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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할 줄 알았던 복수의 끝은 씁쓸했다. 

저 괴물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녀석의 숨통을 끊자마자 왜 이리 허망하게 느껴질까.

어쩌면 이 여정의 결말은 나의 죽음인 것을 알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오히려 남은 것이 없기에 가는 길이 더 편하지 않을까.


"주인님.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사람은 있다.




어딘가의 귀족으로 추정되는 새하얀 머리칼과 아름답지만 공허한 붉은색의 눈을 가진 소녀.

그녀를 발견한 건 복수의 흔적을 쫓아 숲을 지나는 길이었다.

쓰러진 노예상의 마차. 진한 피비린내. 그르렁거리는 괴물의 울음소리.

그 곳에 그녀는 서 있었다.

겁에 질린 것도 괴물과 맞서 싸우려는 것도 아닌 마치 죽음을 반기는 듯한 모습으로. 

마침 혼자 사냥을 하던 것에 버거움을 느끼던 나는 소녀를 거뒀다.

그녀는 이내 휼륭한 파트너가 되었고 어느 날 이름을 지어달라던 그녀에게 언젠가 딸이 생기면 붙여주려고 생각했던 레이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회상에 잠긴 것도 잠시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그녀에게 어제 약속했던 물건을 건냈다.


"여기 너의 노예 증명서다. 이걸 노예 시장에 제출하면 노예의 낙인이 사라지니 이제 자유로운 삶을 살거라."


"네 그런데 주인님.."


말하기를 주저하는 레이나.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지 알기에 냉정하게 쳐내야 한다.


"앞으로도 계속 주인님 곁에 있을 수는 없을까요?"


"어제 말했을 텐데. 나는 너가 나에게 예속되지 않고 너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한다. 뭐 가끔 나를 보러 온다면 반갑게 맞이해주겠지만."


"네. 주인님. 그게 원하시는 바라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증명서를 받은 그녀였지만 어쩐지 그녀의 표정은 꽤나 슬퍼 보였다.


"주인님 여기에 적힌 말이 정말인가요..?"


"그래. 거기 적힌 모든 건 사실이다."


여태껏 감정 표현이 희박한 줄 알았던 그녀가 이렇게 떨면서까지 얘기하다니 

상당히 의외였다.

지금의 노예 생활이 좋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자유를 갈망해왔던 걸까.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건네준 것이 다른 종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그녀에게 준 건 얼마 남지 않은 내 모든 재산을 레이나에게 상속하고 시신은 꼭 가족들 옆에 묻어달라는 단 하나의 부탁을 적은 조촐한 유서였다. 


"어서 내놔라..!"


당혹감에 서둘러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를 낚아챘다.

이런 머저리 같은 실수를 하다니 너무 긴장감이 풀어진 걸까.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키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불편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녀였다.


"왜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그녀의 물음에 원래 줄려 했던 노예 증명서를 그녀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질문하지 않는 게 너의 장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만은 않구나. "


"하지만.."


"그만."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저지했다. 


"루빌 마을에 가면 내 이름을 대고 돈을 찾아가거라. 새 출발을 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될테니. 알겠나?"


"...알겠습니다. 주인님"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듯했지만 레이나는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이걸로 끝이다. 총명한 그녀는 제 앞길을 알아서 잘 헤쳐나갈 것이다.

그렇게 나는 뒤돌아서 이 곳을 떠날려고 했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강한 충격만 아니었더라면.


극심한 통증과 함께 내 몸뚱이는 앞으로 쓰러졌다.


"죄송해요. 주인님. 죄송해요..."


정신을 잃으면서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피가 묻은 무언가를 든 채 연신 사과를 하는 그녀였다. 



 

"내일 만약 모든 일이 끝난다면 나는 너를 풀어줄 생각이다."

 

"네? 저는 괜찮아요. 아뇨 오히려 싫어요."


"너도 많이 변했구나. 예전에는 고개만 끄덕일 줄 아는 인형인 줄 알았는데."


"..그 때는 세상 전부를 증오했거든요."


"아무튼 아까 말한 건 내 결정이다.  토 달 생각하지 말고 날이 늦었으니 오늘은 그만 자라."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을 뜨니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 내가 살았던 집. 추억과 악몽이 함께 깃듬과 동시에 내 최후도 여기서 맞이하리라고 생각했던 곳.

 

"머리는 괜찮으신가요 주인님?"


내가 생각했던 다른 점이 있다면 몸에 칭칭 감긴 밧줄과 레이나가 여기 있다는 것일까.


"너도 농담을 할 줄 아는구나. 너가 이래 놓고 걱정까지 해주다니."


"거기서 놓치면 영영 떠나버리실 거 같아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괜찮다. 무슨 오해를 한거 같은데 그냥 그건 언제 죽을지 몰라 늘 품에 가지고 다니는 유언장일 뿐이야. 너가 생각하는 그런 일들은 전혀 벌어지지 않을 거란다."


연신 사죄만 반복하는 그녀를 저지한 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호탕한 척 일부러 크게 말했다.


"거짓말."


"응?"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주인님을 몇 년동안 봐왔는데 저를 속이실 수 있을 거 같으세요?

제가 떠나면 당장이라도 죽으실 생각이셨잖아요!"


"..그래. 니 말이 맞다."


역시 레이나에게 얄팍한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 걸까. 

거짓말을 들킨 나는 그녀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에요? 가족분들이 그리워서 그래요? 제가 옆에 있어드릴게요. 

제 삶에 빛을 비춰주시고 이렇게 무책임하시게 가시면 저보고 어떡하라고요? 

차라리 저도 같이 죽.."


"진정해라. 레이나. 아무래도 내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줘야겠구나."


여태껏 본 적 없던 무너질 거 같은 그녀를 보고 나는 결국 모두 실토하기로 했다.


"사실 그 괴물이 죽은 건 처음이 아니다. 

옛날에 내 형제들은 손쉽게 그 녀석을 죽였지. 

하지만 정확히 666일 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녀석은 우리 가족을 찾아왔다. 그리고 모두를 죽인 뒤 사라졌지. 

그 놈에 대해 온갖 정보를 뒤지던 나는 이름조차 알아낼 수 없었지만 단 하나만은 확실했단다. 

그 놈을 죽인 존재가 살아있으면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말이야."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니 말도 안 돼요."


"나도 처음에 너와 같은 반응이었단다.

어차피 녀석을 죽이고 나도 같이 죽을 생각을 하자 무덤덤해졌지만.

믿지 못하겠다면 서재에 가서 찾아봐도 된다. 대부분은 고서라 읽지 못하는 게 태반이었지만 그 놈에 대한 정보는 싸그리 모았으니."

 

"분명 주인님이 죽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을 거에요..

저는 고서를 읽을 수 있으니 제가 정보를 찾아볼게요."


"어어 잠깐 레이나!"


서재로 급히 뛰어가는 그녀에게 밧줄은 좀 풀어주지 않으련이라는 말은 전해지지 않았나 보다.




하루가 지났다. 그녀는 간단한 요리를 들고 여전히 묶여 있는 나를 찾아왔다.


"풀어달라고요? 싫어요. 도망가실 수도 있잖아요. 식사랑 용변은 제가 도와드릴게요. 괜찮아요. 

부끄러워하시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저한테 계속 의존해주셨으면 해요. 

그나저나 음식이 식겠어요. 아하세요 아~"



이틀이 지났다. 그녀는 내게 자신이 알아낸 것을 보고하듯이 말했다.


"그 괴물의 정체를 알아냈어요. 그 놈은 블러드벤지라고 하는 악마였어요. 죄송하지만 주인님의 가족 분 중 한 명이 악마를 소환하신 거 같아요.

검은 표지에 자물쇠가 잠긴 책은 건들지 말라니. 조상 대대로 보관한 저주 받은 고서라고요? 알았어요. 아직 남은 책들은 많으니까요."  



사흘이 지났다. 그녀의 눈은 몰라보게 퀭해졌고 얼굴은 수척해졌다.


"악마를 죽인 자는 복수의 표식이 심장에 새겨진다. 그런데 어디에도 그 복수의 표식을 없앨 방법이 적혀있지 않고 다 쓸모없는 정보뿐이에요.

하지만 저는 꼭 찾아낼 거에요. 드디어 주인님과 함께 행복해 질 수 있는데. 저는 절대 포기 하지 않을 거에요."



나흘이 지났다. 그녀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미 헐거워질대로 헐거워진 밧줄을 풀고 그녀가 있을 서재로 향했다.

 

"아.. 주인님. 풀러나셨군요."


그녀는 흩뿌려진 종이에 뒤덮혀 엎드린 채 다크서클이 짙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주인님이 말씀하신 그 책 빼고 모두 찾아봤어요.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쓸모있는 정보는 없더라고요. 이렇게 되면 금서라도.."


"레이나."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제게 이름을 주신 그 날 저는 저주만 퍼붓던 신께 처음으로 감사했어요.

여태까지의 모든 고통이 당신이라는 빛을 만나기 위한 대가였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이렇게 희망을 잠깐만 보여주고 다시 뺏어가는 게 어딨어요?

이 빌어먹을 신이라는 녀석은!"


요새 잠을 자지 못한 탓일까

그녀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녀는 계속 열변을 토했다.


"사랑해요. 주인님. 이 세상 그 어떤 사랑보다도.

늘 주인님이 목적을 이루면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꿈꾸면서 혼자 바보같이 웃었던 적도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 무슨 상관이죠?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는데."


말을 끝마친 그녀는 이내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어야 할 사람이 함부로 정을 줬다가는 그 정은 남겨진 사람의 가슴에 추억이라는 이름의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녀를 떠나보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울음을 참으려고 숨죽이는 레이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포시 안아 줬다.


"미안하다 레이나. 내 생각이 아무래도 짧았던 모양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우리 같이 살아가자.

함께 살면서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품 안에서 계속 서글프게 울었다.




다음 날 나는 복수를 결심한 뒤로는 자본 적 없는 늦잠을 잤다. 

대충 옷을 챙겨입은 뒤 부산스러운 아래층의 소리에 이끌려 내려가니

레이나는 주방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아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마침 깨우려고 했는데."


"좀 더 자지 않아도 괜찮겠니? 요새 잠을 별로 못 잤을 텐데."


"잠만 자기에는 앞으로 남은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요."


처음 느껴보는 평화롭고 즐거운 그녀와의 식사를 마친 뒤 레이나에게 문득 생각난 것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서재를 정리해야겠구나." 


"아 제가 어지른 거니 금방 치울게요."


"아니야. 나도 같이 도와주마."


"아뇨 괜찮아요. 주인님은 쉬고 계세요."


나를 만류하려는 그녀에게 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내기 하나를 제안했다. 


"그럼 늦게 도착한 사람이 더 많이 청소하기 어때?"


"네? 주인님 그게 무슨."


"자 출발한다? 3.2.1."


이상하리만큼 필사적으로 뛰어가는 그녀를 추월할 듯 말듯 놀리며 달리니 어느 새 서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야. 내가 져버렸네. 생각보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구나."


"..."


숨을 고르면서 나를 절대로 서재 안에 들이지 않겠다는 듯이 문 앞을 막아서는 그녀를 보고 나는 무언가 잘못됨을 감지했다.


비키라는 말에 이내 힘없이 물러선 그녀를 뒤로 한 채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띈 것은 책상 위에 펼쳐진 채로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 책이었다.


"레이나. 무슨 짓을 한 거냐."

 

"죄송해요. 주인님 그 책이 저의 마지막 희망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거기서 주인님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뭐라고? 저 사악한 것에 답이 있었다고?"


"저 책에 따르면 복수의 표식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만약 악마를 처치한 사람이 아이가 생기면 표식이 그 아이에게 옮겨 간대요.

즉 저랑 주인님이 아기를 만들고 그걸 처리하면 주인님이 죽지 않아도 되는 거에요!" 


출구가 보이지 않던 미로에서 돌파구를 찾은 듯한 기분으로 미친 소리를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눈으로 얘기하는 그녀가 갑자기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시간은 좀 빠듯하겠지만 아기는 서로 간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하니 저희 함께 열심히 해봐요!"


"혈육을 그것도 아기를 자기 손으로 죽이자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소리니?

그런 짓을 저지르고 살아갈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다."


"주인님이야말로 무슨 말씀하시는 거에요?

아이는 또 가지면 되지만 주인님은 하나잖아요?"


"오..레이나. 저 금서에 홀리고 말았구나."


"아뇨. 저는 온전한 이성을 가지고 지극히 합리적인 얘기를 하는 거에요."


나의 부정에 해맑은 미소까지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를 보니

나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불경한 물건을 없애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내 몸은 얼마 못 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너 음식에 도대체 뭘 넣은 거야..?"


힘이 점점 풀리며 눈 앞이 빙글빙글 돌더니 고간에는 의지와 상관없이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생각보다 약효가 빨리 도네요."


"너가 만약 그런 짓을 할 생각이라면 나는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의 으름장에도 그녀는 여지껏 본 적 없던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처음은 강제로 하는 건 싫으니까요. 

그러니 제발 해달라고 애원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사랑해요. 주인님. 아니 서방님❤"





퇴근 후 쓰던 연재 소설 내용이 펑하고 날라가서 현타가 좀 씨게 오다가

예전에 써 보던 단편 하나 다듬어서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