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편

다음 편



"아니, 씨발 너네 형님이잖아! 너네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아침이 되었음에도 아직 어두운 사무실 안에서 임현재가 전화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돈은 충분히 준다고 하잖아, 뭐가 안 되는데?"


[돈이 문제가 아냐. 지금 안 그래도 현금도 털리고 우리 큰형님부터 간부들까지 다 죽었는데 더 보낼 사람이 어딨어?]


"그러면 이대로 그냥 잊어버리려고?"


[걔가 우리만 더 안 건드리면 우리도 그냥 잊고 사는 게 나아. 지금 나 빼면 남은 간부가 1명밖에 안 돼. 안 그래도 작은 조직 더 손실 내면 끝장이야.]


"하, 씨팔…"


 임현재가 전화를 내려놓고는 전화기를 내내 잡고 있던 뜨거운 손으로 지끈대는 머리를 감쌌다.


 계획이 완벽하게 꼬여버렸다. 정윤경의 능력을 그는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해결사 축에도 못 끼는 얼뜨기 범죄조직이더라도 숫자가 우세하면 이기게 되어 있다는 그 경험에서 우러나온 신념은 정윤경 앞에서 속절없이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남은 패는 거의 없었다. 일만 성공하면 20억의 돈이 그의 손에 들어오니 자금은 문제가 안 된다 치더라도 힘이든 계략이든 그녀를 이길 만한 해결사를 여럿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가지고 있는 여력에 맞춰 급조한 계획이 들어맞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무실이 덜컥 하며 문이 열렸고 익숙한 여성의 실루엣이 문 가까이 있는 방 스위치를 올렸다.

 임현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왔냐."


"네가 급하게 맡길 일 있다며?"


 임현재가 정윤경 쪽을 쳐다보았다.


 서로 무슨 일로 여기에 와 있는지 다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일단 차나 한 잔 하지."


 뜬금없이 임현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컵 두 개를 꺼냈다. 딱히 급할 것 없는 듯 연기하려는 티가 살짝 났다.


 냉장고 옆 상자에서 꺼낸 티백을 넣고 흔들며 따뜻한 차가 담긴 종이컵을 정윤경에게 건넸다.


"맡길 일은 별 거 아니고…."


 하던 그가 말을 삼켰다.

 임현재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정윤경이 종이컵을 받고는 씩 웃으며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쏟아버린 것이다.


"..내가 바보로 보여?"


"......."


"저 차 상자, 티백 몇 개는 약 섞어놨다고 지가 자랑해놓고서는."


 임현재가 대답하지도 않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자꾸만 후들거리는 다리를 그녀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러면 내가 부른 이유도 잘 알겠네?"


"잘 알지."


"하지만 이건 모르겠지."


 하고 임현재가 책상 아래 버튼을 꾹 눌렀다.

 미리 대기시켜 둔 해결사 두 명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신호기였다.



 사무실이 조용했다.



"..따로 기다리던 손님이라도 있나 봐?"


 정윤경이 그 의도를 아는지 비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들고 온 가방을 뒤적이더니 그 안에서 꺼내든 건 잘린 손목 두 개였다.


"얘네들 기다렸어?"


 임현재의 몸이 굳었다.

 저것들이 자신의 밑에서 열심히 구른 손임을 그는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이래서 프로 앞에서 급조된 계획 같은 거 들이밀면 안된다니까."


"그걸 알면서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정윤경이 비꼬았다.


 바들바들 떠는 손을 억제하지 못하는 임현재가 품 속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당겼다.


 이제 남은 계획은 없었다. 서랍 안에 권총 한 자루가 있긴 하나 그걸 꺼내기 전에 정윤경의 옷자락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권총이 먼저 튀어나와 불을 뿜을 것이다.

 아마 이것마저도 내다보고 있겠지. 자조 섞인 생각을 하며 임현재가 담배 한 모금을 빨았다.


 판은 끝났고 모든 패는 뒤집어졌다. 타짜의 스트레이트 플러시 앞에서 어떻게든 만들어낸 조잡한 하이 카드를 들이민 것과 같은 자신의 모습이 그는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떨리는 입술 끝에 담배연기가 조금씩 끊겨져 나왔다.


"지금 뭘 해도 소용없겠지?"


 정윤경이 고개를 젓자 임현재가 담배 한 모금을 더 삼켰다.


".....이해좀 해줘. 이 바닥이 이런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마치 넋두리 늘어놓듯 변명하는 임현재였다.

 합리화라고 해도 말이 될 지 모르지만 정윤경의 귀에 딱히 들어오는 말은 아니었다.


"너도 몇 번 봤을 텐데. 몇 년 같이 일하다가도 천만 원 더 부르는 사람 말이면 서로 죽이고 달려들게 되어 있는 게 해결사라고."


 자기 인생 마지막 담배가 될 지 모르는 꽁초를 털어 아무 바닥에나 던져버린 임현재가 담배연기 없는 한숨을 쉬었다.


"수십 억이면 또 말할 것도 없잖아. 그 정도면 사람 죽이는 거 일도 아니지."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정윤경이 그 말에 대답을 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다음 순간 정윤경의 오른손이 허리춤에서 튀어나오며 임현재의 머리를 겨냥했다.


 픽 소리 한 번에 사무실이 다시 잠잠해졌다.



"이 바닥에서 사람 죽이는 거 일도 아니지."




==========




 오랜만에 다시 학교에 모습을 드러낸 정유진에게 반 친구들의 시선이 몰렸다.

 마치 전학 가기 전 학교에서처럼, 말도 자주 섞지 않던 학생들이 몰려와 내심 걱정하고 있던 마음을 토로하며 하나둘 질문을 늘어놓았지만 정유진은 애써 평범한 척을 할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지 않았다.


 이제는 어디에 있든 아이는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허리 쪽에서 자꾸만 느껴지는 이물감이 아이에게 소리없는 위협이 되어 입을 다물게 만들고 있었다.


 그 이물감은 느껴질 때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를 그녀가 듣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아이를 소름돋게 했다.


"혹시 집에 무슨 일 있니?"


 학교에 다시 등교한 정유진을 보고 상담실로 불러낸 담임교사가 아이에게서 안 좋은 예감을 느꼈는지 조용히 물어왔다.


"괜찮아, 선생님한테는 다 얘기해줘도 돼."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표정에서 담임교사는 분명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담임교사가 자리에서 잠깐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문에 모두 커튼을 치고 문 바깥에 '들어오지 마세요' 팻말을 걸어놓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뒤 문을 잠가버렸다.


 교사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유진아, 잘 들어."


"......"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얘기는 선생님하고 유진이만의 비밀이야. 여기서 하는 말은, 유진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절대 말해주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


 담임교사의 얼굴이 진지했다.


"지금 유진이가 결석한 날이 올해에만 벌써 수십 일이야. 이 정도면 유급할 수도 있어. 근데 선생님한테는 사정도 잘 설명 안 해주고, 누나한테 연락해봐도 제대로 대답을 안 하던데. 무슨 일 있는 거니?"


"......."


 정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 유진이가 전학 왔을 때 가져온 가족관계증명서를 보니까, 유진이하고 같이 사는 사람은 누나밖에 없던데, 혹시 누나가 집에 안 오니? 아니면 혹시… 너희 누나가 괴롭힌다거나 하는 게 있는 거야?"


"......."


"유진아… 무슨 일이 있으면 선생님이 도와줄 수 있어. 정말이야."


 그러나 담임교사가 아무리 비밀을 보장한다 한들 정유진은 자신이 당한 일 중 그 무엇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아이를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했다. 정윤경은 이제 아이를 따로 감시하지도 않았고 등하교를 챙기지도 전화를 걸지도 않았으나 아무런 방해요인도 없음에도 아이는 자유롭게 움직일 힘을 모두 놓아버리고 무기력의 바다 속에 조용히 표류했다.

 어쩌면 담임교사가 아이에게서 읽어낸 것은 바로 그 절망감 섞인 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말 못할 사정이라면, 선생님도 강요하지는 않을게."


 아이가 어디선가 들어본 말을 부드럽게 꺼내며 담임교사가 다시 창문 쪽 커튼을 걷었다.


"곧 수업 시작하니까, 교실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 선생님은… 잠깐 생각 좀 하다 나갈 테니까."


 아무런 말도 더 꺼내지 않고, 정유진이 그저 꾸벅 인사만 올리고는 상담실을 나섰다.




==========




 30분이 넘도록 사무실 안은 적막이 흘렀다.


 긴 시간 함께 일하던 동업자까지 자기 손으로 죽여버린 정윤경은 무언가 허탈감이 섞인 표정을 한 채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여기에 오는 사람도 이제 따로 없을 것이다. 여기에 연줄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죽었거나 그녀가 죽여버렸을 테니까.


 연유가 어떻든 사람을 죽이는 데 한치의 망설임이 없는 그녀다. 그러나 정유진을 만난 이래 살아나고 있던 그녀의 감정이 지금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죄책감과 허탈감은 아직도 그녀를 찔러댔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는가….


 '정유진과 함께할 행복'을 위해 지금까지 험한 꼴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었다. 그것이 자신과 아이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믿으며 그녀는 한기성을 죽였고 갈색 정장의 차를 날려버렸고 정희은을 납치했고 20억의 현금을 훔쳤고 그 밖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행복의 대가 치고는 너무도 과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그녀는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었다.


"......"


 임현재의 옷 속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잠깐 고민하던 정윤경이 몸을 일으켰고 죽은 임현재의 바지 속에서 꺼낸 휴대폰에는 전화가 오고 있었다.


 발신인의 이름에 '정희은'이 또렷이 박혔다.



 ...그럼 그렇지.



 사실 둘 사이의 연관은 5년 전 둘 사이의 인연을 전해들었을 때부터 조금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잘 생각해 보면 정윤경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도 이 두 명의 공통 관심사가 아닌가.

 자신을 죽이고 30억과 정유진을 나눠갖는다… 참 영리한 발상이었다.



 정윤경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희은이 먼저 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당신 사람 보냈다면서요. 설마 그냥 정윤경 죽여버린 건 아니겠죠? 내 손으로 죽인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계약 계약 노래를 부르더니 계약 이행 안 해요? 왜 말도 안 하고 마음대로 죽이고 지랄이야! 자꾸 이러면 나도 다 생각이 있--]


"계약은 끝났어."


 듣다 못한 정윤경이 말을 확 끊어버렸다.


"이제 네가 죽을 차례야."


 정윤경의 목소리를 알아챈 듯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정윤경."




 그 한마디 안에 가득 찬 살의가 전화 너머로까지 느껴졌다.

 정윤경은 애써 그 살기를 떨쳐내며 대꾸했다.


"이제 보니 아주 비겁한 년이었네. 이렇게 뒤에 숨어서 조종하는 거 보면 어디 한두번 한 솜씨가 아닌데?"


[뭐라고?]


"그래도 머리는 좀 돌아가나 봐. 20억도 나눠갖고, 유진이도 얻고, 안 그래? 나한테 걸려서 문제지만."


 말투에 흥이 섞인 조롱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유진이 돌려줘.]


 정희은이 나직이 위협했다.


"지금 네가 나한테 협상 걸 위치가 아닐 텐데? 임현재는 죽었어. 내 손에. 널 도와줄 놈 이제 없다는 얘기야. 새 해결사 고용할 돈은 있으신가 몰라."


[그건 네년이 걱정해야 할 일인데?]


"무슨 말이야? 임현재가 죽었다는 말 아직도 이해 못해? 네가 그놈하고 나눠가지려던 20억 내 손에 있다고. 돈이면 돈, 인성이면 인성, 지능이면 지능 아무것도 나은 게 없네 너는. 그러면서도 유진이는 어떻게든 기를 쓰고 데려가겠다는 거 보면 양심마저도 없나 봐?"


[착각하지 마, 창녀 같은 년아. 우리 순결한 유진이가 너처럼 돈 받고 아무한테나 대주는 걸레년한테 갈 줄 알아?]


 순간 정윤경이 몸을 살짝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해결사 특유의 냉철함으로 어떻게든 냉정함을 회복하며,


"....너야말로 착각하고 있구나? 유진이는 이제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 이미 유진이 몸 안에 작은 선물까지 넣어줬는데? 요즘 추적기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


 하고 되받아쳤다.


[씨발, 뭐가 어째?]


 이번에는 정희은이 열받은 모양새였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정윤경이 계속 쏘아붙였다.


"그리고 비겁하게 숨지 마. 아, 어쩔 수 없나? '우리 동생'이 너 같은 무서운 살인마를 보면 놀라는 것도 당연하지. 남의 가족 괴롭히는 거 아니라고 부모님한테 안 배웠어? 아 아니다. 그래서 네 손으로 죽였구나?"


[이 좆 같은 년이, 죽여버릴 거야!!!]


"어머, 지금 선전포고 한 거야? 근데 그 몸으로 해결사 몸에 상처는 낼 수 있겠어?"


[닥쳐!! 그건 두고보면 알아!]


"아이고, 무서워라~ 여기 해결사 협박하는 여자애가 있네~? 지능이 딸리세요?"


[.........씨..발..년이...]


"그래서, 어쩔래? 한번 진짜로 만나서 얘기해볼까?"


 그러자 정희은 쪽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것으로 정윤경은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확신을 했다.



[.......내일 오후 3시. 나 납치했던 공장으로 나와. 내 손으로 아주 죽여버릴 테니까.]


 하고 정희은 쪽 전화기가 어딘가에 부딪쳐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 흐하하하… 하하하하!"


 정희은이 들으라는 듯 일부러 영악한 웃음소리를 내며 정윤경이 전화를 끊어주었다.



----------



 '일이 계획대로 풀릴 때만큼 좋은 게 없다니까.' 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던가.

 정윤경은 바로 그런 기분을 느끼며 조금씩 새어나오는 웃음을 흘린 채 운전대를 잡았다.


 모든 것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지막 한탕도 10억을 더 얹은 30억을 손에 쥐었고, 임현재가 준비한 허술한 습격마저도 모두 막아낸 뒤 반대로 임현재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거기에 계속 도망치던 정유진마저도 아주 이상적인 방향은 아니긴 하지만 완전히 손에 넣은데다 이제는 정희은도 자신의 손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쥐고 있었다.


'멍청한 년.'


 자신의 감정 안에 빠질 대로 빠져 이성이 무너져버린 사람이 걸어오는 공격만큼이나 허술한 것이 없다. 그런 사람이 내리는 모든 판단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편향되며 계획을 세운다 해도 상대방의 움직임에 대한 고려는 전혀 들어가지 않게 마련이었다.


 정윤경은 여유롭게 해결사 두어 명을 고용해 접선 지점을 미리 정찰했다. 그중에서도 한 명은 과거 정희은을 납치해 두들겨 팰 때 불렀던 바로 그 해결사였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도 하나의 심리적 공격이 될 수 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버려진 공단 안에 위치한 그 폐공장은 그녀의 소유도 임현재의 소유도 아니나 이 주변을 손바닥 보듯 통달한 그녀는 주인없는 이 공장이 당장의 작업 공간이 필요한 해결사들의 임시 작업장 겸 심문실 겸 맞이방으로 쓰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정희은을 여기로 데려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마 임현재에게서 그런 사정을 전해듣고 이곳을 장소로 정했으리라. 정윤경은 폐공장을 둘러보며 그렇게 짐작했다. 만약 그런 의도라면 분명 정희은 쪽도 없는 돈을 박박 긁어 해결사를 고용해 그녀와 싸우려 할 것이다. 정윤경이 홀로 싸울 리 없다는 것을 그녀도 모를 리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변칙을 좀 써줘야지.'


 어떻게 머리 싸움에서 틀에 박힌 움직임만 할 수 있으랴. 그렇게 멍청한 해결사라면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정윤경은 폐공장 안쪽 어두운 곳을 찾았다. 공장에 들어오는 문은 단 하나였고 그 출입구 쪽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오는 공간이 한 곳 있었다.


 정윤경은 정공법으로 맞서줄 생각이 없었다.

 분명 정희은 쪽도 싸우기 전 이곳을 정찰하러 미리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정윤경은 바로 그때 기습해버릴 계획이었다.


 애초에 싸우는 날과 시간을 정하는 것부터가 하수였다. 무슨 학교 일진 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며칠 몇시에 어디서 만나 싸우자는 애들 도전장 같은 제안은 왜 한 건지.


 정윤경은 코웃음을 쳤다. 정말 멍청한 여자였다.


"...너 같은 여자는 유진이한테 안 어울려."


 정희은이 들어올 폐공장 정문을 돌아보며 정윤경이 뇌었다.



----------



 다음날이 되었다.


 정희은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해결사 둘과 교대로 경계를 서며 폐공장에서 대기한 정윤경은 아침이 되자 2명을 모두 불러 다시 매복에 나섰다.


 무기라면 충분히 있었다. 그 구하기도 어렵다는 30발들이 돌격소총을 정윤경은 자기 무기고에서 두 정이나 꺼내와 해결사들에게 한 정씩 주어 무장시켰고 정윤경 자신은 역시나 그녀의 특기인 저격소총을 손에 쥐었다.


 정희은이 공장 안에 들어오자마자 그년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그것을 신호로 나머지 해결사들까지 모두 처리해버리는 전술은 이미 그녀가 지금까지 수십 수백 번을 써왔던 방식이었다.


 흔해빠진 전술이긴 하나 전술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희은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공격해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기습의 이점이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아침부터 모여 간단히 요기를 때우고 지금까지 매복하고 있던 정윤경의 기대와 다르게 낮 2시가 넘도록 정희은은커녕 주변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들려오지 않은 것이다.


 차마 고용자에게 말은 꺼내지 못하고 다만 뭔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며 해결사들이 정윤경 쪽을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저격소총을 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멍청한 년이 영리한 전략을 쓸 리가 없다고 그녀는 확신했다. 오히려 그런 상대에게 더 깊은 고민만 해 봐야 소설 속에서 제갈량에게 농락당한 조조처럼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꼴일 뿐이었다.


 출출한 배를 채우려 주머니에 넣어둔 에너지 바를 꺼내 먹고 있던 그때, 전화기 하나가 진동을 울리며 침묵을 깼다.


 그것은 정윤경의 휴대폰이 아니었다.

 혹시 몰라 그녀가 함께 들고 온 임현재의 휴대폰이었다.


[정희은]


 잠깐 공장 주위를 살피던 정윤경이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


[........]


 잠깐 흐르던 정적 사이로 정윤경이 전화 너머 정희은 쪽에서 들려오는 잡음들을 들었다.

 여기서는 들리지 않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몇 들려오고 있었다.


 정희은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제서야 정윤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3시 다 돼가는데 왜 아직도 안 와? 겁먹어서 도망갔냐?"


[.......어?]


 정희은이 놀란 말투를 했다.

 그러나 그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서라기보다는 무언가 웃음기가 섞인 물음 같았다.


"어디서 뭐 해? 아직도 해결사 못 찾아서 울고 있었니?"


[뭐?]





[....저기 혹시, 너 설마 그 공장에 아직도 숨어있어?]





 순간 정윤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너--"


[거기서 잘 기다려 보든가. 아, 유진이 지금 학교해서 하교할 시간인데, 우리 아가 지금 누나 기다리고 있겠네~]


"!!!!!"


 속은 것은 정윤경 쪽이었다.

 정희은은 애초부터 여기 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 도둑고양이 같은 년이…!"


[저기, 어제 뭐? 추적기 성능이 어떻다고? 뭐 그럼 알아서 잘 찾아봐~]


 정윤경이 전화도 끊지 않은 채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이미 그녀는 달리고 있었다. 지금 이 공장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정희은은 정윤경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학교에서 하교하는 정유진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야! 어디ㄱ--"


"닥치고 다 따라와!!"


 당황한 해결사 둘의 물음에 그렇게 고함치고는 정윤경이 숨겨놓고 있던 차에 올랐다.


 시동이 걸리자마자 정윤경이 페달을 밟아 공단을 빠져나왔고 가장 빠른 외곽 도로에 들어가 정유진의 학교로 차를 몰았다.


 하필 이 공장을 짚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여기서 정유진의 학교까지는 차로 달려도 수십 분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거기에 만약 퇴근 시간대의 교통체증에 걸려버린다면 그녀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희은이 아이를 데려간 채 사라지고도 남을 것이었다.


 완벽하게 그년의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감정에 빠져 판단력을 흐린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분노'가 아닌 '자만'이라는 감정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거의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정희은이 아닌 오히려 해결사인 자신이 속아넘어갔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이 서두르지 않으면 정유진은 그대로 그년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과속 단속 카메라 바로 아래를 시속 90km로 스쳐 지나가는 정윤경은 이미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


 청소를 끝낸 정유진이 이제 가방을 싸고 돌아가려는 모습을 담임교사가 씁쓸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마지막으로 말을 걸까 고민하는 듯 아이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으나 정유진은 애써 그쪽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푹 내리고 가방을 챙겼다.


 자신이 갈 곳도, 해야 할 일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정윤경의 집으로 돌아가 그녀의 도자기 인형이 되는 것으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넘은 그때 누군가 자신을 막아세웠다.


"....아가?"


 정유진이 걸음을 멈춰세워 자신을 부른 여성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아이가 못 알아챌 수가 없는,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ㅎ..희..희은..누..나.."


"후후, 누나 보고 싶었지? 데리러 왔어."


 그러나 아이가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쳤다.


"시..싫어.. 저리 가..!!"


 그러나 자신을 반기지 않는 그 모습에 정희은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아가, 말이 심하잖아. 누나한테 말이 그게 뭐니?"


"제발.. 누나 싫단 말야.. 나한테 오지 마..!"


"......."


 정희은의 눈빛이 노려보는 눈으로 변하다 그녀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래…"


"......?"


"어차피 순순히 따라올 거란 생각은 안 했어."


 정희은이 정유진을 확 끌어안고는 주머니 속에서 젖은 천 몇 장을 꺼내들어 아이의 코에 갖다댔다.


"으읍!!"


 그 단말마 같은 말과 넘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등을 받치는 정희은의 촉감을 마지막으로 아이는 정신을 잃었다.


--


 운전대를 돌릴 때마다 욕지기를 내뱉으며 미친듯이 달린 정윤경은 그날 따라 적은 교통량과 자신을 돕는 신호의 운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학교에 닿았으나 시간은 벌써 아이가 교문을 나서고 있을 3시 5분이었고 그녀는 차에서 내려 미친듯이 정유진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를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아이를 안아들고 차에 싣고 있던 정희은을 교문 바로 옆에서 발견한 것이다.


"정희은!!!"


 정윤경이 고함을 치며 그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고 그 말에 정희은이 서둘러 아이를 차에 싣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미친듯이 달려오던 정윤경이 뻗은 손이 정희은의 차문에 닿기 직전, 엔진 소리가 확 울리며 차는 그녀의 반대쪽으로 떠나버렸고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이 씨팔년이..!"


 정윤경이 넘어진 몸을 툭툭 털 여유도 없이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




 이제는, 상황의 주도권이 정희은에게 있었다.




====================




시발 뭐지

갑자기 글이 막 쓰이기 시작함


말싸움이나 키배를 자주 뜬 적이 없어서 말싸움 대사 쓸 게 없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합이 다 맞춰진 싸움이다 보니 대사가 확확 생각나네


이제 다음편 40화가 최종화.

물론 진짜 마지막 편은 아니고 엔딩 에피소드 3개를 따로 제작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