개를 휘휘 젓고는 길 건너편에 있는 클럽 문으로 걸어가려다가 시야 한 켠에 비친 여자의 모습에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색의 머리칼이다. 도저히 탈색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탐스럽게 찰랑거리는 백발이다. 여자가 고개를 살짝 돌릴 때마다 머리카락은 비단으로 짜내어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부드럽게 사락거린다. 


 헛것을 보고 있나 싶어 눈을 감았다 떠 보자 이번에는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정갈한 이목구비가 보였다. 예쁜 푸른색 눈동자와, 도도하게 치켜올라간 눈매.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솟은 귀까지. 현실감이 없어도 너무 없다.


 입에 물고 있는 디스플러스 담배만 아니었으면 요정이라도 본 셈 쳤겠지. 살짝 시선을 내려보자 탱크탑 테크웨어 사이로 폭 들어간 허리와, 매끈한 배, 수줍게 박힌 배꼽이 보였다. 자칭 배 감별사인 내가 보기에도 씨발 완벽한 몸매다.


 "......"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그녀를 보고 있기를 몇 초.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요정같은 여자가 시선을 돌렸다. 마주친 눈이 반짝이며 빛난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처음 길바닥에서 여자한테 번호를 물어봤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도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무슨 용기가 났던 건지,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박동이 천둥처럼 울린다. 텅 빈 머리 속을 딱 한 가지 생각이 가득 채웠다.


 저 여자는 앞으로 내가 볼 수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예쁜 사람일 거고. 지금 말을 안 걸면 뒤질때까지 후회할 거라는 거.


 빠른 듯, 느린 듯한 시간이 흘러, 나는 그녀의 앞에 섰다.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하기라도 했던 건지, 그녀는 차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얽힌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느꼈다. 투명한 푸른색 눈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 보는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되지? 뭐라고 해야 되더라? 평소에 어떻게 했었지? 장난을 쳐? 담배 맛있냐고 물어볼까? 


 혼란스러운 머리 속과는 반대로, 내 입은 제멋대로 움직여 말을 내뱉었다.


 "혼자예요?"


 그 말이 귀에 닿는 순간 느꼈다. 


 끝났다 씨발. 다 끝났다. 내가 생각해도 진짜 좇찐따같다. 혼자예요 이 지랄. 혼자 있는데 그럼 혼자겠지 옆에 심심이라도 있겠냐? 염병한다 미친새끼.


 "응. 혼잔데."

 "아 네. 제 이상형이라 진짜 말 한 번 걸어보고 싶었거든요. 일행 있으시면...예?"

 "혼자라고. 왜?"


 하 씨이발 목소리도 존나 귀엽네. 그래도 말은 걸어 봤다.

 낙담을 곱씹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며 몸을 돌리려는데, 그제서야 그녀의 말이 귀에서 천천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네? 아, 저, 그..."

 "?"


 그녀는 파란색 눈을 깜빡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흘겼다. 살짝 튼 고개를 따라서 머리카락이 찰랑인다. 

 에라이 병신새끼야 씨발 좀 잘 해보자 좀 잘!


 "저도 혼잔데 같이 안 놀래요? 시간도 늦었는데 해장해요 우리. 여기 맛집 다 알거든요."

 "?"

 

 놀란 듯이 자기를 가리킨다. 좋아, 반응 좋고.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면 되든 말든 씨발 기세로 가는거다.


 "제 이상형이니까 밥은 제가 쏠게요. 뭐 좋아해요?"

 "으...저, 진짜로...?"

 "말 더듬는 거보니까 진짜 많이 취했네. 이름이 뭐예요?"

 "...나연."

 "이름은 기억해서 다행이다. 좋아하는 음식도 기억하죠?"

 "아니... 그게 아니라, 너 남자잖아. 그러니까...그게...앗 뜨거!"


 자기가 담배를 피고 있던 걸 깜빡하기라도 한 건지, 그녀는 입술에 손을 가져가다가 허둥대며 손을 털었다.

 뭐지? 미친년인가? 길바닥에서 이 지랄하는 사내새끼 처음 보나? 미쳤어도 괜찮다. 저 얼굴에 미쳤으면 그것도 캐릭터다. 느낌 좋다. 될 것 같다. 


 "남자 싫어해요? 아, 그럼 안되나..."

 "아, 아 아니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씨, 모르겠다. 나 라면 좋아해."


 화악 하고 하얀 얼굴이 붉어진다. 아까부터 묘하게 서툰 느낌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손가락까지 꼼지락댄다. 그게 귀여워서 한눈을 파느라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라면을 좋아한다고? 아니겠지 설마? 떠보기일지도 몰라, 그래 일단 한 걸음 물러나자.


 "....아, 라면이요..? 라면 하는 데가 어디에 있더라."

 "......자, 잠깐 좀 그랬...나..."

 

 모르겠다 씨발 지르자. 


 "사실 제가 라면 진짜 잘 끓이는데, 대회 나가면 상 받을 자신 있거든요? 근데 보여줄 수가 없네요... 아, 저 자취하는..."

 "나 자취하는..."


 그녀의 말과 나의 말이 겹쳤다.

 자취. 자취한다. 그게 무슨 뜻이더라? 아니 자취한다고? 진짜로? 진짜 돼? 진짜 되는 거야? 하나님 진짜 이번엔 나한테 사기치는 거 아니지? 


 "...초면에 실례합니다. 놀러가도 될까요?"

 "...어, 으..응."


 대답이 나오자마자 인생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스마트폰을 꺼내 택시 앱을 켰다. 그리고 주소를 입력하려다가, 그제야 주소를 모른다는 걸 알고 그녀에게 폰을 건넸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폰을 받았다가 살짝 고개를 젓고는 다시 내 손으로 돌려주었다. 


 혹시 나가린가 싶어서 멍해지려는 순간, 그녀가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나 오토바이 타고 왔어. 뒷자리 타는 거 괜찮아?"

 "네."


 대답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나연이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키를 끼워 시동을 걸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그 뒤에 탔다. 그러니 가녀린 어깨와 관능적일 정도로 유려한 목선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면허 있는 거 맞죠? 저 보험 없어서 사고 나면 큰일 나는데."

 "...이, 있어."


 그 와중에 입은 잘도 헛소리를 내뱉었다. 좀 닥쳤으면 좋겠는데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잠시 망설이다가 끌어안은 허리는 놀랍도록 품에 쏙 맞아서 가슴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으응.."


 귀에 와닿는 달콤한 소리를 끝으로 내 의식은 끊어졌다.



 ---------



 "..야.."

 "..어나, 야...!"


 ...따뜻하고 딱 들어맞는 느낌. 끌어안고 있는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녀리면서도 부드러운 게 어디에서 만들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촉감이 장난이 아니다.


 "...장난치는 거..."

 "...모르겠다...어떻게든..."

 "일어났어? 놔주면..."


 어디를 걷고 있는 것 같다. 꿈인가? 


 "...아...하아...하아...."

 "응...하읏....읏...아앙..하으응...응, 으으으으...하윽...!"

 "하악...학...힉...힛...햐아아앗...읏...아흐으읏...."

 "...하그으으......읏...앙....아읏.....으응..."

 "......읏..."

 "......"

 "..."



 깜빡, 하고 눈이 떠졌다. 살갗에 와닿는 3월의 한기와 이불의 보드라운 감촉이 선명하다. 벗고있나? 


 아무래도 잠든 모양이다. 그런데 술 한 가득 쳐마신 것 치고는 묘하게 숙취가 없이 깔끔하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집까지는 잘 기어왔나 보네. 참 대단하다. 이 짓도 몇 번 하니까 관성이라는 게 생기는구나.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나른함을 마저 만끽하려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보니까 따뜻하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살갗에 닿는다. 살짝 물기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뭐지?


 안 떠지려는 눈을 있는 대로 찌푸려서 앞을 확인하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찰랑이던 새하얀 머리카락은 몸에 엉켜있고, 반짝이던 푸른 눈동자는 조용히 감겨있다. 습기가 말라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고운 이목구비를 가로지른다.


 가녀린 어깨선, 그 사이로 똑 떨어진 듯이 솟은 쇄골은 숨이 막힐 듯이 뇌쇄적이었다. 그 아래는 이불로 가려져 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안에 펼쳐져 있을 유려한 곡선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대로 화보를 찍어도 될 정도...기는 한데, 얘가 왜 여기있지? 잠시 버퍼링을 거치며 머리 속의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오. 뭔가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자, 잠깐...만. 읏, 내가, 벗을 테니..꺄악..!"

 "응..으읏...하, 핥지 마..흐으읏...!"


 "지, 진짜 하는 거...야? 나 아직...힉..."




......와. 형들이 보빨은 진짜 사랑하는 여자한테만 하는 거랬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씨발 얘 처녀였어?그게 말이 돼? 저 와꾸에? 아니, 아니지 일단.


 나는 무척이나 차분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꺼내서 카메라 어플을 켰다. 그리고 각도를 잘 조정해서 내 팔의 문신이 잘 보이게 조정한 다음에 자고 있는 나연이의 모습을 찍었다. 


 이건 인생업적이다. 인증샷은 못 참지 야 ㅋㅋㅋㅋㅋ


그리고 어제 같이 달렸던 패배자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을 찾아 사진을 전송....어?


 순간 멈칫한 나는 카톡을 쭉 쭉 스크롤하며 원정대 카톡방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뭘 잘못 눌러서 나갔나? 하는 생각에 이름으로도 검색해 보았지만 분명히 저장되어 있을 프로필들조차 뜨지 않았다.


 "으응..."


 그런 내 혼란을 끊어낸 것은 달짝찌근한 신음소리였다. 화들짝 놀라 뒤를 확인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은 감겨있다. 


 모르겠다. 일단 좀 자 두자. 


 놀란 가슴을 달래며 얌전히 폰을 바지위로 던져놓은 나는 다시 그녀의 옆에 누웠다. 따듯한 이불 안, 말랑말랑 보드라운 살결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이루 말 할 수 없는 충족감과 나른함이 의식을 덮쳐온다. 그래, 일단은 좀 자고... 잠 좀 깨고 일어나...ㅅㅓ....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날 했던 일들은 모두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 날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내가 말을 걸었을 때 나연이가 왜 그렇게 놀랐던 건지, 같이 달렸던 형들은 다 어디로 간 건지, 그리고 이 세상이 남녀 성비 1:5000의 세상으로 뒤바뀌었다는 걸 안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