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을 서둘러 마을의 중앙 광장으로 향한다. 약속시간 5분 전이지만, 지난 번에 그녀가 30분 전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지금 가도 이미 늦었을 것이다.


마을 중앙 광장, 이라고 해봤자 마왕군과의 전선과 가장 가까운 탓에 병참기지 비스무리하게 되어버린 마을이기에 싸늘하고 살벌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중앙 광장의 한복판에 그녀가 서있는 것만으로 왕궁의 꽃밭이 떠오를 정도로 광장의 분위기가 살아난다.


5.9피트 - 그러니까 180센치미터에 가까운 장신에 슬렌더와 육덕 사이의 경계에 위태위태하게 서있는,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과할 정도로 완벽한 몸매. 


몸에 두르고 있는 어두침침한 색의 망토가 그 몸매를 겨우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외모는 숨기지 못했다. 


살짝 촉촉하게 젖은 눈가에 남자를 홀리는 고양이 같은 눈매. 그녀가 바라보는 것만으로 남자의 음심을 자극하는 눈. 손을 대면 뺨 안에 손이 빠져들 것만 같이 부드러워보이는 피부,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살짝 윤기가 돌아 피부의 탄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내 눈에만 보이는, 회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길쭉한 붉은 색 뿔이 흉흉하게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예술품처럼 아름다워 보인다.


"엘리~!"


손을 들어 그녀에 흔든다. 그녀는 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확 들어올리더니 내 목소리를 따라 나를 바로 바라본다.


그리고 싸늘하기 그지없던 그녀의 표정에 봄이 찾아오듯 미소가 피어난다. 


도저히 스스로는 억누를 수 없다는 듯,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은 그녀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행복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마왕의 딸이자 제1군단장, 엘리자베스. 


나의 숙적이자, 나의 애인인 그녀와는 3개월째 교제중이었다.


*


전장은 잔인하다. 


이쪽 세계에 용사로서 불려온 뒤 수없이 많은 전장을 헤쳐나왔지만, 전장에서는 그 어떤 긍정적인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죽인 목숨, 내가 구하지 못한 목숨이 떠올라 손이 덜덜 떨려온다. 내 목을 스치고 지나간 칼들이, 그리고 내가 목을 갈라버린 그 칼들의 주인들이 나를 괴롭힌다.


마왕을 무찌르고 나면 끝이 날 것이라고, 그리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밀어붙여왔다.


전쟁은 길었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목숨을 빼앗고 나서야 비로소 마왕성의 바로 앞에까지 전선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최후의 보루에 내가 도달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나서지 않았던 것은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에 써야했기 때문임을 보여주듯, 순식간에 인류 측의 강자들을 해치워냈다. 마침내 내 앞에 그녀가 당도했을 때, 나는 새삼 스스로가 얼마나 평온한 전투를 해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성검과 성갑, 그리고 성유물을 두른 나와 대등한 적. 마검을 쓰지도 않은 채 손톱과 순수 무력만으로 나와 대적하는 적.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절대적 강자였던 나는 싸움이 아니라 벌레를 짓밟는 학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전장에 나온 병사들과 같은 시각에서 이 전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전선은 지지부진해지고, 양 측에서 부상자가 속출할 때 즈음에.


엘리자베스는 홀연듯 이 마을에 나타났다. 


마을 광장 한복판에 선 채로 불안한 눈으로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며 성검을 꽉 쥐었다. 


전선이 지지부진하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의 존재 탓. 내가 이곳에서 그녀와 공멸한다면 전쟁은 어찌 되었든 인간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다가간 내게,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겨우 말을 걸어왔다.


축제날, 왁자지껄한 거리에 부모 몰래 처음으로 나들이를 나온 귀족집 아가씨처럼, 시선은 흔들리며 볼을 새빨갛게 물든 채로, 나보다 10cm는 큰 그녀가 자신의 덩치를 알고 있다는 듯 엉거주춤하게 무릎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을 걸어왔다.


"저기... 혹시 가까운 옷가게가 어딘가요?"


"...네?"


옷가게로 가는 동안, 아무 말 없이 따라오는 그녀를 흘끔흘끔 훔쳐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따라오기만 했다. 


뿔에 걸린 인식저해 마법 덕에 난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녀 스스로가 이 상황이 부끄러운지 그녀의 둥근 귀가 새빨갛게 물든 채 원래의 색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입니다. 최전선인 탓에 그리 좋은 옷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닙니다."


여성복을 입을 이유도, 입을 사람도 없는 최전선의 개척마을에 '개척마을에 의복점이 있는 것은 곧 왕국의 국력을 상징함'을 주장하는 왕국의 늙은이들 덕에 차려진 의복점이었지만, 지금만큼 왕국 늙은이들의 고집이 고마울 때가 없었다. 


"아, 그럼..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옷가게 안으로 들어가던 그녀가 문에 뿔이 걸려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까지 본 이후, 차고 있던 성검을 울타리에 기대어 둔 채 생각에 잠겨들었다. 


전장에서 겨루던 마왕의 딸이 인간의 마을에서 여성복을 구하러 올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 의심과 의문이 머리를 스쳐지나가지만, 빈약한 가능성들을 머릿속에서 털어낸다. 전장에서 투구를 뒤집어쓴 채 마주하는 탓에 나를 알아보지 못했음에도, 그녀의 태도에서는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되려 마을의 축제에 처음 구경을 나온 귀족가의 아가씨와 같은 모습..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간 그녀에게 나는 동정을 하는 것일까. 


아니, 그것 역시 바보 같은 질문이다.


마왕군에게 있어서의 나는 그녀와는 아무 차이가 없을 테니까. 군단장들과 마족 군인들을 수없이 해치워왔으니까.


팔짱을 낀 채로 톡, 톡 검지손가락으로 팔을 두드렸다. 


딸랑-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은 문을 열고 나오는 그녀를 보았을 때, 스스로가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침침하기 그지없는 마을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밝은 분홍색, 북실북실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유가 있는 드레스지만 허리의 끈이 몸의 곡선을 드러내주는 덕에 살이 쪄 보이지는 않았다. 


밝음을 잃은 회색의 머리카락에도 핑크색 핀이 꽂혀 이마를 깔끔하게 드러내었고, 약간의 홍조를 머금은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했다.


양 팔에 옷을 가득 담은 봉투를 낀 채, 그것도 모자라다는 듯 품에 옷 두 벌 정도를 꼭 끌어안은 그녀는 헤픈 웃음을 지으며 가게를 나왔고, 그대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고, 이윽고 웅얼거리며 아무도 묻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집안 분위기 상 이런 옷을 못 사서요... 사는 김에 이것 저것 사게 되니까.."


그 때 무슨 생각이었을까 지금도 가끔 밤에 이불을 팡팡 걷어차긴 하지만, 지나치게 용기가 넘쳤던 그 때의 나는 울타리에 기대어 둔 성검을 쥐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 옷을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을 붙잡았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흐에?"


더 알고 싶었다.


전장에서 만나던 이 여자. 인류의 가장 큰 위협인 그녀에 대하여.


인간을 무자비하게 해치우는 자의 유흥, 초식 동물들의 문화로 유희를 즐기는 잔인한 짐승에 불과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나처럼 검을 쥔 채 전장에 내몰리는, 행복을 꿈꾸는 여인이자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공주인가.


*


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 이 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반쯤 마신 커피가 든 잔을 들어올리며 맞은 편에 앉아있는 엘리를 슬쩍 살폈다. 


170cm에 겨우 턱걸이를 하는 나보다 최소 10cm는 큰 키 탓에 일어서면 그녀를 올려다봐야 했지만, 그녀의 사기적인 비율 탓에 앉아있을 때에는 눈높이가 딱 맞았다.


엘리는 어깨가 드러나는 남보랏빛의 드레스를 입은 채 양 손을 다소곳이 무릎 위에 모으고는 덜덜 떨고 있었다. 


추위 때문은 아니라는 듯,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새하얘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벌써 30분이 넘도록 한 마디도 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늘 날씨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녀와 만나지 못한 1주일간 무엇을 했는지까지 이어진 대화에서 그녀의 대답은 계속 "응."과 "아니.", 그리고 그 사이의 어딘가를 맴돌 뿐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내게 할 중요한 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정작 장본인이 저렇게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데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살짝 가슴이 답답해져 커피를 한 모금 마셨지만, 이제는 식어버린 탓에 최전선의 형편없는 원두맛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나도 모르게 눈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표정을 본 엘리는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는지 입술을 꽉 깨물며 애써 입을 열었다.


"...유하. 할 말이 있어."


두려움을 애써 참는 표저응로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녀의 미모는 그녀의 슬픔마저도 비통한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들었다. 나는 콩만큼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운 뒤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얘기하려나 기다리고 있었어."


"...응."


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지만 여전히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한 채 양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 쪽으로 향한다.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따라오라는 눈짓을 한다. 그녀는 후우, 하고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결심했다는 듯 당당하게 일어나 나를 따라 카페의 출구로 걸어나왔다


무슨 사이냐는 듯한 종업원과 몇몇 기사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입구에서 기다리다 뒤따라 나오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끌었다. 귀족가의 아가씨를 모시는 듯한 내 움직임에 그녀는 당황한 듯 조금 머뭇거렸지만 이내 내 손에 스스로의 몸을 맡겨왔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서서히 별들과 달이 하늘에 자리잡기 시작하는 시간대에, 그녀와 처음 만났던 중앙 광장에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할 얘기가 있다면 하라는 내 진중한 눈빛에 그녀는 마지못해, 그렇지만 언젠가는 했어야 했다는 듯 자신의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리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광장에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는 뜻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엘리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징그럽지. 뿔."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방금 여태껏 감추고 있던 뿔을 드러내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니 엘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알아. 놀랍겠지. 여태껏 마족이랑 사귀고 있었다니, 나 같아도 증오스러울 거야."


'아니,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는데요.'


그렇지만 이 말을 하려면 내가 용사인 것부터 시작해서 여태껏 마족, 그것도 마왕의 딸이라는 걸 알고도 그녀와 사귀어왔다는 걸 털어놓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 엘리는 자신이 나를 속였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 쪽으로서도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까, 빈약한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는 내게 엘리는 냅다 폭탄 발언을 내던졌다.


"네가 싫다면 이대로 사라져줄게. 대신 이 마을에서 내일까지 떠나. 내일부터 마왕군이 최후의 공격을 할 예정이거든."


엘리는 소중하게 여기던 것이 분명한 남보라색의 얇은 드레스의 치마를 꽉 붙잡았다. 손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그녀의 고개가 숙여진 채, 눈물이 한 두방울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진다. 


'...바보구나,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손을 붙잡는다.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빈 오른손으로 성갑의 투구를 소환해 텁 덮어썼다.


"미안, 엘리. 내가 용사야."


"...어?"


'음.'


엘리의 눈이 이렇게 예뻤구나. 


눈동자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눈을 크게 뜬 엘리는 이윽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에? 어? 거리며 어버버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말캉한 두 언덕... 아니, 언덕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산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크기의 그것들이 뺨에 와닿았지만 지금 그런 것에 신경이 쏠릴 정도로 하반신에 지배당하는 남자는 아니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모습이 되었지만, 하반신에 필사적인 통제와 그나마 남자답게 그녀보다 두꺼운 팔뚝 덕에 우스꽝스러운 광경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내가 해야 하는 말을 했다.


"미안, 엘리. 처음부터 너에게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용사야? 유하가 용사라고?"


아직도 아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엘리는 팔을 들어 나를 꼭 끌어안은 채로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더 파묻... 아니, 말이 헛나왔다. 그녀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응."


"....왜? 왜 나랑 사귄거야?"


글쎄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무슨 이유로 너를 여자친구로 받아들이고 싶었을까.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까.


바보 같은 의문이다. 해야 할 말은 정해져있었다.


"사랑하게 되어버려서. 너가 나를 사랑해줬듯이, 나도 너를 사랑하게 되어버려서."


"....으웃."


엘리는 울음을 애써 참으며 내 머리를 꾹 끌어당겨 안았다. 어떤 장비도 없이 스스로의 신체능력만으로 마왕군의 1군단장을 얻은 그녀답게 손에는 힘이 꽉 들어가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그녀와 내 키는 얼추 10cm, 혹은 그 이상 차이가 난다. 따라서 나는 그녀의 훌륭한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상태고.


그 상태에서 엘리의 손을 대면 어떤 저항도 없이 손가락이 들어가는 부드러운 피부에 그녀의 가공할 힘으로 끌어안아지고 있다는 것은-


"...엘리, 엘, 나, 숨.. 숨막ㅎ.."


"유하? 유하! 잠깐만, 괜찮아?!"


가슴 사이에 파묻혀 질식사할 뻔 했다는 것이다.


...엘리의 몸에서는 달콤한 포도향기가 났다.


그냥, 그랬다고.


*


마계 공작이자 언데드로 이루어진 6군단의 군단장, 리치 케르투스는 뼈 밖에 남지 않은 제 손 끝을 물어뜯고 있었다.


살과 피가 진작에 말라버린 몸이기에 살점이 뜯겨나가 유혈이 낭자하는 일은 없었지만, 늘 권위와 체통을 중시하던 그가 이토록 흐트러져 있다는 것을 다른 공작들이 본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로서도 도박수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도박수. 포커의 첫 패가 오픈되었을 때에 모든 돈을 밀어넣는 것처럼 위험하고 위태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마력반응!'


그는 저 멀리에서부터 날아오는 순간이동의 마력반응에 헐레벌떡 순간이동 마법진 앞에 섰다. 이윽고 순간이동의 마법진에서 내려선 것은 마왕의 딸이자 1군단장, 그리고 총사령관인 엘리자베스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그녀의 애인인 유하가 보았다면 깜짝 놀랄 정도로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매, 절벽 위의 꽃 같이 위태로우면서도, 봄날을 맞은 꽃처럼 화사하게 만개한 그녀는 어딘가로 사라진 듯.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은 수천, 수만의 인간을 도륙한 잔혹하기 그지없는 고고한 포식자였다.


"오오, 오셨습니까, 사령관님!"


케르투스는 고개를 연신 숙이며 그녀를 영접했지만, 그녀의 뒤를 따라 왔어야 할 용사가 없다는 것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불길함은 엘리자베스가 아무렇게나 내던진 스크롤을 받아들었을 때에 현실이 되었다.


"...사령관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케르투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애써 스크롤을 갈무리해 제 품 속으로 집어넣으려 했지만, 떨리는 손 탓에 제대로 되지 않아 인상을 확 찌푸렸다. 


물론 뼈다귀 밖에 남지 않은 그의 표정을 알 리가 없었던 엘리자베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마법진에서 걸어나와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나갔다.


"쓸 일이 없었으니 돌려준 것 아니겠는가."


"오늘 용사를 만나러 간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게..!"


케르투스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억울함과 분노를 내뱉으려다 혼신의 힘을 다해 스스로를 억눌렀다. 순간 싸늘하기 그지없는 감각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간다.


아마 그녀로서는 감정이 격해진 그를 한 번 돌아본 것에 불과하겠지만, 케르투스는 그 순간에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이미 저 옛날에 스스로를 위하여 짓밟고 비웃었던 그 죽음이 아닌,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지는 죽음의 공포를.


그가 딱딱하게 굳어버리자 엘리자베스는 그가 제정신을 차리고 따라올 수 있도록 조금 천천히 걸었다. 애써 공포를 잠재운 케르투스는 최대한 평온하면서도 침착한 어조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마왕성의 보물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정신지배' 스크롤을 드린 것은, 사령관님께서 그것을 용사에게 사용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대답 없이 계속 걸었다. 케르투스는 다시금 끓어오르기 시작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계속 내뱉었다.


"용사를 잃은 인간들은 붕괴할 것이고, 그것이 마왕님께서 갑작스레 쓰러지신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전쟁은 종결될 것이다."


찰칵-


아무도 없는 복도에 선 채, 제 방의 문을 열며 엘리자베스는 그리 말했다.


"나와 용사가 결혼하며 마족과 인간의 융합을 이뤄낼 테니까."


"....."


케르투스는 순간 말문이 막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문을 열어둔 채 제 방에 놓인 응접용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들어오게. 차나 한 잔 하지."


"...."


차를 머금을 입도, 차를 음미할 혀도 없는 자신을 놀리는 듯한 그녀의 말에도 그는 저항하지 않고 문을 닫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말 그대로일세. 용사, 유하와 다음 달에 혼인식을 치루기로 했어. 전쟁은 휴전의 형식으로 마무리할 것이고."


태연하게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그녀를 보며 부아가 치밀어올랐지만, 케르투스는 여태껏 살아온 삶의 관록을 백분 활용해 그녀와 오늘 만난 이후 처음으로 제 감정을 제대로 관리했다.


"마왕님께서 그걸... 아니, 애초에 왜 용사와 혼인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사랑하니까, 아니겠나."


당연하다는 듯 그리 대답한 엘리자베스는 응접용 탁자의 서랍에 들어있는 담배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녀의 손 끝에서 피어오른 한 줄기의 불꽃이 연초의 끝에 불을 붙이고는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홀연히 사라졌다.


"후우...."


연초의 맛은 지독하지만 동시에 사랑스럽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주는 것에는 이만한 것이 없다. 


엘리자베스는 유하 앞에서는 피지 못하는 풀떼기의 맛을 음미하며 그리 생각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케르투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마왕님이 갑자기 쓰러지시고, 마왕군은 수세에 몰려 하루하루 근근히 버티고 있으며, 그 오랜 세월동안 쌓아놓은 언데드들도 이제는 바닥을 보이기 직전이다.


부상자만 늘어날 뿐 사망자는 없으며, 겨우 생긴 인간 측의 사망자들도 꾸역꾸역 그 시체를 회수하여 축복을 통해 언데드화를 막는다.


마왕군은 지금 위기였다. 인간군이 무리를 해서 밀어붙인다면 그대로 넘어갈 정도로.


그런 상황을 뒤집기 위해 다른 공작들의 동의나 마왕의 허락도 없이 국보 중 하나인 '절대 정신지배' 스크롤을 그녀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마왕의 딸과 용사의 결혼? 휴전?


"....안 되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는 한이 있더라도-"


"케르투스."


오싹-


죽음의 두려움. 잊고 지내고 있던, 그 가능성.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라이프 베슬이 칼에 베인 듯 아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 그리 말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그녀의 묘하게 취한 듯한 눈동자만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소름이 돋는다.


'...이 여자는.'


자신이 알고 있던 공주님이 아니다. 마왕군의 제일 앞에 서서 그 잔혹하기 그지없는 용사의 칼날을 온몸으로 막아내던, 헌신적인 공주가 아니었다.


지독하게 독선적이고, 지독하게 잔인하며, 지독하게 사랑에 취해버린.


사랑이라는 열병에 중독되어버린 여자일 뿐이었다. 


케르투스는 조심스레, 아주 조심스레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지금 해치워야 한다.'


이 여자가 총사령관인 이상, 마왕군에 승기는 없다. 


굴욕적인 패배도, 마왕의 딸이 인질로 잡혀가는 그림이 나오더라도, 이 여자는 아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나라에 대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가꾼 이 마왕성에 대하여 어떤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


잔혹하면서도, 이 나라를 제일 신경쓰는 그답게 망설임이 없는 판단이었다.


케르투스의 손가락이 품에 담긴 스크롤에 닿았을 때, 케르투스는 스크롤을 발동시켰다.


"정신지배!"


그리고 스크롤은 불타오르며 발동-


스스슷-


하는 대신, 그대로 재로 변해 바닥에 흩날렸다.


케르투스는 허망하게 바닥에 흩어져버린 국보를 내려다보았다. 


저 먼 옛날, 선과 악이 충돌하던 최초의 시대에 악마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위대한 스크롤.


마법사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리치가 된 그에게 있어, 추구해야 할 궁극의 진리와도 같았던 그 스크롤은.


아무런 힘도 내지 못한 채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케르투스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후우... 맛있군."


담배를 다 핀 엘리자베스는 담배를 그대로 응접용 탁자에 비벼껐다. 


환하게 밝혀져있던 그녀의 방 안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죽음을 극복해낸 리치인 케르투스의 눈으로도 꿰뚫어볼 수 없는 짙은 어둠이.


그 안에서 빛나는 것은-


지독하고 오만하게 빛나는 엘리자베스의 붉은 눈 밖에 없었다.


[케르투스.]


"컥, 커흑-!"


단순히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 생명력이 깎여나간다. 케르투스는 제 가슴팍을 부여잡고 온 몸을 비틀었다.


엘리자베스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마법도 펼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냈을 뿐.


회색의 머리카락은 새카맣게 물들었고, 뾰족하고 길쭉할 뿐이었던 그녀의 붉은 뿔은 잔뜩 뒤틀린 채, 무언가를 갈구하듯 여러 갈래로 나뉘어 하늘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래, 무언가를 갈구하듯 하늘로 뻗은 손처럼.


"케흑, 콜록-!"


이제는 호흡을 할 폐도 남아있지 않음에도 그녀의 존재감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쉴 수가 없다. 케르투스는 그녀의 응시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덜덜 떨 수 밖에 없었다.


'틀렸다.'


모든 판단이 틀렸다. 자신의 도박수는 처음부터 틀려먹었다.


판 밖에서 돈을 거는 입장이라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던 그는 그녀의 판 위에 올라가있는 카드 중 하나에 불과했다.


[마왕... 아버지가 어째서 갑자기 쓰러졌다고 생각하나.]


엘리자베스는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들며 그리 물었다. 케르투스는 굳이 되묻지 않더라도 그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담배의 끝에 불을 붙이며 그에게 다시금 물었다.


[마계 공작의 몇이 나를 따를 것 같은가. 셋 밖에 없는 대공은? 후작들은? 백작 이하의 마족들은?]


묻지 않더라도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케르투스는 체면조차 내버린 채 바닥을 기어 겨우 그녀의 방에서 도망쳐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생각에 잠겨들었다.


자신의 아버지- 마왕은 좋은 지도자였지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강하다는 이유 만으로 전장에 내몰려,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을 앗았다. 


그녀는 꽃이 좋았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어머니가 자신이 어릴 적에 심어놓은 꽃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자연스레 포근해진다.


그녀는 귀여운 옷이 좋았다. 그녀 스스로도 너무나 잘 자랐다는 자각이 있는 몸임에도 귀여운 옷을 입으면 그런 부담감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그녀는 인형이 좋았다. 뜨개질도, 요리도. 어머니와 함께 하던 인형극도. 모두가 좋았다.


그리고 전장에 내몰렸다.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설만한 남자를 만났다.


엘리자베스는 담배를 문 채로 바닥에 흩어진, 재가 되어버린 스크롤을 발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사랑스러운 자신의 애인은, 오늘도 용사다웠다.


전장에서 자신에게 검을 겨눌 때부터, 그를 찾아 인간들의 마을에 갔을 때, 그와 첫 교제를 시작했을 때, 그리고 오늘까지도 그는 용사다웠다.


[...흐훗.]


자신도 모르게 나와버린 바보 같은 웃음소리에 자신이 깜짝 놀랐다. 


어쩔 수 없다. 


그만큼 그가 사랑스러운 것이니까.


자신의 가슴 사이에 얼굴이 파묻힌 채, 질식할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으면서도 자신의 가슴에서 떨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


전장에서 자신을 마주할 때에, 온갖 번민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적이라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들여다본 그.


그보다 훨씬 몸이 큼에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을 제대로 여자로 바라봐준 그.


마왕은 자신에게서 사랑하는 것을 모두 앗아갔고, 그는 마왕이 앗아간 사랑들의 텅 빈 자리를 메워주었다.


'아아..'


또 다시, 또 다시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온다.


수도 없이 많은 강자들을 잡아먹고 이런 힘을 손에 넣었음에도 이 아릿한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열병이 주는 두근거리면서도 아릿한 아픔.


[...유하.]


엘리자베스는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홀로 중얼거리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언젠가 그와 함께, 이 방에서 잠에 들 날을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