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약 냄새가 퍼진다. 형형색색의 빛이 빠르게 번개처럼 시야에 나타나 눈 녹듯 희미해지고, 물처럼 퍼져 시야 곳곳에 차오르기 시작하고 그럴수록 세상과는 점점 멀어져갔다.

남자는 어렵게 눈을 떴다. 눈꺼풀에 힘이 없어 의식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닫힐 듯하다.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그런지 눈을 부릅 떠 둘러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 또한 비몽사몽하다. 마치 술을 진탕 빨고 아침에 어렵게 힘을 떴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철컹,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던 그는 이내 강한 저항감과 함께 들린 쇳소리에 움찔했다. 그제야 자신의 팔다리가 쇠사슬로 묶여 있다는 걸 깨달은 남자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떨리기 시작한다. 떨리는 건 눈뿐만 아니다. 으슬으슬한 바람이 그대로 느껴져, 남자는 자신이 지금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그때 인기척이 저 멀리서부터 느껴졌다. 전신이 묶인 지금 그의 오감은 그 어느 때보다 곤두서 있었다. 발소리다. 사뿐사뿐 가볍게 걷는 것이 여자거나 훈련된 사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그의 목숨을 쥐고 있다는 건 매한가지, 남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 여보?"

 

그 진상을 알았을 때 남자는 마음 깊숙이 안도하며 소리내었다. 160 중반의 적당한 키, 밤을 그대로 담은 듯한 검은 생머리,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 날렵한 턱 선. 남자가 평소 자신에게 너무나도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아내였다.

 

"여보가 여긴 왜, 아니, 그것보다 빨리 와서 이것 좀 풀어 줘. 누구 짓인지 몰라도 나 진짜 큰일날 뻔...."

 

횡설수설하던 남자가 아내와 시선이 맞고는 멈칫했다. 아내가 저런 눈도 했던가? 평소의 생기가 도는 매혹적인 눈동자가 아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순간 소름이 돋은 남자가 움찔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무서운 눈을 하고서... 장난치지 말고 이것 좀 풀어 줘."

 

남자의 물음에도 여자는 끄떡 안 한다. 터벅터벅 걸어와서 코앞에 멈춘 그녀를 평소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남자의 눈에 공포가 깃들어 있다.

 

"풀어줄 수 없어요."

 

여자가 속삭이듯 말한다.

 

"... 무슨 소리야? 풀어줄 수 없다니."

"왜냐하면, 그거 내가 묶었거든."

 

갑작스러운 소리에 남자가 눈을 잠깐 깜빡인다. 바로 입을 열려는데 많이 긴장되었는지 입모양만 뻥끗거릴 뿐 정작 목소리가 새어나오진 않았다.

 

"후후, 제가 왜 당신을 묶었는지 궁금해요? 맞춰봐요.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길지 혹시 알아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손에 장을 지라면 기꺼이 질만큼 그녀와 만난 이후로 청렴결백한 삶을 살아왔다. 가끔 삐끗할 땐 있어도 그럴 때마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격려해 줬기 때문에 언제나 바르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왜?

 

"... 몰라. 기껏해야 몰래 비상금 든 거 하나뿐이야. 근데 그것만으로 날 이렇게 할 리는 없잖아."

"거짓말."

 

여자가 남자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린다. 손이 가슴에 닿을 때마다 "거짓말, 거짓말." 하고 중얼거린다.

 

"아니잖아요? 다른 연놈들이랑 놀아났잖아요? 저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했었잖아요? 왜 그랬어요? 결혼할 때 저만을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왜 그 사랑을 다른 불필요한 것들에게 나눠준 거죠?"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여자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정말? 난 너 빼고 다른 사람이랑 어울린 적 없다고! 심지어 단체 회식에서도 네가 생각나서 여자랑은 거리를 두고 앉았어, 난! 근데 바람 의심을 해?"

 

남자가 고개를 치켜들며 큰소리쳤다. 지금까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던 여자는 손을 빼고 조용히 그의 옆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는 순간에서도 여자는 시선을 그의 눈에 맞추고 있다.

저 눈, 저 초점이 없는 눈. 남자는 항상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눈이 지금은 무섭다고만 느껴졌다. 치를 떨며 남자가 말한다.

 

"오늘 정말 무슨 일이야? 너 내가 알던 얀순이 맞아? 힘든 일이 있었던 거지? 너 동네에서도 착하다고 소문났잖아. 항상 곤경에 빠진 사람이 보이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줬잖아. 근데 왜...."

 

조용히 얘기를 듣던 여자가 작게 웃었다. 평소였다면 무척이나 매력적인 웃음이었겠지만, 지금의 남자는 도저히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동안 웃던 여자의 얼굴이 굳었다. 마치 일부러 흉내 내기라도 한 양, 표정의 변화는 순식간이다.

 

"지금까지 착한 짓을 한 건, 당신이 마음씨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여자의 손이 남자의 뺨을 감싼다. 얼음에라도 닿은 듯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느낌이 그의 얼굴에서 맴돌았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선 건, 내가 하지 않으면 당신이 나서서 위험에 빠지곤 했었으니까."

 

잠깐 그때를 떠올린 듯 여자가 이를 깨물었다.

 

"... 당신이 알던 저는, 전부 꾸며낸 것들이에요. 당신이 좋다고 한 것들, 좋아한다고 느낀 것들, 그대로, 그대로 따라 하려고 노력해 왔으니까. 그래서 당신이 좋다면 저는 그것만으로 행복했으니까. 노력했어요, 누구보다 완벽한 여자가 되려고. 그런데... 그런데...."

 

남자를 감싸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압박이 심해진 남자는 그만두라고 말하려는데 손의 압박이 거세 입모양이 틀어졌고 때문에 웅얼거리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당신은 거짓말이나 쳐? 날 사랑한다며, 세상 누구보다 나만 사랑하겠다며! 그런데 감히 내가 보는 눈앞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해? 날 두고 다른 사람한테 관심을 더 가지고, 당신은 그런 게 사랑이야!?"

 

언성을 높여 말하던 여자가 색색거렸다. 한동안 숨을 고르던 여자가 손에 힘을 푼다. 힘없이 축 늘어진 여자가 조용히 말했다.

 

"... 난 그런 거 용납 못해. 당신은 나만 바라봐야 돼. 당신이 날 바라보지 않겠다면,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들 거야."

 

여자가 옷을 벗는다. 스르륵하고 천과 살이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리고 알몸이 된 여자는 팔을 살짝 벌려 자신의 몸매를 과시했다. 매력적인 몸매다,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특히 남자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매일 원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흥분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우선 오해를 푸는 것부터 생각했다. 지금 아내는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맹세컨대 남자는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

 

"너 지금 큰 착각하고 있어. 난 널 두고 바람피운 적 한 번도 없고 그런 생각 해본 적도 없어. 누가 합성이라도 한 사진을 봤나 본데 그거 나 절대 아니야, 나 믿어 줘."

"... 아니라고요?"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자를 바라보더니 곧 피식 웃었다.

 

"아니, 보여주는 게 더 빠르겠네요."

 

그 순간 어두웠던 방이 환하게 밝혀졌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찡그리던 남자는 곧 여자 너머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들을 보곤 경악했다.

 

"... 저, 저거. 뭐야?"

 

아니야, 남자는 부정했다.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줄에 매달린 그것들은 작지만 그에겐 매우 큰, 컸던 것. 덕분에 즐거워했고 슬퍼했던, 그렇기에 지금 누구보다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는.

 

"너 시발 지금 저게 뭐냐고!"

 

젖 먹던 힘까지 내뱉으며 큰소리친다. 작게 그 장소에서 메아리쳤고, 여자는 웬 비명 같은 소리에 잠깐 한쪽 눈을 찡그렸다.

 

"보고도 모르겠어요? 당신과 바람난 것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세 명의 아기를 보며 여자는 웃었다. 꼴좋다는 듯이. 전부 흰 봉투에 감싸여 있다.  봉투에 담겨 있는 것들은 처참하다, 팔, 다리, 몸, 아니. 저걸 더 이상 생명체로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처참하게 조각나고 망가져 있다. 다만, 얼굴만은 그대로 남아 그 눈과 남자는 마주치고 말았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워낙에 작은 탓에 닮고 안 닮고를 구분할 수 없었지만 저 아이들을 보면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후후, 병원 알아보느라 힘들었어요. 근처에서 하면 혹시라도 소문날까 봐 일부러 멀리 가서까지 했고. 하지만 괜찮아요, 결국 당신과 저 이렇게 둘만 남게 됐다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불이 꺼진다. 꼭 신혼 첫날밤처럼 앞으로 일어날 행위가 부끄럽다는 듯 여자가 주춤했다가 용기 내어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남자의 성기를 툭툭 건드린다. 하지만 평소와 같이 금방 커지지 않자, "아, 추워서 그런 거구나. 금방 따뜻하게 해줄게요." 하고 그의 성기를 들어, 그 위로 잠깐 허리를 뺐던 여자가 조심스레 엉덩이를 내린다.


"아하... 느껴져요. 어때요, 이제 춥지 않죠?"


그러고 여자가 남자를 꼭 껴안았다. 상체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이 은은하게 전신으로 퍼진다. 남자는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왜... 시발, 왜 그런 거야. 우리가 지금까지 아기를 가지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알잖아? 당신 배가 불렀을 때,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뻐하기까지 했잖아...."

"그랬죠, 처음에는. 당신과 사랑의 결실이 맺어졌다고 생각해서, 당신과 나 사이에 태어난 생명이라고 생각해서 기뻤어요."


여자가 남자의 눈가에 손을 가져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어요. 당신은 제가 아니라 아기한테 더 신경을 기울였고, 제가 무얼 하려고 하면 뱃속에 아기를 생각하라며 제 행동을 저지했어요. 제가 그럴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더러웠는지 알아요? 당신이 저와의 행위마저 아이를 위해 참자며 거부할 때마다 얼마나 슬펐는지 모르죠?"


여자가 얼굴을 그의 앞에 바짝 들이민다. 감정이 격해졌는지 손으로 그의 목을 조이며 목소리를 높인다. 남자는 고통에 의해 몸을 움찔거렸고 본능적으로 그의 성기가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아핫...." 하고 움찔한 여자가 그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하고서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 사랑의 결실이라니, 웃기지 않은 소리. 저게 어떻게 사랑의 결실이에요? 당신의 사랑을 뺏어가는 저게 어떻게 우리 사랑의 결과에요? 저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당신이 저만 바라봐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여자가 격렬하게 허리를 흔든다. 쇳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나며 방 안에서 맴돌았다. 남자는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보다 더 눈꺼풀이 무겁다. 남자는 차라리 이대로 눈을 감고 영영 뜨지 않았으면 했다.


"... 미쳤어, 너 진짜 미쳤어."

"저는 누구보다 헌신적일 뿐이에요. 지나고 보면 제 행위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당신도 제 사랑이 당신과 아이한테 양분된다면 싫잖아요?"

"미친년. 일이 이렇게 됐는데 내가 널 사랑할 것 같아...?"


남자의 몸 깊은 곳에서부터 사정감이 치솟는다. 이를 악물며 그걸 참고 참았으나 결국 남자의 정은 허망하게 그녀의 질 속에 빨려 들어간다. 남자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짐을 느끼며 그대로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더 이상 저 여자와 말하기도 싫고 보기도 싫었다. 하지만 귀는 닫을 수 없어서, 그렇게 긴 잠에 빠져들어갈 때, 의식이 흐릿해져 현실과 꿈 사이 괴리감이 어렴풋이 느껴졌을 때, 여자의 말이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괜찮아요. 이제 우리 둘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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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괴성을 내지르며 격하게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이곳이 병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 희미한 약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하지만 남자는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시에 깜짝 놀란 여자는 손에 들린 물조차 쏟고 황급히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왜,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의사 선생님이 수면 마취 중 당신이 좀 격하게 움직였었다 했는데,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생겼어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쩔 줄 모르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수면 마취? 동시에 남자는 자신이 여기 왜 왔었는지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둘은 4년 차 부부다. 서로 누구보다 사랑했으나 둘 사이에 어째선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운 좋게 세 번 정도 임신했었으나 여자의 건강이 악화되어 한 번, 자연 유산으로 두 번 손에 거머쥘 뻔했던 아이를 떠나 보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아내는 남편과 상의 끝에 아기에 집착하지 말고 둘만의 행복을 찾기로 결심하여 남자가 이렇게 정관수술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 그런데 정말로 자연유산일까? 지금껏 남자는 일이 바빠 여자의 이렇게 됐다 저렇게 됐다는 말을 듣고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혹시 꿈속에서처럼, 그녀가 낙태를 해놓고 거짓말을 친 건 아닐까?


"... 우우, 당신 정말 괜찮아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여자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골똘히 생각하는 남편을 걱정한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잠깐 피곤해서 그래."

"진짜죠? 아, 일단 의사분께 일어났다고 말씀드리고 올게요!"


하고 여자가 몸을 일으켜 황급히 병실을 벗어난다. 도중에 방금 전 그녀가 쏟았던 물 때문에 한 번 넘어질 뻔했지만, 그런 여자를 보며 남자는 단지 악몽을 꿨을 뿐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지극정성인 아내가, 너무나도 착하고 올바른 아내가,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원했었던 아이를 일부러 낙태했을 리가 없다.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뒤틀린 사랑을 품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아내가 방금 무의식중에 지어 보였던 비릿한 미소는, 단지 비몽사몽한 탓에 자신이 잘못 본 것뿐이라고, 분명 그럴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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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얀데레 광기를 표현하고 싶어서 써 봤는데 혐오스러웠다면 죄송 폰으로 쓰기 더럽게 힘드네 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