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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때를 기점으로 생각하는 걸 그만두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생각이 돌아왔을 때, 나는 휠체어에 앉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휠체어에 의존한 채, 본 적 없는 회색빛 거리가 내 시야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퇴원 수속을 마친건가. 아직 내 몸은 멀쩡하다고 볼 정도가 아니었는데.


설마 돈으로 해결을 본 걸까.


병원도 나를 시체로 취급하려는 걸까. 이렇게 쉽게 내버리다니.



다신 느끼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찬바람이 얼굴에 스며든다.


피부에서 차갑다는 감각이 숨을 쉰다. 눈에는 군청색의 하늘이라는 시각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은 숨을 쉬지 않았다. 차에 치였다해도 마음은 이미 죽은지 오래였다.



"하늘은 왜 보고 있는거야?"



그녀의 말이 들려왔다. 생각이 돌아온 이래로 처음 듣는 말이다.



"네 죽어버린 눈으론 하늘에서 뭐가 보이는 걸까?"


"너에게 보이는 세계가 궁금해져... 후후훗."



그녀가 휠체어를 끌고 있는 것 같다.


그래, 분명 난 이 여자의 것이 되었지. 기억이 돌아왔다.


이제 이 여자의 소유물로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까.


그 때의 재현이랍시고 나를 다시 차에 치어버릴까? 내 몸에서 피를 뿜게 만들까?


차라리 그런 일을 당해서라도 생존의 필요성을 되살린다면 좋을 지도 모르겠다.



"...하늘은 참 넓네요."


"아플 때마다 저 넓은 하늘을 보며 나 자신의 작음을 생각했죠."


"저 하늘에 기대어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때가 많아요."


"하지만 늘 저기서 날 지켜보기만 하지, 달라지는 건 없었죠."


"...그런게 보이곤 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요."



"...내가 그런 하늘같은 존재였으면 좋겠어?"



"설마요."


"그런건 이 세상에 없잖아요."



"......."


"이유야 어찌됐건 상관없어."


"지금은, 그냥 눈을 감아..."



모든 일에 거부감이나 비판마저 잊어버린 내 마음에 그 말이 스며들자,


그녀의 말대로 슬며시 눈이 감겼다.


의식이 멈추고 무의식을 향해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마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조금 뒤 의식이 돌아왔다. 눈에는 새로운 비전이 담겼다.


붉은 조명이 켜진, 묘한 느낌의 조촐한 방이었다.


바닥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침대였다.


난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져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 때, 뒤에서 감겨오는 손이 내 상의를 천천히 벗겨냈다.


감겨오는 손은 좋은 촉감을 만난 듯 계속해서 내 피부를 만져댔다. 


갈비뼈가 패인 부분을 긁어가며 내 몸의 이곳저곳을 느낀다.


앙상한 내 배가 유난히 좋은 듯 주물거리는 감각이 느껴진다.


이어서 등에 얼굴같은 무언가가 파묻히곤, 깊이 냄새를 들이마신다.



"흐으응...."


"너에게서 피 냄새가 나."


"시체에서 피 냄새가 느껴진다니 웃기지 않아?"



"..."



그녀의 살갗에서 인간의 피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내가 차에 치였을 때 다 내뱉어버린, 차가운 피와는 다른 따뜻한 피.


실로 몇년만에 느껴보는 사람과의 접촉인가.


게다가 마치 사랑을 표시할 때에 쓰는 접촉이다.


분명 남자의 몸을 가졌다면 피가 돌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마저 과거형이 되버린 인간이다. 애초에 내게 남자라고 부를 수 있는 증거가 남아있을까.


빈 깡통은 어느 품에 들어가있대도 차가울 뿐이다.




"피는 별로 좋아하지 않던거 아니었나요."



"너 때문에 좋아하게 될지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차에 치였던 것도 이유겠지만, 다시보니 손과 발에 사슬달린 팔찌가 둘러져있다.


나를 여기에 가둘 셈 인가.




"이렇게까지 안해도 난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거에요."



"후훗. 넌 묶인 모습이 보기 좋아."




"...네 이름이 뭐야?"



"......"



"왜?"



"기억이 나지 않아요."


"...시체 이름같은 거 기억해서 뭐해요. 의미없는데."



"풋, 알았어. 시체 군."



"당신 이름은요?"



"내 이름? ...시체가 이름같은 거 기억해서 뭐하게?"



"...알았어요. 빨강머리 씨."



"좋아. 재밌네."



나를 이 방에 가둔 그녀와의 싱거운 통성명은 그렇게 끝났다.



"...시체 군."



"...네. 빨강머리 씨."



"......"


"...살아있다는 느낌은 뭘까?


"대체 무엇이 우리를 세계라는 존재와 이어주는 걸까?"


"대체 무엇을 해야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생기는 걸까?"


"난 믿었어. 이 몸의 감각이, 이 속의 감정이 날 존재케 한다고."


"쾌락을 쫓아 일생을 살았지. 몸을 미치게 만드는 감각, 뜨거워 분출할 듯한 감정."


"쾌락과 함께라면 내 일생이 역사에 영원히 새겨질듯한 상상도 들었지."


"입 안에는 언제나 달콤한 맛이 돌았어."



그녀는 전생을 회상하듯이 거창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살다가, 난 어느날 죽었어."


"초점나간 시야... 손에 흐르는 피. 악몽같던 클럽 조명. 혼합색으로 빛나는 나이프."


"내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본 것들이야."


"...내 피에서 헤로인이 흘렀대."


"그게 알려지자, 어딜가든 내 옆에 있던 인간들은 하나둘씩 날 버렸어."


"고통이 점차 혈관에 쌓여져갔어. 썩은 내 나는 곪은 혈관에 쑤셔박듯이."


"혈관이 막히자 감각은 죽었고, 감각이 죽자 감정도 곧 죽었어."


"난 그렇게 죽었지."



그녀는 내 몸을 돌려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빛에서 가시가 튀어나와 내 홍채에 깊숙히 박혔다.


내 눈은 가시가 박혀 움직이질 못한다.



"네 눈. 눈알에서 죽은 냄새가 나. 나와 똑같은 썩은 내가 나."


"난 널 치었던 차로, 그대로 강에 빠져죽을 생각이었어."


"웃기게도 죽을 뻔했던 건 너였지."


"네가 뿜어낸 피를 빨아들이고, 내가 되살아난거야."


"알겠어? 넌 내게 새로운 기회야. 내 새로운 목적이며."



그녀의 송곳니가 번쩍인다. 송곳니는 내 목덜미를 바라보며 침을 삼킨다.



"...네게 너를 구원한다는 사명을 줘. 나의 인생을 다시금 긍정케 해줄 이유가 돼줘."


"너에게 살아간다는 실감을 줄게. 목적을 줄게."


"네 식어버린 감각과 감정을 다시 데펴줄게."


"다시 살아났다 죽어버릴 만큼의 애정을 부어줄게."



"...왜죠?"



"아직 모르겠어?"


"널 구원해서 난 살아있게 되는거야.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해보겠어."


"너 같은 인간도 살아갈 수 있다는 증거를 내가 만들겠어."


"이기적일지도 몰라. 하지만 살기 위해서라면 뭘 못하겠어?"


"사랑해."







...거짓말.







그녀의 품에서 달콤한 향이 났다.


내 목덜미에 천천히 이빨이 물리고 있다.


송곳니는 더욱 파고들어 몸에 구멍을 만들고 있었다.


구멍에서 찌꺼기는 흘렀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목덜미와 어깨 사이의 감각이 꿈틀거린다.


찾아온 적 없던 새로운 감정이 문을 두들겼다.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사랑이 없긴하지만 나를 사랑한다.


괴상한 모순 속에서 피어나는 쾌락에 나는 썩은 몸을 내던졌다.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빠져든 꿈에서 어릴 적 기억이 멋대로 상영되어졌다.


난 순간 눈을 떴다.


어느 기억못하던 비전이 보였다.


하얀 맵시의 새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른다.


끝없이 이어진 하늘을 향해, 자유를 흩뿌리듯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느새 나는 눈에 물기가 느껴졌다.


죽은 마음이 거친 숨을 들이쉰다. 메마른 호흡을 내뱉는다.


마음이 정말 오랜만에 말을 하고 있다.


마음이 쥐어짜낸 마지막 숨결. 난 진심으로 통감하고 있다.


난, 여기서 나가고 싶다.


사람이란 아무리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몇번이고 절망해도 

자유를 바라는 의지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게 세상 달콤한 얀데레의 사랑이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