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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6812016


형단영척 形單影隻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몹시 외로움을 이르는 말.





기세로 밀어붙이고 말았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조건반사처럼 서류를 훑어보고 처리를 마치고 다음으로.


다음.

다음.

다음.


서류 일 자체는 그렇게 힘들지 않다.

나까지 결재가 돌아오는 서류는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고, 대개는 부회장으로서 놀라운 솜씨를 보이는 에어 그루브가 미리 확인해 주고 있다.

나는 마지막 판단만 할 뿐. 어느 정도 걸러내긴 했지만 버릇일까. 그만 제대로 전부 훑어보고 만다.

마음이 편치 않을 때일수록 서류 작업이 현저하게 진행된다.


일을 할 때 침착해지는 건 약간 워커홀릭의 기질이 있는 게 아닐까, 하며 낡은 진자시계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쉰다.

시각은 딱 15시. 체내 시계는 정확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인기척 없는 학생회실.

소리를 내는 것은 고작 시계와 서류를 넘기는 소리뿐.

이따금 연습에 힘쓰는 학생들의 구호가 들리지만, 방음이 제대로 된 학생회실에 닿는 목소리는 아득히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지금쯤 테이오는 트레이너 군과 쇼핑을 즐기고 있겠지.


시간상으로는 슬슬 어디선가 차라도 마실 때가 되었을까.

몹시 화가 나지만 한숨 돌리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다.

비수기에 일에 매진하는 것도 싫지 않다. 내 꿈을 위해서는,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휴일인 날은 쭉 트레이너 군과 보내고 있던 탓일까.

나는 도저히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미결재 서류를 일단 마무리하고 집무 책상을 뒤로한다.


전기포트의 뚜껑을 열고 물의 양이 충분히 들어가 있는지 확인한다.

미터기를 들여다보면 될 뿐인데 이러한 습관이라고 할까, 버릇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오늘 아침 트레이너 군과 약속하고 이곳에 왔을 때 물을 채운 뒤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전자에 가득 찬 물이 채워져 있을 텐데도.


평소 같으면 제대로 물을 끓여 차를 끓이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지금은 다소 대충해도 괜찮을 것이다.


찻주전자에 마음에 드는 찻잎을 한 숟가락 집어넣고 나서 툭, 손을 멈춘다.

이런 트레이너 군은 지금 없었지.


......

이건 이른바 「*포트를 위한 한 잔 더」라는 전통이라는 걸로 하기로 하고, 전기포트에서 물을 붓는다.

정말. 연수에 한 숟가락 더 넣으면 진해져 버릴 텐데.


어느 정도 붓고 포트와 함께 돌아가기 시작하는 사고를 가라앉힌다.

가까이 놓여 있던 모래시계를 뒤집고 의자에 걸터앉는다.


무심코 책상에 팔꿈치를 짚고 창밖을 내다본다.

......트레이너 군이 항상 곁에 있던 탓인지 최근에는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않다.

레이스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의 분별은 있지만, 생활면에서 얼마나 늘 곁에 있었던 걸까.


유리 속에서 사르르 모래가 떨어져 간다.


학생회실에 있는 동안은 별로 의식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휴일에 일을 하다 보면 대부분 트레이너 군이 느닷없이 간식 같은 걸 들고 얼굴을 내밀어 왔던 것을 떠올리니 괜히 외로움이 치밀어 오른다.


마지막 한 조각이, 떨어졌다.


무거운 허리를 들어 따뜻하게 데운 찻잔에 홍차를 따른다.

톡톡 소리를 내며 호박색이 백자를 채워간다.


컵을 들고 집무 책상으로 돌아간다.

거의 없는 이성으로도 간신히 컵 받침만은 가져왔지만, 도무지 괜찮아지지 않는다.

집무 책상 맞은편, 응대를 위해 놓인 소파


쉬는 날. 수업도 없고 트레이닝도 없고.

이른바 보통의 휴일.


날씨는 오늘도 온화하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빛은 매우 따뜻하다.


호박색이 채워진 컵을 들여다본다.

흔들리는 호박색 수면을 들여다보니 약간 향과 색깔이 진한 것 같다.


「......떫어 보이는군」


내뱉은 한숨이 피어오르는 김과 수면을 흔든다.

비친 내가 미덥지 않게 흔들린다.


옆에 트레이너 군이 없다. 단지 그것만으로 나는 이렇게 약해져 버리는 것인가.


그냥 옆에 네가 없고.

내가 아닌 누군가와 외출하고 있다.


그것뿐이다.

말하자면 그저 그뿐이다.


미덥지 않게 흔들리는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서.

컵에 입을 댄다.


......떫다. 이건 실패겠지.


......실패라고 하니.

오늘 아침에 부숴버린 방 열쇠에 대해선 다시 한번 사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필이면 하야카와 씨의 방 열쇠다.

솔직히 뭔가를 부숴버렸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문고리를 돌렸더니 열렸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문 열쇠가 부서질 정도로 힘을 주지는 않는다.

본래 품어야 할 위화감도, 그러한 배려도, 어딘가에 내팽개쳐 버리고 있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유치한 질투심과 독점욕이 나에게서 냉정함을 빼앗고 있었다.


반성해야 할 점이다. 반성한 후에도 분명 또 반복해 버릴 거라 생각하지만.

평소 사용하지 않는 방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트레이너에게 방을 빌려주고 있는 그녀의 방 열쇠를 부숴버린 건 좋지 않았다.

트레이너 군이 이미 연락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을 정도로 내 낯가죽은 두껍지 않다.


단말기를 꺼내서 하야카와 씨에게 사과의 연락을 넣으려다 대기화면으로 설정하고 있던 사진을 보고 손이 멈춘다.


트레이너 군과 둘이 나온 사진.

3관왕을 차지한 그날 둘이 찍은 사진.


......아아

내일의 「데이트」. 기세로 밀어붙여 버린 걸로 트레이너 군의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닐까.

요즘 부담을 주고 있지만, 테이오와의 외출과 아침 메시지가 내게 실수로 도착한 시점에서 나의 자제심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바로 얼마 전, 자신이 먼저 약속을 받아냈었고 테이오도 제대로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내일은 데이트라고 우기며 본래 중요시해야 할 순회도, 팬서비스도 「하는 김에」라고 단언에 버렸다.


......나도 상당히 도량이 작아졌다.

고작 하루도 트레이너 군이 옆에 없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지금도 이렇게 반성이다 뭐다 하면서도 그 실제로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른 것뿐.

내일 데이트라던가, 어떻게든 테이오와의 데이트에 참견할 수 없을까라던가, 아니면 돌아온 트레이너 군에게 꼬치꼬치 캐물을까, 하고.

질투심에 미친 것 같은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다.


쏟아져 나온 한숨이 다시 홍차와, 비친 나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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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를 위한 한 잔 더 : 영국에서 홍차를 끓일 때 전통적으로 티스푼 1잔 분량의 여분의 찻잎을 넣는 경우가 있음.


이유로는


1. 찻잎이 커서 추출에 시간이 걸리니까 사람 수보다 많은 양의 찻잎을 넣는다.

2. 영국의 수질이 좋지 않아 색을 진하게 하기 위해 넣는다.

3. 옅게 추출하면 맛이 없으니까 진하게 추출하고 뜨거운 물로 희석한다.


같은 이유가 있다고 함.

3번의 이유 같은 경우, 이를 위해 뜨거운 물을 넣는 핫 워터 저그라는 전용 용기도 있었다고 함.


다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수질도 나쁘지 않고 찻잎의 질도 좋아져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고, 이렇게 영국 전통의 방법을 재현하려면 너무 진해져 떫은맛이 강해지기에 핫 워터 저그가 필수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