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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어 다시보는 친누나 정희은.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도 과연 이 모습 그대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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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가 선선했다.

 자기 몸 위에 이불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있지만 새벽에 몰래 방에 들어와 자기를 껴안고 잤던 정윤경의 감촉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아 더 춥게 느껴졌다.


 아직 잠에 취한 아이가 이불을 찾아 손발을 흐느적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누군가 키득거리는 소리도 났다.


"히힛, 강아지 같아."


 그러나 그걸 내내 지켜볼 요량은 아니었는지 이내 웃음을 참고 정윤경은 아이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으음…."


"얼른 일어나! 벌써 7시야 7시."


 하고 정윤경이 정유진을 일으켜세웠고 아직 눈을 비비고 있는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이고, 이 눈꼽 좀 봐. 유진이 너 어제 늦게 잤지!"


"그렇게 늦게 안 잤는데."


"늦게까지 방에 불 켜져 있던 거 다 봤거든? 으유, 일찍 자야 키 큰다고 몇 번을 말하니?"


"......."


 간신히 두 눈을 다 뜬 정유진이 거실로 이끌고 나오니 이미 식탁에는 아침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아이는 잠이 덜 깼는지 아니면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숟가락을 제대로 들지 않았다. 역시 매일 일찍 일어나는 건 아직도 적응이 안 된 건가 싶었지만 이렇게 잠 때문에 흐물흐물대는 정유진도 나름 귀엽다고 생각하며 정윤경은 밥을 조금씩 조금씩 넘기는 아이를 사랑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이면 잠이 다 사라질 법하건만 밥그릇을 다 비우고도 정유진의 표정은 식탁에 막 앉았을 때의 표정 그대로였고 그것이 표정을 펼 힘이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그렇다는 것을 정윤경은 알아챘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누나, 나 친구들이랑 여행 갔다올게."


 정윤경의 표정이 굳었다.


 다른 말도 없이 여행을 가겠다는 것도 너무 갑작스러웠을뿐더러 그녀가 8시 통금을 정한 것이 겨우 한 달도 안 되었는데도 그걸 잊었는지 무턱대고 여행을 나가려는 아이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왜..냐니. 나도 이제 스스로 여행 정도는 갈 수 있잖아?"


 눈을 피하고 있다.

 말을 더듬는다.


 아이 스스로도 그 약속 때문에 찔리는 것이 분명했다.


"안 가면 안 돼? 매일 8시에는 집에 오기로 했잖아."


"여행가는데 그런 게 어딨어.."


"그..그래도 1박 2일로 갑자기 나간다는 건 좀 아니지. 유진아, 누나 그렇게 놀래키면 못써. 멀리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얘길 했는데.."


 정윤경의 말이 빨라졌다.


"..."


"그냥 집에서 쉬어. 누나가 걱정돼서 그래. 너 아직 그... 다리도 불편하고 그런데 어딜 나간다는 거야. 당분간..."


"누나."


"그러지 말고.. 그래, 그날 누나랑 놀러가자. 너 혼자 나가기엔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누나."


"혹시 누나가 뭐 잘못했어? 그래서 그러는 거야? 미안해. 누나가 더 신경썼어야 했는데..."


"윤경 씨."


"......"


 그 말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녀를 '윤경 씨'라고 부른 것은 자기 누나에게 갈 테니 붙잡지 말라며 매몰차게 그녀를 뿌리쳤던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던 그녀에게 이 말은 분명 '진짜 누나도 아니면서 누나 노릇할 생각 말아라'는 뜻처럼 들렸다.


 정윤경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말실수든 아니든, 정유진도 자신이 말을 잘못 꺼냈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눈을 피했다.


"유진아."


"......"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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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대신 자신과 함께 놀러가기로 약속을 받아냈지만 정유진을 차로 데려다주는 내내 정윤경의 표정은 풀릴 생각이 없었다.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삐친 수준도 아니었다. 마치 자기가 화를 낼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나빠지는 감정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억누르고 있는 그런 표정 같았다.


 정유진이 다른 말 붙이지 않고 "다녀올게." 하며 차에서 내리자 그제서야 정윤경이 창문을 내리며 아이를 불러세웠다.


"아가."


"....?"


"다시 한번 물어볼게."


 감정을 조금 덜어낸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내가 네 누나고, 너는 내 동생이야. 맞지?"


 아침에 말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응."


 그리고 아이도 아침과 똑같이 대답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듯했다.


"그러면 여기."


 정윤경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손가락으로 자기 왼쪽 뺨을 톡톡 가리켰다.


 입을 맞춰달라는 표시였다.


"........"


"자, 얼른."


 정유진이 망설였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물론 자기를 진짜 누나처럼 대하게 하려는 그녀의 억지에 아이는 말도 놓았고, 거의 매일 같이 잠에 들었고, 학교 친구들에게 그녀가 자기 친누나라고 거짓말도 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아이도 거부감이 들었다.


"누나 기다리잖아? 자."


 정윤경의 눈꺼풀이 조금 내려왔다. 왼뺨을 앞으로 내밀고 있어 저절로 눈을 흘기는 듯한 시선이 된 그녀의 눈매가 지금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나 갈게."


 결국 아이가 가방끈을 꽉 쥐고 학교로 뛰어갔다.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한유나와 그 친구 2명이 정유진에게 달려왔다.


"누나랑은 어떻게 됐어?"


 정유진을 가장 먼저 보고 다가온 한유나가 물었다.


"...안 된대."


"뭐어? 진짜 너무 깐깐한 거 아냐? 무슨 여행도 맘대로 못 가게 해?"


"제대로 따진 거 맞아?"


 어느새 나타난 윤채영과 민예지가 같이 물었다.


"여행 안 가고 대신 누나랑 나랑 둘이서 놀러가기로 했어."


"야, 그게 말이야 당나귀야? 우리랑 놀러가는 건 안 되고 둘이 가는 건 돼?"


 하며 여학생들이 구박하듯 정유진에게 따졌지만 아이도 대충 대답만 할 뿐 다시 물어보겠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았고 그저 다음에 같이 가자는 마음에도 없는 말로 어물쩍 넘겨버렸다.


 이미 정유진은 여행에 더 미련을 품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정윤경을 더 설득할 수도 없다. 무슨 말을 해도 그녀가 자기의 여행길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는 건 더 물어볼 거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지갑을 되찾은 이상 여기에서 더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 더 지체하며 학교에 머무르고 정윤경의 집에 머무르고 있는 매일매일이 아이에게는 고통이었다.

 여린 정유진의 마음에 더 기다릴 만큼의 여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막을 사람도 없잖아.'


 한유나의 여행 제안에 귀가 솔깃했던 것도 정윤경에게서 벗어날 기회로서 의미가 있던 것이고 그 길이 막혔다면 이미 계획해둔 대로 떠날 뿐이다. 오늘도 그녀가 늦게 데리러 올 거라는 보장은 없되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학교에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면 그만 아닌가.


 4교시가 지나가고 해가 조금씩 내려오며 정유진도 창문 밖을 바라보는 간격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언제 올지 연락이 오지 않았으나 평소 정윤경이 데리러 오는 시간을 생각했을 때 늦어도 6교시가 끝난 직후에는 학교를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점심 시간이 되어도 정윤경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에 도착할 예정이라면 6교시에 나가는 건 자살행위다. 그보다 더 빨리 여길 나가는 게 안전했다.


"......."


 아이가 휴대폰을 꺼내 엄지손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만지작거렸다.

 무심코 딸깍 눌린 버튼에 휴대폰이 잠금 화면을 표시하며 정희은과 정유진이 웃고 있는 배경화면을 아이의 눈앞에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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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N 뭐?"


"농협. 보면 어딘지 딱 알잖아."


"아니, 그냥 농협이라고 하든지 NH라고 하든지 N 모시기 협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얘 메일에 그렇게 써있는데 뭐. 근데 너 지역농협이랑 NH농협은행이랑 다른 거 알아?"


"너 농기구로 맞아볼래?"


 이날 아침.

 코리와 정윤경은 둘의 작업장 구실을 하고 있는 코리의 작업실에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다.


 목표 조직의 간부들이 가진 정보들을 수집하고 분석하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며칠 간의 분석 끝에 이제 조직의 대략적인 현금 흐름을 파악하게 되어 노력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마약 판매로 얻은 수익은 모두 위장 법인 명의의 은행 계좌로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마약으로 얻는 수익이 워낙 상당한 탓에 거액의 금액을 계좌에 예치시키는 건 추적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돈세탁 같은 걸 할 능력이 없던 조직에서는 교외의 외딴 곳에 현금 저장고를 하나 만들어 두어 현금을 조금씩 인출해 거기에 옮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정윤경의 미행 실력 덕분인지 조직 우두머리는 자기들을 노리는 세력이 없다고 안심하며 쓸데없이 돈만 먹는 보안 책임자와의 계약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내부 사정도 메시지 기록으로 알아낼 수 있었다.


"IT 쪽에도 저런 일 많지."


"그래?"


"일본 쪽에 유명한 일화가 있잖아? 회사 사장이 서버 관리팀한테 지금까지 서버 문제가 한 건도 없었으니 너네들은 필요없다고 잘라버린 일."


"나중에 어떻게 됐는데?"


"얼마 안 돼서 하루종일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애먹었다나."


"하하…"


 수집한 정보들을 정리해 현금 강탈 작업을 지휘하는 의뢰인에게 알려주자 곧 대략적인 계획이 그의 손에 짜여져 내려왔다.

 나머지 일들이야 나중에 해도 되는 것들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현금 저장고의 위치였고 그걸 알아낼 방법은 다른 생각 할 것 없이 간단했다.

 목표 조직은 매주 수요일마다 현금을 저장고로 이송하고 있으니 그때를 기다렸다가 돈을 빼가는 조직원을 미행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느 지점이야?"


"여기."


 코리가 마우스 휠을 돌려 지도에 표시된 은행지점을 확대했다.

 도심과는 산을 사이에 두고 있어 국도를 타고 가야 나오는 먼 곳에 위치한 작은 지역농협이었다.


"구석진 곳을 참 잘도 찾았네."


"그래서 농협에다가 계좌를 만들었나봐."


"멀지 않으니까 그날 바로 가서 대기하면 되겠네."


"잠깐, 매주 수요일?"


"....?"


 정윤경과 코리 모두 자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13:40]

[6월 24일 수요일]


"....바로 가봐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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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 시간은 1시 40분을 막 넘기고 있었다. 학교 수업은 6교시만이 남아있었지만 그말인즉 아이가 탈출할 기회도 지금 아니면 하교 때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정유진은 아직까지도 망설이고 있었다. 마치 숙제를 할 때처럼 자기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걸 알지만 뭔가 지금 하기가 꺼려졌다.


*위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카카오톡 1: 윤경 누나]


[윤경 누나: 누나 일잇어서 한두시간정도 늦게올거같아 어디가서 좀만시간때우고있어 미안해]


 뭔가 급하게 쓴 듯한 정윤경의 메시지는 망설이는 정유진의 등을 확 떠민 격이 되었다.


[응 알았어]


 고민은 끝났다.

 답신을 보내자마자 정유진은 방금까지의 망설임은 다 잊은 듯 곧바로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지금 나갈 것도 없이, 6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교를 뜨면 되었다.


 아이는 꺼진 휴대폰의 잠금화면 대신 지갑에 끼워두었던 쪽지를 꺼냈다.

 그곳에는 정희은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곧 갈게.'


 그것이 꼭 정희은의 물건이라도 되는 듯 아이는 그것을 다시 고이 접어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다.


 어느 때보다도 느리게 흘러가는 마지막 수업 시간이 끝나고 담임교사가 잠시 교실을 비우자마자 정유진은 청소도 대충 끝내두고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야, 검사 맡아야지 어디가!"


"미안, 나 대신 좀 맡아줘. 나 갈 데가 있어."


 같은 청소구역을 맡은 민예지가 아이를 붙잡았으나 정유진은 전학 이래 거의 처음으로 친구에게 부탁을 하며 자기 휴대폰을 사물함에 집어넣었다.


"어디 가는데? 오늘 내 얘기 들어주기로 했잖아!"


 하고 같이 있던 한유나가 받아쳤지만,


"미안해."


 정유진도 미안하다는 말만 연발할 뿐 그만둘 기색이 없어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윤채영이 가방을 둘러메려는 아이에게서 가방을 빼앗아서는,


"사정이라도 말해주고 가. 안 그러면 너 여기서 못 나가게 막을 거야."


 하며 가방을 자기 등 뒤로 숨겼고 다른 두 명도 눈치를 알아듣고 각자 교실 앞뒤 문을 틀어막았다.


"자, 너 이제 못 나가. 어서 말해."


".....나 가야 돼."


"그럼 왜 나가는지 얘길 해보라니까."


"......."


 절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저 궁금증 많은 3인방에게 "누나한테서 도망쳐야 해." 같은 말을 했다가는 "도망친다고? 싸웠어? 뭐 때문에 싸웠는데? 아님 혹시 누나가 괴롭혔니? 너 집에서 맞고 다니는 거야?" 하며 그 뒤까지 꼬치꼬치 뒤를 캐물리고 전후사정까지 모조리 털어놓아야 할 것이다.


"....옷 사러 가야 돼."


 그것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해낸 정유진의 변명이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지금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는 일이었으니까.


"뭐?"


"옷 사러 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나 좀 나가게 해 줘.."


 한유나의 눈썹이 올라갔고 민예지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만 윤채영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


"...아, 알았다."


"알아?"


"응. 너 누나랑 싸웠구나?"


"....!"


"어쩐지, 오늘 하루종일 완전 다운되어있다 싶었어."


"......."


 정유진은 자기 가슴 속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고 그 앞으로 윤채영이 다가왔다.


"..나도 그 마음 딱 알거든!"


"으..응..?"


"역시, 너도 화나거나 스트레스 쌓이면 막 물건 사는 걸로 기분 푸는 타입이지? 내가 딱 그렇잖아."


 하고 윤채영이 까르르 웃었다.


"아, 그런 거야?"


 민예지가 거들었다.


"...어..! 맞아! 무슨 느낌..인지 알지? 안 그래도.. 어, 옷 뭐살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거든!"


 정유진도 거기에 맞춰 대충 말을 만들어냈고 다들 그것으로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여주며 아이에게 길을 터주었다.


"아, 여기서 가까운 곳에 예쁜 옷 많은 가게 있거든? 알려줄게!"


 윤채영은 어느새 자기가 나서서 옷가게를 추천해주고 있었다. 물론 정유진에게는 옷가게가 가까운 곳일수록 좋으니 들어서 나쁠 건 없었고 가는 길을 전해들은 뒤 다시 가방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예쁜 걸로 사와! 확인해볼 거야!"


 하는 민예지의 말을 등뒤에서 들으며 정유진이 교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반바지 사이로 피멍이 살짝 드러난 남학생 한 명이 자기를 따라가고 있는 것을 아이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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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일잇어서 한두시간정도 늦게올거같아 어디가서 좀만시간때우고있어 미안해]


"후우."


 급하게 일을 나간 탓에 차에 오르고 나서야 정유진에게 연락할 생각이 난 정윤경이 신호등을 기다리는 짬을 이용해 간신히 정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음성 인식 텍스트를 써본 적이 없어 손으로 보내느라 글이 엉망이었다.


 지역농협 지점에서 손님으로 위장하고 기다리고 있던 정윤경은 예정된 시각에 정확히 300만원을 인출해 가방에 집어넣는 조직원을 발견했고 그의 뒤를 밟아 차량으로 미행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큰 지점이 아니었기에 주차장이 1열뿐이었고 목표물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조직원이 차를 타고 주차장을 나갈 때까지 기다린 후에 자기 차를 탔다. 그 때문에 거리가 멀어져 하마터면 놓칠 뻔했지만 목표 차량이 넓은 국도로 진입한 덕에 신호에 더 방해받지 않고 차량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목표 차량이 올라가고 있는 이 국도의 동쪽에는 산을 타고 올라가는 좁은 2차선 도로들이 넓게 퍼져 있었고 그 서쪽에는 분당 시가지의 콘크리트 정글이 빽빽했다.

 어디를 가든 미행이 쉬울 리가 없었다.


"시골길 따라가는 줄 알았더니…"


 내심 오른쪽으로 빠지기를 바라며 정윤경이 운전대를 잡지 않은 오른손으로 팔걸이를 툭툭 쳤다.

 도심 속 차량 미행은 그녀도 질색이었다. 만약 상대가 제대로 준비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시골길이나 산길을 타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러나 국도를 죽 올라가 교차로에 들어선 차는 좌회전 차선에서 멈춰서 있었다.


"제길."


 그나마 다행인 건 주위에 보이는 건물이 모두 주택단지였고 아직 퇴근 시간대가 되지 않아 차가 밀려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교통량이 많지 않자 정윤경은 안심했다. 다만 직선도로가 짧고 교차로가 많은 시가지의 특성상 목표 차량과의 거리가 조금씩 짧아지는 것이 신경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시가지 깊숙이 들어가던 차가 돌연 오른쪽으로 차를 꺾었다. '돌연'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어서 곧바로 다음 사거리가 다가오자 목표 차량이 이번에는 좌회전을 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2턴 리밋이었다.


"하, 챘구나."


 정윤경이 탄식하며 목표 차량이 좌회전한 사거리에서 그대로 직진했다.


 2턴 리밋은 목표 차량이 2번 연속으로 회전을 하면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그대로 미행을 중단하는 절차다. 하지만 정윤경은 분명 목표 차량이 자신을 눈치챘다고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자차로 미행하는 것이 아니었어. 아무리 급하게 나온 거라고 해도 평범한 세단을 어떻게든 빌렸어야 했는데. 검정색 SUV면 모두가 의심할 거 아냐.'


 정윤경은 먼 곳에 차를 세우고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차는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 다음주 수요일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뭐 일주일쯤이야.'


 하고 다시 차 시동을 건 그녀가 휴대폰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어?]


"놓쳤어."


[이 동네에서? 아니, 시골 농협이었잖아? 그놈한테 걸렸으면 걸렸지 그걸 어떻게 놓쳐?]


"너 키보드 바깥에도 좀 돌아다녀 봐. 여기 분당이야 분당."


[아니 분당이면 추적을 못 하냐?]


"새끼가 2번 연속으로 꺾는 걸 어떡해."


[그게 뭐?]


 정윤경이 답답한 듯 휴대폰을 잠시 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만나서 얘기해."


 하고 전화를 끊은 그녀는 바로 액셀을 지그시 밟아 코리의 작업실로 향했다.

 시간은 아직 2시 40분밖에 되지 않았으니 여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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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장으로 나온 정유진이 등을 돌려 학교 건물을 돌아보았다.

 본관에 걸린 대형 시계가 2시 41분을 표시하며 정유진을 굽어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정윤경이 데리러 왔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자기를 따라나온 듯한 누군가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헌데 반가워하는 그 모습을 가까이 보니 이창훈이었다.


"!"


 놀란 정유진이 도망갈 기색을 보이자 녀석이 "잠깐! 잠깐만!" 하며 아이를 불러세웠고 한달음에 달려온 이창훈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며 말을 걸었다.


"할 얘기가 있어."


 거부감부터 드는 정유진이었지만 어차피 도망쳐봐야 달리기로 녀석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을 아이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창훈의 뒤를 따라가 닿은 곳은 담장이 등을 지고 있는 건물 뒤 공터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건…"


 정유진이 운을 떼자 이창훈이 주위를 살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


"뭐?"


 고개를 갸우뚱한 정유진에게 이번에는 녀석이 고개를 숙여왔다.


"지, 지금까지.. 내가 괴롭혀온 거,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게."


 웬 생뚱맞은 상황을 순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정유진이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자 녀석의 하체가 자세히 눈에 들어왔고 반바지로 미처 가리지 못한 피멍 몇 개가 이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정윤경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강제로 사과하는 꼴이 분명했다.


 정유진이 잠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무슨 상황인지 다 짐작이 갔지만 그렇다고 야멸차게 거절하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거기다 나가는 것이 우선이던 정유진은 일단 녀석의 사과를 받아주고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이창훈의 고개가 올라가며 "고마워." 하고 말하는 걸 대답해준 뒤 녀석이 알아서 돌아가도록 그를 지나쳐 갈 때였다.


"...근데 너 혹시,"


"...?"


"누나랑 싸워서 도망가는 거야?"


"....!"


 정유진이 녀석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 교실에서의 이야기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창훈의 얼굴에서 평소의 그 악의적인 인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 표정 알아. 나도 우리 형한테 얻어맞으면 그런 얼굴 하거든."


 하지만 아직 경계를 풀지 않고 있는 정유진이었다.

 이창훈이 다시 아이에게 다가갔다.


"....몰래 나가는 길 알려줄까?"


 하고 녀석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은 학교 경계에 둘러진 담장이었다.

 자세히 보니 풀에 덮여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내가 학교 쨀 때 자주 썼지. 쨀 거면 같이 째자고."


 하며 이창훈이 익숙한 솜씨로 담장에 올라 풀을 헤치고 길을 만들었다.


 정유진이 잠깐 고개를 돌려 학교 대형 시계를 보았다.

 2시 52분. 정윤경이 한두 시간 늦는다고 했으니 여기 오는 시간은 길면 90분쯤 뒤다.


 이창훈의 그 아부하는 목소리와 표정을 순진한 정유진이 더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는 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남아있는 여유를 믿고 녀석의 진심을 떠보느라 시간을 더 소모했을지도 모른다.




 90분의 여유는 정유진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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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실제 도로는 국도가 아니라 지방도.



확 삘받아서 이부분 끝까지 함 써봐야지 하고 달리니까 새벽 3시

사실 뒤의 유사 리얼타임 연출을 만들어내느라 죽 이어서 2만자 가까이 썼지만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야 1만자 언저리에서 끊음.




아니 근데 내 잠 어떡할꺼야 얀붕이들아 책임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