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배고프다"


"얀붕아 가서 빵이나 좀 사다줄래?"


지긋지긋하다. 이런 한 물 간 빵셔틀을 아직도 시키다니, 좀 발전이란 게 없는 걸까?

하지만 내 몸은 정직하게, 그들을 거스르지 않고 재깍 자리에서 일어나 매점으로 향한다.


"잠깐"


나를 부르는 애들의 목소리.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이다.


일진, 그 얼마나 이중적인 이름인가. 그 기원은 일제시대 때부터 한 세기가 흐른 지금까지도 아직 잔존해 있다.


그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이중적이다.

또래를 괴롭히는 순수악의 집단에서 은밀한 숭배의 대상까지.

저마다 다르게 그려지는 그들의 모습들.

웹툰에 그려지는 그들의 모습은 불량하지만 쿨한 모습이다. 


그리고 찐따는 그저 찐따다.


사람들은 찐따를 동정하지 않는다. 경원시한다.

불쌍하긴 하지만 굳이 도와주고 싶지 않은 존재...결국 그들이 처한 상황은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돈 가져 가야지"


"왜 그렇게 급하게 가는거야 얀붕아?"


그들이 거짓 선의를 건넨다.

내 손위에 올려진 것 천원 한 장이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진일보 한 셈일까?

과거 500원을 주고 빵 두개에 천원을 남겨오라는 레파토리 보다는 나았다.


나는 말 없이 돈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바닥에 난 땀으로 벌써부터 눅눅해진 지폐의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나는 항상 그들 앞에서면 긴장하니까.


심장이 두근거리고 제대로 올려다 보지 못한다.

승냥이 같은 아이들 앞에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연약한 피식자는 재미난 먹잇감이다.


강압과 신체적 폭력은 없었다.

요즘 애들은 옛날같지 않다고들 한다.

그들은 은근히 반 아이들을 선동해 나를 물먹였다.

조금씩 조금씩 가스라이팅 당한 아이들은 일진애들이 나를 괴롭히는 것에 암묵적인 동조를 하게 되었다.


"쉬는 시간 얼마 안남았다. 좀 빨리 갔다와야 겠는데?"


"얀붕아 좀 부탁해"


"으, 응"


사육당한 가축처럼 나는 저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가련한 짐승의 비애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2분. 남은 쉬는 시간이다. 

매점까지 가는 데만도 2분이 걸릴 것이다.

가서 빵을 사오더라도 다음 수업에 늦을 것이다.


조용한 복도를 걸어, 반 뒷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면 모두가 나를 바라보겠지.

선생님은 나를 보고 뭐라고 할 거고 반 아이들은 비웃을 것이다.

체벌은 없다지만 가벼운 벌을 받을 수도 있겠지.

일진 애들은 겉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할테나 얼굴은 비웃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빵...시발 요새 빵 하나가 천원이다.

옛날보다 낫다고? 천원주고 빵 다섯개 사오라는 게 말이냐?

자기꺼 하나만 사오라는 말은 절대 아니니, 나머지 애들건 알아서 사오라는 말이지.


엿 같다.


드르륵


뒷 문을 열자 나는 멈칫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우리 학년 유명한 일진인 얀순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깔끔한 단발에 가느다란 흰 목이 유독 도드라지는 그녀.

타이트하게 맞춘 교복이 너무나 성숙한 그녀의 몸매를 강조한다.

치마는 어떤가. 취향답게 확 줄인 그건 행여라도 안에 속옷이 보이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물론 팬티스타킹을 입긴 했지만.


"..."


나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꿀꺽 침을 삼켰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

고양이 상의 도도한 얼굴, 약간의 도톰한 눈밑 애교살, 그 아래 점.

틴트를 바른 그 달콤해 보이는 입술에 잠깐 정신을 팔리고 만다.


나는 그녀를 알고있다.


"얀순아..."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나온 이름, 그녀의 목소리였다.

작디 작은 목소리였지만 얀순이는 그것을 들었다.

꿈틀 거리는 미간, 기분이 나빴을까?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추리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저 뒤에서 내게 빵셔틀을 시킨 일진애들보다, 눈 앞의 얀순이가 더욱 두려웠다.


우린 과거 소꿉친구였다.

어릴 적 부터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자라온 우리.

한 시도 떨어져 있지 않고 같이 놀았던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 그녀는 나를 정말 잘 따랐었다.

잔병치레를 많이 했던 몸이 약한 그녀.

나는 그런 그녀를 위해 소꿉놀이 같은, 내 나잇대 남자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그런 놀이들로 같이 어울려 주었다.


감기가 걸리면, 감기가 옮든 말든 집에 놀러가 심심치 않게 이야기해주고,

열이 나면 그녀의 엄마가 집안 일을 할 수 있도록 잠깐씩 돌봐주기도 했었다.

침대 맡에 앉아 열이 올라 벌건 얼굴로 아픈 숨을 내쉬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어린마음에 얼마나 기도를 했던가?

얀순이를 살려달라고.


그랬던 우리 사이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생이 되어 자연스레 멀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릴 때 우리는 서로 헤어진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항상 이대로 같이 커갈 줄 알았다. 서로를 보듬으며.


그렇게 고등학생이 된 나는 같은 학년 일진애들의 빵셔틀이 되고, 그녀는 일진이 되었다.


왜 이런 결말인지는 모르겠다.


"미안해...잠깐 지나갈게"


나는 어수룩한 진따처럼 그녀의 눈을 못마주쳤다.

그렇게 몸을 비켜 그녀를 지나쳐 가려는 찰나.



그녀의 가느다란 팔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마치 그녀의 팔이 쇠사슬이라도 된 듯 봉쇄당한 함선처럼 제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김얀붕"


그녀의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

약간 허스키함이 가미된 그 목소리는 어릴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때는 잘 웃기도 했었고 내 이름도 잘 불러주었는데...

지금 그녀에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 정말 오래간만 이었다.


반이 다른 그녀가 꾸준하게 계속해서 우리반을 찾아오는 이유.

그녀또한 내게 빵셔틀을 시킨 무리들과 같은 일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슴이 아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도 나를 괴롭히는 무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김얀붕"


스윽


그녀의 상체가 내게 다가왔다. 훅하고 풍기는 달콤한 과일향. 아찔할 정도다.

그녀의 체향과 섞인 그것은 남자를 홀리는 향을 풍겼다.


"어, 어"


꼴사납게 말을 얼버무리는 나. 그녀의 예쁜얼굴이 내 얼굴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어디가?"


"빵...사러"


그 자신없는 말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도 여전히 예뻐보여 나는 슬며시 고개를 피했다.


"얀붕아 늦겠다!"


"얀순이네? 거기서 뭐해?"


그녀를 반기는 일진 무리들. 그 중에 몇은 이전부터 그녀에게 진한 관심을 품고 있었다.

같은 학년 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내에서도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예쁜 그녀.

아이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어릴적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그저 꿈만 같았다.


"나, 나 빨리 가볼게"


"어딜?"


"빠, 빵 사러"


"네가 왜?"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당황했다. 왜라니...그걸 몰라서 물어? 

오늘 따라 그녀가 왜이러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큰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그녀. 오늘 같은 대화도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는 척도 잘 하지 않고, 그저 무심한 눈길로 나를 지나가기만 했던 그녀.

내가 무슨 일을 당하든, 오늘 같은 일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어도 그녀는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너 나한테 관심없는 거 아니었어? 내가 찐따라고, 병신이라고 그저 반항도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놈이라서...

그래서 무시 했던거잖아? 그런데 왜 그래? 


아......알겠다. 너도 나를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구나?


"왜...?"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었다.

나는 멋대로 그녀를 판단하고 나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판단했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속에서 차오르는 울분을 전부 막을 순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문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앞길을 막고 있는 그녀의 팔을 거칠게 치워냈다.


"비켜"


"읏!"


"야! 김얀붕!"


그녀의 모습에 화를 내는 일진녀석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녀석들이 그러든 말든 나는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나중일이야 어찌되든 시발 내 알바가 아니었다.


지금 흐르는 눈물. 억울함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는 그녀에게서 부터 등을 돌리고 달아나야만 했다.


그래서 내 뒤에서 나를 향해 손을 뻗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은 이제껏 그 누구에도 보여준 적 없는 슬프고 애처로운 표정이었다.


///



"얀순아 괜찮아?"


"김얀붕 이 시발새끼, 오냐오냐 해주니까...원래는 생각 없었는데 손 좀 봐야겠다"


"씨발 진짜...나 얀순이 한테 손대는 것 보고 존나 어이털렸다니까?"


"병신새끼, 우리한텐 뭐라 못하면서 얀순이 한테는 여포질이네...괜찮아 얀순아?"


쓰레기들.


김얀순은 눈 앞의 무리들을 보고 생각했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들.


그래도 그녀는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녀의 말에 반색하는 남자들.

마치 관심을 받길 바라는 강아지들 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귀여운 생명체에 빗댄다는 것은 실례.

은근한 열망과 추접한 욕망을 감추려 하지 않는 그들의 눈빛을 보면, 그런 순수한 동물들에 비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실수 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녀의 몸을 훑어보는 그들.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다리를 스쳐지나듯 바라보는 녀석들의 시선은 역겹기 그지없었다.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제껏 받은, 그리고 이제껏 구축해 온 도덕율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부모나 선생님보다 다른 존재에게 먼저 배웠었다.


바로 그녀의 소꿉친구, 얀붕이를 통해.


"얘들아 나 잠시"


"어, 얀순아 어디가?"


"야야, 곧 종치겠다. 일단 나중에 보자"


"그래 씨발 꼰대새끼 화낼라"


얀순이는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는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인데도 자신을 반으로 가지않고 매점으로 향했다.


///



"응? 남학생? 이름이 얀붕이라고? 흠...못 본 것 같은데 그런 애 못봤어"


매점아저씨는 얀순이에게 그런 학생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김얀붕 어디있는거야.


그녀답지 않게 살짝 초조해진 기분.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지막, 그녀의 팔을 밀치고 달려갈 때, 잘 못 본게 아니라면 얀붕이는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눈물을 보니 그녀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녀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이미 수업이 시작한터라 복도는 조용했다.

행여라도 복도에서 선생들을 마주칠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그녀도 얀붕이의 모습을 찾지 못하자 조바심에 바빠지기 시작했다.


"얀붕아"


창 밖을 보니 바깥에도 없었다. 운동장은 체육 수업이 없는지 아무도 조용했다.

그녀는 같은 층 화장실도 확인하고 아랫층 화장실도 확인했다.


"얀붕아!"


"헉! 자 잠깐만"


닫혀있는 변기칸의 문을 보자 조급한 마음에 옆 칸 변기 위에 올라가 너머를 확인하는 그녀.

하지만 얀붕이가 아니라 처음 보는 학생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아..."


"뭐, 뭐에요"


실망한 마음도 잠시, 그러면 도대체 얀붕이는 어디에 있다는 말일까?


다시금 뛰어서 그를 찾는 그녀, 학교건물 뒤편과 다목적실 등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곳을 확인해 보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다시 교실로 돌아 갔을까? 하지만 그녀의 감은 그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를 찾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기분. 분명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거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아!"


그때 떠오른 장소, 바로 옥상이었다.

일진 같은 애들의 출입을 막기위해 자물쇠를 채워놓았지만 그녀는 그게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아, 하아"


곧 바로 계단을 오르는 그녀. 이미 여러군데를 뛰어다녔던 터라 조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옥상입구에 도착하고 보니 역시나 입구가 열려있었다.

항상 이곳을 감시하는 게 아니라 선생들도 문이 열려있는지 확인을 하지 못한 듯 싶었다.


끼이익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문을 열었다.


"아..."


그러자 그 너머에는 얀붕이가 있었다.

난간을 내려다 보는 그의 쓸쓸한 뒷 모습.

어쩌면, 어쩌면 그는......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얀순이는 그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


씨발......


개창피하다. 병신새끼, 여자 앞에서 질질짜기나 하고...

그것도 어릴적 소꿉친구 앞에서 말이다.


현타가 씨게 온 나는 도저히 매점으로 간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봐야 뭐하나...억지요구에 돈만 낭비하고 교실로 가면 욕이나 들어먹겠지.


그보다 아까 그녀의 팔을 밀치고 나왔을 때 뒤에 있던 일진새끼들 목소리.

돌아가면 좆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씨발, 함 좆되보자.

내가 죽더라도 개좆 같아서 네들 중 한 새끼는 꼭 데려간다.

...그렇게 속으로 맘껏 화를 내고 나니 마음이 허해졌다.

그래서 옥상에 올라와 밑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높네......많이 아플까?


당장 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다.


죽음을 마주한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싶어 난간 위에 올라가도 보았다.


시벌...존나 무섭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당장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십 몇년의 삶 동안 깨닫지 못했던 고소공포증을 오늘에서야 깨달으며 그저 멍하니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얀붕아?"


"얀순이?"


조심스럽게 들려 온 그녀의 목소리. 얀순이였다.

그녀가 왜? 그런 의문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난간 근처에 있는 나보다 위태해 보이는 그녀.

교복은 흐트러져 있고, 안 그래도 짧은 치마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속옷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실수라도 한 듯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얀붕아...뭐하는 거야? 설마 그런 건 아니지?"


"뭐?"


한 발자국씩 다가 오는 그녀.

급하게 뛰어 왔던가 그녀의 숨이 제법 거칠었다.

하아, 하아. 달콤한 향내가 날 것 같은 숨소리는 그마저도 예쁘게 들렸다.


"왜, 왜 그래?"


하지만 그녀의 눈, 그것만큼은 평소와 달라 보였다.

평소의 무심한 듯한 차가운 눈길이 아닌, 어찌보면 죽은 듯한 눈빛.

차갑게 굳은 그것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얀붕아, 그러지마...응?"


"무슨 소릴...아...아냐! 그런 생각 안했어!"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 다급하게 고개를 흔든다.

그녀는 내가 자살이라도 하리라 생각하는 걸까?

전혀.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겁쟁이라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저벅저벅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녀, 바로 내 앞에.


꿀꺽 


긴장감에 침이 넘어갔다.


스윽


손을 뻗어 내 얼굴을 감싸는 얀순이.

그 부드러운 손길과 느껴지는 따스함에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야, 얀순아..."


"죽지마"


그녀가 뒷꿈치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다.

내 바로 눈 앞에 위치한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어떤 아이돌이나 인스타 유명인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절대"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기억나? 네가 어릴 때 해준 거. 내가 아플때마다 넌 우리집에 찾아와 누워있는 내 침대맡에 앉아있었지"


"그리고 항상 내 손을 잡고 기도 해줬잖아? 제발 나으라고, 얀순이를 살려달라고...그랬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젠 내가 그렇게 해 줄께, 응? 네 옆에서 항상 지켜줄게. 다치면 나으라고 기도도 해주고 그럴께. 그러니까,"


"...무슨 소릴 하는거야?"


나는 그녀의 팔을 가볍게 뿌리치고 물러났다.


듣다보니 어이가 없었다.

나를 지켜주고 보살펴 준다고? 갑자기? 그러면 이때까지는?

도대체 갑자기 무슨 마음이 들어서 이런 얘기를 한다는 말인가?

내가 죽을 거 같아서? 자살할까봐? 


"너, 장난치는 거야? 갑자기 왜 이래? 우리 서로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었어? 얀순이 너, 솔직히 말해 봐. 내가 창피한 거잖아. 창피하니까 계속해서 무시하고 외면한거 아니야? 쟤가 내 친구였다고 말하기 싫으니까, 어릴적 제일 친한 소꿉친구였다는 게 짜증나니까!"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야, 얀붕아..."


"닥쳐! 너도 똑같아, 알어? 너도 똑같다고! 나를 괴롭히던 녀석들이랑 똑같다고...내가 항상 괴롭힘받고 무시당할 때 너도 같이 있었잖아? 왜 그땐 아무 말도, 행동도 안 한거야? 응? 그런데 지금 내가 죽을거 같아 보이니까, 그러니까 이제서야 그런다고? 장난해?"


"..."


"아니 그럴 수 있지, 맞아. 병신새끼 그냥 죽게 냅두는 것보다 차라리 위안되는 말 좀 던져주고 살려놓는 게 낫지. 죽어봐야 일만 더 커지고 분위기만 더 안 좋아지고...혹시라도 알아 꿈에서라도 복수한다고 나와 설칠지?"


"김얀붕..."


"아니다! 아니야, 이제 알겠다! 너 이거 나 놀리는 거지? 너도 한 패 잖아? 걔들이랑 똑같잖아? 처음에 이렇게 희망을 주는 척 하면서 다가왔다가 나중에 가차없이 버리는 거야...질질 짜는 내 모습을 보면서 비웃으려구? 재밌긴 하겠다, 그치?"


나는 혼자 신이 난듯 떠들었다.

내 말에 담긴 조소, 경멸 그리고 혐오를 면전에서 받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이 없었다.

하하...! 나는 승리의 쾌감을 맞보았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는 상대에게서 얻어낸 찌질하고 비열한 승리였다.


"야, 김얀붕"



"윽!"


그 때 그녀의 손이 날아들었다.

그녀의 왼 손이 내 목을 단단히 틀어잡고 밀어붙였다.

도저히 그녀의 가녀린 체구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힘

머리로 올라가야 할 피가 막혀 정신이 혼미해지려고 했다.


"거기까지 해, 얀붕아"


"컥, 커헉"


그녀의 눈은 이미 차갑게 굳어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도 못하고 쉬어지지 않는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손은 마치 바이스라도 된 듯 떨쳐낼 수 없었다.



"허어억! 헉, 허억"


손을 놓으면서 뒤로 살짝 밀치는 그녀.

덕분에 나는 뒤의 난간에 주저앉듯이 기대고 말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을 매만지는 나, 그런 나를 그녀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얀붕아...괴롭혀지는게 그렇게 좋아?"


그런 나에게 몸을 싣는 그녀. 무게감이 느껴지면서 부드러운 그녀의 신체가 옷 너머로 전해졌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하웁


다짜고짜 입을 맞춰오는 얀순이. 벌려진 입으로 그녀의 미끈한 혀가 침투해 들어온다.

츗츗거리며 입안을 휘젓는 혀, 나는 멍하니 그녀의 혀를 받아들였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서로의 호흡이 야릇하게 느껴졌다.

사지의 힘이 주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츄웃


늘어지는 긴 은빛 실. 중간에 투욱 끊어진다.


"하아아...으으음...레몬 맛?"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얀순아..."


"닥쳐"


웃으면서 가볍게 말하는 그녀.

나는 그녀의 웃음을 어릴 때 이후로 오늘 처음 보았다.

그 웃음은 맑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왜 이리 진득하게 느껴질까?


"얀붕아"


벌겋게 홍조가 피어오른 그녀의 얼굴, 그녀의 눈은 이미 정상적이지 않아 보였다.


투욱 툭


셔츠의 단추를 푸는 그녀의 손가락.


"흐으읍"


목덜미에 고개를 박고 숨을 들이킨다.

그녀의 숨결에 약한 간지러움과 창피함을 느낀다.


"얀붕아, 네가 그렇게 괴롭힘받는 걸 좋아하니 이젠 내가 괴롭혀 줄께"


콰득


"윽"


쇄골을 무는 그녀. 그 고통에 짧게 신음을 한다.

단순히 무는 것만이 아닌 햝고 빠는 그녀의 입.

그것이 주는 야릇한 느낌에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됐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한 얀순이


"이제 너는 내꺼라는 표식이야. 오로지 나만 너를 가지고 놀 수 있고, 나만 너를 괴롭힐 수 있어...알겠지?"


"그러니까 얀붕아...절대 죽으면 안 돼? 그런 생각도 하지마..."


"나 말고 너를 괴롭히는 녀석들이 있다면...어떻게 할까? 그런 애들은 없어지는 편이 좋을텐데..."


"앞으로 얀붕아...우리 어릴 때 처럼 너는 나, 나는 너만 보는 거야...아플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녀의 눈이 내 눈 바로 앞에 다가온다.

큰 눈동자가 매력적인, 예쁘고 아름다운 눈이다.


"어릴 때 다 못했던 놀이...계속 함께 하는 거야, 둘이서..."


"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