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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상관없어요... 이제 다 원래대로 돌아왔으니까. 그대만 데려가면 돼."


밀리아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풀고 미소 지으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딸려오는 서슬 퍼런 대검이 마치 나를 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말을 안 듣는다면 강경책을 쓸 겁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진짜 나한테 쓸 작정이었는지 그녀는 대검을 들어 올려 내게 겨누었다. 칼날이 내 어깨에 내려앉으며 당장이라도 베어낼 것 같은 기세를 풍겼지만 다행인 것은 내가 반항만 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정말 이걸 휘두를 일 따위는 없다는 것이었다.


"저기, 일단 우리 대화로 해결"


-쾅


"죄송합니다."


하지만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할 생각도 없었는지 내가 입을 열자마자 칼 끝을 조금 휘둘러 내 옆의 지면을 박살 내며 강제로 침묵하게 만들었다.


"닥치세요. 기껏 저한테서 도망쳐 놓고 뻔뻔하게 바람이나 피우고 다닌 호색한의 말을 들어줄 것 같습니까? 이번에 궁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못 나갈 줄 알아요!"


"너나 닥치고 우리 서방님한테서 떨어져!"


그녀의 분노에 찬 선언이 이어지던 도중 밀리아나의 배후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두 개의 이빨을 박아 넣으려 했다. 하지만 직전 밀리아나가 대검을 재빨리 움직여 파티마의 단검을 막아내었다. 무기를 교차한 둘은 힘싸움을 벌이며 서로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파티마, 이 개새끼가! 쓸모를 다했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지 주제도 모르고 끝까지 남의 남자한테 들러붙어!"


"뭐? 네 남자? 이게 하룻밤도 같이 못 지내본 게 까불어!"


"예, 예!?"


"이건 몰랐지!? 나랑 서방님은 어제 첫날 밤도 같이 보낸 사이야! 그런데 감히 누구 보고 내놔라 말아라야!"


"당신!"


'거짓말이죠?' 하는 뒷말이 나오다 만 눈빛으로 그녀는 애절하고 다급하게 나를 돌아보며 사실여부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파티마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단박에 부정을 하지 못하고 잠깐 망설이자 밀리아나가 더욱 동요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분명 네년이 환술로 홀린 거야! 이 창녀새끼야아아아아!!!"


"훗! 거짓말 하는 건 너야, 서방님이 직접 나를 안아 들고 침실로 가셨다고! 너희 둘이 손가락만 빨면서 내 뒤꽁무니나 쫓을 때 나는 간택 받았단 말이야!"


"니가 강제로 묶어 놓고 덮쳤잖아! 그리고 누가 들으면 우리가 끝장 본 사인 줄 알겠다! 키스만 해 놓고 설명이 왜 이렇게 장황해!"


"애무도 했잖아요!"


"야!"


"용서 못해! 그대여, 잠시 기다리세요! 이년만 정리하고 금방 더러워진 걸 씻어 드리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분노에 찬 밀리아나가 파티마를 밀치고 있는 힘껏 대검을 휘두르자 파티마 주변의 땅 덩어리도 부숴지며 수많은 파편을 발산했다. 덕분에 겨우 걷히던 연기가 다시 무성해졌지만 파티마는 고작 몇 초 만에 다시 한 번 밀리아나의 배후에 나타나 단검을 휘둘렀다.


"학습능력도 없는 버러지가! 먹히지도 않는 같잖은 수를!"


밀리아나가 다시 한 번 배후를 향해 대검을 휘두르자 이번에는 파티마가 이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몸통이 절단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시체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누가 없다고?"


-파악


검을 휘두르며 전후를 반전 한 밀리아나의 배후에 다시 한 번 파티마가 나타나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단검을 찔렀다. 보통이라면 눈치 채지도 못하고 꿰뚫릴 게 분명했지만 밀리아나는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파티마의 자세를 망침으로써 공격을 막아냈다.


"빌어먹을 년아! 주제도 모르고 남의 것에 손을 대!"


"썩을 도적 주제에!"


서로 열이 바짝 오른 두 명은 정신없이 공방을 주고 받으며 한순간에도 공중에 섬광과 잔영을 수십 개씩 남기고 있었다. 그제야 밀리아나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생각한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크레오메를 찾았다.


"크레...!"


"...미안."


오래 걸릴 것도 없이 곧바로 내 근처에 있던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전신갑주를 입은 기사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 이름이 아니고 이딴 악마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건가요 당신?"


그리고 그보다 조금 떨어진 옆에는 신부처럼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이레시아가 차가운 눈으로 나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결혼식 당일 날 신랑의 불륜녀를 붙잡은 모습 같았다.


"이레시아."


"그래요, 당신은 내 이름을 불러줘야죠. 이런... 더러운 년의 이름이 아니라요."


-짝


"퉷! 이게 무슨 짓이야!"


"입 다물어, 더러운 것아. 멋대로 내 남자한테 꼬리 친 주제에 그 뻔뻔한 태도는 뭐야? 네가 지금 나한테 억울해 할 처지야?"


그녀는 장갑 입은 손으로 통성명도 하지 않은 크레오메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그리 많았는지 쉴세 없이 뺨을 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처음에는 반항을 시도하던 크레오메였지만 계속해서 늘어나는 구타에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발악이 아닌 핏방울 밖에 남지 않았다.


"같잖은 년이 감히 내.것.에.손.을.대?"


"헤윽..."


방울지며 입 밖으로 떨어져 나가던 핏방울은 어느새 줄기가 되어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흐르고 있었다. 맹목적으로, 필사적으로 나를 믿고 난생 처음 미지의 땅으로 발을 들였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된 그녀에게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이레시아를 말리기 위해 그녀에게 제동을 걸었다가는 오히려 감싸주는 거냐며 더 폭주할 게 불 보듯 뻔했기에 구경만 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그녀도 살고 나는... 끌려가지 않기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분명 이런 상황이 생기면 벗어날 방법 몇십 가지 정도는 생각했었던 것 같았지만 도저히 그게 뭐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도시 근처에서 잡몹이나 도적들이나 때려잡던 나 따위로는 도저히 이 혼파망을 타개할 방법이 없음이 당연한 일이었기에 뭐가 떠오를 리가 없었지만 혼란에 휩싸인 내 이성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러운 새끼. 너는 더 맞아야 돼."


"이레시아. 잠깐만!"


"네 당신. 당신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집에서 달아나고 세 번이나 바람 피운 대가는 조금 후에 치르게 해줄게요."


"..."


잠시 후 입안이 완전히 헌 크레오메가 거의 의식을 잃자 이대로 가면 정말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내가 황급히 끼어들자 이레시아는 바로 내 쪽을 돌아보며 환한 미소로 섬뜩한 소리를 했다. 덕분에 잠깐 움찔한 사이 그녀는 멈추지 않고 경고를 이었다.


"결혼식 때 손 잡고 행진은 해야 하니 팔다리는 자르지 않을게요. 대신 앞으로 평생 목줄 차고 살 각오하세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목줄 끝을 이레시아에게 붙잡힌 채 네 발로 엎드린 내 모습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몸서리 쳐지는 끔찍한 미래의 상상도에 이성이 돌아온 나는 침착하게 나의 오의, 입 털기를 시전했다.


"이레시아, 전에 얘기해준 그 꿈 기억하지?"


"당연하죠. 당신 머리카락 한 올도 다 기억하는데."


-콰앙


"사실 너한테 말 못한 게 하나 더 있어!"


"그게 뭐죠?"


"마왕이 부재하면 통제를 잃은 마수들이 날뛰면서 개체수가 폭증하고 원래 살던 대륙을 벗어나기까지 하는 건 알고 있지?"


"당연하죠."


제발 생각을 정리하자. 이 세계관에서 마왕은 단순히 마족, 즉 악마 중 가장 강한 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정 상 바다 건너 마족들의 대륙인 달의 대륙은 초기 문명이 존재하던 오래 전부터 태양이 발산하는 순수한 별의 마력을 오염시켜 다시 지상에 뿌리는 이 세계관 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그 땅은 물론 살고 있던 모든 생물이 일찍이 악마, 마수라 불리는 괴물과 기형의 것으로 변질되었다.


따라서 그 땅에 법과 질서, 문화는 있으나 짐승과 지형지물이 지나치게 흉악하게 변해 원주민인 인간에서 악마로 변한 거주자들은 매 대에 마왕이라 불리는 단 하나의 군주를 뽑아 짐승들과 환경을 통제할 의무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달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이 대륙을 언제나 탐하며 마왕에게 이 대륙을 침략하여 정복할 의무 또한 부과하였고 그로 인해 마왕들의 기존 의무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마왕이 이 대륙과의 전쟁 도중 사망하게 되면 자연스러운 승계가 끊긴 달의 대륙은 한동안 재해를 통제할 존재가 사라지면 오염된 달의 마력을 무제한으로 쐬게 되는 악마 이외 생물의 개체수가 상식을 초월한 수준으로 폭증하게 된다. 이때 너무 오랜 시간 마왕이 부재하면 대륙의 수용력을 초과할 정도로 마수와 각종 식물들의 번식이 진행된는데 마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인간들의 땅인 이 대륙까지 건너와 둥지 틀기와 번식을 자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륙 인간들은 침략자인 마왕을 경계하면서도 직접 달의 대륙을 침범해 마족을 뿌리 뽑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버밍엄에서 출현한 마수화 된 순록 한 마리만 해도 수백 명을 죽이는 대참사를 일으켰는데 하물며 저런 것들이 떼거지로 몰려온다면 이곳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달의 대륙과 관련된 이곳의 군주들의 사명에는 마왕을 막는 것도 있지만 마왕의 자리가 장기간 비워지는 것을 감시하는 것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산나의 여왕인 파티마가 내 같잖은 인류애 넘치는 개소리를 단박에 쳐내지 않고 어느 정도 수용해준 것이다. 그러니까 이레시아에게도


"말씀하세요, 당신."


이레시아에게도...


"왜 그러죠?"


왠지 그녀에게는 거짓말을 말하기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