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똑-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바깥에서 한 집의 문을 두드리니, 곧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끼익-


"앗, 선배! 오셨어요?"


얼마 안 가 문이 열리고, 어두웠던 주위가 밝아짐과 동시에 나를 맞이한건, 졸업 이후 간간히 연락만 하던 대학 후배, 얀순이었다.


서로 바빴던 탓에 직접 만나진 못하고 톡이나 전화로만 연락을 하던 나와 얀순. 하지만 오랜만에 직접 본 얀순이의 모습은, 여전히 귀엽고 아름다웠다.


키가 여전히 작다는 것을 빼면, 대학 시절 그대로 변함 없이 새하얗고 뽀얀 피부에 균형 잡힌 몸매. 거기에 지금 나를 맞이한 얀순이는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듯 딱 맞는 돌핀 팬츠에, 심지어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맨 가슴 그대로 하얀 민소매를 입으며, 고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에 난 반사적으로 시선을 얀순이에게서 돌렸지만, 그것을 눈치챈 얀순이는 서운한 듯 두 볼을 약간 부풀리며 말했다.


"너무해요~ 선배 온다고 해서 이렇게 입었는데, 안보시면 어떡해요~"


"이러면 안되는거 너도 알잖아."


"칫. 대학생 때는 맨날 저랑 같이 다니면 힐끔힐끔 쳐다봤으면서."


부정 할 수는 없었다. 대학 시절 남자들에게 소문이 날 정도로 예쁘고 몸매가 좋은 얀순이었기에, 나도 남자인지라 얀순이에게 시선이 가지 않으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언제적 얘기를 하는거야. 그건 그렇고, 들어가도되니?"


내 말에 그제서야 자신이 날 아직까지 밖에 세워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얀순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차, 죄송해요. 선배. 제가 너무 오래 잡아두고 있었죠? 들어오세요!"


그렇게 얀순이의 안내에 따라 들어온 얀순이의 집. 문이 닫히자, 방금까지 맡아지지 않았던 기분 좋은 향수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걸음을 더 옮기니, 얀순이의 취향이 잔뜩 들어간 듯한 귀여운 느낌의 인형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센스있고 깔끔한 인테리어와 가구 배치가 된 얀순이의 집안 내부를 본 난, 얀순이에게 이런 안목이 있었나 생각하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너 혼자 사는거치곤, 생각보다 꽤 넓네? 방도 여러개 있고."


게다가 혼자 산다고 하던 얀순이의 말치곤 꽤 넓은 얀순이의 집. 이정도면 혼자 사는 집이 아니라, 가족이 사는 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지금은 혼자 살지만, 곧 이곳에 살 사람이 더 늘어날거에요. 평생 저 혼자 살 수는 없잖아요? 헤헤."


그러면서 얀순이는, 미리 자신이 준비해놓은 듯한, 맥주 두 캔이 놓인 탁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맥주, 괜찮죠?"


"엥? 술 마신다는 말은 없었잖아."


"그걸 꼭 말로 해야겠어요? 오랜만에 선배랑 마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요~"


"그치만 시간도 늦었고... 나 집에도 가야하는데..."


"에이~ 선배 술 잘 마시잖아요~ 아니면 여기서 자고 가도 상관없고요~"


"장난해...? 그랬다가 여자친구한테 들키면, 나 진짜..."


"농담이에요! 농담! 자, 자! 얼른 앉아요!"


그렇게 나를 강제로 앉힌 얀순이의 손길에 시작하게 된 얀순이와의 술상. 비록 안주도 없이 맥주 한 캔씩이지만, 문득 옛날 생각도 나고, 나쁘진 않았다.


칙-! 딱-!


"자, 건배!"


가장 먼저 맥주캔을 딴 얀순이가 맥주캔을 나에게 들이대니, 나도 어쩔 수 없이 맥주캔을 따고, 서로의 맥주캔을 부딪혔다. 


이후, 과감하게 맥주를 들이키기 시작하는 얀순. 그에 비해, 난 막상 맥주캔을 따도, 그걸 마실 순 없었다. 그저, 맥주를 마시는 얀순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을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날 본 얀순이는, 마시던 맥주캔을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왜 안마시세요? 선배? 건배 까지 해 놓고 이러시면 안되죠."


"아, 알았어. 마실게... 조금 이따가..."


"뭐... 알았어요. 마시는지 안마시는지, 지켜볼거에요."


말을 끝내며 다시 한번 맥주를 들이키는 얀순. 그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벌써 다 마신건지 맥주캔을 손으로 찌그러뜨린 얀순이는, 나를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아 참, 선배. 곧 결혼하신다면서요?"


얀순이에게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이미 알고있는 얀순이의 말에, 난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선배 여자친구가 올린 글보고 알았죠. 거기에 선배랑 같이 찍은 사진이랑, 곧 결혼한다고 글을 매일 올리는데, 모를수가 있겠어요?"


"그런 글들은 어떻게..."


"뭐... 그냥 우연히 알게 된 거에요. 근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지금."


"어?"


부스럭-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뒤에 있던 검은 비닐 봉지에서 맥주 한 캔을 더 꺼내는 얀순.


칙-! 딱-!


이후, 얀순이는 맥주캔을 따며 말했다.


"저 선배한테 정말 배신감 느낀거 알아요? 어떻게 하나뿐인 후배한테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을수가 있어요?"


"아니... 그게..."


"물론 결혼 준비가 바쁘고, 선배한텐 곧 결혼할 여자친구가 소중하니까 저같은건 생각이 안날수도 있겠죠. 하지만, 서운한건 어쩔수가 없네요."


"마, 말하려고했어."


"언제요? 결혼하고 나서요?"


"......"


갑작스럽게 이상해진 분위기와, 정적. 얀순이는 그저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난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죄송해요. 선배. 전 그냥... 선배가 저한테 무언가를 숨기셨다는게 너무 화가 나서..."


잠시 후, 진정이 된 건지 얀순이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고, 그것을 들은 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냐. 내 잘못이야... 너한테도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이후, 고개를 들어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얀순이는, 자신이 쥐고 있는 맥주캔을 나에게 들이댔다.


"자, 건배해요. 선배."


"응..."


다시 한번 부딪힌 맥주캔. 이번엔 아까와는 다르게, 얀순이보다 내가 먼저 맥주를 들이켰고, 그것을 본 얀순이는 해맑게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오랜만에 마시는 얀순이와의 술자리의 분위기가 다시 달아오를 무렵, 얀순이는 들고 있는 맥주캔을 내려놓더니, 탁자에 팔꿈치를 붙인 뒤, 마치 꽃처럼 손으로 얼굴을 받치며, 날 쳐다봤다.


"선배, 제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응...? 재밌는 얘기?"


"토끼와 거북이에 대한 이야기에요."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하게 된 토끼와 거북이었지만, 앞서 가던 토끼가 잠을 자는 바람에, 결국 쉬지 않고 열심히 달린 거북이가 토끼를 이겼다는 동화.


"그거... 토끼랑 거북이가 경주해서, 거북이가 이겼다는 내용아냐?"


"잘 아시네요. 하지만 거기엔 선배도 모르는, 잔인한 이야기가 숨어있어요."


그렇게 시작된, 얀순이의 이야기. 


"옛날 옛적에 토끼와, 토끼를 좋아하는 거북이가 살고 있었어요. 토끼와 거북이는, 사이가 아주 좋았죠. 하지만 거북이에게 토끼는, 그 이상이었어요. 자신이 의지하며, 절대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였었죠."


"그렇게 영원히 아무 일도 없이 이어졌으면 좋았겠지만..."


"주위에 있는 다른 동물들은, 토끼와 거북이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어요. 토끼가 자신의 우월감을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느린 거북이에게 접근해서 일부러 친한척을 한다고요. 이 소문은, 빠르게 모든 동물들에게 퍼져나갔죠. 당사자인 거북이에게 까지도요."


"당연히 이 소문을 들은 거북이는, 다른 동물들에게 토끼는 그런 동물이 아니라고 열심히 말했지만... 다른 동물들은 거북이를 그저, 토끼가 그런 동물이라는걸 믿고 싶지 않은, 불쌍한 동물이라고만 생각하고, 오히려 거북이에 대한 동정심만 늘어갔죠."


"결국, 토끼에 대한 혐오감은 극에 달해, 다른 동물들은 토끼를 죽이기로 결심했어요. 바로,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말이죠."


"토끼를 죽일 명분이 필요했던 다른 동물들은,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토끼가 이기면, 그것을 명분 삼아 토끼를 죽일 계획이었던 거에요."


"이를 눈치채고있던 거북이는 황급하게 토끼에게가서 이 경주를 하면 안된다고 하려고 했지만, 거북이는 더 이상 토끼에게 다가 갈 수 없었어요. 다른 동물들이 접근을 막고 있었거든요."


"결국, 거북이가 토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어요."


"토끼와 거북이만 알고 있는 샘. 거북이는 토끼가 그 샘에 자주 오는걸 알고 있었고, 거북이는 그 샘에 잠이 잘 오는 약을 섞었어요."


"그리고 대망의 경주 날. 아무것도 모르는 토끼와, 다른 동물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온 거북이는, 드디어 경주를 시작했어요."


"이기기위해 열심히 뛰던 토끼는, 당연히 약 때문에 가던 중에 잠이 들 수 밖에 없었고... 거북이는 그런 토끼를 보고 안도하며, 결승점까지 열심히 달려갔죠."


"결과는 당연했어요. 거북이가 이기며 다른 동물들은 토끼를 죽이는데에 실패했고, 거북이는 자신이 본인을 살렸다는 사실을, 토끼에게 말했어요. 거북이는 당연히, 생명의 은인인 자신만을 더 사랑해주고, 의지할거라 생각했었죠. 하지만..."


"토끼는 여전히 거북이를 친구로만 생각 할 뿐, 그 이상의 감정은 주지 않았어요. 게다가, 시간이 흘러 짝을 찾아야 할 시기가 되었을 때, 토끼는 자신을 살려준 거북이를 버리고, 다른 암컷 토끼를 찾았어요. 그 이후로는, 토끼가 거북이에게 찾아가는 횟수도 뜸해졌고, 심지어 자신이 다른 암컷을 찾았다는 소식 조차 알려주지 않았죠."


"그래서 거북이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어요. 자신의 집으로 토끼를 초대하고, 자신이 토끼를 살려준 샘. 그곳에 약을 한 번 더 푼 뒤, 그 물을 자신이 살려준 토끼에게 건넸어요."


얀순이의 말이 끝나자,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뭐지...?"


"그 후, 거북이가 건넨 물을 마신 토끼는 당연히 잠에 들 수 밖에 없었고..."


"얀순아..."


"잠든 토끼는 그대로... 거북이에게, 대가를 치뤘답니다."


"이... 게 무슨..."


아무리 정신을 붙잡으려 해도, 자꾸만 더 흐려지는 의식.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왜 절 놔두고 그런 년에게 간 건가요? 선배?"


"으..."


"대학 시절, 유일하게 어울려줬던 제가 있는데, 왜 그런 년에게 간 거냐구요."


"얀..."


"뭐... 더 말해봤자, 선배한텐 들리지 않겠죠.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요."


"순..."


"이제 힘들게 결혼 준비하실 필요 없어요. 그 결혼, 없던 일로 될 테니까. 이제부턴, 제가 선배에게 필요한 모든걸 해드릴테니까. 그러니까... 잘 자요. 토끼 선배."


얀순의 말과 함께 완전히 끊겨진 의식.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