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경비병을 사랑해버렸다 (58)

 

 

 

 

 

118.

 

…….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어느 장소에 아무것도 없는 건 불가능하다.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다. 그러므로 완전한 무(無)는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긴 모든 곳의 끝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없고, 동시에 무한하게 존재하는 장소.

 

난 이곳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곳에 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보았다.

 

파도가 치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왠지 알 수 있었다.

 

해안…….

 

영원의 해안.

 

나는 여기에 그런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이곳엔 아무것도 없어.”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니, 남자일지도 몰랐다.

 

녹슨 목소리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녹슨 목소리 말이다.

 

“이 너머엔 아무것도 없어.”


“…….”


“죽음은 축복이지, 저주가 아냐.”

 

진정한 저주는 이곳에 있다.

 

녹슨 목소리가 내 귀에 속삭였다.

 

한 발자국 나아가면, 나는 절벽 밑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올라올 수 없다.

 

죽음도 삶도 허락되지 아니하며.

 

그저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되어.

 

영원히, 우주가 끝난 이후에도, 그저 가라앉을 뿐이다.

 

여기엔 시작이 없다.

 

그렇기에 끝도 없다.

 

그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나는 그 순간 이해했다.

 

죽음조차 축복이라 할 수 있는 장소.

 

그곳이 바로 여기, 영원의 해안이다.

 

“때가 오고 있어.”


“…….”


“그 순간이 왔을 때, 과연 너는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천성적으로 두려움을 잘 모르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분명, 나는 절벽 끝에서 공포를 느꼈다.

 

이 바다에 빠진다는 것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완전무결한 무한. 

 

절대 끝나지 않는 영원함.

 

사랑도, 저주도 없는, 완벽한 허무.

 

“검을 뽑는 순간, 너는 이 절벽에서 떨어질 거야.”


자격은 오로지 ‘선택한 자’에게만 존재한다.

 

“모든 걸 잃고, 모든 짐을 짊어지고, 무엇에도 선택받지 않은 자여.”

 

눈을 뜬다.

 

새벽의 빛이 반짝거렸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빛이었다.

 

“어……방금……뭐였지?”


누가 나한테 말을 걸었는데.

 

잠에서 깨어나니, 그 모든 게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어두컴컴한 무언가를 봤다. 그리고 무서웠던 것도 기억난다.

 

하지만……나는 뭘 무서워했던 거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알 수 있는 건, 배가 고프다는 사실뿐이었다.

 

“뭐라도 먹어야지…….”


나는 오두막 안에 있는 상자에서 한 번 구웠던 감자를 꺼냈다.

 

역시 감자는 늘 옳다. 감자는 진리다, 감자야말로 신의 선물이 분명하다.

 

아무튼 그렇게 감자를 먹던 중-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일어났네?”


“아하시, 아녕하시니가.”


“……그 감자 다 먹고 인사해도 돼.”


그렇구나. 나는 반쯤 남은 감자를 입에 쑤셔 넣었다.

 

“태평하게 늦잠자고 있어도 되겠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습니까?”


“뭐, 그렇긴 한데.”


플로라 씨가 돕지 않겠다고 한 이상, 지금으로썬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한테 제물을 받아가겠다고 말했기도 했고…….

 

무엇보다 우리가 뭘 하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 마녀들이 움직일지, 전하가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인데…….”
 
“급할수록 집에 돌아가란 말도 있잖습니까.”


“아니, 집에 돌아가서 뭘 어쩌자고? 잘못 알고 있어, 너.”


“그, 그랬습니까?”


속담은 잘 모른다. 나는 경비병이지 학자가 아니니까.

 

“아무튼 대충 준비하고 나와.”
 
“어……뭔가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 의수, 더 능숙하게 다뤄야 할 거 아냐.”


아.

 

나는 얼마 전, 공주님한테 받은 의수를 보았다.

 

이 의수는……생각보다 보잘 것 없는 물건이었다.

 

진짜 팔처럼 움직이는 거나 손이 발사되는 건 쓸 만하지만, 그 외엔 별 쓸모가 없었다.

 

나는 좀 더……불꽃이 발사되거나, 엄청 힘이 세지거나, 그런 걸 기대했는데 말이다.

 

“이거, 역시 불량품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팔이 멋대로 움직여 내 안면을 때렸다.

 

“우게엑!?”


“왜 자해하는 거야?”


“파……팔이 멋대로 움직인 겁니다…….”


아파……뭐지, 대체? 가끔씩 지 혼자 움직일 때가 있긴 했는데…….

 

설마 자기 욕하는 걸 알 수 있는 건가?


에이, 설마. 

 

“금방 준비하고 나가겠습니다, 아이고…….”


나는 갑옷으로 갈아입은 뒤, 오두막에서 나왔다.

 

“그나저나 여관도 아니고, 왜 여기서 지내야 합니까?”


“여관은 너무 눈에 띄어. 우리는 몰라도, 공주님은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어.”


“아.”


그렇구나……역시 아가씨, 동경하게 된다.

 

“음, 여기가 좋겠네. 적당히 넓고, 사람도 없으니까.”


우리는 오두막 근처에 있는 공터에 마주보고 섰다.

 

확실히 사람도 없고, 훈련하기엔 딱 적당해보였다.

 

“먼저 그 의수의 한계를 알아야 돼.”


“한계……입니까?”


“여차할 때 어느 정도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알아야 하잖아.”


“그런 겁니까?”


“……얀센, 이럴 때는 그냥 내가 하자고 하는 대로 해.”
 
“아, 알겠습니다.”


괜히 아가씨 성질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최근 들어선 나한테 엄청 잘해주시지만, 그렇다고 성격이 죽은 건 아니니까.

 

“먼저……의수를 최대한 멀리 날려봐.”


“네!”


나는 자세를 잡고- 낚싯대를 던지듯 팔을 휘둘렀다.

 

철컥-!

 

손이 날아가- 저 멀리 날아간 다음,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여기서 봐도 꽤 멀리 날아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손이 거의 안 보일 정도였으니까.

 

“음……50M 정도인가? 생각보다 멀리 날아가네.”


“근데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멋지진 않습니다.”


고작해야 손을 발사하는 게 능력이라니, 너무 멋이 없다.


나는 좀 더……화려하고 그럴싸한 기술이 좋은데 말이다.

 

샤크아랑 싸울 때는 요긴하게 써먹긴 했지만.

 

“좋아, 회수해.”


푸슈욱-!


손이 엄청난 속도로 돌아오다가- 주먹이 내 안면을 후려쳤다.

 

“악!”

 

“잠깐, 괜찮아!?”


“코……코뼈……부러진 거 같습니다…….”


이놈의 의수가 오늘따라 왜 이래.

 

이번에도 내 잘못이 아니다, 의수가 멋대로 내 얼굴을 때린 것이다.

 

“제 잘난 부분은 잘생긴 얼굴 뿐인데, 큰일 났습니다.”


“……음…….”
 
“에이, 저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줄게……일단은.”


아가씨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이번엔 파괴력을 시험해볼까? 나를 때려.”
 
“어…….”
 
“괜찮아, 네가 쳐봤자 흠집도 안 날 테니까.”


“그럼 알겠습니다!”


나는 자세를 잡고- 있는 힘껏 아가씨의 배를 때렸다.

 

“……음, 좋아. 알겠어.”


“어떻습니까!?”
 
“파괴력은 일반인 수준이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힝…….”


진짜 별 쓸모가 없구나, 이 의수.

 

손이 드릴로 변하거나, 뭐든지 자르는 검이 나오거나, 그런 기능은 없는 걸까.

 

“역시 저는, 전투에선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냐, 저번엔 잘했어. 네가 아니었으면 나도 죽었을 테고.”


“그건 그냥……운이 좋았던 거 같습니다.”


“주눅 들 필요 없어. 네가 잘하는 걸 하면 되니까.”


아가씨가 미소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제가 뭘 잘합니까?”


“……으음.”
 
“아, 저 감자 요리는 잘하지 않습니까!?”


“소박한 장점이구나.”


아가씨가 조금 뒤로 물러나, 내게 손짓했다.

 

“이번엔 다른 걸 시험해보자. 내가 이 돌덩이를 던질게.”


“네.”


“그걸 공중에서 잡아봐. 할 수 있다면, 생각보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테니까.”


아가씨가 내 머리 위로 돌덩이를 던졌다.

 

“흐음!”


푸슈욱!

 

하고, 손이 돌멩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아.”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얀센!?”
 
“엄마, 저 배고파요…….”


순간 헛소리가 나왔다.

 

응, 아프다. 확실히 아프다, 진짜 아프다. 매우, 엄청 아프다.

 

“……미안.”


“아뇨, 괜찮……지는 않은데, 괜찮습니다. 아마도, 네.”


왠지 오늘따라 내 취급이 험한 것 같다.

 

아니, 원래 이랬던가?

 

아무튼 우리는 몇 시간 정도, 의수 다루는 연습을 했다.

 

처음엔 이래저래 실수가 잦았지만, 곧 쓰는데 익숙해졌다.

 

“이 의수……대체 누가 만든 걸까요?”


“어쩌면 최초의 종족이 만들었지도 몰라. 아니면 엘프.”


“최초의 종족은 또 뭡니까?”

 

“모르는 거야? 동화책에서도 나오지 않아?”


“저희 집에는 글자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없고, 책 살 돈도 없었습니다.”


그야 평민이니까, 그마저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가세도 기울었다.

 

감자밭과 집을 지켜낸 게 기적이었다. 그 정도로 힘들었다.

 

“아,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도 거의 까막눈입니다!”
 
“그건 알아.”


아가씨가 내 의수를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 의수는 평범한 금속으로 만든 게 아냐.”


“어…….”


“강철도 아니고, 내가 아는 합금 중에선 이런 금속은 본 적이 없어.”


확실히 나도 그랬다. 흑요석이랑 비슷하면서도, 유리보단 금속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강도나 경도도 상당한 것 같고……무엇보다도 그 와이어……케이블이라고 해야 하나?”
 
“손에 연결된 밧줄 말입니까?”


“그래, 그거. 내 생각대로라면 이건 어지간한 유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물건이야.”


그냥 좀 튼튼한 밧줄 아니었나?

 

이게 뭐 그리 특별한 건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신축성이 좋으면서, 동시에 충격에 강인한 재질은 많지 않아.”


“어……그래서 뭐가 대단한 겁니까?”


“사실상 끊어지지 않고, 어지간한 압력이 가해져도 멀쩡할 거라는 뜻이지.”


확실히, 샤크아랑 싸우면서도 와이어가 끊어지지 않은 건 신기했다.

 

“최초의 종족은, 인간을 포함한 그 어떤 종족보다 번성했던 종족이야.”


“언제 이야기입니까, 그거?”


“대충 1억 년 전?”


일, 십, 백, 천, 만, 십만…….

 

나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써서 그게 대체 얼마나 큰 수인지 가늠해봤다.

 

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너무 많다. 나는 할아버지 부자인 것 같았다.

 

“최초의 종족은 마법, 과학, 예술- 그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


“근데 이젠 없잖습니까?”


“맞아. 그 최초의 종족을 무너트린 것도 마왕이었거든.”


그럼 마왕도 최소한 1억 살이라는 건가…….

 

100년만 살아도 지겨울 텐데, 참 대단한 놈이다.

 

“만약 이런 물건을 만들 기술을 가진 종족이라면, 그들이나 엘프일 거야.”


“음……그 정도로 번성했다면 마왕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우리야 모르지. 1억 년 전이니까.”


그나저나 슬슬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배고파?”


“네!”


“좋아, 밥 사줄게. 가자.”


“만세!”


나는 아가씨의 뒤를 따라갔다.

 

이 동네는 그 대게인지 왕게인지가 맛있다고 했으니, 사달라고 부탁해볼까.

 

“저기, 얀센.”


“네!”


“나……이번 일이 끝나면, 은퇴할 생각이야.”


너무 뜬금없는 말에, 내 발걸음이 멈췄다.

 

은퇴? 아가씨가? 왜?


“10년 넘게 꼭두각시처럼 일했으니까, 이젠 괜찮겠다 싶어서.”


“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가씨가 내 옆에 슬쩍 붙었다.

 

“너도……경비병, 은퇴하지 않을래?”


“저, 저도 말입니까?”


“응. 나랑 같이, 그래……여행을 하는 건 어때? 재미있을 텐데.”


아가씨랑 단 둘이서 여행인가…….

 

모든 게 끝나고, 아가씨랑 둘이서 다니는 여행은 분명 즐거울 것이다.

 

지금까지도 둘이서 이곳저곳을 다니긴 했지만, 매번 위험천만한 일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일 없이 함께 다니는 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내가 함께 떠날 수 있다면 말이다.

 

“넌 충분히 했어. 그러니, 쉬어도 된다고 생각해.”


“으음.”


“……싫어?”


“아뇨,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머지않아 죽는다는 사실을.

 

그걸 돌이킬 방법 따윈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나는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 살아있는 건, 순전히 페르 덕분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 끝난 뒤에- 함께 어디든지 가보죠!”


“후후, 기대되네.”


“저도 기대됩니다!”


거짓말을 해버렸다.

 

평생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나는 아가씨한테 거짓말을 해버렸다.

 

이 사람만큼은.

 

이 사람만큼은, 앞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식당 안.

 

우리는, 거기서 또 예기치 못한 만남을 가져야만 했다.

 

플로라 씨는- 

 

어째서인지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작 며칠 정도 공부한 것뿐인데 스스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확실히 경험치가 쌓이니까 공부할 때의 효율도 엄청 다르구나...

올해는 여러모로 많이 성장할 수 있을 거 같아서 행복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