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그러니까 그 이전의 기억은 없는 유치원 시절, 나는 아파트 놀이터에 매일같이 놀러왔던 한 여자애와 소꿉놀이를 하고는 했다.

소꿉친구의 정의가 '소꿉놀이를 같이 하는 친구'라는 것을 본다면, 그 여자애야 말로 나의 소꿉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호칭에서 베어 나오는 감정은, 일반적인 경우와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말이다.


유치원에 막 들어간 나는 다른 아이들이 이미 쓰레기장에 버린 소꿉놀이 세트를 주워 들고 놀이터로 가, 돗자리를 깔아놓고 스스로 아빠와 엄마 역할을 정하여 소꿉놀이를 했다. 찍찍이가 달린 플라스틱 당근을 플라스틱 칼로 썰고, 고체로 된 된장국에 넣고는 후르릅 소리를 내며 마셨다.


그 당시엔 이미 여자아이들도 소꿉놀이라는 '어린' 취미를 그만두었던 때라, 4인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역할을 하나하나 다 연기해야만 했다. 아버지로서 말한 것을 어머니로서 대답하고, 장난감을 사달라고 칭얼거리며 바닥 위에 고꾸라졌다가, 바로 일어나 방금 전의 나를 혼내는 것이 그 예였다.


얼핏 보면 정신나간 짓을 해가면서도 소꿉놀이를 이어나간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 나이까지 소꿉놀이를 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원활하고 따뜻한 가정생활에 대한 열망이 무의식중에 드러난 걸까, 라고 현재의 나는 어렴풋이 추측하지만, 그것 조차도 정확한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부모님이 매일같이 싸우는 도중에도 나는 행복했으니까.


어찌되었건, 그러한 알 수 없는 이유로 소꿉놀이를 계속하던 내 앞에, 그 여자애가 나타났다. 얼굴이 기억 안 나는 중년 여성의 손을 잡고.


"102동 사는 애구나, 맞지?"

"네, 맞는데요!"


"우리 아이가 소꿉놀이가 하고 싶다고 하는데, 혹시나 끼워줄 수 있니? 아줌마가 워낙 바빠서 말이야."


양복을 입고 있는 그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런 손길로 여자애를 내 앞에 세웠다. 소꿉놀이를 하고 싶다는 것 치고는 표정이 떫어 보였다.


아마 여자애의 요청은 단순한 놀이가 아닌, "엄마와 함께 하는 소꿉놀이"였을 것이다. 목적이 달성됐다는 심정으로 놀이터까지 왔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남자애와 같이 소꿉놀이를 하라고 하니 어안이 벙벙했겠지.


결국에 그 여자애의 엄마가 나에게 일종의 짬을 때린 셈이었지만, 어린 나는 그러한 내막을 제대로 몰랐다. 그냥 1인 4역을 해야 할 것을 1인 2역까지 줄일 수 있단 것에 기쁨을 느꼈을 뿐이었다.


"응! 좋아요!"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미소 지으며, 여자애를 내게 밀어주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애의 손을 잡고 돗자리에 앉힌 뒤 , 늘 하던 대로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돗자리 위에 앉은 여자애는, 내가 아빠와 아들을 완벽에 가깝게 연기하고, 된장국 끓이는 것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서서히 베시시 웃기 시작했다.

마지 못해 참여하는 부모님과, 진심으로 소꿉놀이에 임하는 나에게는 거대한 차이가 있었고, 여자애는 그것을 느낀 것이다. 해가 질 때쯤에 이르러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 여자애는 내 팔을 부여잡고선 그렇게 말했다.


"싫어! 오빠랑 놀거야!"


그렇게 말하고선 입술을 앙다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어머니가 '다음에도 같이 놀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하며 내게 눈치를 줬던 것도.

그 다음 날에도 소꿉놀이 세트를 들고 놀이터에 찾아오면, 여자애가 엄마 손을 잡고 이쪽으로 왔다. 어제와는 다른 완전히 밝아진 표정으로. 돗자리에 앉고서는, '이번에는 내가 아빠 할게!'라고 말하며 환하게 미소지었고.


그날부터 우리는 매일같이 놀이터에 모여, 4인 가족을 주제로 한 소꿉놀이를 했다. 놀이 도구는 그달리 변하지 않아 하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된장국을 만들고, 돗자리 밖에서 신발을 벗어 들어오며 '다녀왔어요'라고 말하고, '어서오세요'라고 대답하고.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곤, 그러한 '다녀왔어요'라고 말하는 역할이, 일반적인 회사원이 아니게 되었단 것이겠다.

'아버지'의 직업이란 오로지 회사원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여자애는 여러가지 직업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아버지 역할을 할 때마다 시의원 보좌관, 국회 서기, 선거대책위원회장 같은 직함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는, 오늘은 시청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 예산안이 결정 됐다 같은 식의 소리를 하며, 내가 만들어준 된장국을 마시는 시늉을 하던 것이다.


직업이라곤 기껏해야 회사원, 의사, 군인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런 듣도보도 못한 이름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여자애는 꿋꿋이 자신의 직업을 그런 쪽으로 결정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여당 중책이고, 어머니가 시의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뭔 그런 직업이 다 있냐, 라고 놀림 반 진심 반으로 얘기하면, 여자애는 볼을 부풀리며 진심으로 화를 내고는 했다. 그런 류의 직업을 지니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왜 그런 이상한 걸 하는 거야?"


"그런 걸 하다 보면, 대통령이 될 수 있으니까!"


"엥? 대통령?"


"응! 대통령!"


그 말을 들은 나는 진심으로 놀랬다. 다른 건 몰라도 대통령은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우리나라의 왕. 나라가 잘 되는 것은 대통령 때문이었고, 못 되는 것도 대통령 때문이었다.

그런 이상한 일들을 하다 보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단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한다는 포부가 대단하게 느껴져서였을거다.


"응, 미나는, 대통령이 될거야!"


"와. 대단하다."


"그리고 오빠와 함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거야!"


"엥?"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때였다. 하나는 여자애의 이름이 '미나'였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 여자애가 나와 결혼하고 싶어했다는 것.


아빠와 엄마가 사랑해서 했다는 것이 결혼이었다면, 미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었을까. 사랑이란 것이 지나치게 가벼운 시절이었기에, 나는 그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응, 결혼하자, 그럼!"


"응! 오빠! 영원히 행복하게 살자!"


그렇게 단언하는 미나의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채로 말이다.


그날 이후로 미나는 항상 소꿉놀이를 할 때마다 반지를 한 쌍 가져왔다. 그것을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차라고 했다. 결혼한 사람들은 이것을 항상 낀다고 했다.


소꿉놀이에서 '아이'라는 역할이 사라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아빠와 엄마라는 역할을 교대로 하고 있던 우리는, 어느 새부터 미나는 아내, 나는 남편이란 역할을 고정시킨 채로 소꿉놀이에 임했다. 굳이 '아빠'와 '엄마'가 아닌 호칭을 쓴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는 필요 없어서'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기괴하기 그지 없는 변화였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저, 짜증이 날 뿐이었다. 반지를 껴야 하는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아이 역할이 없어진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소꿉놀이라는 행위 자체에 지루함을 느끼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내 반대의 뜻을 가볍게 묵살하고 행동하는 미나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러한 불쾌함이 어떠한 형태가 되어 폭발한 것은, 미나를 만나고 딱 1년이 지났을 때였다.


"오빠, 그건 뭐……야?"


돗자리에 앉아 미소 짓는 미나에게 손에 들린 것을 보여주자, 그 행복하기 그지없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버렸다.

당시 개그 프로의 코너에 나왔던 시베리아 허스키 인형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을 돗자리 위에 올려놓은 나는 미나에게 말했고.


"응, 유성이야! 우리 집의 새로운 애완동물!"


"뭐……?"


아이 역할이 없다면, 적어도 애완동물 하나쯤은 집에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면, 미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면서 거부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요청을 수용했던 나는 그 '애완동물은 싫다'라는 의견을 묵살해버렸다. 그것이 마지막 자존심의 한계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날의 소꿉놀이는 계속, 그렇게 새로 들어온 '유성'이란 이름의 강아지를 두고 이루어졌다. 강아지를 아끼고, 강아지를 목욕시키고, 강아지가 좋아하는 사료를 주는 등. 시베리안 허스키 인형의 입에 사료를 쑤셔넣는 내 손길을 보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미나가 생각난다.


그렇게 뾰로통한 표정의 미나를 보며 약간의 미안함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즐거웠다. 오랜만에 소꿉놀이라는 행위의 즐거움을 다시금 깨달은 것 같았다.


내일도 유성이 함께할 거야, 라고 말하는 나를 보며 미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오빠,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어제 단언한 대로 시베리안 허스키 인형을 가지고 와, 돗자리 위에 올렸을때.

하늘하늘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미나가 그렇게 말했다.


"무슨 날이야?"


"복날! 오늘이 중복이래!"


그 말을 했던 것을 보면, 여름의 한복판이었던 것 같았다. 소꿉놀이 내부의 설정의 흐름은 보통 현실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땀이 뻘뻘 흐르는 피부로 돗자리 위에 앉은 미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허스키 인형을 쓰다듬었다.


"엄마가 말했는데, 복날에는 몸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한댔어."


"응, 그렇구나."


"그래서, 이 미나가 직접, 오빠를 위해 준비해왔거든!"


그리고 그 쓰다듬던 손을 급작스레 등 뒤로 돌려 무언가를 꺼냈을때, 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느껴버리고 말았다.


"그건……? "


"개고기, 개고기가 몸에 좋다고 했어!"


날이 시퍼런 식칼을 꺼내 든 미나는, 그대로 시베리아 허스키, 즉 유성의 몸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건 어느 부위라고 했어, 어디에 쓴데!'같은 식으로 말하며 칼을 내려치는 미나의 손 안에서, 왕관을 쓴 시베리아 허스키는 딱 어설프게 토막난 개의 시체가 되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살점 대신에 솜이 들어차 있었고, 피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응, 이걸 끓이면, 끝!"


그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어올라, 입을 가리고는 돗자리에서 달려나갔다. 뒤쪽에서 어디 가는 거냐고 미나가 소리쳤지만, 이미 그 소리에 어떠한 감상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미나와 다시는 소꿉놀이를 하지 않았다. 아니, 소꿉장난이란 행위 자체에서 아예 손을 때 버리고 말았다.


집 안으로 들어온 나는 두려움에 찬 채 겪은 일들을 엄마한테 말했고, 부모님은 근 몇 년 간만에 처음으로 의견을 일치시킨 채 미나의 부모님에게 항의를 넣었다. 아이한테 무슨 정신적 충격을 준 것이냐고.


문제는, 그달리 돈을 잘 벌지도 않는 일반 직장인인 우리 부모님과는 다르게, 미나의 부모님은 정치계의 중앙에 거의 다가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보상을 받기는 했지만 보복으로 온갖 불이익을 떠안게 된 우리는, 아파트에서 떠밀려나가듯이 이사를 가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그달리 불만은 없었다. 항상 싸우던 부모님이 그 일을 계기로 서로 단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 끔찍한 기억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미나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는, 이삿짐을 트럭에 전부 다 싣고 마지막으로 아빠의 승용차에 몸을 실으려 했을 때였다.


"오빠."


손에 반지를 끼고 있는 미나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등 쪽에 소름이 감돌았다. 시선이 맞닿자마자 몇 발짝 뒤로 간 나를 바라보는 미나의 눈은 퀭했다.


그것이 정녕 아이의 눈이었는가. 생각해보면, 두려움을 느낀 것은 그 토막난 강아지 인형의 기억이 아닌, 그 반쯤 죽어버린 눈 때문일지도 모른다. 입을 떨며 바라보는 나를 향해 미나는, 껴 안겨 올 듯이 달려와 내 품에 안기려 했지만.


"저리 가!"


당연하게도 나는 그렇게 외쳤고, 발을 멈춘 미나는 손을 떨며 내게 말했다.


"오빠, 우리……결혼하기로 했잖아……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로 했잖아……."


"결혼은 무슨! 너랑은 절대로 결혼 안해!"


그 말에 갑자기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고, 충격을 받은 듯 부르르 떠는 미나에게 다시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세상에 다른 모두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너랑은 결혼 안 해! 만나지도 않을 거야! 절대로!"


다시는 만나지 않고 싶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작별인사를 한 뒤,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아빠의 차 뒷자리에 올랐다. 시동과 함께 멀어지기 시작한 미나의 눈에는 옅은 생기조차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축 늘어진, 생기조차 없어 보이는, 막 6살이 되려고 하던 소녀의 모습.


그것이 내가 본 미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새로운 집에 이사를 간 나는 몇 달 동안 그 미나에 대한 악몽을 꿨지만, 해가 지나가기 전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기억에서 반쯤 사라져버린 미나를 더이상 회상하지 않을 수 있게 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평균 이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나는 8살이 될 때까지 소꿉놀이를 한, 어찌 보면 덜 떨어졌다 말할 수도 있는 위인이었다.

공부도 딱히 남들에 비해 잘하지 않았고, 신체 느열곧 평균 이하인데다가, 무엇보다 의욕이 하나도 없었던 나는 멍하니 살다 보니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 삶을, 나 자신이 아닌 남에게서 찾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고등학교때쯤 부터 애들 사이에 차츰 생겨난 '정치'라는 주제는, 20대가 다 지나갈 때쯤 되어서는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그 영역을 확대해갔다. 농담 따먹기도 정치에 관한 것이었고, 진지한 얘기도 정치에 관한 것이었다.


대통령이 이래서 안 된다, 우리가 왜 우리의 투표권으로 저런 놈을 뽑아놓았을까. 멀쩡했던 사람들이 권력 있는 지위에만 오르면 정신병자가 되는 그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어느 샌가 하루하루 허덕이는 내 불행한 신세가 모조리 남의 탓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못 사는 것도 대통령 탓, 미세먼지가 많은 것도 대통령탓. 술 마시러 모이면 누구 한명쯤은 대통령 욕을 했고, 그에 동조하는 말도 여럿 나왔다. 대통령 욕을 하다 보면 여당 욕, 여당 욕을 하다 보니 야당, 범위를 확장시켜 나가다 보면, '정치'라는 단어에 약간이라도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 모두를 정신병자라고 욕하는 것이 대화의 결말이었다.


20대 후반, 어느 맥줏집에 들어앉아 닭똥집을 씹으며 모여앉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식의 욕이 오고갔다.


"제대로 된 놈은 정치를 안 하나봐. 쓸데없는 짓인 줄 알고."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끼리 나오는 얘기가 또 이런 거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런 얘기에 약간의 공감을 느끼며 듣고 있던 차였다.


"어, 걔는 잘 하잖아?"


"걔?"


"신미나."


"아, 누구더라? 그……."


"이번에 1선 한 애. 그, 서울 쪽에……."


"아, 걔. 걔는 좀 맘에 들더라."


급작스레 나온 한 사람의 이름, 그 사람을 언급하기 시작하는 친구들을 보며,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나마 요즘 윗사람들 중에서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느니, 대통령 선거 때 오르면 뽑을 거라느니, 급작스레 오고 가는 칭찬은, 귀 속에 울림에도 머리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신미나.


분명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는데.


과거는 언제나 그렇듯이, 이름 하나만을 듣는 것 만으로 불쑥 현실 속으로 떠올라, 그 시간에 느꼈던 감정들을 끌고 와서는 나를 물들인다. 떨떠름하기 그지없는 심정으로 집 안으로 간 나는, 휴대폰을 켜고선 검색창에 그 이름을 입력했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결과. 인물의 프로필이 떠오른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선 눈을 찌푸렸다.


맞았다.


기억 속에 있는 신미나였다.


기억 속에 있던 6살의 신미나가, 20대 중반의 젊은 여자가 되어 뉴스에 오르고 있었다. 정치인 부모님의 아이라는 가족배경, 얼굴 위에 덮여 있는 약간 포근한 인상까지. 모든 것이 내가 아는 신미나와 일치했다.


그런 신미나를 묘사한 기사들을 차례차례 훑어보았다. '소신발언'과 '청렴결백함'. 긍정적인 수식어만 달려있다. 가장 주목되는 정치 신인, '대통령이 되었으면 싶은 사람' 여론조사 1위.


봉사활동도 여럿 하고, 기부도 많이 하고, 기사에 나온 것만 보면 지상에 내려온 천사가 다름 없었다.

기억 속에 있는 그, 섬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신미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듯 했다.


처음에는 그 기억속에 있는 본성을 숨기고 연기라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부정적인 감상이 고작 유치원때의 일이라는 것을 떠올려내고는 그 생각을 접어버렸다. 자아가 형성되기엔 지나치게 빠른 시기의 일이었다. 좋은 교육을 받아 올바른 인성을 가지게 된 걸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저, '올바르게 자라났구나' 란 생각을 한 나는, 어느 새 그녀에 대한 불쾌함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일도 있었지, 라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일 속에 신미나라는 이름도 넣을 수 있었다.


그 정도 감상을 느낌과 동시에 휴대폰을 끈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살짝 눈을 감았다.

묘하게 후련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기 시작했고, 나는 막 30대가 되었다. 어제 뽑았던 것 같은 대통령 자리에 오를 사람을 새로이 뽑아야 할 때가 다가왔다.


뉴스에서 떠들고 대통령 후보 목록을 살펴보면, '신미나'라는 이름이 계속해서 오르내린다. 국회의원 활동을 하면서 엄청나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온갖 파벌의 애정을 받는 짓을 도맡아 해왔으며, 젊고 유능하고, 업적도 많이 쌓았다는 위치가 겹치고 겹쳐 일어난 것이었다.


20대 후반 여성을 대통령에 올려서 나라가 잘 되겠냐는 반발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워낙 착실하고, 유능하고, 청렴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그러한 반발의 목소리도 급격하게 사그라 들었다.


물론 뉴스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청렴하고, 유능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투표소에 가서 받아든 투표지에 '신미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면,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녀의 이름에 도장을 찍을 생각이었다.


어릴 적에 존재했던 그 시간 속, 미나의 목소리가 잠시 생각난 탓이었다.


'응, 미나는 대통령이 될거야! 그리고 오빠와 함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거야!'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찼던 과거에는 한없이 거부했던 그 말이었지만, 아무런 감정이 없어진 지금에 이르러선 그 말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결혼'은 그녀 자신도 거부할 것이었으니, 적어도 대통령이라도.


비록 모래사장의 바늘 하나 같은 조그만 기여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일조한다면 요청을 들어주는 셈이겠지.


그런 생각과 맞이한 대통령 선거 날의 나는, 투표용지의 '신미나'라는 이름에 빨간 도장을 찍어놓곤 투표함에 넣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TV를 틀곤 시작되는 개표방송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새벽쯤이 되어서야 끝난 대통령 당선인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신미나였다. 70퍼센트 가량의 득표율을 찍은 채였다.


저 70퍼센트의 표 중에 내가 있을 거라 생각해보니,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올바른 선택을 한 거겠지, 눈 앞에 있는 신미나는, 내 기억속에 있는 신미나와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어."


당선 기념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던 신미나가, 지지자들에게 화답하듯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흔들고 있는 손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있다.


익숙하기 그지 없는 디자인이다.


급작스레 불안감이 든다.


뽑아놓은 다음에야 들어버리는 이 불안감은 뭘까. 왜 급작스레 과거의 그, 반지를 낀 채 나를 막으러 달려오던 그녀가 떠오르는 걸까.


의문이 느껴지는 것을 애써 억누르곤, TV를 끈 다음 침대에 누웠다. 아닐거야, 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왼손에 끼워져있던 그 반지는 그저 착각이었을 뿐이라 생각하고선.


하지만 두 달 뒤 일어난 대통령 취임식, 선서를 하는 신미나의 왼손에는, 여전히 그 익숙하게 생긴 약지가 끼워져 있었다.


대통령이 된 신미나의 손에 약지가 끼워져있다는 사실은 뉴스에서 나온 화젯거리가 되어있었다. 국회의원 시절에서부터 끼고 있었던 사실이 다시금 조명된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있느냐고 하는 기자들의 말에 신미나는 그저, "아직은 아니에요"라는 식으로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그럼 왜 끼고 있느냐는 기자들의 말엔 살짝 미소를 짓는 것으로 묵비권을 행사했고.


그러한 태도가 계속해서 이어진 끝에 화제는 점차 사그라들었고, 점차 다른 소식들이 인터넷 기사창을 채우기 시작했다. 신미나 대통령, 무엇을 하다. 신 대통령, 무엇을 발표하다. 신 대통령, 무엇을 연설하다.


신 대통령, SNS에 이상한 게시글을 올리다란 기사도 나와 있었다. 대통령이 취임하고 1년 정도가 지난 뒤였다.


SNS에 실언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대통령의 전통인 모양이었다. 저번 대통령도 SNS에 포르노 사진을 올렸다가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고, 그 전대 대통령은 SNS에 도의적으로 논란이 될 내용을 올리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런 것이었나보다, 생각하며 무심코 기사를 누른 나는, 급작스레 등을 타고 올라오는 섬뜩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오빠, 나에요, 신미나. 미나를 기억하죠?]


캡처된 사진 속에 있는 SNS의 속에는, 신미나가 적은 것으로 보이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위에 있는 사진. 자신의 왼손을 찍은 듯 했다.


약지손가락에 끼워져있는 구리 반지. 역시나, 기억 속에 있던 것과 똑같이 생겼다. 크기만 약간 커져 있을 뿐. 새로 맞추기라도 한 모양이다.


6살때의 미나는 그 반지를 끼고 나에게, 가지 말라고 외쳤다. 쾡하니 죽은 눈과 끔찍하게 절망한 얼굴과 함께.


그리고 그 반지를 약지에 끼고 있다는 건…….


[오빠와 했던 약속의 절반을 이제 이뤘어요. 이제 남은 것을 해야 할 때에요.]


나와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자는 그 말을, 미나는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 시베리안 허스키를 토막내며 실실 웃던 미나는, 계속해서 그저 미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기사를, 그 글을 읽었음에도,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명확히 나를 부르고  있는 그 SNS에 대해 나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라가 급격하게 경직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1년 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평가에 맞던 정책을 펼치던 신미나는, 급작스레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경제와 민주주의 지수는 급작스레 바닥으로 치닫고, 세금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상 속에서, 언론들은 더 이상 정치에 대한 기사를 올리지 않기 시작했다. 하잘 것 없는 연예부 소식만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신문은, 요즘 뜨는 유튜브나 K-POP아이돌의 소식 말고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외국의 소식통을 향해 나라의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파악은 할 수 있었지만, 그 파악한 나라 상황 또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국가정보원의 요원들이 급작스레 미국에서 포착되기 시작했다고? 누가 봐도 수상한 공장이 동해안에 여럿 세워지고 있다고?


의도도, 결과도 알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나는 집 안에 처박혀 모든 것을 그저 관망하기만 했다. 가면 갈 수록 두려움이 심해져만 갔다.

그 SNS 게시물을 무시했을 때만 해도 상상의 영역에 있었던, 불안한 상황들이 현실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미나가 나를 찾기 위해,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을.


그렇다는 건, 미나는 나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방 안에 처박힌 채, 나라 꼴이 왜 이렇냐고 욕하는 부모님의 말을 무시하며, 컴퓨터로 쓰잘데기 없는 게임이나 반복할 뿐이었다. 밖에 나가서 얼굴이라도 보이는 순간 모든 것이 들통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 또한 어찌 보면, 쓸모가 없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오빠.]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에서 온 문자다.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는 그 내용을 보고 숨을 내뱉었다.


[기억하죠, 그 장소?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것으로  끝난 문자였지만, 의미를 이해하는덴 충분했다.

옷을 입은 다음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 지도로 검색한 곳을 향해갔다. 그녀가 말하는 '기억하는 장소'라곤 그곳밖에 없었다.


어둑어둑해진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그 중앙에 있는 놀이터.

위에 세워져 있는 놀이기구들은 반쯤 녹슬어있고, 모래사장을 감싼 타이어는 색이 다 바랬지만, 그 형태는 내가 기억했던 그대로였다.

누군가가 보존하기라도 한 듯이 보이는 이 장소에 도달하자마자, 모든 기억이 현실로 끌어들여져온 것 같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손을 잡고 그녀를 끌고 온 장소, 내가 소꿉놀이 도구들을 찾기 위해 뒤적거렸던 쓰레기장.


그리고 돗자리를 폈던 그 장소. 그 장소 위에.


"오빠."


그녀가 뒷짐을 진 채 뒤돌아보고는,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정말로 멋있게 자라주셨어요. 사진보다 더."


"신미나."


그녀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는 혐오감이 담겨있었다. 8살때 그녀를 향해 거부감을 드러냈을 때와 똑같이.

그 혐오감이 익숙한 것 마냥 입술을 비죽거린 신미나는, 몸을 나에게 완전히 돌리고는 다가왔다.


"오실 줄 알았어요, 오빠."


"내 번호를 찾아서 연락까지 할 정도라면……."


"어머님과 아버님을 찾아 어떻게 할지 모른다. 스스로 그렇게 느끼셨군요."


고개를 끄덕이자 신미나가 쿡 하고 웃었다. 귀엽다는 듯한 태도였다.


"옛날에 한 약속, 기억나세요?"


"뭐?"


"기억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고개를 끄덕이는 신미나는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뒷짐은 계속해서 쥔 채로.

이해할 수 없는 그 행동에 잠시 몸사레를 치면서도,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약속을 읊었다.


"너는 대통령이 된 다음, 나와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거라고 약속했지."


"우, 그거 말고요."


"그거 말고?"


"오빠 말이예요, 오빠가 했던 약속."


내가?

미나에게, 약속을 했다고?


그녀에게 무언갈 약속하거나, 맹세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약속'이란 단어는 항상 미나와 연관되어 있었다.

내가 무언가 약속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보면, 고개를 올리고 있는 신미나가 뒷짐을 풀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 이제, 올라가네요."


그 말에 물음을 던지는 대신,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시커먼 하늘 속에 급작스레 붉은 빛이 생겨나 있었다. 밝게 타올랐다 식기를 반복하는 붉은 빛은 하늘을 오른쪽 방향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건……?"


"핵미사일 이랍니다."


그 평안하기 그지 없는 말투 때문인지, 단어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붉게 빛나는 저 유성같이 생긴 것이 핵미사일이라니.


"나머지는 곧 출발할 거예요. 오십 발은 미국, 스무 발은 러시아. 그 다음에 출발하는 삼십개는 중국과 이란 쪽으로 향할 거고요."


그렇게 평안하게 전해져 오는 미나의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은 조금 뒤였다.


"뭐……?"


"정말 힘든 공작이었어요, 중국과 미국, 러시아와 미국을 또 이간질하는 건. 나라에서 핵이 터지면 당연히 상대편이 쏜 걸로 알 거예요. 서로에게 핵무기를 퍼붓겠죠? 사실이 밝혀지면 우리나라에도 미사일을 쏠 거고."


그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야가 사라짐과 동시에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봉지를 내 머리 위에 씌우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숨이 막히는 와중에 팔 쪽에 고통이 도달했다.


아마도 주사였을 거다. 팔이 뜨거워지는 것을 보면. 멍하니 쓰러져 있는 동안 급작스레, 콘크리트 바닥 위에 누워 있단 것을 깨달았다.


몸이 구속되어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팔을 움직여봤다. 사지가 전부 자유로웠다. 머리 위에 씌워진 봉지를 빼고 주변을 둘러다보았다.


콘크리트, 쇠, 아니, 납인가. 어찌 되었건 이해할 수 없는 회색빛 재질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어딘가로 통하는 문 위에는 무언가 붉은색 표시가 쓰여 있고, 그 반대쪽 벽 위엔 TV들이 정연히 늘어져 있었따.


TV는 절반이 신호가 끊겨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불이 켜져 있는 TV를 보고 나니,  그 신호가 끊겨버린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버섯구름이 온 TV 위에 피어나 있었다. 끔찍하게 당황한 표정으로 뉴스를 보도하는 앵커들 뒤로, 버섯모양 구름이 일어나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다. TV에 보이는 언어는 가지가지. 아마 아랍 계 언어. 영어. 일본어와 중국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완벽히 이해했기에, 그 이해한 사실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대체, 대체…….


"다녀왔습니다."


뒤쪽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돌아보니, 신미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권총을 든 채였다.


"일어나셨군요, 오빠! 당장 방으로 안내해도 될까요?"


대답할 새도 없이 손을 잡힌 나는,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끌려나갔다.

납으로 된 방을 나오자 보이는 것은, 똑같이 납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는 듯한 방이었다. 차가운 재질로 이루어진 이 방은 운동장 몇 개를 집어넣어도 될 정도로 거대했다.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 아래, 바닥 위에, 무언가 상자 같은 것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손에 이끌려 가면서  바라본느 그 상자의 표현에는, '사과'와 '돼지 안창살'과 같은 표시들이 포스트잇으로 붙어 있었고.


그 모든 곳을 본 채로 끌려다니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미나가 발을 멈췄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다본다.


"이제부터 우리가 생활할 곳이에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사람이 생활할 수 있어 보이는 설비의 '집'이, 콘크리트에 나 있는 문 안쪽에 세워져 있었다.


적어도 30평은 넘을 것 같은 이 아파트 모양의 '집'은, 미나와 소꿉놀이를 하던 시절 내가 살았던 집과 완전히 똑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저 베란다 밖에는 그 당시 살았던 서울의 맑은 하늘, 맑은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맑은 화면과 전경을 조금 보고 나서 깨달았다. 그 풍경이 진짜가 아니라, LED화면이 비추고 있는 가짜 서울의 풍경이란 것을.


이곳은 여전히 지하였다. 지하 위에 꾸려진 이 방의 구조도, 어찌 보면 이상했다.

거실 위에 냉장고가 있고, 도마가 놓여 있다. 소파 아래에 깔린 러그는 돗자리를 모방한 듯한 질감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소꿉놀이를 할 때 배치한 가구들이었다.

소꿉놀이.


"미친 거, 아니야?"


모든 사실들이 조합되어 일어나는 하나의 결론에, 헤실히 웃고 있던 미나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미쳤다, 미쳤다. 지금 내 주변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봐라.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 모든 것이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네?"


"미쳤어, 너는, 이건, 신미나, 너는……."


"아직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건가요?"


웃으며 대답하는 신미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면, 신미나는 살짝 실망한 듯 입술을 비죽이며 내 손을 잡았다. 나를 끌고 나갔다.


상자가 잔뜩 쌓여있는 창고형 방에 끝으로 나는 다시 끌려갔다. 다만, 방향은 달랐다. TV가 있는 방 쪽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오빠가 했던 약속을 아직도 기억하지 못 하신 건가요? 미나는 평생동안 오빠의 약속을 기억하기로 했는데……."


"난, 난, 네게, 약속을 한 적이 없어."


나는 미나에게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 약속을 할 정도로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선명히 떠오르는 기억들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러한 약속을 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미나는 아닌 듯 했다. 나를 그렇게 끌고 가면서도 새차게 고개를 흔든 걸 보면.


"저와 잠깐 헤어지실 때, 약속하셨잖아요!"


헤어질 때의 약속.


무슨?


"아직도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말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기억을 뒤져봤다. 헤어질 때 내가 한 것은, 한 마디 밖에 없었다.

설마.


"설마……."


급작스레 생각난 약속. 그 모든 것이 확실해진 순간, 나는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그 거대한 방 한 쪽에 나 있는, 거대한 철문 앞에 도달한 탓이었다.

도달하자마자 내 손을 놓은 신미나는, 그 금고 같이 생긴 철문 위에 손을 올리고는 약간의 조작을 했다. 끼리리릭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문이 열리자 마자 들어오는 빛은 주홍색을 띄고 있었고, 문 앞에는 머리에 구멍이 뚫린 듯한 검은 양복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저 남자가 내 머리에 봉투를 씌운 건가. 그리고 여기까지 데려와 살해당한 것이다. 신미나가 권총을 들고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너머로 펼쳐진 주홍빛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짐작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곳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들어가는 신미나의 행동이 미친 짓이라는 것도.


확실히 알 수 있음에도, 나는 그녀를 따라들어갔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빠, 이제 기억나세요? 오빠의 약속."


뜨거운 바람이 조심스레 불어닥치는 문 너머에는,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을 절반쯤 올라갔을 때 즈음에 신미나는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 다른 모두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나와는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만나지도 않을 거라고 하셨죠."


그것이 나의 약속이었다. 신미나가 받아들였던 나의 약속.

그 약속을 자연스레 말하고 있는 신미나는 어느새 계단을 다 올라 있었고, 그녀의 옆에 선 나는 다만 앞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걸 보세요."


지구가 불타고 있었다.

내 눈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불타거나, 불탔거나, 불타오를 예정이었다. 돌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흩어진 도시, 수분이 말라붙어버린 나무, 하늘 위로 새로이 피어오르는 버섯구름, 충격파, 살을 태울 것 같은 바람.


"이제, 저 의외에는, 그 누구도 남지 않았어요."


그녀에게 새겨진 나의 약속.

그것이 이루어졌다.


"정말로 노력했어요!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는 것도……그것을 실행하는 것도, 정말로 어려웠지만, 해냈어요. 오빠. 미나는 해냈어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나를 향해 미나가 몸을 돌렸다. 무릎을 바닥 위에 반쯤 꿇은 채로 품을 뒤적였다.


"그러니까……."


그리고 그 품 속에서 한 가지 상자를 꺼낸 뒤, 그것을 조심스레 열었다.


"이제, 미나와, 결혼해주시는 거죠? 오빠……."


그리곤 그 속에 있는 구리반지를 조심스레 내게 건네어왔다.


"저와, 영원히, 함께해주시는 거죠……?"


 구리 반지.

열기로 가득 찬 대지.


축복이라도 받은 것 마냥 희열에 차 있는 그 표정, 그 망설이면서도 노력해왔던 모든 결과들에 감싸여있는 이 상황이.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 했기에, 헛웃음을 여러 번, 정말로 여러 번 날리면서.


상자 안에 놓인 구리반지를 조심스레 잡았다. 미나의 눈가에 옅은 눈물이 고인다.

멀찍이 도시 위로 새로이 떨어지는 핵미사일이, 축복이라도 하듯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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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라이브 게시글은 쓰면 쓸 수록 렉이 존나 걸리네요

걍 한글 파일에 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