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산을 뽑아 던지고 세상을 덮어 무엇하겠느냐. 사특한 마녀 하나 죽이지 못해 이 꼬라지거늘.'


몸은 지쳤다. 마음은 깎여나갔다. 병력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몇 명이고 사라져있었다. 


그들을 탓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주변에서 쉼없이 들려오는 사이한 소리가 내 마음조차 갉아먹고 있으니.


"초나라 노래라고 했더냐. 말도 안되는 소리를."


저 소리가 초나라의 민요라면 초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마귀란 말인가. 


이제는 듣는 이도 아무도 없거늘 홀로 중얼거린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저 소리는 노래 따위가 아니다. 노래의 형태로 엮어낸 주술이지. 그것을 깨닫고 저항할 수 있는 자신과 달리 병사들은 그것에 홀려 제 발로 떨어져나가고 있었다. 


철거덕- 철거덕-


오강을 뒤로 한 채 홀로 배수의 진을 펼친다. 몇 남지도 않았던 병사들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윽고 자신을 짐승 몰듯 천천히 따라온 유방의 장수들이 10보의 거리를 유지한 채 방진을 갖출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둥그렇게 둘러싸온다.


그들 중의 익숙한 면면에 나도 모르게 자조 섞인 웃음이 나온다.


"여마동, 살아있었구나."


비록 보신을 위해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으나 장수로서의 충과 능력은 인정받았던 그가 유방의 편에 서서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탓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영혼을 빼앗긴 인형에 불과했기에.


"내 업이 깊구나."


듣는 이도 없거늘 홀로 되뇌인다.


이들은 모두 유방에게 항복한 이들이다. 이들이 부족했는가? 이들의 충이 사내답지 못하게 쉬이 그 방향을 바꿨는가? 


그렇지 않다. 자신이 빼앗긴 병력이고, 장수다. 유방에게 그들이 넘어갔을 때 어떤 꼴을 당할지 스스로 알면서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부덕의 소치이다.


"길을 터라."


장수들의 뒤에서 나긋나긋하면서도 속은 텅 비어있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명령에 자신을 둘러싼 장수들이 양 옆으로 물러선다. 그리고 병력의 가장 뒤에서부터 나오던 것은-


"유방, 아니. 한왕이라 불러야 하는가."


"어느 쪽이든 초패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부르시지요."



유방.


씹어먹어도 모자랄 적이자, 마녀.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한 갈래로 묶은 경국지색의 미녀.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옷을 입고 갑주도 걸치지 않은 그녀는 전투에 나설 생각조차 없다는 듯 얼굴에 가벼운 분칠까지 한 채로 나타났다. 


그녀가 나를 부르는 우스운 호칭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지칠대로 지친 몸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는다. 말라 비틀어진 고목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게 한계였다.


"초패왕이라. 가지고 있던 장수들도 병사들도 그대에게 다 빼앗겼거늘."


"빼앗다니요. 민의가, 천의가 저를 택한 것이지요."


"아주 뻔뻔하군. 마(魔)의 힘을 빌린 주제에."


"후후, 마라니요. 진정으로 제가 악에 손을 대었다면 어찌 하늘이 저를 황제로 추대했겠습니까."


유방은 여느 아녀자들처럼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지만 나는 그 가증스러움에 이를 갈 수 밖에 없었다.


유방, 자는 계. 그와 천하를 두고 맞붙었던 상대. 세간은 그녀를 호적수라고 부르고 있었고 나 역시 한때 그리 생각했으나 지금은 인정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사특한 힘으로 하늘마저 비틀어낸 것이 아니더냐."


하늘의 별들은 이 난세를 정벌할 제왕으로 자신을 꼽고 있었다. 별들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곁에는 내노라하는 장수들이 기라성처럼 서있었고, 유방을 따르는 것은 우민한 백성들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민의와 천의가 그녀에게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별들은 그 빛을 잃은 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유방을 향해 기울었고, 군율을 세우고 전의를 가다듬었음에도 매일 밤마다 수백의 병사가 유방의 진영으로 투항했다.


그 모든 것이 유방의 인덕 때문인가? 이 항우가 그들을 이끌지 못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잘.


그녀는 마녀였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마녀.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마녀.


세간은 그녀의 인덕에 장수들이 감복하였다고 알고 있으나 그것은 틀린 이야기이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한 가시덩쿨이 순식간에 심장을 휘감아 자아가 없는 인형으로 만드는 주술. 그것이 그들이 '인덕'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다.


"후후후. 역시 초패왕께서는 일신의 무력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꿰뚫어보시는 혜안 또한 출중하십니다."


유방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다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지만, 그 속에 담긴 여유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이토록 수많은 병력 앞이라면 나 또한 무력하리라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나와 동고동락했던 이들을 제일 앞에 세운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들을 벨 때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라는 생각.


'내가 검을 뽑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겠지.'


포위진의 가장 앞을 차지하고 있는 장수들은 모두 한때 초나라의 중역을 맡고 있던 자들이자 동고동락한 자신의 전우들이었다.


비록 패배했으나 혼란한 세상에 그 뜻을 펼치겠다는 기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으며, 세상에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네년에게 붙잡혀 농락당할 만한 이들이 아니란 말이다."


으드득-


이를 갈며 전의를 불태운다. 다 타버린 것만 같았던 몸에 활력이 돌아온다. 


"힘은 산을 뽑아 던지고, 기개는 세상을 뒤덮는다!"


폐의 공기를 쥐어짜내 세상에게 소리를 지른다. 


들어라, 세상아.


이 항우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니.


"오거라, 전우들이여! 내 손으로 해방시켜주마!"


스르릉-


수없이 많은 사람의 피를 마시고 뼈를 베고 살을 잘라낸 검이 검집에서 뽑혀나온다. 검에게 이름은 없다. 다만 베고 찌르기 위한 쇳덩어리일 뿐이니. 


손에 쥐고 있던 창을 고쳐잡는다. 창에게 이름 따위는 없다. 적을 꿰뚫고 잘라내는 쇳덩어리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만 이 순간에는 이 항우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 


"원하는 대로 날뛰어주마, 유방."


적어도 역사에 이 항우의 이름이 지워질 수 없는 흉터처럼 새겨질 것이다. 


"오라."


그 말에 텅 빈 눈의 인형들이 제각기 무장을 꺼내들고 달려든다.


그리고 그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촤악-


"으훕-!"


얼굴에 차가운 물이 뿌려지는 고통에 눈이 번쩍 떠진다. 코로 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따가운 기침을 몇 번 한다.


"커헉, 콜록, 콜록!"


"기침하셨습니까, 항우."


눈 앞에는 가증스러운 유방이 서있었다. 먼지를 잔뜩 머금은 돌벽 위의 횃불이 가끔 타닥거리는 소리 외에는 그 무엇도 들려오지 않는 적막한 감옥 안이었다. 팔과 다리는 벽에 붙은 단단한 쇠사슬에 묶여있었다.


"...왜 살려둔거냐."


며칠이나 기절해있던 것일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탓에 몇 번이나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나온 목소리도 죽음을 앞둔 노인의 것처럼 어떤 힘도 들어가있지 않았다.


유방은 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빙긋 미소지었다.


'가증스럽군.'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왔던 그녀의 표정 중에서 진심이었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자신과 대면할 때에는 물론이고 다른 제후국의 제후들과 대화를 할 때에도.


가면을 뒤집어쓴 괴물. 그것이 유방이다.


"살아있는 항우와 죽은 항우. 어떤 것에 더 가치가 있겠습니까."


"...징그럽군."


내 솔직한 감상에도 유방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미소를 지은 상태였다. 


'그녀에게는 나도 하나의 재화로 보이는 것 뿐인가.'


자신은 그녀의 진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천하를 두고 대적할만한 자. 비록 여인이나 그러한 것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도 될 정도로 뛰어난 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을 그저 다른 장수들과 병사들처럼 '가치가 있는가'로 보고 있었다는 게 여간 우스운 게 아니었다.


"유방. 그대가 하늘의 뜻을 비트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 자리에 묶여 있는 것은 그대가 되었을 것이다."


"후후, 그렇겠지요. 제가 악에 손을 댄 것을 눈치챈 선인이 당신에게 대항책을 전해주려고 했으니까요. 그를 죽이는 데에 시간을 더 잡아먹혔다면 패하는 것은 저였을 것입니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안 하는 것이냐."


"숨긴다니요. 누구로부터 숨기는 것입니까. 어째서 숨겨야하는 것입니까."


유방의 말은 뒤로 갈수록 조금씩 들뜬 것 같았다.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그 높이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 황제이거늘, 천하를 손에 넣었거늘."


"...축하한다고 해야하려나."


나는 자조 반, 비아냥 반을 섞어내었지만 유방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초의 병사들도, 장수들도 모두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비록 그들의 용맹한 혼백은 사라졌으나 그들의 강건한 육신은 한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오강에서 벨 수 있는 한 베어내서 다행이군. 전우들을 사특한 주술에서 풀려나게 해주었으니."


"글쎄요. 백성은 당신을 제 부하였던 이들도 서슴치 않고 베어나는 냉혈한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언제는 그러지 않은 적이 있었나. 아니, 애초에 그리 만든 장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유방을 상대할 때에 언제나 초나라를 괴롭혀왔던 것은 군사의 부족도, 자신의 부덕도, 군량의 부족도 아니었다.


소문, 그리고 주술.


유방이 교묘하게 주술을 섞어낸 노래들은 민심을 어지럽히고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라도 유방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라면 자신이 저지른 것이 된다. 유방이 부리는 사특한 주술을 깨뜨릴 때마다 장수들 중 누군가는 그 여파에 휘말려 며칠간 시달리다 죽음에 이른다. 자신이 그 임종을 지킨 적만 해도 열 번은 넘어갈 것이다.


"그리 악의 손을 빌려 천하를 평정하니 마음에 드는가."


"후후, 항우께서는 무언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유방은 그리 말하고 내 앞에서 살짝 비켜섰다. 그녀의 뒤에 서있던 것은-


"...우희?"


"..."


다른 장수들처럼 눈이 텅 빈 채 나를 바라보는 우희(우미인)였다.


"맙소사... 안 돼. 유방, 유바앙!"


나는 증오를 끌어모아 부르짖었다.


"우희는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희?"


우희는 텅 빈 눈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열불이 끓어오른다. 목구멍을 타고 울분이 치솟아오른다.


"약속과 틀리지 않느냐! 빌어먹을! 이 씹어먹어도 마땅찮을 년이!"


"흐으음... 이상하군요."


유방은 여유를 잃지 않은 얼굴로 수염도 나지않은 제 턱을 쓰다듬었다.


"제가 약조한 대상은 초패왕이지, 모든 걸 잃어버린 항우라는 남자와는 약조한 적이 없습니다."


"황제라는 자가, 천하를 손에 넣은 자가 어찌 목숨 하나를 가지고 이러는 것인가! 그녀를 풀어주어라!"


내 증오는 이제 타들어가 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슬픔이 가슴에 들어찬다.


'우희야.'


이리 되어서는 아니 될 여인이었다. 부족한 자신의 곁을 늘 지켜준 소중한 여인이었다. 만인을 사랑하며 만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 그것이 우희이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난초 같은 여자. 물을 주고 다정하게 대하면 수줍게 피어나는 난초꽃 같은 여자.


"그녀를 풀어주거라. 이 항우의 부탁이다."


"후후후... 영웅이신 항우께서도 무력할 때에 꽤나 인간다워지신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유방은 그런 내 모습에 어딘가 취한 것만 같은 모습으로 무릎을 굽혀 수그려 앉으며 내 눈을 아래에서 올려다보았다. 살짝 풀어진 눈, 나른하게 늘어진 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술보다 더욱 자신을 취하게 만드는 황홀한 것이라는 것마냥.


"후우우.... 항우. 그토록 우미인이 좋으십니까."


"....나를 농락하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적어도 최후는 그녀의 손으로 지어드리려는 생각이지요."


유방은 왼손을 살짝 들어올려 손가락을 까닥였다. 뒤에 서있던 우희는 그 손짓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들어올렸다. 나의 마지막을 장식할 쇳덩어리로는 부족한 투박하고 더러운 단도였으나 그것을 든 이가 우희라면 목을 내어주는 것 정도라면 기꺼워진다.


"...우희야."


"..."


내 부름에도 그녀는 멍한 눈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를 다시 재차 불렀다. 


"우희야."


"..."


"이 어리석은 항우는 살면서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 제일 큰 잘못이라 한다면, 유방을 믿고 너를 살리기 위해 보내준 일이겠지."


그녀가 그것을 바랐는가. 그렇지 않다. 앞으로의 도망에 자신이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우희는 스스로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저지한 채 유방에게 고개를 숙여 그녀만을 살려보내려고 했던 것은 자신의 욕심이자 자신의 잘못이었다.


스스로가 선택한 스스로의 삶의 마지막을 막아세웠고, 주군이자 낭군인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스스로 꺾일 자리를 놓치게 만들었으며, 그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사특한 마녀의 손에서 인형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


"네가 내 마지막이 되어주리라는 것이다."


우희는 단도를 들이민 채 조금씩 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얼굴을 마음에 남기기 위해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답구나."


그 난초같은 기개도 꺾이고, 그녀를 밝히던 하늘의 별조차 유방에게 더럽혀져 그 빛을 잃었거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우희야."


"..."


"사랑한다."


답은 없었다. 들을 필요도 없었고, 들을 생각도 없었다.


"베어라."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던 유방은 툭 던지듯 말을 뱉었고, 우희는 천천히 단도를 들어올렸다. 나는 단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우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먼저 기다리고 있으마.'


그녀는 자신을 따라 지옥으로 와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끓는다. 선녀의 옷자락에 스치듯,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할 자신에게도 그녀를 멀리서나마 바라볼 기회가 있겠지.


스윽-


마침내 단도를 위로 들어올린 우희는, 힘껏 단도를 휘둘러-


프슈욱-


스스로의 목을 베어내었다.


".....우희야!"


"말했지 않습니까."


유방은 아까의 나른함은 어디간듯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죽은 항우에게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풀어준다고 한들 제 말을 듣지 않는 항우에게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 씹어죽일 년!"


철커덕- 철커덕-


통짜 쇠로 이루어진 사슬이 팔과 다리를 붙잡는다. 벽에서부터 아예 사슬을 뜯어내려고 해보았으나 이마저도 유방의 사특한 주술이 깃들어 있는 탓인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울컥- 울컥-


멍한 표정의 우희의 목에서 흘러내려서는 안되는 붉고 끈적한 액체가 끊임없이 쏟아져나온다. 순식간에 우희의 얼굴이 하얘지기 시작한다.


"제발, 제발! 우희를 살려다오! 내 이리 부탁한다!"


"...흐응."


내내 진득하고 기분 나쁜 미소를 잃지 않던 유방은 이제야 흥미가 동한다는 듯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무엇이든! 우희를 살려준다면 무엇이든 주겠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유방은 피를 흘리는 우희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다가와 내 턱과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인간 같지 않은 서늘한 손의 감촉과 주술을 지어내느라 새카맣게 탄 그녀의손에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가 몸에 오한을 불러 일으킨다.


"전부."


히즉-


유방은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그 어느 때에도 진심인 적 없던 그녀가,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야 웃고 있었다.


"항우, 그대의 전부를 내놓으라."


"...."


나는 멍하니 유방을 내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해 하늘을 비틀었다. 틀렸다.


황제로서 서기 위해 장수들의 혼백을 더럽히고 그들을 인형으로 만들었다. 틀렸다.


"...나였느냐."


"그렇습니다."


유방은 드디어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낸 채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초패왕으로 우뚝 선 당신. 당신을 손에 넣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의 목표였습니다."


"...어째서?"


"연모입니다. 사모입니다. 흠모입니다. 존경입니다. 경외입니다."


유방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하늘의 빛나는 태양인 당신을 손에 넣고 싶었습니다. 떨어뜨려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유방은 이제는 어지러운 지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은 우희를 흘낏 훔쳐보았다. 


그 눈에 깃든 것은 질투였다. 분노였다. 증오였다.


"....그랬던 거냐."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치솟아 오른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메마른 허탈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그걸 위하여 그 많은 피를 흘리고, 그 많은 이들을 더럽히고, 기어코 우희마저 앗아가는 것이느냐."


"틀렸습니다."


유방은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에 자신이 있다는 듯 말했다.


"그 모든 것과 당신이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하, 아하하하...."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온다.


수많은 피를 이 손에 묻혔고,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친우이자 가족에게 죽었으며, 세상은 혼란에 휩싸였고, 백성들을 이끌 하늘조차 더럽혀져 빛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손에 넣기 위함이라고.


"...우희를 살려다오."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전부를 주겠다. 네 인형으로 살겠다. 원한다면 발이라도 핥겠다."


"후후, 인형으로 사실 필요는 없습니다. 가끔 마음이 동한다면 발 정도는 핥아주시지요."


유방은 입을 가리며 쿡쿡 웃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만으로 우희의 상처는 언제 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닥에 흘러있는 질퍽한 붉은 액체만이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황제위에 오르고 난 후에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까지는 마음과 몸을 추스리시지요."


유방은 고민이 해결되었다는 듯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몸을 돌려 감옥을 나섰다. 자신의 목을 베라 명령했던 유방을 군말없이 따르는 핏기없는 우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내 부덕이다.'


유방에게는 덤벼서는 안 되었다. 그녀를 장수로 보아서는 안 되었다. 그녀를 호적수로 여겨서는 안 되었다.


짐승. 이 천하를 집어삼키려는 짐승. 하늘을 더럽히고 별을 떨어뜨리며 백성을 유혹하는, 저 고대의 짐승과 마귀들 중 하나로 여기고 맞서 싸웠어야 했다. 더럽혀져 그 빛을 잃은 별을 빛내고 혼란한 세상을 그녀의 손으로부터 구한다는 생각으로 싸웠어야 했다.


그리고 잘못된 판단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모든 것을.


"....우희야."


나는 이제 보이지 않는 그녀를 불렀다. 스스로 꺾이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화분 속의 가녀린 화초 같은 여인. 


"미안하다."


그녀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사죄를 했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모두에게. 장수와 병사들에게 사죄했다.


"미안하다..."


그 말만이 감옥에 한참동안 울려퍼졌다.


*


"폐하, 항우의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대전에 들어서 옥좌에 앉은 유방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남겨둔 인간이 있었나.'


심드렁한 얼굴로 그 자를 바라보았지만 그 자는 유방의 감정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여태껏 인형으로 만들지 않은 이들은 둘 중 하나였다.


인간으로 남기고 싶었거나, 광대로 쓸법할 정도로 아둔하고 어리석은 자였거나.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항우 밖에 없으니, 이 자는 후자에 속하는 자일 것이다.


"염려 말거라. 초패왕은 한의 뜻, 천하의 도리를 세우는 것에 동참할 것이라 이야기했다."


"역시 폐하시옵니다."


"..."


아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를 쳐다보며 유방은 또 다시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항우가 떠오른 탓이다.


항우와의 대화는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가 하는 손짓, 그의 눈길, 그의 호흡,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신을 설레게 한다. 주술 탓에 썩어문드러진 진창이 되어버린 자신의 마음에도 꽃은 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가 다른 여자를 향해 보이는 연심에 안달이 난다. 발 끝부터 머리 끝까지 어찌할 줄 모르는, 봄날 같은 싱숭생숭한 질투가 흐른다. 그의 눈을 파내어 우희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고 싶다가도, 그가 우희를 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를 상상한다면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그가 그런 애절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자신은 발끝부터 녹아서 사라지지 않을까.


"..폐하? 편찮으신 곳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여봐라."


유방은 자신의 상념을 끊은 노인 탓에 눈을 찌푸렸다. 걸걸하며 귀를 긁는 거친 목소리는 항우의 중후한 목소리와 비교되어 더욱 자신의 심경을 흐트러뜨렸다.


"이 자를 데리고 나가 참수형에 처하라."


"ㅍ, 폐하!"


노인은 오체투지라도 하려는 듯 몸을 움직였으나 그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그를 붙잡아 입을 막고는 대전 밖으로 끌고나갔다.


"권력에 아양 떨기 위해 인간이 인형이 되는 것에서조차 눈을 돌린 이가 어찌 삶을 구걸한다는 말인가."


적어도 목숨을 구걸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것을 위해 구걸해야 한다.


항우처럼.


"...아아."


또 다시 마음이 아릿해진다. 그를 떠올릴 때면 자신은 소녀가 되어버리고 만다.


가슴 속에 숨긴 연심을 들킬까봐 구석에 숨어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으면서도, 때로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나마 대화를 나누고 싶은 소녀.


그를 위해 악에 손을 뻗고, 세상을 자신의 발 아래에 두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는 소녀였다.


"후후."


대전은 장수와 군사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녀의 웃음을 들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 끌려나간 노인이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이었기에.


"항우, 나의 낭군."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결심했다. 그를 손에 넣기로.


스스로의 무세를 믿고 움직이지 않는다. 천의와 민의를 따라 움직인다. 뒤처지는 이 없으며 앞서가는 이 또한 없다. 그가 이끄는 초의 병력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백전불패의 용사들이었다.


천하를 두고 경쟁할 호적수로 유방 자신을 인정했을 때, 그녀는 구름 위에서 떨어지는 것만 같은 아찔하고 달콤한 감각에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럼에도 별이 기어코 그를 향해 기울었을 때, 어둠에 손을 뻗어 추악한 힘으로 하늘을 뒤엎었다. 


그가 천하를 손에 넣었을 때에 그의 곁에 있을 여자가 자신이 아니기에.


그와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인간이 자신만이 아니었기에.


그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가 자신만을 향해 웃으면 좋겠다. 그가 자신만을 향해 말을 걸었으면 좋겠다. 그가 다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자신을 만나러 오기 위해서만 그 다리를 움직였으면 좋겠다. 그가 자신을 끌어안기 위해서, 쓰다듬기 위해서만 그 팔을 움직였으면 좋겠다.


그가 초패왕인 이상. 그가 정의와 천의를 위하여 천하를 일통하려고 하는 이상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별을 떨어뜨렸다. 인간의 의지를 꺾고 인형으로 만들었다. 사이한 주술을 섞어 노래를 퍼뜨리고, 소문을 퍼뜨렸다. 강을 더럽히고 산을 물들였다.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기 위하여.


"아하, 아하하하하하..."


유방은 마침내 참아왔던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는 인간 하나에게는 너무나 넓구나."


유방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그리 말했다.


"인간은 딱 둘. 둘 정도만 있으면 좋겠어."


다른 이들은 필요없다. 생각할 필요도, 살아갈 목적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과 그를 위하여 일하면 된다. 어떤 의문도, 어떤 감정도 갖지 않은 채 그와 그녀의 제국이 영원히 이어지도록 죽을 때까지 노동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그에게서 앗아가기 위하여.


유방은 한참동안 웃었다. 


진심으로 웃었다. 


*



노벨피아에서 역사물 보다가 갑자기 삘 떠서 써봤는데 괜찮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