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yandere/72612790?mode=best&p=1 -1편


날이 밝은 후, 

기사단장의 부름에 훈련장으로 향하던 중 

처음 들어보는 괴성이 들렸다.

 

키에엑- 

케륵케륵-

 

그 곳엔 철장에 갇힌 

수많은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설마..

 

불현 듯 불길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나를 보며 짓고 있는 미소가

뒤틀려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용사님께 필요한 건 실전 경험입니다.

 

이제부터 저희가 고블린 한 마리씩을 내보낼테니,

‘모두 죽이시면’ 됩니다.

 

철창 문이 열리고 

저항의 의지마저 꺾여버린 고블린이 기어나온다.

 

주변의 기사들이 내게 검을 쥐어주고

일제히 내게 저 혐오스런 괴물을 죽이라고 소리친다.

 

내 갈 곳 잃은 시선을, 

 

열의에 찬 광기에 매몰된 기사들의 시선이 뒤쫓아온다. 

수많은 시선이 옥죄어온다.

 

다시금 앞을 쳐다본다.

 

내게 생사여탈권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일까.

이 혐오스럽게 생긴 괴물은 필사적으로 매달려온다.

 

살기 위해서-

 

하지만 그 모든 몸짓과 울부짖음은

사슬로 결박된 내 족쇄를 풀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검을 쥐고 있던 팔은

주변의 시선과 함께 서서히 들어올려진다.

 

죄악감이 등 뒤를 타고 엄습해온다.

식은땀이 내 몸을 타고 마구 질주한다.

 

이 검을 내리치는 순간 

다시는,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다. 

 

나도 널 죽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널 죽이지 않으면 나는 죽어

살기 위해서- 

 

푹찍.

 

낯선 이질감이 뱀이 되어,

팔을 타고 기어올라 사정없이 

내 몸을 물어뜯었다.

 

이 독은 

괴물이 되어버리고 만,

내 몸과 마음을 영원히 배회하겠지.

 

철창 안에 갇힌 모든 

고블린들이 죽고 나서야,

 

기사단장과 기사들의 표정은

부드러운 선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용사님!

 

역시 여신님께 선택받은 자답게,

고블린들을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단칼에 베어넘기시다니!

 

용사님도 저 간악한 괴물들을 혐오할 줄 알았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서 쉬어도 좋습니다.

 

 

..혐오인가

 

묘혈에 아무렇게나 파묻혀지는 고블린들의 

역한 시체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러붙는다.

 

난 억지스런 웃음을 기사단장에게 지어주곤

도망치듯 자신의 독방으로 달음박질쳤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한 쌍의 시선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방에 도착하고 나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달은 

낮에 일어났던 일 따위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환하게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모습은 내 모습과 대비되어

...이다지도 욕될까.

 

잠깐 사색에 잠긴 사이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제 보았던 자신을 7황녀라고 소개한 얀진 공주가 

창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 타칭 용사 군!

 

갑작스런 방문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난 예의를 차리곤 자리를 권했다.

 

 

 

생글생글 웃음을 짓고 있는

이 공주는 내게 무슨 용건일까.

 

-만나서 영광이옵니다. 얀진 공주님.

제게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시옵소서.

 

내 인사가 끝나자 

생글생글 웃고 있던 공주의 얼굴은 

비죽이 입꼬리를 올리며 일변했다.

 

지금까지의 미소는 거짓이었던 것처럼.

 

-다 봤어.

 

-..무엇을 말입니까?

 

-네 물음에 답해주자면 

 

네가 고블린들을 죽이면서 죄책감에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랑 

아니면 이건 내가 살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자위하는 모습?

 

아! 자기혐오로부터 도망치는 모습 등... 다 봤거든..!

 

공주라는 작자의 말을 듣자

내 몸에 퍼진 독들이 발작적으로 몸 안을 헤집는다.

 

(아니야.. 아니라고..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라고..)

 

공주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맞아.. 내 잘못이 아니야..!!

제발 날 이 이상 몰아붙이지 말아줘..)

 

-맞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지.

 

(제발... 뭐..?)

 

-아무것도 모르는 널 부른 건 빌어먹을 돼지새끼와 귀족 놈들,

그리고 여신을 숭배하는 버러지같은 교단 놈들이지.

 

타인의 손에 휘둘렸을 뿐이잖아?

도구처럼.

 

어느샌가 자신을 변호해주고 있는 

얀진 공주의 말에 나는 이성을 되찾았다.

 

공주는 조소했다.

 

-나도 너랑 똑같은 처지거든.

 

용사라고 부르면서 네 이름을 물어볼 생각도,

알 생각도 없는 건 우습지 않아?

 

도구에겐 이름조차 과분한 모양인가봐.

 

나처럼 말이야. 

 

-얀진 공주님처럼이라 하심은..?

 

-난 사생아라서 어렸을 때부터 쭉~ 암살 위협을 받았거든.

 

그래서 살기 위해 

무해한 척 천진난만한 모습을 연기해왔어.

 

그러다 최근에 내 모습을 보고 

욕정한 더러운 놈들에게 혼인 압박이 들어왔었지.

 

-혼인 압박이요..?

 

-애비라는 작자가 날 도구로 보고 

어디다가 팔아넘길까 품평하면서 나에게 혼인을 강요했었어. 

 

그러다 네가 나타난 거야.

 

여기서 이름도 모를 돼지한테 팔릴 것인가,

아니면 여정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을 것인가.

 

후자가 내게 매력적이지 않겠어?

그래서 네게 어제 부탁했었던 거야.

 

-명령을 하셨다면 전 따랐을 것입니다.

 

-명령이라니, 내겐 아무런 힘도 없어.

그래서 너한테 그런 식으로 접근한 거지.

 

그런데 네 오늘의 모습을 보니

나도 널 도구로써 생각한 게 퍽 우습더라.

 

도구처럼 부려지는 걸 혐오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널 이용하려고만 한 게 

너무 미안해서 이렇게 찾아와서 다 말해주는 거야.

 

너는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해서.

 

그렇게 말하며 

처연하게 웃는 얀진 공주의 모습을 보니,

 

가슴 속에 격랑이 끓어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계에 떨어진 자신과,

태어나자마자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이 소녀는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도구로 이용당하고,

버림받아 죽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기 위한 평생의 발버둥.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가여워서,

그러면서도 타인을 신경써주는 그 마음이

너무나도 사무치게 갸륵하고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공주님 잘못이 아니에요.

살고자 한 게 죄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원해서 이 곳에 떨어진 게 아니잖아요.

제가 공주님을 도와드릴게요.

 

갑자기 내 품에 안긴

얀진 공주님은 당황한 것 같았으나, 

곧 머리를 가슴에 가만히 기댔다.

 

얼마 후, 감정을 추스른 난 

황급히 얀진 공주님을 떼어내었다.

 

-죄..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큰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얀진 공주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괜찮아.

그러고 보니 아직 당신의 이름을 듣지 못했네.

이름을 알려주겠어?

 

-제 이름은 얀붕이입니다.

 

-얀붕이라.. 좋은 울림이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볼게.

그럼 다음에 보자.

 

-조심히 들어가세요!

 

난 고개를 꾸벅 숙였고,

얀진 공주님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셨다.

 

침대에 몸을 뉘이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달 주위에 두 개의 은색의 별이 

환한 모습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난 오늘의 만남을 회상했다.

 

얀진 공주님은 강하신 분이니,

곧 제 진면목을 드러내실 수 있을 거야.

 

그 모습을 보며 점차 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