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경비병을 사랑해버렸다 (2)

 

 

 




단 한 순간도 행복이라는 걸 느껴본 적 없었다고.



 

 


 

4.

 

나의 아버지는 경비병이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갑옷을 입고 있었고, 언제나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성문 앞을 지켰다. 나는 종종 아버지가 일하는 걸 구경하러 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이 일은 장난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날 혼냈지만, 그래도

 

난 아버질 보러 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묵묵하게, 조용히,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며 살아간다.

 

결국 그 의무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아버진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하지 않으셨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라. 네가 해야만 하는 일에서 도망치지 마.”

 

칼에 맞아 며칠이나 사경을 헤매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

 

나는 그 말대로 살았다. 그리고 경비병이 되었다.

 

“……벌써 아침인가.”

 

해가 뜨기 직전이면 절로 눈이 떠졌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찬물로 세수를 하고, 먹다 남은 차가운 스프를 마시고

 

갑옷을 입었다. 아, 이번엔 칼이랑 방패도 잊지 않고 챙겼다.

 

“오늘도 내일도 일이다! 일하자, 일!”


“시끄러워, 바보야.”


현관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내 이웃집에 사는 또래의 여자 아이- 소피아.

 

얼굴엔 곰보 자국이 있었고, 갈색 머리를 뒤로 땋아 말의 꼬리처럼 보였다.

 

몸은 약간 통통했고 얼굴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시골 아가씨 같았다.

 

“오늘은 칼 챙겼지?”


“챙겼어!”


“저번에 칼 놓고 가서 죽을 뻔했다며. 좀 제대로 해, 제대로.”
 
“나는 늘 제대로 하거든!”


“안 하니까 하는 말 아니야.”


소피아가 내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차며 말했다.

 

“그 뭐였지……그레이시아? 그 사람이 구해줬다고 했나?”


“어. 엄청 예쁘더라, 그 사람.”


“나보다도?”


“너보다 못생긴 여자를 찾는 게 빠를- 아파! 아프니까 그만 때려! 아야!”


그녀가 이번엔 내 발을 콱 짓밟고 무릎을 찼다.

 

요놈의 계집애는 왜 경비병인 나보다 더 성질이 나쁜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남정네들이란. 예쁜 게 최고지? 아주 그냥 그 사람이랑 같이 살아라, 엉?”

 

“아니, 왜 화내는 건데…….”
 
“그걸 모르니까 네가 두들겨 맞는 거야!”


나는 성질내는 소피아를 피해 얼른 달아났다.

 

대체 왜 화낸 걸까. 예쁜 사람을 예쁘다고 하지, 그럼 못 생겼다고 하나?

 

하여간 얼굴이 호박이면 마음이라도 꽃처럼 고와야 하는데……저 녀석은 글렀다.

 

나는 곧장 둔영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밤이 될 때까지, 대략 14시간 정도 일하면

 

다음날엔 쉰다. 하루는 쉬고, 하루는 일하는 것이다.

 

“왔어, 얀센?”
 
“너 또 칼 놓고 가서 죽을 뻔했다며?”


“어디까지 소문이 퍼진 거야…….”


“아마 옆 동네 영주님도 아실 거다. 어떤 멍청한 경비병이 칼을 놓고 다닌다고!”


먼저 와서 장비를 손질하던 동료들이 말했다.

 

“얀세에에엔-!!”


“윽.”
 
“대장님이 부르시네. 가봐, 큭큭.”


“남 일이라고 놀리지 마!”


전부 내 잘못이니 어쩔 수 없다, 나는 대장님의 방으로 향했다.

 

“얀센 이 새끼야, 너는 정신을 어디 놓고 다니는 거야? 경비병이 칼을 놓고 다녀?”

 

방에 들어오자마자, 대머리에 수염이 풍성한 요반 대장님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은 왜 하는데? 야, 너 나 싫어하냐? 그래서 일부러 엿 먹이는 거지, 그치?”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놈의 새끼야! 너 죽으면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아지는지 알아?

 

위에 보고하고, 왜 칼도 안 챙겨 주냐고 까이고, 잘못하면 나도 짤려! 내가 지금

 

자식이 다섯인데 지금 이 나이에 짤리면 어디 가서 굶어 뒤지는 수밖에 없다고!”

 

“맞습니다!”


“맞긴 뭐가 맞아, 어휴! 한 대 쥐어 팰 수도 없고!”

 

대장님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척했다. 아픈 척하면 더 혼날 테니까.

 

“야.”
 
“네!”
 
“잘하자, 응? 우리 잘 좀 하자. 제발 나 화낼 일 좀 만들지 마. 너 올해로

 

경비병 벌써 4년은 했잖아? 후임들이 너보고 뭘 배우겠어? 아, 저 선임은

 

칼도 놓고 다니는데 우리도 그냥 놓고 다니자 이럴 거 아니야. 그래, 안 그래?”

 

“음……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진짜 모르겠다. 응? 모르겠어, 나는 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모르겠다고.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차라리. 엉?”

 

“어! 그러면 일할 때 간식 먹어도 됩니까?!”

 

내 말에 대장님의 얼굴이 재미있는 색으로 변했다.

 

붉은데 창백하고, 뭐 아무튼 붉으락푸르락한 그런 색 말이다.


“처먹어! 그냥 처먹고 나가 뒤져 이 새끼야! 가서 배수로나 파! 어휴, 진짜!”


“네!”


나는 삽을 챙겨 배수로를 파러 갔다.

 

사실 배수로 파는 일은 막내들이 하지만, 요즘은 어째 내가 제일 자주 하는 것 같았다.

 

“흠, 흐음, 흐응- 배수로를 파자, 배수로를 파자…….”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삽으로 흙을 퍼냈다.

 

그러길 몇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등 뒤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음?”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가 저 모퉁이에서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누구지? 멀어서 잘 안 보인다. 혹시 새로 들어온 신입인가?

 

“거기-”


내가 부르자마자,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누구였을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헛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배수로를 마저 팠다.

 

이것도 경비병의 업무 중 하나였으니까.

 

 

 

 

 

 

5.

 

둔영으로 돌아오니 저녁 무렵이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

 

“으음? 뭐야, 다들 순찰이라도 나갔나?”


“내가 내보냈어.”


왠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붉은 머리카락에 예쁜 얼굴……어?

 

“그레이시아 씨?”


“맞아. 아, 다음부턴 이름으로 부르지 마. 얀데르손 아가씨라고 부르도록.”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녀가 손짓했고, 나는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대장님은 방 안에 다소곳하게 앉아계셨다. 그리고 땀을 엄청 흘리고 있었다.

 

“대장님, 어디 아프십니까? 땀이 엄청 납니다.”


“입 다물고 있어…….”


“요반 대장? 잠시 얀센과 단 둘이 대화하고 싶은데 잠시 나가주겠어?”


“저, 얀데르손 님……얀센은 귀중한 시간을 할애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옵-”


철컥. 그녀가 책상에 발을 올리자, 대장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너는.”


마치 기계가 말하는 것처럼,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아, 아니,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럼 이제 꺼져줄래?”


“넵!”


우와, 요반 대장님이 저렇게 긴장한 건 처음 봤다.

 

이 여잔 대체 뭐지? 어디 부잣집 따님이라도 되는 건가?

 

“그나저나 너는 내 이름을 듣고도 놀라질 않네.”
 
“놀라야 합니까?”


“내가 이 땅의 영주, 조반니 얀데르손의 외동딸인데?”


“……아.”


아아, 그런 거였구나. 잠깐만, 그럼 나는 지금 결례를 저지르고 있던 건가?


“뭐, 됐어. 나는 여기 자랑하러 온 게 아니니까.”


“혹시 칼 놓고 온 걸로 혼내러 오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인간으로 보여?”


“영주님의 따님이시면 별로 안 바쁠 것 같긴 합니다.”


얀데르손 아가씨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우리 집 가훈이 뭔지 알아?”


“모릅니다!”
 
“빚도 원수도 무조건 갚는다. 특히 원수는 더더욱 철저하게 갚거든.”


“저 혹시 뭐 잘못했습니까?”


“아니. 이번의 경우엔 ‘빚’을 갚으러 온 거야.”


얀데르손 아가씨가 그렇게 말하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뭐든 좋아, 이뤄줄 수 있는 것에 한해서 들어줄게.”


“허어.”


“반응이 시원찮네.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만.”


“그러면 뭐든 하나 말해.”

 

…….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역시 됐습니다.”


“뭐?”


“아가씨는 저한테 빚 같은 거 안 졌습니다. 그러니 갚을 필요도 없습니다.”


“내 목숨을 구해줬잖아.”
 
“그냥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 일을 한 것도 제 급료에 포함됩니다!”

 

아가씨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혹시 내가 말실수를 했나? 

 

“몇 가지 질문을 하겠어. 얀센, 솔직하게 대답해.”


“네.”


“첫 번째 질문. 너한테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 있으면 뭘 하고 싶어?”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남들한테 주고 없던 일로 할 겁니다!”


“두 번째 질문,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가 너한테 청혼을 했어. 그럼 어쩔래?”


“거절합니다! 모르는 여자가 청혼하는데 왜 그걸 받아줍니까?”


“……마지막 질문. 도적들이 습격했을 때, 너는 왼쪽에 있는 아이와, 오른쪽에 있는 

 

5명의 어른들이 습격당하는 걸 목격했어.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굴 구할 거야?”

 

어려운 질문이네. 나는 조금 더 심각하게 고민했다.

 

“……둘 다 구합니다!”


“아니, 둘 중 하나만-”


“되든 안 되든 구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저는 경비병이니까요!”


아가씨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도 조용히 기다렸다.

 

혹시 이상한 대답을 했다고 화내려나. 설마 해고당하거나 하진 않겠지……?

 

“넌……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류의 인간이구나.”


“좋은 겁니까?”


“나도 몰라. 본 적 없으니까. 얀센, 인간에는 어느 정도……유형이라는 게 있어.”


아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아까 요반 대장을 봤지? 대부분의 인간은 내 신분을 알면 저렇게 반응해.”
 
“아, 그런 겁니까?”


“대다수의 인간은 거금을 주면 받고, 예쁜 여자가 청혼하면 받아주고,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으면 목숨을 저울질해.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야.”

 

나는 평범한데. 어쩌면 아가씨는 여태껏 그런 사람들만 보면서 자란 걸지도 몰랐다.

 

“좋아, 정했어.”


“뭘 말입니까?”


“요반 대장! 들어와도 좋아.”


그녀가 부르자 대장님이 쭈뼛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다, 다 끝나셨습니까?”

 

“오늘부로 얀센을 내 호위병으로 임명하겠어. 필요한 서류는 알아서 준비하도록.”


“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얀센보다 우수한 병사들도 많습니다만?”


“그래서 어쩌라고?”


“……금방 준비해오겠습니다.”


음……으응? 뭔가 이상하다. 호위병? 왜 내가 호위병이 되는 거지?

 

그나저나 호위병은 경비병이 아닌 건가? 그럼 싫은데.

 

“저 호위병은 싫습니다!”


“왜? 봉급은 지금의 5배 정도 받을 거야.”


“그 문제 아닙니다! 호위병은 경비병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나를 경비하는 거니까, 이름만 좀 달라지는 거야.”


아, 그런 건가! 이름만 달라지는 거구나. 그럼 괜찮다.

 

“그럼 다시 자기소개를 해야겠네. 내 이름은 그레이시아 얀데르손, 조반니 영주의

 

외동딸이자 차기 후계자이며 왕국의 3검, 동시에 영지를 수호하는 기사단의 대장이야.

 

너는 앞으로 나를 호위하며 수행한다. 질문은?”


“혹시 일할 때 간식 먹어도 됩니까!?”


“……먹어도 돼.”
 
“와! 호위병이 경비병보다 좋은 거 같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얀데르손 아가씨의 호위병이 되었다.

 

대체 왜 나를 호위병으로 임명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인공 얀붕이의 능지가 낮다고 생각되면 정답이다, 얀금술사!

얀붕이는 낮은 능지와 능력치에 반비례한 멘탈의 튼튼함이 장점이다.

이제 잔다 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