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인데! 마지막에 어째서 이렇게..!"

한 쪽만 남은 팔로 검을 들어 자세를 다시 잡는다.

아직이다. 아직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지금도 눈 앞에는 마왕의 대군이 진격하고 있다.

용사인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흔들리는 몸을 가까스로 중심을 잡아 한발 내딛는다.


"흐음~ 네가 이번대의 용사로구나!"

무슨 강대한 마기!

갑작스레 내 앞에 당도한 존재는 너무나도 존재감이 대단했다.

압도적인 힘. 이게 정녕 마왕이란 말인가? 차이가 나도 너무나..


"응? 너 용사의 낙인이 없는데 어째서 용사를 하고 있는것이냐?"

무슨 소리지?

내가 낙인이 없다니.

그날, 우리 집에 낙인의 증표가 빛났고, 나는 용사로서 선택을..

"하하하하! 용사를 착각한 것인가, 인간이여! 성검을 못쓰는 용사라니 3류 코미디만도 못하는구나! 봉인에서 깨어난지 얼마 안되었지만, 시시해서 흥이 나지도 않는구나!"


말도 안돼.

그날, 저택에 있던건 오로지 나와 내 메이드뿐. 내가 용사가 아니라니.. 설마?!

"눈치챘나보군! 네 곁에 있던 다른 자는 어디로 갔느냐?"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부터 시종을 맡게된 얀순이입니다. 혹시 어렸을때 절 구해주신걸 기억하시나요? 에? 못하신다고요?? 그럴수도 있죠.. 주인님은 워낙.. 대단하시니까요..."

'약혼자분께서는 참 좋겠어요. 저는.. 제 주제를 알아 나설 수 없는게 너무 슬퍼요. 네? 무슨말이냐고요? 아직은 안돼요!'

'용사라니 대단하세요! 용사는 준 왕족 취급이라는데, 이미 귀족인 주인님은 별로 상관 없겠네요? 만약 제가 용사였다면.. 헤헤, 비밀이에요!'

'살아남아주세요. 주인님, 다만.. 여기서 제가 주인님을 지키다 죽는걸 평생 마음에 담아주세요. 다음 생엔 꼭, 꼭! 다시 인연의 실이 이어져 만나기를 신님께 기도할게요.'


죽었다. 나를 지키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인간연합군이 쓰러지고 있다. 압도적으로.

나는, 나의 착각으로 이 모두를..

자만했다. 성검은 언젠가 나를 선택할거라고 믿었다.

나의 신념을, 나의 힘을, 나는 믿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나올줄이야..


"용사여, 포기했는가? 재미없구나. 나는 쾌락의 마왕, 이런 결과를 납득할 수 없구나. 만들어진 가짜 용사여, 깨진 마음을 가진, 열등감투성이의 용사여. 그대의 모험의 서는 여기서 끝났도다.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만큼 재미없는 이야기는 없을터. 자, 새로운 이야기를 내게 보여주거라! 수천, 수만개로 나뉘어진 갈래 중 그대는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그에게서 엄청난 힘의 파동이 느껴진다.

나는, 결국 여기서 끝나는건가.. 

과거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이것이 주마등이구나.


'앗! 제가 주인님의 옷을 가져가는게 아니라.. 그래요, 빨래! 빨래 하려는 거였어요!'

'왜 손등을 갑자기 감추는거냐고요? 주인님은 여자의 비밀이 그렇게 궁금해요?'


아, 이때다. 이때 분명 그녀는 낙인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내게 말을 안했지?

분명 내가 용납하지 않을거라는걸 알았기 때문일것이다.

당시의 나는 용사로 간택되어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으니깐.

유난히 나를 잘 따라주었던 그녀이기에 아마도..


'용사면 약혼자분과도 헤어져야겠네요? 그렇죠?'

'왜 주인님이 헤어진거 가지고 좋아하냐고요? 충실한 심복으로서 얘기해보자면 솔직히 주인님께 어울리지 않았아요. 주인님은 좀 더 약간.. 그, 그런거 있잖아요! 검은 긴 생머리에 검은 눈동자? 그런 여자가 더 잘어울려요. 네? 저랑 비슷하다고요? 에이~ 그냥 말한거에요.'

'동료가 떠나갔다고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요. 의외로 인연은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메이드 복을 입은 긴생머리 여자라던가..'

'성녀가 좀 수상하지 않아요? 성직자라는 자가 저런 음탕한 눈으로.. 네? 아니라고요? 주인님, 홀리면 안돼요! 용사잖아요!'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길긴 길었나보다.

죽기 전 마지막 순각까지도 떠오를 줄이야...

그녀가 날 좋아하는건 알았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신분차도 신분차거니와, 나는 성녀가 좋았으니깐.

하지만 그렇게 죽을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줄껄 그랬다...


"용사여, 나는 다시 만날 그때가 너무나도 기대되는구나. 그때는 날 더 즐겁게 해줄 수 있겠지?"


시야가 회전한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심한 두통이 온다.

대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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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악!"


"주인님, 주인님! 괜찮으세요?"

얀순이..?

그런가, 죽어서까지 나를 기다려주었던건가..

깨질듯한 통증을 주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녀를 본다.


창백한 피부의 무심한 얼굴인 그녀지만, 나를 걱정하는게 눈에 보인다.

짙은 검은 머리색과 눈동자로 마녀라 놀림받던 아이.

죽기 전에 그녀가 떠올라 그녀를 왈칵 안아준다.


"히에엣"

이상한 소리를 내던 그녀는 곧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게져서 말을 마구잡이로 한다.

"주,주,주인님, 아직 이건 좀 이른거같아요! 주인님께는 약혼자가.. 아, 혹시 드디어 제 마음을 알아주신건가요? 도피로 시작되는 사랑, 행복한 가정.. 아이는 몇 명이 좋을까요? 저는 주인님을 닮은 남자 아이 1명이랑 여자 3명 정도.. 헤헤.."


약혼자..?

그녀는 분명 마왕이 도래하자마자 차마 대피를 못하고 죽었을것일텐데..

아니, 애초에 나와 그녀 둘 다 죽었는데?


"얀순아!"

"네,넵! 도피 준비를 시작할까요?"

"쾌락의 마왕. 들어본적 있어?"

"아니요? 처음 듣는거 같아요. 그보다, 어디가 좋을까요? 역시 비경이 아름답다는 레비아탄의 둥지? 아니면 일년 내내 사랑비가 내리는 세이렌의 꽃밭?"


분명 저 두 장소 또한 파괴된 장소일터

"혹시 지금 왕국령 몇년이야?"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나쁜 꿈이라도 꾸셨나요? 저기 달력이 있잖아요. 그치만 방금 한 말이 거짓말이라면 저 울거에요?"


그녀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달력을 보니.. 분명 내가 용사로 간택받기 하루 전날이다.

아니, 그녀가 선택받기 하루 전이다.

나는 미래를 알고있다. 앞으로 어째야하지?

다시 그 괴물 앞에 서야하는건가? 


어차피 곧 거의 부숴질 세상이다.

만약 내가 용사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의 간부까지 잡을정도로 강했다. 이번 생에는 얀순이를 도와서라도 세상을 지킨다.

베드엔딩이라니 어울리지 않아.


"주인님!! 주인님!!"

"어? 아, 응. 왜?"

"왜 그리 멍때리고 그래요. 그래서 거짓말이에요?"

"뭐가?"

"헐 듣지도 않은거에요?"

"미안, 생각이 좀 많아져서"

"여자의 순정을 가지고 놀다니 귀축이에요."

"너 점점"

"올라온다? 맞죠? 전 주인님 능력 고사가 있다면 만점을 넘었을거에요."

"에휴, 말을"

"말자 말을 말아! 헤헤, 또 맞춘거 맞죠?"


저렇게 해맑게 웃는 아이를 나는 사지로 몰아야하는건가..

"얀순아. 진지한 이야기니깐 잘 들어줘."

"두근두근 고백타임?"

"진지한 이야기라니깐."

"저도 진지해요."

"어쨌든, 얀순아. 네가 만약, 만약에 말이야. 용사가 된다고 하면 어쩔거야?"

"용사요?"

"응, 신탁을 받아 마왕을 무찌르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런 용사."


"저는.. 아마 할거 같아요."

"이제와는 다른 삶이 될거야. 나를 보좌하는게 아닌, 세상을 위해서 많은 피를 볼꺼야. 어쩌면 삶의 중요도가 바뀔 수 있어. 아니, 다들 바뀌기를 요구할거야."

"주인님."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날 보며 웃었다.


"저는, 바뀌지 않아요. 제 삶의 가장 우선도는. 절대로 불변해요. 그리고 제가 용사가 된다고 해서 주인님을 떠나지 않을거에요.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얀순아.."

"갑자기 왜 그런걸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떠난다는 상상을 하며 울상짓는 주인님을 보는것도 좋네요. 아! '또 기어오르네'라고 하려 했죠!"

"아니, 정말 고맙다. 나도 내자리에서 최선을 다할게. 다시는 그런 미래가 오질 않을거야."

"자존심 강한 주인님이 변했네요.. 그래도, 저는 역시 지금이 더 좋을지도.. 제게 좀 더 상냥한거같고..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어요.."

"응? 뭐라고?"

"전 이만 일하러 가볼게요!"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예정돼로 용사가 되었다.

나는, 용사가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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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왕국 인증 용사에요!"

"축하한다. 이제 메이드 신분에서 벗어났네?"

"아니요! 저는 죽을때까지 메이드에요! 그게 제 용사로서의 정의!"

"크큭. 주인될 사람이 부럽네"

"헐~ 주인님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제 주인은 언제나 얀붕이 뿐이에요!"

"누가 주인 이름을 막 부르냐"

"흥!, 저도 이제 준왕족 취급이거든요!"

"그럼 이제 모험을 시작할거야?"

"아니요, 가장 중요한 두가지가 있어요."

"두가지나?"


"첫번째는! 저랑 같이 가주세요! 용사 파티 동료, 주인님! 어때요? 용사파티라니 어감도 팍팍! 나서기 좋아하는 주인님으로서는 최고 아니에요?"

"주인님한테 나서기 좋아한다니..."

"대답!!"

"이제 말까지 줄이냐? 그래그래 간다, 가. 우리 메이드 촐랑대서 내가 잘 봐줘야지."

"그럼요! 끝까지 봐주세요? 두 눈에 저만 담으셔야해요??"

"에휴.... 두번째는?"


"이것도 중요한데, 두번째는 약혼파기에요!"

"엥, 나?"

어차피 약혼자는 전생에서도 그리 깊은 인연은 아니였다. 내가 성녀를 좋아하기도 하였고..

"용사 파티가 이성에 홀리면 곤란해요! 모험에 지장이 가는 순간 마왕한테 꽥! 전멸! 디 엔드! 라고요!"

"어디서 그런말을 배워온거냐.."

"대다압!!"

"네, 네.."

"좋아쓰! 용사 파티 출범!"


"그럼 다음 동료는 누구를 구할거야? 역시 교황청에서 힐러인 성녀? 아니면 산을 부순다는 소문의 무도가? 옆 제국 최강의 용기병단장이나 세계를 울리는 괴도도 나쁘지 않지. 아! 숨어버린 현자도 있어."

"다 여자잖아요!! 여자는 기각! 아니, 용사파티는 저희 둘만이에요!"

"파티가 너무 부실한데"

"안된다면 안되는거에요! 용사는 모든 스킬을 쓸 수 있다고요? 다 필요없어요!"


알 턱이 있나. 내가 용사가 아니였는데.


"그럼, 하다못해 교황청에 들려서 성검이랑 성녀를 데려가자."

"끼아아아악!!"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모든 미래로 뻗는 가지 중 가장 최악이에요! 절대 용납 못해요!"

"성검 없이 어떻게 마왕을 무찌르려고"

"인간에게는 예로부터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 들었어요."

"가장 강력한 무기?"

"그것은... 사랑."

"너 진짜 진지하게 뻘소리를 하는구나."


"아니요, 이제는 말할 수 있어요. 주인님, 아니 얀붕씨!!!!"

"아예 말도 놓지 그러냐..."

"그래, 그럼. 얀붕아!"

"왜.."

"사랑한다!!! 내가 네 아이를 낳을게!!"

"싫어. 난 성녀가 좋아."

"흐흐흐.. 어떻게 보지도 않은 성녀가 좋은지 많은 의문이 들지만 어차피 세상이 멸망하기전까지는 오로지 우리 둘뿐.

이건 용사인 나와 파티원인 얀붕이의 정조싸움이다!"

"용사와 마왕의 싸움이겠지."

"게임은 오늘부터 시작이야!!"


그렇게 나와 그녀의 위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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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종합 : https://arca.live/b/yandere/207587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