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1편

3-2편



1.

이렇게나 지쳐있었나 싶을 정도로 오래 잔 느낌이었다.

나름 진탕 마셨던 것 치고는, 생각보다 멀쩡히 눈을 뜬 채 금실이 새겨져있는 붉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으레 봐왔던 짙은 회색의 질감과는 전혀 다른, 조금 과할 정도의 화려한 색상.

보는 것만으로도 살짝 어지러워지는 그 산만한 색으로부터 눈을 치우고, 창가를 바라보니 아침이라기엔 제법 쨍쨍한 햇빛이 방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몇 시지?

그제서야 휴대폰을 들여다 보니, 오후 두 시를 가르키고 있다.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 채 한 시간도 자지 못한건가 하는 착각이 일었지만, 휴대폰의 날짜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멍하니, 일 분, 이 분 지나는 시계를 쳐다보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지각이라도 했거나, 약속에라도 늦은 모습이었다.

급하게 대충 씻고서는, 마치 쫓기듯이 나갈 채비를 하면서도, 계속 하나의 생각이 맴돌았다.


늦었나?

안 늦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현관을 박차고 나가 모텔 계단을 몇 개씩 한 번에 뛰어내리며 달려갔다.

멀지는 않은 곳.

거리 한 귀퉁이를 돌자마자, 보이는 편의점의 앞에서 정우는 세차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판매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있다.

물건을 내려놓은 손님 앞에서 바코드를 찍고 있는 그 무성의한 얼굴.

어제의 자신에게 당돌하게 참견하던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안심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참 웃기게도 그 생각을 긍정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딸랑.


"어서오세요."


어째서인지 모를 긴장 속에서, 뻣뻣한 얼굴로 문을 여니 눈도 안 마주친채 그녀가 인사를 걸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조금. 아니 이런 것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설핏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정도로 건성거리는 인사였지만, 오히려 그런 일관성 있는 태도가 정우로서는 안심이 되었다.


아. 그러고보니 뭘 사야 하지?

딱히 뭘 사려던 목적이 아니었던지라, 그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당황해 버렸다.

무턱대로 들어와놓고, 아무것도 안 사면 그것도 좀 실례일 터.

결국 무얼살까 고민하던, 정우의 발이 다시금 주류 코너에 멈추었다.

조금은 바보같은 선택.

편의점에서 술을 사가는 사람이 자신만 있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떠올려줬으면 하는 바램으로 진열된 술 앞에 서있는 정우였다.


달그락.


결국, 그 때와 똑같이 술을 고르지만 이번에는 한 병. 아니 한 캔정도면 충분하다.

소주에 가려던 손을 맥주로 옮긴 채, 어제의 그 참견대로 안주도 골랐다.

어제 먹었던 그 새우과자를 손에 쥐었다.

이걸 보면, 눈치채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정우가 천천히 판매대에 물건을 내려놓았다.


삑. 삑.


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아쉬움을 애써 감추었다.

바램과는 달리,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찍고는 차마 어찌할 틈도 없이 포스기에 적힌 가격을 불러버렸다.


"오천원이요."


"...네."


기대한 만큼 실망하는 법이랬나.

이유없이 찾아오는 씁쓸한 마음을 갈무리한채, 지갑에서 카드를 건네주니, 금세 계산을 치러준 아르바이트는 그 어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말을 꺼냈다.


"안녕히 가세요."


"아, 아 네. 수고하세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순간, 얼굴이 확 붉어지는 느낌에, 도망가듯 황급히 밖으로 나와버리고는 멍청한 자신을 마음 속으로 흠씬 두들겼다.

병신.

괜히 자연스러운 척, 어제 앉았던 테이블에 과자를 던져놓고 맥주의 캔을 따고 있지만, 속은 바싹거리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병신, 병신.

심한 갈증이 나, 맥주를 그대로 들이켰다.


"후우."


찌릿한 탄산이 목을 스쳐지나가고, 달아올랐던 머리가 살짝 식자,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닌 사람 앞에서 이상한 헛물을 들이키고 있는 모습.

추하다 못해, 차마 두 눈 뜨고 보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잊자. 잊어.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술과 과자를 부리나케 축내고 있던 사이.


딸랑.


"엥? 아저씨, 또 술 마셔요?"


"아..."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제서야 봤다는 듯, 유니폼을 벗은 그녀의 시선은 이번에는 확실하게 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은 멍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뻐하는 자신이 있었다.

조금은 한심한, 그러면서도 어쩐지 약간의 동정이 깃든 표정.

왜 그런 얼굴로 바라보는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정우는 그녀가 자신을 알아봐주었다는 것 만으로도 이미 감정이 벅차오르는 수준이었다.


"으, 어..."


"엥?"


하지만 기쁜 마음은 둘째 치고, 먼저 말을 걸으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한 지라 머리가 굳어버려, 아까보다 말을 더 심하게 더듬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조차 못잡고,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사이, 그녀가 점차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일단, 뭐라도 대답하자.


"그, 저기...네."


"흠 엄청, 힘든가 보네요. 그렇게나 좋았나?"


좋았다고?

아, 그러고보니.

어제 느닷없이 여자친구랑 헤어졌나고 물어보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저런 표정을 지었나.

얼굴에서 보인, 약간의 동정심의 이유를 깨닫던 사이, 그녀가 또랑거리는 목소리로 정우에게 말했다.


"아, 그래도 안주는 샀네. 아무튼 괜히 테라스에 토하지 말고, 적당히 먹다 가요. 저 다음이 점장이라 그런거 엄~청 싫어하거든요."


일 하고 있을 때와, 아닐 때의 차이가 꽤 심한 듯 어느새 참견까지 하는 모습이 약간의 괴리감을 만들어낸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그렇게 생각할 무렵, 더이상 용건이 없는지 그녀가 테라스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만."


아.

그 말을 듣고 그제서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조금만 머뭇거려도, 이 기회는 순식간에 멀어질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

안에서 곪아버린, 그 응어리진 수많은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어느 사람이건 속내를 꺼내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정우는, 그 작은 맥주캔의 반도 채 비우지 못했으면서도, 없는 취기를 빌려 용기를 내자고 생각했다.


"저, 저기요."


"음? 저요?"


다행이도 들었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말하자.

딱 한마디면 돼.

더듬거리던, 말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제 얘기좀 들어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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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출근하면 주말...

이제 분량 안 쪼갤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