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버틸만합니다만.."

"나만의 호위무사로 임명해준다니까? 돈도 지금보다 30배는 더 받을 수 있어!"

"죄송합니다."

내 앞에서 신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이름은 하르페 아겔, 내가 경호하는 임무를 맡은 아겔 가문의 영애이다.



이 세계에서 흔치 않은, 그리고 나와 같은 칠흑의 검은 머리칼을 가진 그녀는 와인잔에 담긴 것 같은 붉은 눈으로 날 쳐다봤다.



바로 이전까지 미소를 띄며 웃고있던 그녀는 지금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가운 표정을 보였다.

"왜 전부터 계속 거부하는거야?"

"죄송합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유동적으로 경호원 일을 하던 나를 아겔 가문의 저택에 1년동안 부모님에게 입김을 넣어 이곳에 발을 묶이게 만들었다.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면, 이곳에서 경호원 일을 처음하게 될 때를 상기해봐야 했다.



하르페의 첫 만남은 이랬다.
*  *  *  * 

공작가의 저택의 밤이 깊어갈 무렵, 하르페는 지루한 연회를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졸린 눈을 부스스 주워담으며 방의 앞까지 도달했을 때 익숙하지 않은 얼굴의 누군가가 내 방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너는 뭔데 내 방 앞에 서있어?"

"이번에 새로 들어온 경호원인 유경호라고 합니다."



하르페는 유경호라는 이름이 낯설어 혼잣말로 유경호의 이름을 곱씹으며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댔다.



"그래 뭐, 유경호. 날 잘 지키도록 해?"



유경호, 정리되지 않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묵을 이었다.



하르페는 무신경한 듯 방 문을 닫고 잠을 청했다.

그 날들이 하나둘 지나가며 3개월을 지내면서,


저택의 밤이 다시한번 깊어갔다.

바깥에서 우는 올빼미를 제외하면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새벽, 갑자기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ㅡ....하르페 님!



방의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며, 이내 콰앙ㅡ!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방 문이 아작났다.



"뭐,뭐하는 거냐 네 녀석!"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내 오른손을 잡고 달리는 그에게선 다급함이 느껴졌다.



이 상황을 이해할 틈도 없이 저택의 밖으로 한 손으로 날 끌고간 유경호는 어깨에 큰 자상이 남아있었다. 

퍼벙ㅡ!



저택의 밖으로 나오자마자 내 방쪽에서 큰 폭발음 소리가 들리더니, 저택의 지붕쪽에서 복면을 쓴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표창으로 보이는 물체를 던졌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 때 처음으로 그에게 죄송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 손을 잡던 손으로 내 몸을 앞으로 끌어내 날 안아들고 근처 바위의 뒤에 몸을 던졌다.

푸욱-! 
복면의 남자가 던진 표창에 유경호의 등과 허리가 마비되는 것처럼 정지 했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걸 보니 아마도 표창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복면의 남자가 지붕에서 내려와 소리쳤다.

"거기에 있는 계집을 넘겨라! 넘기면 너의 목숨만은 보장해주지!"


"흐극!"



생전 처음 겪어보는 죽음의 공포에 난 손을 부르르 떨수밖에 없었다.



저택에서부터 이어진 폭발의 연기내음이 이젠 유경호와 하르페가 있는 바위까지 흘러들어와 하르페의 정신은 더욱 혼미해져갔다.



이곳에서 자신의 목숨이 끝났다고 생각한 하르페는 주마등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의 저택이 아닌 소박하게 생긴 조그마한 집의 앞에서, 누군가와 약속했던 기억이 수면 위로 흘러내려갔다.



[그래도 내일은 올 거야 하르페.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렴.]



그저, 그 장면 하나만이 생각났다.



흘러내린 내 눈물은 눈을 감은 유경호의 얼굴에 닿았다.



복면을 쓴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손을 뻗을 때, 내 눈 앞이 빛나며 무언가가 타올랐다.



싸악ㅡ!



마비가 끝난 것인지 순식간에 눈을 뜨고 일어난 유경호가 복면과 함께 그 남자의 머리를 잘라 날려보냈다.



목에서 피가 분출하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에도 그녀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




그의 눈이 뜨여있는 한.






*  * *  *

"죄송합니다."

"대체 죄송하다고 오늘 몇 번이나 말하는건데! 네 의견 물어주는것도 이젠 지쳤어!"



하르페는 눈을 칼날 모양으로 뜨며 손에 마법을 피워냈다.

그녀의 손에서 피어난 마법에선 스크롤처럼 보이는 계약서가 생겼다.

"돈을 엄청나게 받을 수 있는 계약서야. 싸인해."




"[영원결속 호위무사 계약]이라 써져있는데요."




"나는 그런거 몰라 싸인해줘."



하르페는 이젠 아예 마법으로 유경호의 손을 조종해서 지문을 인식하는 것으로 계약을 마쳤다.



"계약 성공~"




어느 때보다 격양되어 신난듯한 하르페는 금방 유경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유경호는 그와 동시에 익숙한 라벤더향을 맡았다.

쪽ㅡ

"다음부터는 더 가혹한 일도 시킬테니까, 이제 너는 내 방에서 지내."

하르페는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경호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오늘부터 시작이다.'



지금보다 한참이나 어렸을 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그녀의 기억을 지우고, 

나를 기억에서 소멸시킨 이후 그녀가 기억하지도 못할 약속을 하며 기다려온지 어언 10년.



나는,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괜찮다. 이제부터는 잘 풀릴 테니까.



그렇다고 생각한 유경호의 앞엔 그가 20년간 살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단 한명만을 위한 여우가 미소짓고 있었다.

저택의 밤은 이번에도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