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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us Track 1.3 – Calamity Trigger>



 


  미안하다.


  그 말은 애쉴린이 열한 살이 됐을 때 생일 선물과 함께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었다.


  이제 막 사월 초로 접어들어 쌀쌀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바람을 맞으며, 동양인 치고는 덩치가 큰 남자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애쉴린을 품에 안아주었다. 애쉴린 역시 아버지를 마주 안아주고 싶었다. 그 역시 울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머리를 얻어맞은 것마냥 전신 어느 한군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퇴근해서 집에 오자마자 이름을 불러주며 소중하게 안아 올리는 두꺼운 팔.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 칭얼거릴 때마다 볼에 부비던 까끌까글한 턱.


  숙제에 골머리를 앓을 때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쓰다듬던 거친 손바닥.


  다 외우지 못 해 어설프게 퀸(Queen)의 Don’t Stop Me Now를 흥얼거리는 담배로 쉬어버린 목소리.


  물려준 전자기타를 켜는 자신을 담는 따뜻한 두 눈동자.


  엄마의 손찌검으로부터 지켜주는 커다란 등.


  언니들의 괴롭힘으로 울 때 감싸주는 탄탄한 가슴.


  이 모든 것이 이제 사라지고 말리라는 것을 절감하고 만 것이다.


  가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병신같이 눈물만 흘리면서 입을 다물고 있을 게 아니라, 저 따뜻한 품에 온몸으로 안겨들어 말리고 싶었다.


  여태까지 참았으면서 왜 더 이상 참지 못 하겠다는 건지.


  왜 자신을 데려갈 수 없는 건지.


  목이 찢어지고 혀가 뽑힐 정도로 소리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


  아버지의 왼쪽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 넘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거 놔아아아아아아!”


  애쉴린이 등지고 있는 집의 현관 쪽에서 육식 짐승의 포효를 방불케 하는 절규가 터져 나왔다.


지저분한 갈색 장발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여성이 두 경관에게 양 팔이 구속된 채로 끌려 나오고 있었다. 두 경관 중 한 명의 손에는 플라스틱 봉투에 밀봉된 작은 권총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둥거리던 여자가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을 붇든 두 경관에게 향하던 증오 서린 눈은 기어코 원래의 사냥감을 포착하고 만 것이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내 앞에서 그 년을 안고 있는 거야…?”


정수리부터 가슴께까지 쏟아져내려 장막처럼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흉흉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내 교육이 너무 심했던 걸까? 하지만 할로우 포인트도 아니고 기껏해야 구밀리인걸? 내가 며, 며칠만 보듬어주면 금방 낫는데?”


“…큭.”


아버지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걸 애쉴린은 느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를 악 물고 자신의 아내를 노려보고 있겠지.


“제이콥? 그 누, 눈빛은 뭐, 뭐야? 당신이 사랑하는 사, 사만다가 말하고 있잖아? 당장 그 년을 놓고 나한테로 오라고오오오오오오오!”


“닥쳐.”


나지막한, 그러나 명확한 아버지의 말에 다시금 날뛰기 시작하던 어머니가 조용해졌다.


“……제이콥?”


“닥치라고 했어. 역겨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포옹을 풀고 보호하듯 애쉴린을 자신의 뒤로 감춘 제이콥이 으르렁거리면서 내뱉었다. 총상으로 인한 출혈도, 그로 인해 검붉게 물들어버린 자신의 한쪽 다리도 아무것도 아니라는냥, 그의 신경은 오로지 사만다에게로만 향하고 있었다.


“금수도 자기 자식을 아낄 줄 아는데, 죽이려고 총을 쏘다니. 너는 사람 새끼도 아니야.”


“그건 저년이 감히 너한테 키스를-”


“생일 선물을 받은 딸이,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도 안 된다는 거야? 너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어. 네가 그렇게 된 데에는 나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화내거나 짜증을 부리면 상처 입을까봐, 너를 달래고 어르기를 몇 년이지? 너의 그 비현실적인 요구에 맞춰주려고 대체 언제까지 나와 애쉬는 희생해야 해?”


말을 이어가던 제이콥이 덜컥 왼쪽 무릎을 꿇었다. 분노로 간신히 지탱하던 그의 정신이 마침내 한계를 맞이한 것이다. 그를 지탱하기 위해 달려오려는 경관에게 손을 내밀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고는 식은땀이 줄줄 나기 시작한 얼굴을 들어 사만다에게 사나운 시선을 향했다.


“나야말로 너에게 묻고 싶어. 대체, 애쉬에게 무슨 잘못이 있길래 그렇게 미워하는 거야?”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이제서야 표면화된 의문.


오히려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은 게 이상한, 어반가(家)의 풀리지 않는 숙제.


어째서 애쉴린만 미움을 받는 것인가?


사만다의 고개가 한쪽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아 그 모습은 기괴하고 기형적으로 보였다.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그 광경에 아무도 침 넘기는 소리조차 내지 못 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무슨 잘못이라니,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청명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사만다는 차분히 제이콥에게 질문을 던졌다.


더 이상 그녀는 말을 더듬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몸을 뒤틀며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비록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어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안광이 띄는 감정은 명백했다.


바로, 연민.


“애쉴린 그년은 나를 가장 닮았으니까.”


한차례 깊은 한숨을 내쉰 사만다는 몸을 바로 하더니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머리카락을 눈앞에서 치웠다.


웃음이 활짝, 만개해있었다.


“정신차려 제이콥.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 뭔가에 집중하는 모습도 멋있지만 가끔씩은 주위도 좀 둘러보라고.”


“무슨 소리야…?”


“딸이 아버지 이마에 고맙다고 키스할 수는 있어. 킴벌리나 라나가 그랬다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년은 안돼. 그년이 너에게 보이는 애정은 부녀 사이에 허용된 게 아니야.”


사만다는 쿡쿡 웃었다.


“항상 안아주고 챙겨주느라고 얼굴도 제대로 못 봤지? 그년이 너를 어떤 표정으로 보는지 기회가 되면 꼭 보기를 바랄게.”


제이콥의 떨리는 눈이 사만다의 턱짓을 따라 뒤에 있는 애쉴린에게로 향했다.


“그건 아버지를 보는 딸이 지을 법한 표정이 아니야. 사랑하는 남자를 보는 여자의 표정이지.”


-그리고 아버지는 떠나갔다.


이후로 애쉴린의 삶은 지옥이 된다.

 


 

<Track 1.6>




 

  힘든 일을 겪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은 무엇일까? 언뜻 머리를 스쳐가는 것부터 몇 가지 나열해보았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더한 일도 있을 수 있어.


  너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야.


  당장 떠오르는 것들만 해도 뒷목 잡기 충분했다. 나의 썩은내 물씬 나는 경험담을 듣고 이중 하나라도 지껄이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면, 아무 후회와 연민도 없이 콧잔등에 주먹을 날려줄 용의가 있다.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키가 일 센티미터라도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 역시 달라지기 마련이다.


  키가 같다면 시력은 어떠한가. 안경을 쓰지 않은 자와 안경을 쓴 자는 과연 똑같은 광경을 대뇌로 보내고 있는 것일까?


  키도 시력도 같다면 성별은 어떠한가. 동적인 것에 특화된 남성과 정적인 것에 특화된 여성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언뜻 사소하다고 그냥 넘길 법한 일들로 개개인의 특성이 생기고 거기에서 인식의 차이가 오기 때문이다. 간혹 이해와 공감이 어떤 차이인지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채로 혼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위험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멍청한 짓거리다. 그들은 이해하는 게 아니다. 약간의 엇비슷한 경험에서 느껴지는 동질감에 공감하는 것이지.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 아니냐고?


  설득력 있는 말이다.


  그게 내 이야기가 아니라면 말이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신중하게 산만한 머릿속 풍경을 정리해나갔다.


  아직 본론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라는 게 내 감상이다. 애쉴린의 경험담은 이제 시작일뿐이라는 불안감이 물증도 없이 뚜렷한 확증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손을 들어 말을 계속하려는 애쉴린을 멈추고 녹음기를 멈췄다.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굳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침 멈추기 좋은 명분이 있었다. 시간이 다 된 것이다.


  한시간 반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한 멍청이가 대체 누구냐? 한 두번 기록해본 것도 아니면서 예상조차 똑바로 못 하는군.


  “아무래도 한 번에 몰아서 끝낼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애쉴린은 내 말에 흘긋 시계를 확인하더니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고운 이마에 여덟 팔자(八)를 그리는 눈썹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연민을 갖게 한다.


  “미안해요…. 점심시간이 이십 분도 안 남았네요.”


  “괜찮습니다. 배고프죠? 시간이 별로 없어서 어디 나가지는 못 하겠지만 간단하게 뭐라도 사줄게요.”


  왠지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제의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오는 그녀를 이끌고 콜드 샌드위치가 진열된 카페 냉장고로 향했다.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보였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없다. 이야기가 깊어져 정신적 상처의 근원에 다다를수록 점점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전문가랍시고 찾아온 낯선 이에게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듯한 수치스러움. 과거의 행적이 하나하나 기록되며 마치 지적을 받는 것 같은 불안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난 다음 어김없이 들려오는 무심한 한 마디.


  ‘이해합니다.’


  지랄하지 마라.


  감히 어디서 이해한다는 말을 꺼내는 거지?


  지금 당장 스스로의 손톱 발톱을 찢고 뽑아봐라. 하나라도 뽑아보면 만에 하나라도 공감할 수 있을 지 모르지. 고통이 스무 번이면 끝난다는 사실에 안심한다는 것을.


  내가 당한 고문 중 하나일 뿐이다. 직접 당한다고 해도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는 없다. 작게 공감은 할 수 있겠지만.


  따라서, 나는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을 환자에게 하지 않기 위해 솔직한 심정을 혀끝에 담았다.


  “저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말에 애쉴린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불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하얗게 변색될 정도로 세게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니 가슴 한 쪽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 주먹을 부드럽게 감싸고 한 걸음조차 떼기 힘들어하는 그녀를 데리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앞의 테이블에 오븐에서 데운 햄에그 샌드위치와 뜨거운 커피가 담긴 종이 컵을 놔주고 말을 눈을 맞추고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한다는 건 질문자들이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서 본인들에게 유리한 결말을 내기 위해 무자각으로 하는 거짓말이에요. 전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을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어요.”


  애쉴린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두렵고 걱정되었겠지. 과거의 일부를 밝힌 사람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이.


  그 느낌만큼은 나도,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다.


  뒷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 내미니 애쉴린이 옅게 미소지으며 받았다.


  “그러니까, 제가 어반 씨를 위해 노력할 수 있게 어반 씨도 저를 위해 노력해주세요. 할 수 있죠?”


  “……네!”


  작지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으며 애쉴린이 답했다.


  “식기 전에 먹어요. 혹시 이후에 바쁜 일이 있나요?”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습관대로 내 손은 입을 가리고 검지로 입가를 톡톡 리드미컬하게 치고 있었다.


  이후에 일정이 없다면 내가 집에 데려다줘도 될 것이다. 병원에 자주 오기 힘들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 나는 납득하지 못 했다. 직접 가서 확인하면 견적이 어느 정도는 나올지도.


  그렇다면 내가 퇴근하는 시간인 여섯 시까지 애쉴린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안 그래도 시선을 모으기 쉬운 그녀였기에 믿을 만하고 입이 무거운 사람의 방에 조용히 있어줬으면 했다.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지? 노리스나 호세 같은 아군으로부터도 숨겨야 할 일이라니, 앞으로가 막막해질 따름이었다.


  샌드위치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우겨 넣기를 십여 분.


  “아.”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탄성을 냈다.


있다.


  나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


  아군도 적군도 아니고 규칙에 엄한 편이지만,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기회를 주는 단 한사람이.


  겨우겨우 시간에 맞춰 샌드위치를 끝낸 애쉴린의 입가를 종이 냅킨으로 닦고 손에 아직도 김이 솟아오르는 커피를 쥐어주며 입을 열었다.


  “신관 이층 복도의 맨 끝에 가면 문에 아무것도 안 적혀 있는 사무실이 있어요. 가서 문을 두들기고 ‘신우가 부탁할 게 있다’라고 하세요. 그럼 들여보내줄 겁니다. 여섯 시까지 거기에 있을 수 있죠? 퇴근하면 곧장 그곳으로 갈게요.”


  얼굴을 붉힌 채로 사용한 냅킨을 잡고 있던 애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에서 밖으로 나가는 방향에 위치한 계단으로 가는 그녀를 눈으로 배웅하고는 서둘러 삼층으로 움직였다.


  딸을 연적으로 생각하고 죽이려 드는 어머니라니.


  아버지가 떠난 이후로 그녀가 곱게 자랐을 리가 없다. 본격적인 학대는 그 이후에 시작됐을 터. 오히려 지금까지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직 사건의 전말을 다 들은 건 아니지만 자매들끼리의 관계도 매우 안 좋다는 건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도와야 하나.


  단서가 모일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부디 ‘그녀’가 애쉴린의 상황을 듣고 자비를 보여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