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붕아 내가 막 깜빡거려."


여느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오전, 내가 얀순에게 듣게 된 말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무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원래부터 무딘 성격이기에.


"그러게 막 깜빡거리네."



.

.

.



얀순과는 첫만남부터 평범하지 못했다.


때는 내가 막 중학교에 입학하던해...


정확히 말하면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술을 사러가던 때였다.


평소 으스스하던 그 골목길이 그날따라 더 스산하더라니 갑자기 뒤에서 창백한 손이 뻗어져 나와 내 어깨를 움켜쥐는 것이었다.


곧 내 어깨를 움켜잡은 그 손에서는 마치 오래된 기계가 작동하는듯한 기분나쁜 소리가 흘러나왔다.


"ㄴㅏㄹ ㅏㅇ ㄴㅗㄹㅈㅏ..."


하지만 나는 무덤덤히 그 말에 답할 수 있었다.


역시 무딘 성격이기에.


"그래."


그러자 그 목소리의 주인은 잠시간 움찔하더니 이번엔 정상적인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저기... 안도망가?"


"내가 왜? 나한테 무언가 해를 끼친것도 아니잖아."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하자, 그녀는 잠시간 벙찐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뒤... 그녀는 시간이 없다며 가려는 나를 붙잡고 자꾸만 수다를 떨어댔다.


심부름에 늦으면 꾸중을 들을것이 틀림없어 조금 짜증났으나, 그녀가 내뱉는 이야기가 꽤 재밌어서 뿌리치지 못하고 계속 이야기를 들은것 같았다.


혹시 지박령이라고 들어봤는가?


죽은뒤 그 터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머무르고 있는 혼령을 뜻한다.


얀순은 그런 흔하디 흔한 지박령 중 하나였다.


애초에 귀신보고 흔하다는 수식어가 맞는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귀신의 경우 자신을 기억하는 이가 하나도 남지 않으면 존재가 지워지기 때문에, 사람들을 자꾸 놀래켜 존재를 각인시키는거라고 한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귀신이라곤 자기 밖에 없어 심심하던 차에 귀신을 무서워 하지 않는 내가 나타난 것이다.


"그나저나, 너 목소리 꽤 예쁘다. 귀신이면 아까처럼 'ㄴㅏㄹㅏㅇ ㄴㅗㄹㅈㅏ...' 같은 말만 할줄 알았는데"


"그..그건.."


아까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묻자, 얀순은 잠깐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변명하듯 말했다.


"사람들을 놀래키기 위해서 억지로 짜낸거야. 평소에는 안그렇단말야..."


양손에 얼굴까지 동원해가며 손사레를 쳐가는걸 보니 여간 억울한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나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귀신에게 어떻게 귀여움을 느끼나 의아해 할 수도 있으나


얀순은 귀신이라고는 해도, 나와 같은 15살 즈음에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피부가 창백한 것 빼고는 외관상 평범한 여자아이와 그리 다를바가 없었다.


어쩌다 죽은건지... 꽤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자정을 알리는 사이렌이 들려왔다.


왜에에엥-!


얀순이랑 떠들다보니 시간가는줄 모르고, 통금시간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제 가볼게."


내가 슬며시 자리를 털며 일어나자, 얀순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이제.. 가는거야..?"


"응."


"그..그럼 있잖아.."


얀순은 한참을 머뭇머뭇 거리더니 덧붙였다.


"내일도 와줄수있어..?"


그러더니 허겁지겁 변명하듯 말을 우수수 쏟아냈다.


"아니 그러니까, 꼭 와주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귀신이니까 나한테 시간 투자하기도 아깝구.. 그냥 시간이 만약에, 진짜 만약에 잠깐이라도 나면 볼 수 있을까 해서..."


말은 오지 않아도 된다였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은 '꼭 와줬으면 좋겠다' 였다.


그날의 경험이 신기하기도 했고, 얀순과의 대화가 퍽 재밌었던 탓에 그만 그러겠노라고 약속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뛸듯이 기뻐하는 얀순을 보니 괜히 나 또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까 그 말을 쏟아내고 눈을 질끈 감은채 대답을 기다리던 얀순의 모습.


거기다가 차마 오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처음 심부름을 갈때는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이었는데,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어쩐지 한결 가벼운 느낌이었다.


뛰고 있어서 그랬던가.


집까지 전력질주로 뛰어가니, 문앞에서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벼르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술 심부름 치고는 꽤 오래걸렸구나."


"오다가 술을 잃어버려서 다시 샀어요."


"..."


잠시동안 아무말이 없으시던 아버지는 내 어깨에 손을 턱 얹고는 말하셨다.


"잔돈은 가지거라."


그러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


잔돈을 보겠다 하셨으면 걸렸을텐데, 거짓말인걸 아시고도 봐주신 모양이다.


우리 아버지는 꽤나 무뚝뚝한 성격이시지만 이런면에서는 알게모르게 다정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내 무뚝뚝한 성격또한 아버지를 닮은거라 하셨다.


물론 잠시후 그 어머니께 잔소리를 두시간은 들어야했지만.


.

.

.


그렇게 다음날, 마침 방학이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은 널널했다.


할것도 없겠다, 나는 얀순이를 찾아가기로 했다.


어제 얀순을 봤던 그 골목길.


그곳에서는 나는 얀순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얀순은 나오지 않았다.


어제의 기억이 설마 꿈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귀신이라 낮에는 볼 수 없는것인가.


그렇게 머릿속에 의문만을 띄운채로 골목을 뒤로 하려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갑자기 내 등을 툭 쳤다.


"워-!"


다리는 낮추고 양손은 내 등을 향해 애매하게 뻗어있는 상당히 엉거주춤한 자세.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빤히 바라만 보자, 얀순은 얼굴을 잔뜩 붉히곤 골목길 한구석으로 도망가 버렸다.


도망간다 해봤자 좁은 골목이라 두세걸음이지만...


쭈그리고 앉아있는 얀순에게 나는 말했다.


"미안 다음에는 잘 놀라볼게."


"됐거든..."


원래 창백한 피부라 더 빨간것이 부각되어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창피함이 상당했는지 얼굴이 봉숭화 물들인것처럼 빨개져있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얀순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리로 와봐."


"어..어어?"


어제 얀순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린것으로 잡힐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귀신이어도 만질수는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얀순과 함께 향한곳은 바로...


"여긴 어디야?"


"우리 부모님 가게."


부모님이 하시는 작은 가게였다.


가게래봤자 동네 슈퍼 정도이지만, 내가 여기 온것은 다름아닌 목적이 있어서였다.


"엄마-!"


내가 밖에서 목청껏 어머니를 부르자, 안에서 아버지가 성큼 걸어나오셨다.


"무슨일이냐."


"잠시 찾을게 있어서요. 엄마는요?"


"할일이 있어 동사무소에 가셨다. 조금 오래 걸리실게다."


그렇다면 그냥 안에서 찾아오는게 빠를듯 했다.


"잠시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게안을 뒤져 내가 원하던것을 찾아왔다.


"저 다시 갈게요."


"너무 늦지는 말아라."


"네."



나는 다시 얀순의 손을 붙잡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지금 어디가는건데-!"


"가보면 알아."


아이들이 북적대는 놀이터를 지나고, 꽃들이 예쁘게 자란 꽃밭을 지나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조그마한 언덕이었다.


"이런곳이 있었어?"


얀순은 신기한듯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와' 혹은 '어머' 같은 감탄사를 연발해댔다.


여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다.


놀이터처럼 아이들이 많지 않아 조용하고, 꽃밭처럼 예쁘지는 않아도 수수하게 싱그러운 풀밭이 가득 펼쳐져있는...


소위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 장소였다.


언덕의 꼭대기에 앉아 나는 얀순을 불렀다.


"여기야."


내 옆자리를 손으로 탁탁 치자, 얀순은 살포시 그곳에 와 앉았다.


"그래서 여기를 보여주려고 한거야?"


"그것도 맞는데..."


나는 얀순에게 손을 내밀어보라하며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이거 주려고."


"이건..."


저번에 어머니가 물들이고 남겨놓은 봉숭화였다.


얀순의 얼굴이 봉숭화같이 빨간 것을 보고 문득 떠올랐다.


굉장히 맥락없이 가져온것이었으나, 얀순이 창피해하는 것이 괜스레 미안하기도 했고, 어쨌든 여자아이라면 이런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실제로 얀순도 꽤 좋아하는 눈치였다.


"이거 말이야. 어릴때 엄마랑 한번 해본이후로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어.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얀순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보였다.


"오늘 두번째로 해보면 되겠네. 손 줘봐."


얀순이 내민 손은 참 곱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궂은일은 한번도 안해봤을거 같은 작고 가녀린 손.


어린시절 남자아이들과 자주 부대끼며 몸장난을 치느냐 투박한 내 손과는 너무도 대조되었다.


하지만 얀순은 그런것을 신경쓰지 않는듯 했다.


"너 손 진짜 크구나..."


그저 내 손이 크다며 놀라기만 했을뿐, 딱히 다른 말은 더 없었다.


지금은 그것보단...


무작정 가져오긴 했는데 과연 귀신의 손에 봉숭화 물이 들어질지가 의문이었다.


"다 됐어."


일단은 물들이기 위한 준비는 다 해놓았다.


열손가락 모두 헝겊으로 덮어놓은 꼴이 꽤 웃기긴 했지만 그래도 예쁘게 물들었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다.


어머니가 하셨으면 더 잘 됐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내가 해준것은 누가봐도 조잡한 솜씨였기 때문에.


하지만 얀순은 그것만으로도 좋다며 내내 빙글빙글 웃어댔다.


그렇게 언덕위에서 우리는 해가 지기 까지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언덕너머로 숨고 달이 떠오르는 시간이 되었다.


그때 문득 궁금한점이 생각났다.


"그건 그렇고, 얀순아."


"응?"


"너는 나한테만 보여?"


아까 분명 얀순과 같이있었지만, 아버지는 보시지 못한듯 하였다.


얀순이 모두에게 보인다면 그럴리는 없었다.


"내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보여줄 수 있어. 그래봐야 한번에 한명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얀순이 내게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 사람을 바꾸면, 전에 봤던 사람은 두번다시 나를 볼 수 없어."


"그렇구나."


괜스레 아쉬웠다.


얀순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계속 놀래켜야만 하는 처지일것이다.


그렇다는건 언젠가 나 말고 다른사람에게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거고, 그건 곧 두번다시 볼수 없음을 뜻했다.


그런생각을 하자 왠지 갑자기 기분이 안좋아지는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얀순이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걱정마!"


그러고는 팔을 양옆으로 활짝 벌리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덧붙였다.


"나 이런 좋은장소, 너가 아니면 있는지도 몰랐을거야. 손끝을 물들이는 이런 경험도 두번다시 못해봤을 거고. 그러니까 말이야..."


얀순은 내게 빙그레 웃어보였다.


"약속할게, 나한테 앞으로 사람은 얀붕이 말고는 더 없어. 얀붕이가 나를 계속 기억해줄테니까."


그 순간 은은한 달빛아래에 창백한 얀순의 피부가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밤이라 쓸데없는 감상에 젖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저 할말을 잃은채 쳐다보기만 했을뿐이었다.


얀순의 보기좋게 휘어진 그 눈매를.


그 이후로는 기억이 명확하게 나지 않는다.


그저 어찌저찌 얀순과 인사하고 헤어져 집에 들어왔다는 것만 생각났을뿐.


잠이 들기전까지도 내 마음은 그 언덕위에 있는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으슥한 골목길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새벽닭이 울자마자 골목길로 뛰어갔다.


그 골목은 더 이상 그렇게 으슥해보이지 않았다.


"얀순아-!"


그렇게 목청껏 부르자, 얀순이 어느새 내 뒤에 서있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


"응, 보고 싶어서."


그 말에 얀순은 일순간 말을 멈추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나도 그랬어."




그렇게 나와 얀순은 방학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웃고 떠들고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서로 장난도 치며, 시답잖은 얘기들로 시간을 보냈지만, 별것아닌 일도 얀순과 함께면 재밌었다.


아 참, 전의 그 봉숭화물은 굉장히 예쁘게 들어버려서 방학이 끝날때까지 빠지지 않았다.


그래, 방학이 끝날때까지...





어느덧 시간은 흘러 개학이 찾아왔다.


나와 얀순은 예전처럼 자주 볼수는 없어도 저녁마다 보기로 약속했다.


약속장소는 늘 그 언덕위였다.


골목길은 혹여나 누가 볼 가능성이 있기때문이었다.


얀순은 지박령이라고는 하나 우리동네만 떠나지 않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덕에 같이 꽃구경도 해보고, 강에도 놀러가는 등 여러가지를 같이 해볼수 있었다.


앞으로 그런것들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는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못보는건 아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그렇다고 학교로 찾아올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며 그건 얀순이 결사반대했다.


개학당일, 학교갈 채비를 하던중에 어머니가 내게 슬며시 말을 건네셨다.


"요즘들어 기분 좋아보이네?"


"아 그래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덧붙이셨다.


"사람이 부드러워진것 같아 보기좋구나."


그런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건 모두 얀순의 덕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머니께 살짝 웃어드리고는 문밖을 나섰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에서 나는 사실 인기많고 잘떠드는 느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학급 아이들 모두와 친하기보단 친한친구들과 노는 그런 느낌이 강했다.


무뚝뚝하고 딱딱한 무서운놈.


급장을 맡고 있는 놈이 나를 저렇게 단정지은 이후 나를 나타내는 수식어는 저것이 되어버렸다.


왕따나 그러한것은 아니지만, 무서운놈이란 인식때문에 딱히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다.


조금 억울한것이, 무뚝뚝한것과 딱딱한것은 맞아도 무서운놈 이란건 절대로 나와 통하지 않는 단어였다.


또래보다 건장한 체격이나 큰키 탓에 그런 인식이 생긴것 같았다.


하지만 키를 줄일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기 때문에 아침에 부드러워졌다는 어머니의 말이 조금은 기분 좋았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교실문을 열었지만 내게 아는체 하는 아이는 별로 없었다.


항상 같이노는 대여섯명의 친구가 전부였다.


그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방학은 알차게 보냈니?"


. . .


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궁시렁궁시렁 이러쿵저러쿵


옛날이었으면 이런 표현은 안썼을텐데 이것도 얀순이의 영향인것 같았다.


마침내 선생님이 조회를 끝내셨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덧붙이셨다.


"그리고 우리학급에 새로 전학생이 왔으니 환영해주렴. 들어오거라-"


그러자 문 밖에서 한 아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는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보자 학급전체가 술렁였다.


애초에 전학생은 학생들 사이에선 꽤 흥미가 돋을만한 소식이었다.


더군다나 그 아이가 여자아이라면 더.


중학교에는 남자아이들의 수가 여자아이들의 수보다 많았다.


그러니 남자애들이 술렁이면 학급모두가 술렁이는 것처럼 보였고, 여자 전학생은 남자아이들이 술렁일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전학생은 그런건 신경도 안쓴다는듯 당당한 걸음걸이로 교탁앞에 척척 걸어와서는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박얀진이구요. 서울에서 전학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쩐지 귀티가 조금 난다 했더니, 서울에서 온 아이였다.


여기도 나름 경기권이지만 서울과는 차이가 컸다.


"그럼 얀진이는... 저어기 얀붕이 옆에 가서 앉거라."


"네!"


얀진이는 다시금 당당한 발걸음으로 아니, 어쩌면 꽤 신난듯한 발걸음으로 내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서슴없이 말을 걸었다.


"안녕, 넌 이름이 뭐야."


"...김얀붕."


"오, 얀붕이구나..."


얀진이는 자기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말했다.


"이름이 되게 특이하네."


얀진이란 이름도 그렇게 평범한 편은 아닌데 저런말을 하니 꽤 신기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얀진이에게 말하니 얀진이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얀붕이랬지? 너 성격 완전 마음에 든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때부터 나는 반강제로 얀진이의 절친이 되어버렸다.


얀진이는 참 성격도 특이했다.


우리 학급의 기존 여자아이들이 굉장히 조용하고 조신한 성격이라면, 얀진이는 털털하고 밝은 성격이었다.


얀진이는 으레 전학생이 그렇듯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그걸 뿌리치고 나에게 절친이란 명목하에 학교 안내를 시켰다.


내가 왜 절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자기만 원한다고 절친이 되는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 말을 듣고는 얀진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학교를 안내해주는 중에도 피식 피식 자꾸만 입꼬리를 올려댔다.


그렇게 학교를 모두 보여주자 드디어 풀려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얀진은 안내해주는 내내 입을 쉬지않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뜰거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것 같았다 .


"이제 된거지? 난 교실로 가볼게."


"그래, 근데 나 교실로 가는 길이 기억이 안나는데."


그렇게 말하는 얀진은 능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헤실대고 있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얀진을 교실까지 데려다준뒤 나는 화장실을 가겠다며 도망갔다.


남자화장실까지는 따라오지 못할테니 말이다.


역시나 이번에는 얀진이 따라오지 않았다.


다른 학급친구들과 얘기할 심산인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한참 시간을 뻐긴뒤 교실로 들어가자, 얀진이 아이들과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말이야, 얀붕이 걔 무섭지 않아?"


내 얘기였다.


나는 일부러 교실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나 들어보기로 했다.


저기 흔히 말하는 뒷담화일 경우에 나는 진짜로 아이들이 바라는 무서운놈이 되어줄 생각도 있었다.


"맞아, 무뚝뚝하고 분위기도 무섭고... 방학때엔 옆학교랑 시비가 붙어서 싸웠다는 말도 들렸어."


말도 안되는 헛소문이다.


나는 방학때 얀순과 즐겁게 수다나 떨었을뿐, 그 시간도 지나가는게 아쉬웠는데 옆학교랑 시비라니 말도 안된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지금까지의 흐름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 나는 얀붕이 괜찮던데."


얀진의 목소리였다.


"내가 장난도 많이 쳤는데 화 한번 안내고, 생각보다 재미있는 애야. 너무 선입견 가지지 말고 한번씩 얘기해봐."


이건 조금 감동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는 애인줄 알았는데, 속으론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래? 그렇다면 뭐..."


"얀진이 니 말이라면..."


내가 화장실을 다녀온 그 잠깐 사이 얀진은 아이들 모두와 친해져 있었다. 나로서는 실로 대단한 친화력이란 생각만 들뿐이었다.


그날이후 뭔가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진게 느껴졌다.


먼저 말을 걸어주는 아이도 생겼고, 힘든일이 있으면 도와달라 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렇게 한명두명 친해지다 보니, 어느새 나도 반 아이들 전부와 친한 그런아이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그중 제일 친한건 단연 얀진이었다.


뒷담화 사건 이후로 나는 얀진이를 조금은 맹목적으로 신용하게 되었다.


얀진이 또한 특유의 성격탓에 남녀 안가리고 인기가 굉장히 많았지만 나와 제일 친하게 지내주었다.


얀진이와는 항상 같이 놀고 제일 많이 떠드는, 얀진이 처음 말한대로 절친이 되어있었다.


1학기때와 비교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와중에도 머릿속엔 뭔가를 잊은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몇주가 더 지난 주말이 되어서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해냈다.


'얀순이!'


학교생활이 너무 행복해서, 또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요 몇주간은 학교가 끝나면 반 아이들과 놀러다니다 저녁이 되면 자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얀순과 약속했던 언덕으로 미친듯이 뛰어갔다.


그곳에는... 얀순이가 하염없이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저기 저러고 있었던 것일까.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얀순아!"


그제서야 얀순이는 흐리멍텅한 초점으로 내쪽을 응시했다.


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잃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마음아팠다.


"얀붕아, 안오는줄 알았어."


"하아, 하아.. 미안해..."


"아니, 괜찮아. 결국 와줬잖아."


그리고 잠깐 동안 흐른 정적.


얀순과 이렇게 어색했던적이 있었던가.


먼저 운을 뗀건 얀순이었다.


"그래서 학교생활은 어때? 1학기때랑 다르게 친구는 좀 사겼어?"


"아 그게 말야.."


나는 있었던 일들을 모두 얀순에게 풀어놓았다.


얀순은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도 끄덕이고 '정말? 재미었겠다' 와 같은 추임새도 사용했지만, 그녀의 초점없는 동공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따금 '얀진이...' 하며 중얼거릴뿐.


이야기가 끝나자. 어느덧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얀순과 내일은 꼭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럼 얀붕아. 잘가."


"그래 얀순아. 내일보자."


"새로 친구들 사겼다고 나 잊지는 말구."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얀순이 입가에 띄운 씁쓸한 미소를 보니 더욱이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그렇게 집에가는 길에 생각했다.


무언가 얀순이와 이야기를 했음에도 전처럼 그렇게 재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는것을.


죄책감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내일 왔을때에는 얀순이와 더 재밌게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랄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바램을 지킬 수 없었다.


"얀붕아-!"


집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문을 내다 보니 밖에서 얀진이가 손을 입가에 모아 확성기를 만들고는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유리창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뭐야, 왜 왔어. 우리집은 어떻게 알고."


"학교 끝나는 길에 같이 갔잖아, 바보야."


"아, 그랬던가."


생각해보니 금요일에 분명 같이 하교했던게 기억이 난다.


"그래서 왜 왔는데."


"나랑 놀자."


"뭐?"


"나랑 놀자고 우리집에서."


남자애가 여자애 집에 놀러가는 일은 흔한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오늘 얀순이와의 선약이 있었다.


그러니 그걸 지켜야 했다.


하지만...


왠지 얀순이와의 약속보다 당장 얀진이와 노는게 훨씬 즐거울것만 같았다.


그러면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나는 하면안될짓을 하고 말았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씻고나갈테니까."


"그래!"


그날 나는 언덕이 아닌 얀진의 집으로 향했다.


얀진의 집은 저택처럼 굉장히 넓었고, 놀거리 또한 무수히 많았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놀았고, 또 시간가는줄 모르게 웃었다.


얀진과 함께 노는 시간은 정말로 즐거웠다.


시간이 조금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정도로.


그날 헤어지기 전 얀진이 내게 말했다.


"다다음주에 놀토 돌아오니까. 그날 우리집에서 하룻밤 또 놀래? 나 오늘 너무 재밌었거든..."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얀순을 볼시간은 없을것이다.


그걸 알고있음에도 나는 그러겠다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얀진의 집 앞에서 스르르 사라지는 귀신의 형체를 나는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그 다음날부터 뭔가 얀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어떤날은 기분이 조금 좋지 않다며 하루종일 쳐져있거나, 다른날은 하루종일 졸려하는, 또 하루는 내 눈을 마주치면 흠칫거리며 벌벌떨어대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채 얀진과 멀어져갔다.


얀진과 친하다는 이유로 나와 친해졌던 반 아이들ㅠ또한 멀어져가는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다 얀진과의 약속 바로 전날, 나는 얀진이 친구들과 하는 얘기를 듣고 말았다.


엿들으려 한건 아니었다.


그냥, 그날처럼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들렸을뿐이었다, 얀진이의 목소리가.


"나, 있잖아 요새 악몽만 꿔. 손끝이 붉은 귀신이 나타나서 피를 뚝뚝흘리며 얀붕이와 멀어지라는 악몽. 얀붕이랑 한마디라도 하는 날에는 그 귀신이 '나만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라면서 목을 졸라..."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아니 확신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무서워 뭘 어찌할수가 없었다.


얀진이 말한 귀신은 내가 알고 있던 얀순이와 너무 달랐다.


얀순을 찾아갈수없었다.


죄책감이 들었을뿐더러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심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전보다 더욱 확실한 혼자가 되었고, 그 상태로 세달이 흘렀다.


여름도 끝나가고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기분나쁜 날이었다.


얀진이가 일과중 절반이 지나도록 학교에 나오지 않은것이었다.


선생님이 부모님께 연락을 해봤으나, 두절이라고 하였다.


한번도 이런적이 없던 얀진이기에 모두가 걱정하던 찰나였다.


그때 얀진이 터벅터벅 비에 젖은채로 교실로 걸어들어왔다.


걱정에 찬 목소리로 모두가 물었다.


"얀진아, 괜찮니?"


하지만 예상외로 얀진이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괜찮아. 그리고 얀붕아."


얀진이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흠칫했다.


완전히 절단된 사이인줄 알았는데, 얀진이가 먼저 날 불러줬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워서이다.


"좀 있다가 학교 끝나고 옥상으로 와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았다 했다.


얀진이는 가볍게 빙긋 웃어보이고는 다시 친구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잠시뒤 선생님이 와서 이것저것 물었으나, 어찌저찌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수업을 드는둥 마는둥 어느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방과후가 되어버렸다.


"얀붕아 그럼."


얀진이는 내 등을 한번 쿡 찌르고는 옥상으로 향했다.


나도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옥상으로 걸어갔다.


'얀진이가 무슨말을 할까? 어쩌면 다시 친하게 지내자 할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좋을텐데.'


옥상에 가니 얀진이가 멍한 표정으로 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시선은 왜인지 저 멀리 꽃밭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얀진아, 그래서 할말이 뭐야?"


"그래, 얀붕아, 그래. 나 말이야."


얀진은 여전히 뒤는 돌지 않은채로 말을 이어갔다.


"진짜 오래 기다렸어. 정말로 너를 믿었거든."


"뭐를 기다렸다는 거야?"


내가 한 질문에 얀진이는 들리지도 않는다는듯 대답도 않고 계속 자기할말만 해나갔다.


"니가 나를 다시 봐주길 바라며 원치 않는 나쁜짓도 했고, 같은 장소에서 2달동안 멍만 때리기도 해봤어. 그런데 그런데."


그제서야 나는 얀진의 손 끝에 묻은 칠이 다 벗겨진 봉숭화 물을 볼 수 있었다.


얀진의 시선이 향해있던 곳은 꽃밭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작은 언덕이었다.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옥상문을 두들겨봤지만 이미 잠겨있었다.


얀진, 아니 얀순이는 그제서야 내 쪽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걸어왔다.


"왜? 왜 도망가는거야? 니가 제일 좋아하는 얼굴이잖아. 니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잖아. 아까도 좋다고 옥상으로 따라오던데, 이 아이는 걱정되고 나는 걱정 안돼?"


"그만해. 제발, 이런식으로 행동한다고 내가 다시 널 좋아하진 않아."


"왜? 내가 이제 얀진이인데 넌 얀진이를 좋아하잖아. 얀진이는 나만큼 널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렇게 말하며 얀순이는 날 덮쳐 넘어뜨렸다.


정체모를 괴력에 전혀 저항할수가 없었다.


얀순이 내 위에 올라간듯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그대로 얀순은 양손을 뻗어 내 목에 갖다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저 엄청난 괴력으로 목을 조르니 정말 죽을것만 같았다.


"커-커헉-!"


"너 때문에 얀진이 몸을 뺐었어. 난 정말 이런 나쁜짓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가 날 좋아했다면, 얀진이가 전학오지 않았다면..."


이제 정말 한계다.


눈앞이 노래지며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얀순이 하는 말의 뜻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대로 죽는것인가 싶던 그때 얀순의 마지막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냥 애초에 내가 널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하는 얀순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목에 가해진 압력이 줄어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얀진의 몸이 털썩 무너져 내렸다.


"허억-! 허억-!"


이유는 어찌됐든 살아있다. 살아남은 것이다.


그보다...


"얀진아, 얀진아 괜찮아?"


얀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으으...나 왜 여기서..."


"휴우... 다행이다..."




그날 이후, 또 무슨일이 생길까 걱정도 해보았지만 진짜 놀라울정도로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지금까지도.


그 긴 시간동안 내게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때 얀순이는 왜 날 살려준걸까.


옛정때문일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이유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물을 당사자가 없으니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얀순이는 그날이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또다시 흘러 내 머릿속에 얀순이란 존재가 거의 지워질때쯤.


그녀가 내게 찾아왔다.


"얀붕아 내가 막 깜빡거려."


나를 죽이려했던 그녀, 그런 그녀임에도 나는 무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날 죽일생각이 없다는것을 알게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게 막 깜빡거리네."


"이제 나를 기억하는건 너뿐인데, 너가 나를 잊으려 해서 그런가봐. 그래서, 그냥 마지막으로 보러 왔어."


"..."


"그때 그래서 정말 미안해. 너 탓이 아닌데, 그냥 내가 귀신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괜히 그랬어. 그거 알아? 난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었어. 우리 엄마 말야."


나는 고개를 들어 얀순을 쳐다보았다.


이건 처음듣는 얘기였다.


"우리 엄마는 어릴때는 나랑 정말 친했는데... 내가 무언가 맘에 안드는 잘못을 했나봐, 언젠가부터 모두 내탓이라며 화를 내더니, 결국 그 골목길에서 날 벽에 밀어버리셨지."


그렇게 말하는 얀순은 자신의 이마쪽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이란거에 더 집착했나봐 그랬으면 안됐는데...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얀순의 몸은 점점더 빠르게 깜빡이며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차츰차츰 옅어져가는 그 몸이 괜스레 더 가냘프게만 보였다.


얀순은 마지막으로 그날 언덕에서 그랬던것처럼 빙그레 웃어보이며 말했다.


"약속지켰다."


얀순에 말에 대답해주려던 그때, 얀순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한심한 놈이었다.


얀순은 사라졌고, 나는 두번다시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건 전부 다 나 때문이다.


나 같은거랑 한 약속이 뭐라고... 그냥 다른 사람한테 모습을 보였으면 살 수 있었을텐데...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렇게 하루종일을 울었다.


닿지도 않을 사과를 하염없이 해보기도 하고, 방안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걱정하셨으나, 그것마저도 자괴감으로 치환되었다.


하지만 시간은 내 슬픔과 비례하는것이 아니었다.


얀순이 없어도 세상은 멀쩡히 움직였다.


나 또한 내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음날 나는 반쯤은 시체가 된 채로 학교에 가야만 했다.


조그만 의자위에 앉아 내가 얼마나 볼품없어 보일까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는 똑같아 보일 수 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름 내 속은 형용할 수 없이 문드러져 있었다.


여느때와 같은 조회, 하지만 지금의 내게 들릴리가 없었다.


"...그래서...전학생...환영... 자리는.. 얀붕이 옆이.."


터벅터벅-


전학생이 온것 같았다.


이젠 전학생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얀진이가 전학오지 않았다면... 아니 이런 가정도 의미없다. 결국에 내가 못나서 생긴 일이니까.


그때 옆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랑 한 약속도 결국은 지켰네."


두번다시 들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이마의 흉터가 있는 그 소녀는 내쪽을 바라보며 그 어느때보다도 활짝웃으며 말했다.


"내일보자고 했잖아."


내 눈에는 어느새 또다시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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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놀토가 있던 시기랑 통금령이 있던 시기랑 안겹치는데 진행을 위해 어쩔수 없이 넣었음

픽션이라 생각해주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