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쌀쌀한 공기. 


걸을 때마다 새어 나와 저 멀리 뭉개지는 입김.


금세 얼어 버린 손을 비비며 하굣길을 재촉했다. 


그저 쭉 뻗어 있을 뿐인 아스팔트 길 위에 가벼운 후리스를 입은 그녀가 있었다. 


그녀, 히나는 학교에선 괴짜로 아무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고 


딱히 히나가 말을 거는 사람도 없는 학교의 유명인이었다. 


그런 히나가 카메라를 들고선 무언가를 열중히 찍고 있었다. 


무엇에 그리도 열중인지 궁금하여 나도 모르게 무심코 말을 걸었다. 


"히나..? 여기서 뭘 찍고 있..? 


으아악!" 


나는 전봇대 아래에 못 쓰는 수건으로 수습된 고양이 시체 한구를 찍고 있는 히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 말이야. 이 고양이 자는것 같지 않아?" 


"응..? 그게 무슨.." 


그러자 히나는 나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검지 손가락으로 고양이 시체를 가르키며 말했다. 


"나 말이지. 저 고양일 보고 무심코 잠들어 있다고 착각해 버렸어. 


그리고 알아챘을 땐 그냥 죽었다고 생각했어. 


딱히 슬프지 않았어. 


알고 있던 고양이도 아니고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히나는 아직도 내게 시선 한번을 주지 않고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찬 바람이 거세게 불어 히나의 단발머리를 헝클였고, 얼마나 이곳에 서 있었는지 히나는 양 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말이지. 


슬프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어." 


또 급작스레 말을 이어간 히나에게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 그럴 수 있겠네..?" 


히나는 찬 바람에도 무표정으로 일관된 얼굴로 알 수없는 말들했다. 


그런 히나의 이상한 생각과 말이 소름 돋고 무섭기도 했다. 


어째서 아무도 히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저번에 사촌오빠의 아이가 태어난 걸 봤거든. 


그때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어. 


왜 기쁘다거나 감동한다거나 하지 않은 걸까? 


예쁜 사진을 찍을 땐 기뻐. 


장엄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감동해. 


그리고 왜 고양이 시체를 보고 사촌오빠의 아기가 생각난 걸까." 


이해하기 힘든 질문을 해 오는 히나에게 대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 궁금한지도 이해가지 않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히나가 괴짜란 것만이 확실해질 뿐이었다. 


십 분이 넘도록 자리에 쭈구려앉아 사진을 찍던 히나를 두곤 대답을 들을리 없는 인사를 하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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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갈 준비하자니 히나가 조용히 고양이처럼 사뿐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 오늘같이 사진 찍으러 가지 않을래?" 


"어..? 어?! 


아니.. 나 선약이 있어서 그건 힘들 것 같은데..?" 


주변에서 날 기다리던 친구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아 목소리도 들어 본 적 없는 아이가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래..? 아쉽네. 


그래도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이야." 


뜻밖에 히나는 시원하다 못해 추울 정도로 쉽게 포기하곤 떠나갔다. 


그러나 그 뭔가 인위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일관된 무표정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게 했다. 


빨리 가방을 챙겨 친구들과 학교를 나서자 친구들은 합심하여 날 놀리는데 바빴다. 


그러고 나서 대부분 학생들이 그렇듯 학원을 가고 벌써 해가 넘어간 밤에 홀로 길을 걷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에 익숙한 교복을 입은 누군가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히나였다. 


이번엔 히나는 처참하게 뭉개진 사마귀을 찍고 있었다. 


"어때? 가장 순수하고 힘없는 아이들이 한 짓이야. 


성악설이라고 하던가? 이런 걸." 


갑작스레 말을 거는 히나의 스산한 목소리에 무심코 몸을 들썩였다. 


"아.. 아마 그럴껄..?" 


"그나저나 정말로 또 만났네. 


이름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평생 못 만날 줄 알았어." 


"아니, 그래도 우리 같은 반인데.." 


"그런가? 


학교는 사람이 많아서 정신 차리고 있기 힘들어." 


그렇게 대답하곤 히나는 계속해서 사마귀의 시체를 여러 각도로 찍었다. 


"그런데 히나.. 


왜 그렇게 시체만 골라서 찍는 거야?" 


몇 초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히나는 급작스레 나에게 고갤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살아 있는 생명은 죽는다는 걸 경험 할 수 없잖아. 


죽은 것들도 살아 있는걸 경험 할 수 없고. 


그래서야. 


익숙해져서 겁먹지 않으려고."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카메라를 잠시 바닥에 두곤 또 히나는 입을 열었다. 


"뭐, 그렇다고 꼭 시체만 찍는 건 아니야." 


시체만 찍는 듯한 이유를 대다가도 시체만 찍는 것이 아니라는 대답을 한 후 열중히 사마귀를 살피고 있는 히나였다. 


그런 히나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지자 다시 스산한 히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맞다. 종이 줄 테니까 전화번호랑 이름 알려 줘." 


그러고선 더플백에서 종이와 귀여운 판다 장식과 대나무가 그려진 펜을 건넸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용히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곤 집으로 떠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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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학교에 오자 말없이 히나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불편한 마음에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 버리자. 


내가 나올 때까지 화장실 입구에서 가만히 서서 날 기다렸다. 


결국 한숨을 푹 쉬며 화장실에서 나오자 히나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스이는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구나? 


화장실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저기.. 히나? 


궁금한 건데 오늘은 왜 날 따라다니는 거야?" 


"오늘 같이 사진을 찍으러 가자." 


날 올려다보는 히나의 눈빛에 난감하여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미안한데, 나 평일엔 항상 학원엘 가야 하거든?" 


"그럼 매일이 똑같은 거야?" 


이어지지 않는 대답과 질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눈을 꾹 감고 있던 나의 주변을 갑자기 빙빙 도는 히나였다. 


"그래서..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오늘이 어제와 내일과 이어지지 않을 때까지." 


그 뒤로 몇 분이나 내 곁을 빙빙 돌며 학교 사람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은 후 넘어지려던 히나를 부축하며 반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상태가 좋지 않은 히나를 자리에 앉혀두곤 떠나려는 찰나 히나가 다시 말을 걸었다. 


"학원이 끝난 뒤에도 좋아. 


난 오전보다 오후가 더 좋거든." 


"굳이 나랑 가려는 이유가 있는 거야?" 


"음, 이유를 찾으려고 같이 가보려는 거야. 


함께 찍는 사진은 뭔가 다를까? 


같이 보는 밤하늘, 밤공기 같은 것들도 말이야." 


"글쎄.. 적어도 내가 너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히나의 눈을 피해 다시 교실 밖으로 도망쳤다. 


오늘은 평범한 하루가 되길 바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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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수업을 마치고서 집으로 돌아가려 문을 나서니 학원 사람들이 웅성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 살펴보니, 히나가 카메라로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며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카메라는 하늘부터 건물, 정차 된 자동차를 차례대로 훑더니 어느 순간 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러곤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고 히나는 곧장 나에게 걸어 나왔다. 


"빨리 나가자.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피곤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내 손을 잡고서 히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공기에도 맞잡은 히나의 손은 따스했고 또 아담했다. 


마치 손안에 햄스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빠르게 걷는다고 걷는 히나의 발걸음은 총총거려 병아리를 보는것 같았다. 


그리고 히나가 지나간 자리에 고스란히 자신이 있었다는 걸 주장하려는 듯 강하게 기분 좋은 샴푸향이 남았다. 


찬 바람이 뺨을 붉혔을까, 아니면 히나 때문에 뺨을 붉혔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도 대답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손을 맞잡고 빠르게 걸은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사라지자 히나는 그제야 손을 놓고는 더플백을 양손에 꽉 쥐곤 숨을 돌렸다. 


그런 히나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지만 대답은 별 기대하지 않곤 질문을 던졌다. 


"히나, 아직도 교복을 입고 있는 이유가 뭐야?" 


"내일은 학생이 아닐 수도 있잖아." 


"아.." 


마치 올해에 대학에 들어간 사촌형이 학생 때가 그립다는 소릴 들은 것 같아 이해가 갔다. 


히나는 숨을 다 돌렸는지 옆에서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고 그저 걷는 것에 의문이 들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딜 가려는 거야? 


저번에 사진 찍는걸 보니까 딱히 정해 두는 것 같지는 않던데.. 


혹시 사진 찍을 거리가 나올 때까지 걷는 건 아니지..?" 


"맞췄어. 


정하는 걸 찍는 건 재미도 없고 사진이 잘 안 나오면 실망만하게 되거든.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사진감이 선물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그래도 사진 거리가 안 나오면 좀 우울하지만?" 


"감기는 안 걸리니..?" 


"다행히 건강해." 


그대회를 마지막으로 오늘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을 먹고 말없이 한참을 걸어 다녔다. 


어릴 적 놀던 시냇가, 이젠 갈 일 없는 초등학교로가는 다리, 목적이 없어 잘 가지 않았던 길. 


꽤 긴 시간이었음에도 히나는 한 번도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다 하늘을 보고 그러곤 나를 보았다. 


정말로 나와 함께하는 산책은 무엇이 다른지 찾아보려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사진도 찍지 못하고 집에 돌아간다면 더 이상 히나도 나를 찾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밀려오는 아쉬움과 섭섭함에 고개를 저으며 계속 걸었다. 


결국 히나가 꽂힌 듯이 멈춘곳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다니지 않은탓에 보도블록은 모두 엉망진창이었고 


마음대로 자라난 풀과 나무가지들이 무성한 곳이었다. 


히나는 무엇인가 기대된다는듯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여기, 괜찮을 것 같지?" 


"가로등도 잘 안 들어오고 위험하지 않을까?" 


히나는 대답 대신에 더플백에서 손전등을 켜고 건넸다. 


"정말 가려고..?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아직 안다쳤잖아. 


무서울 것 없어." 


먼저 어두운 길에 뛰어드려는 히나보다 먼저 앞서서 강제로 험한길을 가게 되었다. 


몇 번이고 발을 접지를뻔하고 나뭇가지에 긁히며 걸어나간 길 끝쯤에. 


얼마 안 되는 거리 언덕 위에 커다란 요양병원과 장례식장이 있었다. 


어떤 반응일지 궁금해 바라본 히나는 이미 카메라를 들고서 연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뭐가 마음에 든 거야?" 


히나는 역시나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대답했다. 


"잔인하지 않아? 


요양병원하고 장례식장이같이 있는 게. 


게다가 옆에는 교회도 있고.. 절도 있어." 


"잔인하긴 하네.. 사람이 그렇지 뭐. 


장례식장 옆에두고 겁주고선 달래려고 교회랑 절두고 말이야. 


길도.. 정리도 안 되고 풀만 무성한 거 보면 잘 오지도 않은 것 같고. 


다른 길이 있으려나?" 


히나는 말없이 사진을 찍다가 그제야 카메라를 내리곤 날 보며 말했다. 


"그래도 스이, 넌 잔인하진 않은 것 같아. 


그리고 손전등 잠시 꺼줄래?" 


히나의 말에 감동받을 시간도 없이 허겁지겁 손전등을 껐다.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저 멀리 빛나는 건물과 교회 십자가의 네온사인이 빛났다. 


점점 눈은 어둠에 익숙해지고 하늘을 보고 있는 히나를 볼 수 있었다. 


무심코 따라 치켜든 시선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수놓은 하늘의 별과 구름 뒤로 은은히 빛내는 달이 아름다웠다. 


쾌청한 하늘은 긴 산책의 보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멍하니 히나곁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샌가 히나가 날 부르고 있었다. 


"스이, 오늘은 사진 다 찍었으니까 돌아가자." 


"어, 응." 


다시 손전등을 키고서 앞서서 걸으려는 찰나 히나는 내 손을 잡아챘다. 


"엇..? 무슨 일이야.?" 


"손에 상처있어." 


그러곤 히나는 잽싸게 더플백에서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 


말없이 반창고와 히나의 더플백을 번갈아 보다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그 가방엔 뭐든 들어있는 거야?" 


"궁금해?" 


"궁금하지..?" 


"그럼 내일도 그다음날도 그 다다음도 이렇게 사진 찍으러 와." 


"아니.. 그렇게 은근슬쩍 또 만나자고 해도 말이야. 


우리 좀 있으면 시험이다?" 


"그래서 안나올 거야?"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겠지.. 


다음 주부턴 이 시간까지 보충수업이거든." 


히나는 그소릴 듣고선 처음 보는 뚱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급히 손전등의 불을 켜고서 히나를 따라갔다. 


조금 뒤에 히나의 발밑을 비추며 걷다 보니 그제야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이 느껴졌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림에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 보니 친구들과의 단톡방이 난리였다. 


언제 찍은지 모르겠는 학원 입구에서의 일과 사진들로 친구들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놀리고 있었다. 


"하..." 


혹시나 들어가 본 SNS도 전의 일로 친구들이 난리였다. 


오늘의 산책이 즐겁긴 했지만, 잃은 것이 더 많은 것 같은 느낌에 한숨이 나왔다. 


조금 뒤에는 친한 후배에게까지 연락이 와서 난리라는 소릴 들었다. 


히나의 남자 친구라느니 똑같이 괴짜라느니 소문이 퍼지고 있댔다. 


조금이나마 틔였던 숨통은 꽉 막힌 듯 조여 왔고 히나의 잘못이 아님에도 히나를 탓하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그길을 먼저 빠져나온 히나가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어때? 오늘과 어제 그리고 내일이 이어지지 않겠지?" 


"뭐, 그렇다면 그렇겠는데.." 


머쩍게 머리를 긁으며 작은 돌멩이 하나를 차버리며 대답했다. 


"진짜 미안한데.. 나 시험 끝나고도 더 이상 같이는 못.. 다닐 것 같아.. 


여기저기 다른 애들 이야기도 그렇고.. 벌써 피곤해져서.." 


역시나 히나의 얼굴을 보며 말하는 것이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아파 왔다. 


히나를 탓했지만, 그게 히나의 탓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탓해 버린 내가 한심했고 또 바보 같았다. 


보도블록을 보다 바라본 히나의 얼굴엔 가로등 빛이 내리쬐어 무표정임에도 따스한 온기가 돌았다. 


날 올려다보는 히나와 눈이 맞고 또 잠시. 


지나가는 차들의 소리가 들리고 바람의 소리가 들려온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초록 불로 바뀔쯤 히나는 분명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볼 땐 더 추워질 테니까 조심해." 


그렇게 말하곤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사라졌다. 


신호등의 초록 불은 그새 빨간불이 되어 빛났다. 


그리고 아직도 죽지 않은 이름 모를 풀이 살랑일 때 나지막이 홀로 토해낸다. 


"다음에 또 본다곤 안 했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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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그리고 시험이 끝나서도 학교에선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좀 논다는 것 같은 녀석들은 하나 같이 날 건드려보고 지나갔고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마저 날 보면 수군대며 지나갔다. 


친구 녀석들은 이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기만했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쉬곤 학교 매점에서 산 음료를 들곤 벤치에 앉았다. 


"이 새낀 요즘 맨날 한숨만 쉬냐." 


"그러게 예쁜 여자 친구도 생겨 놓고는. 


좀 괴짜긴 해도." 


함께 음료수를 산 친구들은 지치지도 않고서 농담을 뱉었다. 


"진짜 하지 마." 


"아니, 뭘 또 정색을 하고 그러냐.." 


다시 한숨을 깊게 내쉬곤 음료수를 목구멍 가득 들이켰다. 


파란 하늘에 뜨문뜨문 구름은 흐르고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맞은편 벤치엔 히나가 카메라를 들곤 이곳저곳을 보고 있었다. 


멀찍이 서 있는 학생들은 나와 히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웅성대는 소리에 머리가 다 아파 왔다.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니 맞은편에 앉은 히나는 카메라를 곁에 두곤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밀려오는 피곤함과 짜증에 그 인사를 무시하곤 혼자 일어나 군중을 헤치며 자리를 피했다. 


히나의 표정도 감정도 무엇도 배려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학교는 끝나고 하교 시간의 인파와 겹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교실에 남아 있었다. 


뉘엿늬엿 져가는 노을이 평소엔 활기찼던, 이젠 죽어 있는 듯한 교실을 아련히 빛냈다. 


무엇인가 일어날것만 같은 불안 함.


따스함이 만들어 내는 신경질에 한숨을 내쉬곤 가방을 들고서 교실을 나섰다. 


방금위 교실과는 정반대인 온기조차 없는 복도에 나오자 창문밖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 히나가 보였다. 


인사하기에도 아는 척 말을 걸기에도 뻘쭘하고 껄끄러운 마음에 다시 교실로 들어가 문에 기대어 히나를 보았다. 


언제나 들고 다니던 카메라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손에는 밧줄을 들고 있었다. 


점점 더 붉게 물들어 열을 내는 교실은 계속해서 날 불안 하고 안달 나게 만들었다. 


마치 히나가 폭죽처럼 무슨 일이라도 만들어 낼것만 같았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히나는 천천히 창문에서 멀어져 복도 끝의 여자 화장실로 향했다. 


손에는 물기가 가득했고 입안은 메말라갔다. 


한시라도 그 교실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던 걸까 히나가 걱정되었던 걸까. 


급히 교실에서 나와 천천히 여자 화장실 앞에 섰다. 


너무나도 고요했다. 


언제나 북적였던 일상이 거짓이라도 되는마냥 토할듯 정적이 이어졌다. 


1년 같았던 1분이 지나고 조금은 안심하기 시작했다. 


'그래, 화장실에 들르려는것뿐이었겠지. 


밧줄은 촬영 소품이었을 뿐이고.' 


그렇게 일부러 자신을 안심시키려 웃어 보곤 뒤돌아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이었다. 


쿠당탕거리는 소음과 목이 졸리는 누군가의 컥컥대는 소리. 


머리가 멍해지고 소리는 아득해진다. 


히나가? 


어째서? 


왜? 


나 때문인 거야? 


1초도 되지 않아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을 억지로 무시하곤 여자 화장실로 달려가 잠겨 있는 좌변기의 문을 두들긴다. 


"히나?! 


히나 거기 있어?!" 


컥컥대는 소리는 점점 희미해져가고 발버둥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미친 듯이 몸으로 좌변기의 문을 쳐 내고 결국 문은 부서졌다. 


"히나?!" 


히나는 좌변기의 커버를 올라타 앉아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 


문과함께 널브러진 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너.. 너.. 뭘 하는거야..?" 


"협상." 


히나는 의미 모를 말을 하고서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밧줄을 내 목에 걸었다. 


"일단 나갈까? 누구라도 오면 내 자료가 쓸모없어 질지도 모르잖아." 


"아니, 자료라니 무슨 소릴하는 거야? 


협상은 또 뭔데?" 


히나는 대답은커녕 막무가내로 내목에 건 밧줄을 개 목걸이처럼 사용해 화장실을 나왔다. 


그러곤 다시 그 불길하고 불안했던 교실로 돌아갔다. 


히나는 나를 자기 자리에 앉혀두곤 다시 복도로 나가 잠시 뒤 자기 카메라와 함께 돌아왔다. 


나에기 다가오며 히나는 살짝 볼을 붉힌 채 의기양앙해 입을 열었다. 


"사람은 잘 안찍는 편인데, 네 덕에 사람도 찍어 보고 괜찮은 느낌이야. 


잘 나온 것 같기도 해서 기쁘고. 


사진 속에 사람을 가두는 느낌이라 싫었거든." 


"아니, 아까부터 말하잖아! 


이게 다 뭐 하는 짓거리냐고!" 


"다 말해줬는걸? 


협상이라니까?" 


화를 내봐도 표정에 한 치의 변화가 없는걸 보니 힘이 쭉 빠졌다. 


히나는 핸드폰을 잠시만지작대더니 내 핸드폰의 알림이 울렸다. 


메신저에는 여러 동영상과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이게 무슨.." 


영상은 히나가 화장실에 들어간 뒤 내가 급히 히나를 따라들어가는듯해 보였다. 


그리고 무서운 표정으로 여자 화장실에 서 있는 내 사진과 히나의 시점에서 찍힌 동영상이 있었다. 


그영상은 내가 히나의 이름을 부르머 무섭도록 문을 쳐 대고 있었다. 


마치 내가 히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처럼. 


"사람은 거의 처음 찍어봐서 잘 나왔는진 모르겠는데 난 마음에 들게 나온 것 같아." 


히나는 자랑스런 얼굴을 하고선 내 옆에 앉아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하나하나 골라보았다. 


"그래서..? 협박이라도 하려는 거야? 


난.. 난! 정말 네가 잘못된 일이라도 하려는 것 같아서 무서워서..! 


걱정돼서..!" 


눈물은 눈을 가려 세상을 흐리게 만들고 또 히나를 흐리게 만들었다. 


한 방울 떨어진 눈물은 곧 줄기를 이루고 얼굴을 뒤덮을 만큼이나 쏟아졌다. 


고갤 숙이고서 끅끅대는 나를 보고선 히나는 내 머리를 자기 품속 깊이 안았다. 


그러곤 머리를 쓰다듬다가 등을 톡톡 쳐주었다. 


"음, 사람들이 우는 사람을 달랠때 이렇게들 하던데.. 


이게 효과가 있는 거야?" 


그렇게 말했지만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는 도중에도 히나의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밤 희미하게 느꼈던 히나의 향기와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이상해, 그만둘래, 재미없어." 


히나는 그렇기 말하곤 내 옆자리에 앉아 내가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조금 진정이 된 후에 매서운 눈으로 히나를 보았다. 


히나의 변화라곤 옷 가슴팍에 묻은 물기,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그 영상은 뭘 원해서 찍은 거야?" 


"같이 사진찍으러 가자." 


"진짜 고작 그 이유야?" 


"응." 


"싫다면?" 


"네가 상상하는 짓거리들 있잖아. 


실행하는 거지." 


"그래도 싫다면?" 


"뭐 그때가선 그때의 방법을 찾겠지." 


순간, 불안 하게 교실을 빛냈던 노을은 점차 빛을 잃고선  어둡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교실의 빛은 히나의 눈동자에 갇힌 듯 어둠 속에서 은은히 히나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서로 아무 말도 더 하지 않고서 저 멀리 시곗바늘의 소리가 들려올 무렵 나는 입을 열었다.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협상이랬잖아." 


"좋아." 


"학교에서 아는척하지마. 


그리고 사진 찍으러 가도 너랑 대화는 안할 거야." 


"좋아." 


의미심장하게 말한 조건이 무색하게 히나는 별말 없이 조건을 받아드렸다. 


"그럼 됐지? 


내일부터 그렇게 할 거니까 알아 둬." 


그렇게 말하곤 급히 가방을 챙겨 나가는 나에게 히나는 나풀거리는 손짓으로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