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어."

 

가져온 먹을 것을 내려놓은 뒤 칼을 문 앞에 놔뒀다.

 

"심심하진 않았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뻣는 그녀의 앞에 먹을 것을 놓았다. 먹을 것을 집어든 수연이는 게걸스럽게 그것을 먹어치웠다.

 

"손목에 덧된 부분을 더 부드러운 재질로 바꾸는게 좋으려나."

 

빨갛게 되어버린 수연이의 손목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 시점에서 그런걸 구할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더 좋은걸로 해주고 싶은데.

목은 괜찮은 것 같았다. 제일 민감한 부위다 보니까 어떻게든 패이지 않도록 조치를 해놓았으니까.

 

 

시선을 올려 수연이의 눈을 봤다. 오르지 먹을 것을 쳐다보는 듯한 맹수의 눈빛. 이전에 있던 이성의 빛이라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하아..."

 

수연이는 좀비다.

 

질병은 한달전에 찾아왔다. 처음엔 감기로 시작했다가 피부가 썩는다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이렇게 됐다. 수연이가 감기몸살로 앓아 누웠다는 소리를 들었을땐 나중에 병문안이라도 가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되었다. 내가 찾아갔을땐 이미 수연이는 수연이가 아니었다. 아줌마랑 아저씨도 길 밖 골목에서 죽어 있었다. 아주 끔찍하게.

 

 나를 물려고 날뛰던 수연이를 제압하는건 정말 힘든일이었지만 어떻게든 해낸 뒤 나는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바깥이 좀비 천지라 옮기기도 여의치 않은데다가 일단 여기가 더 넓었기 때문이다. 다행인건 나는 평소에 쓸일이 없어보이는 생존용품에 돈을 쓰는 취미가 있어서 생존용품이나 비상식량은 내 집에 있던걸 옮겨 오는

 

걸로 족했던것이다. 평상시에도 이것저것 들고 다니던 것과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 시작한 단련을 최근까지 게을리하지 않던 것도 초기 생존에도 도움이 됐다.

 

이렇듯 집에 틀어 박혀서 농성하면 그만이었던 내가 수연이를 찾아간 이유는 간단했다. 하나뿐인 친구니까. 중학교 올라가면서 나에게 시작된 왕따 때문에 사이가 서먹서먹 해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친구였고 대학생이 된 지금도 가끔 인사는 하는 사이였다. 비록 지금은 좀비고 혹여 풀려난다면 내가 죽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대로가 좋다.

 

"네가 사람 음식만 먹을 수 있어도 내가 왔다갔다 할 일은 크게 줄어들텐데 말이야."

 

어찌된 영문인지 전기는 계속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냉장고를 계속 쓸 수 있다. 하지만 좀비고기라는건 이상할 정도로 부패가 잘 되어서 냉장고에 넣더라도 오래가지 못하는데다가 다른 음식까지 부패시킨다. 상한 사과처럼. 그래서 수연이의 먹을 것을 구해오기 위해 나는 철저한 준비를 거친뒤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어? 그러고보니 너 피부 좀 변하지 않았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찢어져서 너덜너덜 해져있던 부위가 아물어 있는 것 같았다. 붉은 기운도 좀 빠진 것 같고.

 

"...아니다, 기분 탓이겠지. 그래서 말인데. 내일은 하루종일 집에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비가 온다고 해서. 그래도 괜찮아. 하루만 오고만데. 그 다음날 부터는 또 나갈 수 있어."

 

성립되지 않는 대화를 주절거리다가 잠들었다.

 

한 생존자 무리가 지나가는걸 봤다. 남자, 여자의 혼성 그룹으로 잘 준비된 그룹 같았다.

 

"세상이 이렇게 되어도 사람은 사는구나."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좀비가 비교적 느린 탓인지 나는 여러 생존자를 볼 수 있었다. 기쁘긴 했지만 성가시기도 했다. 수연이의 먹

 

을 것을 눈앞에서 가져가기엔 시선이 신경쓰였으니까. 정부가 치안을 회복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대체로 온건한 편이었다. 사람들중에는 직접 안전지대로 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간혹 함께 가지않겠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가는길의 안전을 핑계로 남는걸 선택했다. 그렇게 한 달이 또 지나갔다.

 

"확실하게 아물고 있어."

 

혈색도, 피부도 눈에 띄게 호전됐다. 찢어져 너덜거리던 부위도 이젠 완전히 아물었고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나고 있다. 하얀머리가 나는게 문제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제법 근육량도 늘었다. 말하자면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다.

 

"야, 혹시 게임처럼 막 진화하고 그러면 안된다?"

 

기쁜 마음에 웃으며 농을 던졌지만 아직까진 반응이 없다.

 

"다시 돌아온다면 정말 기쁠텐데..."

 

 

어차피 친구는 없었고 부모님도 없다. 왕따를 당한 것도 그 이유니까. 남은 친구가 있다면 오로지 수연이뿐이다. 다른 알던 사람들도 어쩌면 살아있을지도 모르지만.

 

수연이가 내 말에 반응한듯 고개를 들어 갑자기 물려들어서 떨어졌다. 부드러운 재질로 바꿔끼운 보람이 있는지 손목도 그렇게 아파보이진 않으니 다행이다. 근력이 늘어서 인지 쇠사슬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건 조치가 필요할 것 같지만.

수연이를 보다보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 수연이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땐 나한테 뭐라고 해줄까?

 

"고마워는 아니겠지. 아무래도 그런 성격은 아니니까."

 

지금까지 나한테 고맙다고 했던건 손에 꼽을 정도니까 혹여 돌아오더라도 그냥 아무일 없었다는듯이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보살피는건 사실 마지막 남은 유일한 친구라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떠오르려던 생각을 애써 눌렀다.

어차피 나를 그쪽으로 봐준적은 한번도 없으니까.

 

짐승같은 소리를 내는 수연이를 보며 불현듯 수연이네 아저씨와 아줌마가 떠올랐다. 얼굴만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그래도 만나면 왠지 기쁜 마음이 되는 분들이었다. 나중에 두분이 돌아가신걸 어떻게 전해야 할까.

 

다시 몇 일이 지나고 마침내 그 날이 찾아왔다.

 

"...주세요! 아무도 없어요?"

 

여자의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바깥은 방음처리를 해놨기에 소리가 새거나 들어오지 않기에 수연이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수연이? 수연이야?"

 

횡급히 수연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가자 수연이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나 왜 묶여 있는건데? 네가 그런거야!?"

 

수연이는 자신이 묶인것에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좀비일때의 기억이 없는걸까?

 

"잠시만 기다려, 풀어줄테니까."

 

다행히도 수연이는 구속이 풀리는동안 얌전히 있어줬다. 풀려난 수연이는 손목을 어루만지며 경계하는 기색이 가득한 모습으로 내게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이야?"

 

"뭐라고?"

 

"왜 나를 묶었냐고. 그리고 집안이 왜 이렇게 어지럽고 내 옷에 묻은 이건 뭐야?"

 

냄새가 나서 역겹다는 말을 하며 수연이는 헛구역질을 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한 뒤에 말했다.

 

"너 좀비라고 알아?"

 

"알아."

 

"너 좀비였었어."

 

내 말을 들은 수연이는 잠시 멍때리더니 곧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그딴게 어딨어? 원래 이상한 놈인건 알았지만 지금 그딴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

 

원래 이상한 놈이라.

 

"진짜야, 거짓말이 아니야. 지금까지 너는 좀비였어."

 

수연이가 변하지 않은 붉은색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증명해봐."

 

바깥만 봐도 바로 증명은 될테지만 수연이가 놀라서 주의를 끌지 모른다.

 

사진이라도 찍어둘껄 그랬나? 혹시 나중에 어떤식으로 수연이에게 피해가 갈까봐 찍지 않았다. 하지만 좀비사진이라면 있다. 왜 찍어뒀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찍고 싶었을뿐.

 

"네 사진은 아니지만 좀비사진이야. 이걸로 믿겠어?"

 

수연이는 집근처가 명백한 풍경의 좀비사진을 보고는 다시 자기 몸을 내려봤다.

 

"진짜로...?"

 

"그래 진짜야."

 

수연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사실 이런거랑 관계없이 네가 변태여서 그런거 아니야?"

 

"뭐라고?"

 

 

수연이는 못들은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윽...!"

 

그리고 오랫만에 일어나서 그런지 다리가 아픈듯 했다.

 

"도와줄까?"

 

"아니야, 됐어. 내 몸에 손대지마."

 

수연이는 자리에서 끙끙거리며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배고픈건가? 뒷정리라도 하려고 쇠사슬을 집어들었다.

 

"아."

 

생각해보니 냉장고 앞 탁자에 좀비고기를 놔뒀다. 오늘 먹일 아침이었는데.

 

"수연아, 잠깐만."

 

"꺄아악!"

 

냉장고 쪽으로 가자 수연이가 주저앉아 있었다.

 

"뭐...뭐야? 이거 대체 뭐냐고!"

 

"진정해, 설명할테니까."

 

거짓말을 해봤자 상황이 더 꼬일꺼라 생각한 나는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네가 좀비일때 사람 음식을 조금도 먹지 못해서 좀비 고기를 먹였어. 그게 그거야."

 

수연이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바닥에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수연아."

 

내가 다가가자 수연이는 손을 내저었다.

 

"이...역겨운 새끼..."

 

 

"수연아."

 

"넌 항상 그랬어! 변태, 사이코 새끼! 음침하고 말없고 항상 혼자있고! 불쌍해서 말 좀 걸어줬더니 달라붙고! 좀비였다고? 그래서 뭐? 왜 살려놨어? 나를?"

 

생각만 하고 있었지 실제로 본인에게 말로 들으니 충격이 더 컷다. 나는 손끝이 살짝 떨리는걸 느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는...너는 내 하나뿐인 친구니까..."

 

"그러니까 그게 기분 나쁘다는거야! 생존주의랍시고 이상한 취미를 하지않나 선물이랍시고 칼을 선물하지않나...! 학교에서 말 걸릴때마다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그리고 이렇게 묶어놓고 인육이나 먹이고. 너는...너는...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까지 심하게 말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 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지. 눈 떠보니 묶여있고 내심 싫어하던 놈이 갑자기 구해준답시고 인육이나 먹이고 있었다고 한다면 본심에 없는 말이...나올수도...

 

아니, 이게 본심이다. 수연이는 내가 없는 곳에서 내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나와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을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와 친구냐고 물어본다면 수연이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건 친구도 아니야, 그냥 불쌍해서 만나주는거지."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인육을 먹이면 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분노를 사지 않을까? 그래도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를 듣진 않겠지.

 

 

주저 앉은체 나와 눈을 마주치려 들지않는 수연이에게 뒷걸음치듯 떨어진 뒤 말했다.

 

"알았어. 귀찮게 해서 미안해."

 

 

그 뒤로 나가라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수연이는 의

 

외로 나가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저냥 눌러붙어서 예전처럼 좀비를 죽이러 나가는 일도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지금까지 더러웠던 방을 정리하고 피를 닦아내고 2인분의 음식을 준비하는 것. 그래도 이 집에 눌러붙어 있는 동안 숙박 값은 해야 하니까. 어쩌면 수연이도 이런 내가 편리해서 내버려 두는걸테다.

 

가져온 좀비시체는 뒷마당에서 태웠다. 이제 필요가 없으니까.

 

 

먼저 밥을 먹고 1인분을 남겨놓으면 수연이가 나와서 밥을 먹었다.

 

"욱...우욱..."

 

수연이는 사람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어쩐지 꾸역꾸역 간신히 먹는듯한 인상을 주었다. 역시 좀비고기가 생각나서 겠지.

 

3일이 지나고 대화 한마디 없는 시기가 계속되어 가고 있던 때에 갑자기 수연이가 말을 걸어왔다.

 

 

"먹어."

 

그러곤 내 앞에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고마워."

 

샌드위치를 내민 수연이는 내 앞에 앉아서 같이 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변덕이라도 생긴걸까. 아니면 홀로 있다보니 외로워서 그런걸까. 친구가 많고 외향적인 사람은 혼자있으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던데.

 

얌전히 같이 먹고 있으려니 수연이는 다시 헛구역질을 해왔다. 이젠 내 얼굴만 봐도 그 일이 떠오르는건가.

 

자리를 피해주려고 일어나자 수연이가 나를 올려다봤다.

 

"왜 그래?"

 

"아무것도."

 

수연이는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다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게임하자."

 

그날 밤 수연이는 보드게임을 들고 왔다.

그러고보니 초등학생때는 같이 자주 했었지.

 

"알았어."

 

주사위를 굴려서 선공과 후공을 정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어릴 때는 자주 같이 했었지?"

 

수연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문득 나에게 말해왔다.

 

"그랬지."

 

"그땐 참 좋았는데."

 

"응. 그때는 좋았어."

 

 

아직 수연이와 나의 우정이 실험받지 않던 시기였다.

학교에서 인사하고, 방과 후에 놀러가고, 주말에도 만나던 시기.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

 

수연이를 쳐다보자 수연이가 어렵게 말했다.

 

"우리 엄마랑 아빠...어디에 묻었는지 말해 줘."

 

"앞 마당에 천으로 싸고 방수포로 한번 더 감싼 다음에 묻었어. 아주 깊히."

 

"그렇구나..."

 

어렵게 물어 본거겠지. 눈을 떳을때 부모가 없다는걸 알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테다. 나는 고아라서 잘 모르겠지만.

 

"고마워."

 

"아니야."

 

고맙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이상한 말을 했다고 타박할 줄 알았는데.

 

보드게임은 수연이의 승리였다.

 

"한판 더 할까?"

 

수연이가 웃으면서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러갈래. 피곤해."

 

"그래...그럼 이건 내가 정리할게."

 

"됐어, 내가 치울게"

 

수연이가 손대기 전에 보드 게임을 정리했다.

 

"초등학생때 보관 하던 곳 맞지?"

 

 

"어...응. 맞아."

 

부모의 최후에 대해 쓸데없이 자세히 말해서 또 기분 나쁘게 생각할까?

 

아니, 이젠 아무래도 좋다. 가리고 가려서 말했던 시절에도 어차피 나는 변태 사이코였으니까.

 

아침이 밝자 라면을 끓이는 냄새가 났다. 방에서 나가자 수연이가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아마 내 몫은 없겠지 하고 냉장고를 여는데 수연이가 말했다.

 

"네 꺼도 끓였어. 앉아서 기다려."

 

요즘 갑자기 다정하다. 전에는 전혀 이런적이 없었는데.

 

"고마워."

 

앉아서 조용히 라면만 먹고 있으려니 수연이가 물었다.

 

 

"안 짜?"

 

"맛있어."

 

다시 간격을 두고 수연이가 말했다.

 

"괜찮아?"

 

"뭐가?"

 

수연이는 잠시 젓가락질을 멈춘 뒤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맛."

 

"괜찮아."

 

묵묵한 젓가락질이 시작되고 수연이는 또다시 헛구역질을 했다. 다시 대화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 날 저녁이 되고 수연이는 다시 찾아왔다.

 

"게임하자."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걸까. 지금까지는 조용히 받아줬지만 이젠 조금 짜증이 났다.

 

"안 해."

 

"왜?"

 

"하기 싫어."

 

수연이는 보드 게임을 바닥에 내려 놓은 뒤 옆에 앉아 내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지 말고."

 

그러고 보니 나는 얘하고 친구도 아니었지.

 

"하기 싫다고 했잖아. 나가."

 

"너야말로 내 집에서 나가. 안 할꺼면."

 

어릴적,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하는 명백한 장난어투 였지만 더이상 받아줄 마음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이제 장난을 칠만한 사이도 아니다. 나가라고?

 

"알았어."

 

"어?"

 

"내일 바로 나갈게. 네가 원하는게 그거면."

 

수연이는 보드 게임을 들고 일어섰다.

 

"알았어, 미안해. 이만 나갈게."

 

나는 수연이가 나갈때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내일 아침이 되고 난 뒤에 나는 짐을 쌋다.

 

"뭐해? 왜 짐을 싸?"

 

먼저 일어나 있었는지 수연이가 와서 물었다.

 

 

"나가라며."

 

"언제?"

 

"안할꺼면 나가라고 하지 않았어?"

 

수연이는 짐을 싸던 내 가방을 빼앗았다.

 

"무슨 짓이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너라면 그게 장난인걸 알잖아."

 

"몰라, 그런데 갑자기 왜 친한 척이야?"

 

"친한 척?"

 

이를 살짝 악문뒤 말했다.

 

"그런 말을 해놓고..."

 

수연이는 내 말에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소리 들을만한 짓을 했잖아! 그렇게 묶어놓고, 이상한걸 먹여놓고 그 정도 소리도 못들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는 말 정도는 들을 수 있잖아!"

 

그 정도 말이 아니었던것 같은데.

 

"내가 잘못했네. 가방이나 내 놔. 내 물건만 가지고 얌전히 사라져 줄 테니까."

 

"바깥은 위험해."

 

"지금까지 내 먹을꺼랑 네 먹을꺼 조달해온게 나야. 상관 없으니까 가방이나 내 놓으라고."

 

수연이는 내 가방을 붙들고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는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나가지마. 이 가방은 압수야."

 

더이상 짜증낼 힘도 나지 않았기에 내버려뒀다.

 

그 일이 있고나서 다시 5일이 지났다. 그 사이에 수연이도 더이상 날 귀찮게 하는 일 없이 있었다. 내가 밥을 하고 수연이는 힘겹게 그걸 먹는다.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걸까 싶었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바라던 곧 있으면 이 지역에도 치안이 회복된다는 안전재난문자가 왔다.

 

"곧 있으면 이 지역도 치안이 회복된다네."

 

수연이에게 말했다.

 

"그래?"

 

"응."

 

전기는 들어왔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꺼트린 적은 없지만 인터넷은 여전히 되지 않았다. 안전재난문자라도 오는게 다행이네. 어느 정도는 복구가 됐다는거니까. 

 

오프라인 게임이라도 깔려 있었다면 그럭저럭 심심풀이가 가능했겠지만 깔려 있는건 전부 온라인이라 게임

 

은 불가능했다.

 

스마트폰을 뒤적거리고 있으려니 수연이가 말을 걸어왔다. 5일만의 일이었다.

 

"만약에 치안이 회복되면 뭐할꺼야?"

 

"몰라, 생각 안해봤어."

 

수연이는 조심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괜찮으면 이대로 우리집에서 살아도 돼. 어차피 갈곳도 없어 보이는데."

 

수연이를 쳐다보니 수연이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하자는 걸까? 원래 친구를 잘 사귀는 사람은 자신이 가해한 일도 쉽게 잊어 버리는걸까?

 

"영문을 모르겠네. 나하고 같이 있는게 싫은거 아니었어? 나는 변태 사이코잖아. 친구도 아니고."

 

한순간 수연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아직도 그런 소리야? 진짜 찌질하네. 이제 그만하지?"

 

혹시 지난번에 했던 말로 인해 내가 상처 받았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걸까? 어쩌면 수연이는 나를 가해자라 생각하고 자신을 관대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걸까?

 

"그냥 같이 지내다 보니까 의외로 괜찮아서 그래. 생각했던것 만큼 이상한 애도 아니고... 어차피 갈 곳도 없잖아. 너."

 

이제는 보고 있으면 기분 나쁜 붉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불편 해져서 시선을 돌린 나는 대꾸하고 싶은 욕구가 많이 옅어져 있었다.

 

"됐어, 이번 사태만 끝나면 난 내 집으로 돌아갈꺼야. 아직 집이 남아 있다면 이지만."

 

나올때 잠궈놓고 나오긴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네 배려 같은건 필요 없다고 말했다가 또 싸움만 일어날 것 같아서 참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현관쪽으로 걸어갔다.

 

"어디가?"

 

"잠깐 바람 좀."

 

문을 열고 나오자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이 사태도 얼마 안 남았네. "

 

기지개를 편 뒤 마당쪽을 보자 땅을 파해쳤다가 다시 매꾼듯한 흔적이 보였다.

 

"저기는...내가 수연이네 아저씨랑 아줌마를 묻었던 곳인데."

 

보이는 건 당연하다. 내가 파고 묻었으니까. 하지만 신경 쓰이는건 내가 묻었을 때에도 저렇게 되있었나? 이다. 

 

나는 잠시 마당을 보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비도 

 

왔었으니 그때 조금 무너진 거겠지.

 

집으로 들어가자 수연이가 나에게 말했다.

 

"아무튼 잘 생각해 봐. 알았지?"

 

내가 그 말에 대꾸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사태가 종식되는 날이 왔다. 

 

수연이가 멋대로 빼앗았던 가방에 내 개인용품을 챙길때 수연이가 내 주위로 다가와 물었다.

 

"진짜 가려고?"

 

"응."

 

"내가 말한건 생각 해봤어?"

 

나는 말없이 수연이를 쳐다봤다. 처음에 났던 흰머리는 다시 검은머리가 대체하고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기분 

 

나쁜 붉은색 눈이었다. 여전히 예쁘긴 하지만 이렇게 보니 새삼스럽게 위화감이 들었다.

 

"너는 나중에라도 렌즈라도 하는게 좋겠다."

 

툭하고 생각하던 말이 나갔다. 수연이는 자신의 눈 주위를 만졌다.

 

"신경쓰여? 역시 좀 이상한가?"

 

"아니, 네 눈이니까 내가 뭐라 할 일은 아니지."

 

다른 물건을 챙기기 위해 방을 나서려 하자 수연이가 앞에 섰다.

 

"그래서 내 말. 생각 해봤어?"

 

"난 집으로 갈꺼야."

 

"왜?"

 

슬슬 짜증이 났다. 왜 자꾸 캐묻는건지.

 

 

"집에 가는데 다른 이유가 있어? 집이니까 가는거지."

 

옆으로 지나가려고 하자 수연이가 어깨로 내 몸을 눌러왔다. 순간 짜증이 솟구친 나는 수연이를 밀쳤지만 수연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힘이 쌔졌지?

 

"짜증나게 하지말고 비켜."

 

"짜증나는건 나야, 왜 이렇게 쌀쌀맞게 구는데? 옛날에는 내가 아무리 뭐라해도 계속 달라붙었던 주제에."

 

어떻게든 분위기를 재밌게 만들려고 애쓰는게 느껴졌지만 바로 그게 불쾌했다.

 

"시끄러워, 이젠 아니니까 이렇게 내 몸에 손대지나 마."

 

불쾌한 압박감을 견뎌내며 몸을 빼냈다.

 

"기다려줘."

 

수연이가 내 손을 잡았다.

 

 

"손대지 말라고!"

 

나는 손을 뿌리치고 현관 쪽으로 달렸다.

 

더이상 이곳에 있기 싫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야겠어.

 

"잠깐만!"

 

뒤에서 소리치며 수연이도 따라왔다.

 

"왜 갑자기 나를 이렇게 싫어하는건데! 옛날말 기억안나?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리고...그리고..."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했던 뒷담 다 기억해. 불쌍해서 만나준다니, 음침하게 군다니,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니..."

 

"그건..."

 

"그래도 이해하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말했잖아 저번

 

에."

 

"저번에...?"

 

"변태 사이코니, 조금만 잘해줬더니 들러 붙는다니, 친구도 아니라니. 사과 한 번이라도 했어? 지금까지?"

 

나는 수연이를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사과한다면, 본심이 아니었다고 해준다면 거짓말이라도 다 받아줄 생각이었다.

 

"그런게 뭐가 중요한데? 중요한건 현재지 과거가 아니잖아! 왜 자꾸 옛날 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건데? 너 진짜 찌질한거 알아?"

 

그 말을 들은 나는 머릿 속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어 뒷말을 들을것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기분이 어때?"

 

지혜가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신기한데,  아프긴 한데 체한게 내려갔어."

 

"그렇지? 전에 어릴적에 어떤 스님이 내가 멀미하고 있으니까 손을 꾹꾹 눌러 줬거든. 그때 신기하게 체한게 쑥 내려가서 기억해두고 있었어."

 

"그렇구나. 역시 뭐든지 아는게 힘이라니까."

 

그 뒤엔 지난 과거가 거짓말 같이 스스로도 가끔 놀랄 정도로 잘 지내고 있다. 가끔 밤 중에 일어난다거나 무언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은 가끔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평온한 일상을 보내게 된 것도 모두 지혜의 덕이다.

 

지혜를 만난건 내가 수연이의 집에서 나온 이후 내 집 근처에 있던 난민 수용소에서였다. 애초에 가족이 없었던 나와 지혜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너무 잘 맞았다.

 

 

취미도 취향도.

 

그렇게 난민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에도 지혜와 살던 집에서 이사한 나는 꾸준히 만남을 이어왔고 마침내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그야말로 내게 선물같은 여자였다.

 

"그래서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 내가 말한거 기억나?"

 

지혜가 방긋 웃으면서 물었다.

 

"오전은 재건사업에 나가서 일하고 오후는 비워뒀어. 같이 밥 먹으려고."

 

"그래, 그럼 그때보자. 알았지?"

 

자고가도 되련만 지혜는 저녁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애초에 오늘 먹어도 되는 것 아닌가?"

 

매일매일 시간을 쪼개서 계속 만나야 정이 생긴다는게 지혜의 지론이었기에 나는 예, 예 하면서 따른다. 적어도 무리를 시키진 않으니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으려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 사람은 없는데?"

 

혹시 지혜인가? 하고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자 문 앞에 서있는건 수연이었다. 평소에 입던 검정색 스판 긴 옷에 청바지. 그리고 눈 색이 붉은색에서 다시 검정색으로 되어 있었다.

 

"수연아...네가 여긴 어떻게 알고 온거야?"

 

수연이는 말없이 방 안쪽을 본 뒤 말했다.

 

"일단 들어가도 될까?"

 

어떻게 해야할까 잠시 생각한 뒤 나는 수연이에게 말했다.

 

 

"들어와."

 

집 안으로 안내한 뒤 나는 수연이와 한참을 침묵한체 마주 앉아 있었다. 차를 내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눈...네가 말한대로 렌즈 해봤어. 어때?"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 뭔데?"

 

렌즈를 끼던지 말던지.

 

수연이는 탁자 위에 올려뒀던 손을 다시 탁자 아래로 내렸다.

 

"곰곰히 생각해봤어. 그 때 네가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수연이는 시선을 내게 맞추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예전부터 너한테 심한짓을 정말 많이 했어. 분명 먼저 배신하지 않기로 어릴적에 약속도 했었는데 다른 

 

애들이 너를 왕따시키고 따돌리는데 나는 거기에 동참해서 너를 뒷담화하고 여러가지로 평생 잊지 못할 행동을 했어."

 

나는 대답없이 들었다.

 

"너는 그래도 나를 친구라 생각하고 늘 받아줬어. 분명 어딘가에선 너와 나밖에 모르는 비밀이 새어나가도 늘 나를..."

 

"이제와서 그런게 무슨 소용인데."

 

"응?"

 

내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듯 반응하는 수연이를 보며 나는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이제와서 그런 말은 왜 하는데. 그런다고 그 일이 없었던 일이 돼? 할 말이 그것 뿐이었다면 시간 아까우니까 이제 집에 가."

 

 

너하고 같이 있다가 지혜한테 쓸때없는 오해받기 싫으니까.

 

"자...잠깐만 나는..."

 

"난 또 뭐 잘못 가져왔나해서 걱정했네. 그런 문제가 아니면 됐어."

 

뭣하러 수연이를 집에 들였을까. 현관문을 열어주려고 현관문으로 걸어가는데 수연이가 외쳤다.

 

"미안해!"

 

순간 몸이 굳은 나는 뒤를 돌아봤다. 

 

수연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미안해..."

 

지금까지 사과해야 할 상황에서도 나에게는 단 한번도 사과한 적이 없었던 수연이가 사과를 하고있다. 그것도 

 

눈물까지 흘리면서.

 

"나...사실 좀비때 기억이 모두 돌아왔어."

 

뺨을 타고 흐르는 물은 어느새 핏빛을 띄고 있었다.

 

"사실 처음 돌아온 직후에도 꿈꾸는 듯한 느낌의 기억은 있었어. 그렇게 돌아오고 나서 그런건 너무 당황해서였고...절대 네가 싫어서 그런게 아니었어."

 

수연이는 핏빛 눈물을 흘리며 엎드린 상태에서 내게 서서히 다가왔다.

 

"너한테 할 말은 사람을 먹지않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이었어야 했어. 그런 심한 말이 아니라. 내가 그랬던건 쓸때없는 자존심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그랬는데 이번에도 넘어가주겠지 라는 내 어리광 때문이었어. 너는 한계에 몰려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몰랐던거야."

 

수연이는 내 발목을 붙잡은뒤 나를 올려다 봤다.

 

"나...너를 사랑해."

 

 

정신이 돌아온 나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거칠게 빼냈지만 수연이는 다시 붙잡아왔다.

 

"헛소리 하지마!"

 

"아니야...기억이 모두 돌아오면서 알았어. 네가 나에게 얼마나 헌신해줬는지. 네가 얼마나 내게 다정했는지 말이야.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절대 너처럼은 못해. 너도 날 사랑하지...? 응...?"

 

"정신차려 윤수연! 미친소리 그만해!"

 

내가 소리를 지르자 수연이는 다리에서 손을 놓았다.

 

"한때는 너를 정말 사랑했었지. 정말 엄청나게 좋아했어."

 

"그렇다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너는 몇번이고 나를 농락했어! 무시하고! 뒷담화나 하고!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반 애들한테 퍼트린 것도 너였어!"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내가 모를줄 알았어? 그래도 좋아했어. 어쨌든 너는 내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어찌어찌 방과 후에는 아주 가끔이지만 같이 어울리기도 했었고. 사태가 터진 뒤에는 너뿐이었어. 오직 너뿐이었어..."

 

나는 눈에 서서히 눈물이 맺히는걸 느꼈다.

 

"하지만...고마워 마지막까지 개년이여서. 진짜 뻔뻔해, 더러워. 집에 돈 많고 재능도 많고 예뻐서 인기가 많았던 너라면 나를 구해줄 수도 있었잖아. 수연아. 나를 좋아하게 되어서야 '미안해'라니. 진짜 속보인다."

 

나는 비틀대며 걸어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나가."

 

수연이는 무표정하게 핏빛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마음은 안 변해. 이제 내 마음을 알았으니까. 나는 계속 올거야."

 

"어서 나가."

 

나가려던 수연이는 문을 닫기전에 말했다.

 

"요즘 붙어다니는 그 여자가 문제야? 그 여자가 너를 이렇게 만든거야?"

 

"나가!"

 

나는 강하게 수연이를 밀쳐낸 후 쾅하고 문을 닫았다.

 

열어준 내가 미친놈이지.

 

 

그 다음날 어제 일로 기분이 찝찝하긴 했지만 오전에 일하고 지혜와 만나자 찝찝한 기분은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또 라면이야? 라면이 그렇게 맛있어?"

 

 

내가 라면을 시키자 지혜가 말했다.

 

"그냥 어쩌다보니까 계속 이것만 먹게되네. 나는 원래 오므라이스나 돈까스가 더 좋은데."

 

"그럼 그거 먹으면 되잖아."

 

"그게 잘 안 넘어가..."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기분 탓이겠지...

 

그 후 계속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집이 말끔히 치워져 있다거나 스토킹을 당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사태로 인한 후유증 정도로 여겼다.

 

 

 

그 날은 평범하게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지혜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바깥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보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은...

 

"왜 그래? 갑자기?"

 

"지혜야 잠깐만 있어, 금방 갔다올게."

 

"뭐? 갑자기 왜..."

 

"잠깐만 있어."

 

나는 카페에서 나온 뒤 나를 보고 있던 사람에게 다가갔다.

 

"수연아, 대체 뭐하자는건데?"

 

"뭐가?"

 

 

수연이는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듯 어깨까지 으쓱이며 말했다.

 

"왜 계속 따라 다니는거냐고. 너 얼마전 부터 계속 쫓아다녔지?"

 

"너무 자의식 과잉인거 아니야?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거야. 뭐가 문젠데?"

 

더이상 말하는것도 소용 없을 것 같고 지혜를 계속 내버려둘 수도 없어서 나는 다시 카페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너네 둘 진짜 안 어울려."

 

무시 할 수 없는 말에 나는 뒤돌아 봤다.

 

"뭐라고?"

 

"너네 둘 진짜 안 어울린다고. 저렇게 못생기고 키작은 애랑 만나고 있다니. 진짜 눈 낮구나 너."

 

 

"말 조심해. 지혜는 못생기지 않았고 너같은거 보단 훨씬 좋은 애야. 너같은건 한트럭이 와도 지혜 한사람을 못따라온다고."

 

먼저 심한 말을 한건 수연이었기에 나도 거침없이 말했다.

 

"입 함부로 놀..."

 

"여기서 뭐해?"

 

내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서 그런지 지혜가 따라 나왔다.

 

"앗, 지혜야. 그게..."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윤수연이라고 해요."

 

"저는 최지혜예요...그런데 둘이 무슨 사이예요?"

 

지혜는 바로 핵심적인 질문을 해왔다.

 

 

"여자친구예요. 밖에서 보자길래 나왔는데...?"

 

수연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헛소리를 했다.

설마 이런 상황을 노린건가?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나는 한박자 느리게 말했다.

 

"뭐? 거짓말 하지마! 지혜야, 얘 말 듣지마!"

 

"너야말로 무슨 말을 하는거야?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왜 그러는데? "

 

수연이는 남들 앞에서 여자친구인걸 부정당한 여자친구마냥 행동했다.

 

"도대체 이 여자랑 무슨관계야?"

 

나는 등 뒤로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걸 느꼈다. 아무 말 없이 나와 수연이의 사이에서 번갈아보던 지혜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거짓말."

 

"지혜야?"

 

"수연씨라고 했나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지혜는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와서 팔짱을 꼈다.

 

"솔직히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그런식으로 거짓말하는걸 보니 알 법하네요. 진짜 여자친구라면 제 남자친구가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을리가 없어요."

 

지혜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뒤 속삭였다.

 

"몰래 봐서 미안해...하지만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 숨어서 보고 있었어. 나중에 말해줘야 해?"

 

"지혜야..."

 

수연이는 나와 지혜가 팔짱을 낀 모습을 보자 크게 흥분한듯 손을 꽉지고 부르르 떨었다.

 

 

"당장 그 애 한테서 떨어져! 어디서 감히...!"

 

"당신이야 말로 떨어지세요! 더이상 제 남자친구를 괴롭히지 말라고요!"

 

수연이가 비명을 지르듯 무언가를 외쳤지만 주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걸 의식한 나는 지혜의 팔을 끌고 인파를 빠져나왔다.

 

아찔했던 순간이 지나고 지혜와 나는 우리 집에 와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누구야?"

 

"그 애..."

 

나는 수연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주 어릴 때는 친하게 지냈던 애야.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말이지..."

 

그때는 주위에서 놀리건 말건 정말 사이좋게 지냈다. 

 

밤 내내 보드게임도 같이하고 어릴 때 애들이 하곤하는 결혼 약속도 할 정도로.

 

그러다가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 왕따 당했던 이야기를 해줬다.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건 그때부터 였어."

 

방과 후에도 아주 가끔 어쩌다 약속 없을때만 만나주고 그나마도 다른 애들과 약속이 잡히면 취소하기 일수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나를 괴롭히는 애들에게 해주더라고. 그러면서 계속 친한척 했어. 아마 모를꺼라 생각했나봐. 나는 계속 전과 다름없이 지냈거든. 수연이하고 있을때에는."

 

내 이야기를 듣는 지혜의 얼굴은 심각해져 있었다.

 

"그래서? 계속 해 봐."

 

"생일 선물도 당일엔 줄 수 없었기에 늘 전날에 주고 그

 

랬어. 그래도 나는 수연이를 정말 좋아 했었지. 어찌됐든 수연이는 나를 친구라고 해줬거든."

 

고등학교 내내 수연이는 예쁘고 반의 중심이고 화려한 수상 경력을 쌓고 선생님의 신뢰도 두텁던 아이였다. 그런 애가 나하고 겉으로나마 친구를 해줘서 나는 바보같이 정말 기뻣다.

 

그러다가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서서히 사이가 다시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점점 좋아지곤 있었다. 

 

수연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고 전화가 오는 정도였지만 그 정도로도 나는 좋았다.

 

"그렇게 그 애가 유학을 앞 둔 시점에 사태가 터진거야. 그 때 내가 좀 보살펴 줬었어.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어떤 일도 없었어. 그냥 보살펴줬을 뿐이야."

 

"그건 좀...부럽네. 보살핌이라니. 나도 못 받아본건데."

 

"하하....."

 

수연이가 한 때 좀비였다는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좀비고기를 먹인 이야기도 해야 하니까.

 

"그러다가 환상이 깨지고 드디어 수연이를 수연이로 보게 됐어. 그래서 싫어하게 된거고. 그 때 이후로 수연이하고 아무 대화도 없었어. 일방적으로 퍼부을때 말고는. 그런데 그 뒤로 이상하게 나한테 집착해. 오늘 같이 말이야."

 

"좀...복잡하네."

 

지혜는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이걸로 내가 싫어졌다면..."

 

"아니야, 난 전혀 신경안 써. 솔직하게 말해줬잖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 해줘서 고마워 지혜야."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자. 하지만 그 수연이라는 여자

 

는 어떻게 할꺼야?"

 

나는 바로 대답했다.

 

"계속 무시할꺼야 이제. 상대도 안 할꺼고. 원래 자존심이 강한 애라 머지않아 자기 자존심 때문에라도 물러날껄."

 

"만약에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지혜는 불안한듯 말했다.

 

"적어도 수연이는 자기한테 해가 될만큼 위험한 짓은 안 해."

 

그때 나는 이미 큰 실수를 하고 있었다.

 

남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오만함.

 

나는 이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나중에 뼈저리게 알게된다. 수연이른 더 경계했어야 하는건데.

 

 

 

"전화를 안 받아..."

 

나는 휴대폰으로 몇번이고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유독 불길하긴 했다. 어제 수연이가 갑자기 우리집으로 들이닥쳤었다.

 

 

"뭐야? 너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거야?"

 

문을 열어 놓았었나?

 

내 질문에 답하는 일 없이 수연이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도대체 그 애한테 있고 나한텐 없는게 뭐야?"

 

"뭐?"

 

수연이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옛날에는 내가 좋다고 해줬잖아? 결혼 약속도 했잖아? 왜 그렇게 갑자기 내가 싫어진건데? 내가 모자란게 뭐냐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나는 경찰을 부르겠다고 외치는 대신 수연이를 진정시키려 애썻다.

 

"일단 진정해. 잠깐 멈추라고."

 

"말해줘, 대체 내게 모자란게 뭔지. 계속 나를 따라다녔으면서 왜 이젠 나를 영원히 떠나려는거야? 응?"

 

"이미 그때 말했잖아!"

 

"사과로는 안 돼? 그럼 뭘 더 할까? 제발 말해줘, 무엇이든지 할테니까...내가 다 맞춰갈테니까 말해줘."

 

수연이는 가까이 붙어서 말했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할까? 내 몸을 마음대로 써도 좋아. 예전부터 항상 곁눈질로 봤었지? 지금이 기회야. 네가 

 

나를 받아준다면 나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이대로 내버려두면 선을 넘겠다 싶은 나는 겉잡을 수 없는 두근거림을 누르며 강하게 수연이를 밀쳤다.

 

"나는 꼴린다고 마구 해대는 짐승이 아니야! 그리고 나한테는 이제 지혜가 있어! 옛날처럼 병신같이 너한테 끌려다니던 내가 아니야! 이제 그만 좀 오라고!"

 

밀쳐진 수연이는 바닥에 앉은체 중얼거렸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야..."

 

"네 의견 따위는 신경 안 써. 계속 거기 앉아 있으려면 마음대로 해! 나는 나갈테니까."

 

나는 잠바를 챙겼다.

 

"어디 가려고...? 또 그 지혜라는 애한테 가는거야...?"

 

"신경 꺼. 너하고 아무 상관 없으니까."

 

수연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내가 나갈게. 집주인은 너니까...민폐를 끼쳐서 미안했어."

 

"진심으로 말하는데 두번 다시 오지마."

 

문을 닫기전 수연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미소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른다.

 

밖으로 나간 뒤 나는 하루종일 지혜를 찾아다녔지만 집에도 일 터에도 어디에도 지혜는 없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하지만 성인 여성이 하루 사라진 것 정도로 경찰이 움직

 

일리가 없다.

 

"윤수연, 설마..."

 

나는 지금까지 누르지 않았던 번호를 눌러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가 바뀐건 아니겠지?"

 

신호음이 3번 가기도 전에 전화 너머로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일이야? 전화를 다하고."

 

"지혜 어디있어?"

 

"뭐라고?"

 

나는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말했다.

 

"지혜 어디있냐고. 네 짓이지?"

 

전화기 너머로 한참을 침묵하던 수연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지금까지 나한테 연락이 없을때는 전화 한 번 안 하더니. 그 못생긴 년이 사라지니까 바로 전화 하는거야?"

 

"윤수연, 장난 칠 기분 아니야. 똑바로 대답해."

 

"글쎄, 어쩔까. 이대로 계속 전화기를 들고 있어봐. 내가 재밌는걸 들려줄테니까."

 

재밌는거? 계속 전회기를 잡고 있으려니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악!"

 

지혜의 비명소리였다.

 

"지혜야? 지혜야!"

 

"들려? 못생긴 년이 더 못생긴 목소리로 지르는 비명 소

 

리가. 네가 나한테 선물해준 칼. 진짜 잘들더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수연이가 말했다.

 

"수연아, 볼 일은 나한테 있잖아. 그 애는 풀어줘! 그만하라고!"

 

"싫어. 너는 그만하지 않았잖아. 나한테서 너를 뺏어간 도둑이니 옛날 도둑한테 했던 형벌처럼 손을 잘라버릴꺼야.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릴꺼야 그럼 네가 나한테 다시 돌아오겠지? 나를 사랑해주겠지? 예전처럼!"

 

"으악! 아악!"

 

"제발 그만해!"

 

어느 순간에 비명소리가 끊어졌다.

 

"지혜야! 지혜야!"

 

"이런 기절해버렸어. 원래 손가락을 먼저 다 끊어버리고 손목을 자르려고 했는데."

 

 

나는 비참하게 외쳤다.

 

"대체 네가 원하는게 뭐야!"

 

"네 집에서 기다려. 만약 경찰한테 신고한다거나 하면 너는 지혜의 시체도 볼 수 없을꺼야. 네가 나한테 선물해준 소중한 칼로 난도질 해서 한조각도 남김없이 먹어치울꺼야."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식은 땀을 줄줄 흘렸다.

 

"지혜가 나 때문에..."

 

만약에 경찰에 신고했다가 지혜가 죽어버리면 나는 견딜 수 없다.

 

그렇다고 수연이를 내버려 둘 수도 없다.

 

나는 입을 꾹 다문체 묵묵히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꺼진 집안으로 들어가 나는 수연이가 올 때까지 말없

 

이 앉아 있었다. 죽일꺼다. 들어오면 목졸라서 죽여버릴꺼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 계속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 와. 열려 있으니까."

 

어둠 속에서 수연이의 빛나는 붉은 눈이 보였다.

 

나는 기다리다가 수연이에게 달려들었다.

 

"이....!"

 

하지만 기습이 무색하게 내 손목을 붙잡은 수연이는 그대로 엄청난 힘으로 반항은 허용하지 않겠다는듯 나를 찍어눌렀다. 도저히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나...이런 몸이 되고나서 힘이 강해졌어. 이것도 다 네 덕분이야..."

 

수연이는 그 상태로 나를 바닥에 눌렀다.

 

 

"오면서 머리가 식어서 밑에서 계속 생각해봤어. 화풀이라기에는 너무한 짓을 한 것도 사실이고 이대로라면 너는 영원히 나를 증오하겠지."

 

"이미...하고 있어!"

 

무릎으로 내 위를 깔고 누른 수연이를 쳤지만 수연이는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어. 너는 책임감이 아주 강하잖아. 아주 싫어하는 여자라도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면... 너는 그 여자를 좋아할 수 밖에 없겠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왜 치마를 입고 있는지... 알겠지? 치마 밑에는 아무것도 없어."

 

"이 미친년아!"

 

내 필사적인 발버둥에 수연이는 계속 내 옷을 찢었다.

 

"그래...! 기정사실을 만들기만하면 너는 날 사랑할 수 밖에 없어!"

 

힘으로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나는 큰 절망감을 느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거지? 대체 왜?

 

 

시간이 흐른 뒤 수연이는 나를 옆에서 껴안았다.

 

"사랑해."

 

수연이는 재차 속삭였다.

 

"진심으로 너를 사랑해. 걱정하지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우리...이제 행복해지자?"

 

말이 끝난 직후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습니까? 경찰입니다!"

 

그 소리에 의식을 잃어가던 나는 정신이 돌아와 비명을 질렀다.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줘요!"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지혜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떳을땐 모든것이 끝나 있었다. 

 

지혜는 수연이에게 오른손의 새끼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그것도 내가 예전에 생일선물로 선물했던 칼로.

 

수연이가 나를 찾아온 시간에 지혜는 어떻게든 매듭을 풀어서 피가 흐르는 와중에도 경찰서로 달려갔고 경찰들을 데리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혜는...

 

"정말이지, 사태 때도 어디하나 다친적 없었는데 손가락이 잘려나갈줄 몰랐다니까? 그래도 약지는 봉합했고 새끼 손가락은 잘 안쓰는 손가락이라서 다행이야. 그렇지?"

 

내 옆에서 엄청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미안해, 지혜야."

 

지혜는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사실 괜찮지는 않아. 만약에 사태를 겪지 않았다면 난 여기에 못있었어."

 

나는 지혜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너 나한테 아직도 숨기는거 있어."

 

지혜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하는 어조였다.

 

 

"그 애. 내 앞에서 새끼 손가락을 먹어치웠어. 그것도 좀비처럼... 게다가 힘도 이상하게 강했고. 나는 맨정신으로 납치당하는데 저항조차 할 수 없었어... 그냥 보살핌이 아니었던거지?"

 

나는 무조건 진실을 말해야 할 시점인걸 알았다.

 

"사실 수연이는 원래 좀비였어."

 

"그 말 진심이야?"

 

"진심이야, 수연이는 좀비였어."

 

그리고 내가 했던 일에 대해서 말했다. 좀비를 사냥해서 먹였더니 수연이가 돌아왔다는 것도.

 

"그랬더니 돌아왔어.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실수 였지만 그때는 필사적이었어..."

 

그 날 당했던 악몽을 떠올렸다. 진심으로 역겨웠다. 진심으로.

 

 

"하하...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그런 방법도 있는거였어..."

 

"왜 그래? 지혜야?"

 

"내가 내 가족 이야기는 안 했었지? 사실 나 가족이 한명 있긴 했어. 남동생이..."

 

지혜는 말없이 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네가 한 행동을 비난하지 않는다는거야. 어쨌든 고아였던 너에게 수연이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을테니까. 그런식으로 끝난게 안타까울뿐이야. 물론 개인적으로는 아주 개년이지만."

 

"지혜야..."

 

"괜찮아...나는 그래도 너를 사랑해. 잘 끝났잖아. 그렇지? 너와 그 여자의 사이에는 아무일도 없었으니까."

 

순간 그날의 일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그 애한테 했던 사랑을 나하고 하면 돼."

 

"지혜야..."

 

나는 지혜를 끌어 안았다.

 

 

"여보 그럼 갔다올게!"

 

"응, 나중에 집에서 보자."

 

지혜와 나는 그 후 결혼했다.

수연이는 경찰에 잡혀간 후 재판을 받고 현재 무기징역수로 복역중에 있었다.

 

알고보니 수연이는 지혜말고도 많은 사람을 잡아먹었다. 집에서 발견된 '먹다 남은' 시체만 5구였다.

 

수연이는 치료가 된 것이 아니라 더 뛰어난 좀비가 된 것에 불과했고 수연이를 그렇게 만든건 나였다.

 

 

수연이는 좀비가 됐을때 죽었어야 했다.

 

"후우..."

 

사태 후에도 겪지 않았던 악몽을 그 날 이후로 가끔 꾸곤 한다. 배가 부풀어 오른 수연이가 나를 찾아오는 꿈을.

 

그럴때마다 나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깨어나곤 한다.

하지만 지혜가 임신하고 부터는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출근 길에 휴대폰을 키고 인터넷 뉴스를 봤다.

 

"...이건."

 

뉴스 맨 윗칸엔 수연이의 탈옥 소식을 전하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식인 사건의 용의자 탈옥.'

 

나는 몸이 굳은체 한참을 뉴스를 보고 있었다.

 

밤이 되고 나는 멍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지혜는 오늘 일 때문에 늦는다고 했었기에 지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는 방에서 몸을 반쯤 내민체 물었다.

 

"지혜야?"

 

대답은 없이 또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지혜야, 너야?"

 

곧 끼릭끼릭하고 문을 해집는듯한 소리가 났다.

나는 바로 문을 쿵 닫고 들어가 잠갔다.

 

"휴대폰...휴대폰..."

 

아차, 휴대폰은 거실에 있다.

곧 문이 따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남편..."

 

적어도 지혜의 목소리는 아니다.

 

"수연이? 설마 수연이야?"

 

곧 방문의 문고리가 으드득 소리와 함께 뜯겨나가고 수연이의 모습이 보였다.

 

항상 악몽에서 봤던 배가 부풀어오른 수연이의 모습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식은땀을 흘리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꾸...꿈이었구나."

 

나는 침대에 누워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수연이가 탈옥했다고 이곳까지 올 수 있을리가 없다.

 

거실로 나가 물을 마시는데 현관문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혜야? 너야?"

 

잠시후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옛날에 쓴 소설인데 남아있어서 한번 올려봄.


문제시 자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