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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너.."


 정유진의 입이 허탈감과 분함이 뒤섞여 떨려갔고 같이 들린 손가락 끝이 이창훈을 향했다. 저쪽은 일부러인지 모르나 정유진의 그 손가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네가 훔쳐갔지!"


 하고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이창훈의 표정은 뜨끔한 감정 하나 없이 평온했다.


"내가 뭐?"


"내 지갑 네가 훔쳐갔잖아!"


"뭔 소리 하는 거야? 네 지갑 나는 본 적도 없어."


"거짓말하지 마!"


 정유진이 참지 못하고 이창훈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140cm도 안 되는 키의 약한 몸을 가지고 달려들었다기보다는 옷자락을 붙잡고 쥐어흔든 것 정도가 고작이었고 그 여린 손은 이창훈의 휙 하는 손짓 한 번에 털어져나갔다.


"생사람 잡지 말고 알아서 찾든지 해."


 그렇게 말하며 이창훈은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게.. 그게 어떤 돈인데.."


  정유진이 발을 동동 굴렀다. 생돈 5만 원을 눈앞에서 빼앗긴 것보다도 아이는 정윤경에게서 도망칠 기회를 이대로 날려버리는 것이 더 안타까웠다.

 혹시나 자기를 도와줄 친구가 없을까 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모든 광경을 봤음에도 어느 누구 하나 아이에게 말 한마디 붙이려 않았다. 


 이미 범인을 이창훈으로 확신한 정유진으로서는 너무도 뻔뻔스러운 말투와 눈빛이었으나 사정을 모르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그렇게 보인다고 한들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낯선 남자아이 편을 들며 지갑 하나 찾아주겠다고 성심껏 도와줄 만한 사람이 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정유진은 절망했다. 아무리 억울하다 호소를 해 봐도 아이의 말대로 이창훈이 자기 돈을 빼앗아가지 못해 대신 지갑을 통째로 훔쳐갔다는 말을 증거도 없이 누가 믿어줄 것인가.


 그렇다면 남은 건 혼자뿐이었다.


'하지만..'


 종례가 끝나고 교실을 나오면서도 정유진은 자신을 무시하고 복도로 나가는 이창훈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대로 그냥 되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이창훈의 뒤를 따라가던 정유진이 보는 눈 없는 교문 너머 좁은 골목길까지 발이 닿자 다시금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야!!"


 하는 정유진의 목소리는 최대한 위협적으로 보이려고는 했으나 원래의 그 여린 티를 숨기지 못했고 이미 따라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이창훈이 놀라는 척도 없이 돌아섰다.


"뭐?"


"내 지갑, 빨리 돌려줘!"


"하…"


"훔쳐가 놓고서 나, 남들 앞에서 거짓말까지 했지! 안 돌려주면 나도--"


 그 순간 덥석 하고 정유진의 멱살이 잡혀 올려지며 정유진의 말이 말려들어갔다.

 아이가 컥 소리를 냈다.


"이새끼가 귀여워서 봐주고 있었더니 이젠 막 기어오르네."


 이런 말투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던 정유진도 이것이 싸움을 걸기 직전에나 나올 법한 험악한 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유진이 순간 움찔했지만 이미 내뱉은 걸 되돌릴 수는 없어 움츠렸던 고개를 다시 들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남의 돈 훔쳐가고도 ㄴ, 네가 멀쩡할 줄 알아? 나도 가만, 가만 안 있을 거라고!"


"얼씨구, 이제는 협박까지?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말끝에서 주먹이 날아왔다.

 턱을 얻어맞은 정유진이 뒤로 넘어져 나뒹굴었고 이어 이창훈의 발끝이 그 가냘픈 몸을 걷어차고는 옆으로 쓰러진 정유진의 무릎 위에 발을 얹었다.


"내가 말했지. 보호비로 받는다고. 네가 안 내놓으니까 직접 압류한 게 뭐 잘못됐냐?"


"......."


 말도 제대로 할 여유 없이 아이는 숨만 겨우겨우 들이켰고 그 한심한 모습을 내려다보는 이창훈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다.

 녀석이 자기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쓰러진 정유진의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다시 말해 봐. 이게 누구 거라고?"


"....돌려...줘…. 콜록, 내 거.. 내 거잖..아.."


"아직도 네 돈이야? 언제까지 니꺼인가 한번 보자고."


 일어설 힘도 없는 정유진을 향해 이창훈이 다시 짓밟다시피 발길질을 했다.


 손으로 막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팔로 가로막은 얼굴 대신 팔과 몸통 아래에 이창훈의 발이 닿았고 그 퍽 하는 소리와 거기 따라서 불규칙하게 나는 정유진의 짧은 신음소리가 아무도 없는 빈 골목 사이를 좁게 울렸다.


 그러나 정유진의 입에서 끝까지 자기 돈 가져가라는 말이 나오지 않자 힘이 빠졌는지 아니면 적당히 즐겼다고 생각했는지 이창훈이 자기 발을 거두고는 가방을 다시 챙기며,


"이젠 내 지갑이야."


 라고 마음대로 내뱉고는 골목을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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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끅."


 솟구치는 울음을 애써 참으며 정유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침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궁상 떨며 우는 모습까지 길 가는 사람들 앞에 내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곧 자신을 데리러 올 정윤경에게 이런 꼴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해결사의 눈앞에서 어린아이가 숨기려고 해봤자였다.


"유진이 눈 왜 그래?"


".....전봇대에 부딪쳤어."


"아가."


"...응."


"누나한테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


"부딪친 상처랑 누구한테 맞은 상처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 누구야?"


"정말 전봇대에 부딪친 거라니까."


"그 무섭게 생겼다는 과학선생이야? 그놈이 때렸어?"


"맞은 거 아니야."


"왜 자꾸 누나한테 계속 숨기려고 그래? 너 혼자 끙끙대 봤자 뭐 하려고?"


 그 말에 정유진이 자그마한 입술을 잠깐 뻐끔거렸다.


 만약 그녀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죽이는 일을 한다는 그녀의 손을 빌리면.. 어쩌면..


'싫어.'


 그러나 알량한 자존심이었을까, 정유진은 그녀에게 도움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 죽이는 짓을 몇 년을 했다는 그 피묻은 손으로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자신이 고자질해서 이창훈에게 그 손을 닿게 만든다면 그걸 해결이라고 할 수 있을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냥 나 좀.."


"......"


"나 좀 내버려둬, 누나..."


".......알았어."


"......"


"그럼 더 물어보지는 않을게."


 그러나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정유진에게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차를 운전하고 있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미련이 묻어나오는 걸 느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날 대충 저녁을 먹고 정윤경은 자기 방에 들어가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아이의 도청기를 확인했다.

 곧이어 소형 음성녹음기에 모조리 녹음되어버린 이창훈과 정유진 간의 대화가 정윤경의 귀에 들어왔다.


 보호비랍시고 돈을 상납받으려는 목소리,

 훔쳐간 지갑을 내놓으라며 고함치는 목소리,

 봐주니까 기어오른다며 화를 내는 목소리..


 그리고…


[언제까지 니꺼인가 한번 보자고.]


 바로 이어지는 퍽, 퍽 하는 소리.


[끅, 아악! 흐윽..]


 거기까지 들리자 정윤경이 헤드셋을 벗어던지고 달려가 정유진의 문짝을 열어젖혔다.


"누..누나?!"


 정윤경의 어두워진 눈빛에 놀란 정유진이 그녀를 불렀으나 정윤경은 아무 대답도 없이 아이의 윗옷을 거칠게 붙잡아서는 쥐어뜯듯 잡아올리며 강제로 벗겨버렸다.


 뽀얀 살결 위로 이창훈이 만들어낸 시퍼런 멍자국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걸 애써 가리려는 아이의 가는 두 팔에도 이곳저곳 피멍이 하얀 살을 물들이고 있었다.


".........."


 정윤경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그게.. 이건…."


"..이새끼 누구야."


"가, 갑자기 왜.."


"어떤 새끼가 이랬냐고!"


 울음이 조금 섞인 정윤경의 목소리가 아이의 멍든 손목을 붙잡은 그녀의 오른손을 타고 정유진에게까지 울렸다.


"누나 또 나 도청했어? 어떻게 알--"


"지금 그게 중요해? 학교에서 얻어맞고 돌아와놓고서, 너는 지금 누나가 도청하고 안하고가 더 중요한 거야? 누구냐고 묻잖아. 대답해."


"......이거 다, 그, 계단에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지!!"


 아이를 붙잡고 거의 악을 쓰는 그녀의 눈가에 조금씩 눈물이 배어나왔다.


"왜 자꾸 말 안하는데? 누나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나쁜사람들 오면 누나가 다 지켜준다고 그랬잖아!"


"........"


"이젠.. 이젠 누나한테 말하기도 싫다 이거야?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고!"


 그러자 이번에는 정유진이 자기를 붙잡은 그녀의 팔을 떨어냈다.


"...지켜준다고 하지 마."


"뭐..?"


"도대체 뭘 어떻게 지켜준다는 건데. 난… 미안해, 난 누나 못 믿겠어."


"왜 못 믿어, 너에 대한 거라면 뭐든 아는데, 널 위해서라면 손에 피도 묻히겠다는데 누나를 왜 못 믿어!"


"그래서 못 믿는…!"


 아이가 아주 잠깐 언성을 높이려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대신 짧은 한숨 소리가 나왔다.


"아까 전에는 더 안 물어보겠다고 했잖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더 묻지 말아줘."


"........."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로 정유진은 정윤경을 떼어놓았다.

 아이다운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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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정유진을 감시하기 위해 마련한 감시 지점에 앉은 정윤경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망원경을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는 걸 보면 아이를 감시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 든 건 정유진 한 명뿐이었다.


'난 누나 못 믿겠어.'


 그 말이 왜 나왔을까.


 자신의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적으니 윗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손을 벌리는 게 꼬마아이들이다. 심지어는 직접 말을 꺼내기 부끄러워하는 소심한 아이들도 누군가 손을 먼저 내밀면 더 고민도 않고 넙죽 손을 잡아당기기 마련이다.

 헌데 그런 끔찍한 일까지 겪어놓고도, 그리고 이렇게 멍자국을 모조리 내보여놓고도 자신이 내민 도움을 칼로 잘라내듯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윤경은 믿을 수가 없었다.


"못 믿는다고..?"


 못 믿는다...


 ....그렇다면 믿게 만들어줘야 한다.


 정유진에게 있어 정윤경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보여줘야 한다.


"..그거야."


 정윤경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어떻게 맞았고 무엇을 잃었는지는 이미 들을 만큼 다 들어서 안다. 그리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명확했다.


[오랜만에 전화하네? 뭐냐.]


"...어깨 둘만 불러줘."


[갑자기?]


"그냥 불러오라면 불러와."


 조금 일방적인 요구였지만 다행히 사람이 좀 남았는지 1시간도 안 되어서 떡대가 상당한 해결사 두 명이 재빠르게 정윤경의 건물 앞에 도착했다.


 정윤경이 시계를 확인했다. 20분 정도만 지나면 곧 학교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나올 것이다.

 물론 그 정도면 그녀에게는 준비하기에 충분히 넉넉한 시간이었다.


"...애새끼 하나 조지는 거야 일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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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좀 늦을 거 같아. 30분 정도만 기다려 줄래?]


"알았어."


[옳지, 말 잘 듣네. 저녁 맛있는 거 해줄테니까 시간 조금만 때우고 있어, 알았지?]


"응.."


[종료]


"으…."


 정유진이 오른손에 쥔 휴대폰으로 이마를 툭툭 치며 한탄했다.

 지금까지 항상 제 시간에 맞춰 오다가 하필 지갑이 없어진 지금에서야 자신에게 탈출할 시간을 주는 것이 꼭 행운의 여신이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돈이 없으면 걸어서 도망쳐야 하고 아이의 두 발로는 정윤경을 이길 수 없다. 그 돈이 없으니 아이는 그저 발만 동동 굴릴 뿐이었다.


"유진! 집에 안 가?"


 정유진을 유독 예뻐해 자주 여장을 시키던 반 친구 한유나가 책상에 아직도 앉아 있는 아이의 어깨를 건드렸다.


"...데리러 오는 누나가 늦게 와서."


"그럼 밖에서 놀든지 도서실을 가든 하지 왜 여기 혼자 고독하게 앉아 있어?"


"어차피 오래 안 있을 거야."


"오래 안 있고가 문제가 아니라 되게 초라해 보이잖아. 이리 와! 우리가 같이 놀아줄게."


 '우리'라는 말은 아마 한유나와 자주 함께 어울리던 윤채영과 민예지를 뜻하는 것이라고 정유진은 짐작했다.


"...기절놀이 같은 건 안 할 거지?"


"뭐래, 그거 유행 다 지났어! 근데 채영이가 오늘 언니한테서 고데기 훔쳐왔잖아? 그걸로 놀자. 너 단발머리니까 뭔가 잘 먹을 거 같지 않아?"


"하아…."


 그나마 오늘은 조용히 지나가나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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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각, 인적 드문 어느 골목길.


 높은 건물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이 작은 길은 비쳐오는 빛이 적어 백주대낮에도 그리 밝지 않았고 넓이도 사람 두 명이 서면 어깨가 겹쳐질 만큼 좁았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으나 주위에 상가도 빌라도 없어 굳이 이 길로 오는 사람도 없었다.


 정윤경에게는 딱 알맞는 공간이었다.


"아아악!!"


"더 세게."


"잠ㄲ--끄이이익!!"


"그거밖에 못 때려? 비켜, 내가 하게."


 정윤경이 떡대에게서 막대를 빼앗아 쥐고는 덜덜 떨고 있는 남학생에게 가차없이 휘둘렀다.


"끅! 으윽! 아흑!"


 그녀가 휘두를 때마다 남학생은 비명을 질렀다. 꼭 자신의 비명소리를 지나가는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듣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소리 낼 힘이 남았나 봐? 야, 둘이서 더 갈겨."


 정윤경이 든 막대가 다시 떡대에게 쥐어졌고 떡대 큰 두 명의 해결사는 남학생의 배를 발로 차며 함께 막대를 휘둘렀다.


 결국 남학생의 입에서 꺽꺽대는 소리밖에 남지 않자 그제서야 정윤경이 중지 사인을 냈고 해결사들이 남학생의 양쪽 팔을 붙잡아 정윤경 앞에 내놓았다.


"야."


 정윤경이 남학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땀과 눈물이 뒤섞여 흉해진 얼굴을 훑어보았다.

 남학생은 눈길을 피하며 입술을 떨었다.


"......."


"대답 안하지, 개새끼가,"


 머리채를 쥔 왼손이 당겨지고는 반대쪽 손이 남학생의 뺨과 닿으며 박수소리를 냈다.


"끅..!"


"이름."


"......"


 박수소리가 한번 더 났다.


"이름."


"이..이이..이창훈..! 입니,다아.."


"초딩 주제에 일진 노릇하면서 애들 괴롭히고 다닌다며?"


"아.."


"대답 망설여도 쳐맞는다."


 정윤경이 오른손을 확 하고 쳐들었고 이창훈이 반사적으로 움찔댔다.


"네..! 맞아요! 저 5학, 5학년하고.. 3학년 4학년 애들도 괴롭히고 다녔어요..!!"


 공포에 질려 있던 이창훈은 묻지도 않은 사실까지 다 털어놓았다. 눈앞에 있는 검정 정장을 입고 눈매가 무서운 이 여성이 꼭 자신의 저승사자처럼 보였던 까닭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애새끼들한테 돈 얼마나 뜯어댔어?"


"그.. 5천.. 아니 1만.. 아아아니, 그러니까.."


"못 셀 정도로 많다 이거지?"


"아니요!! 아니요!! 저저, 친구한테서 훔쳐간 지갑 있어서 거기에 다 넣--"


"지갑?"


"...아..."


 스스로가 매를 벌고 있었다.


 정윤경이 이창훈을 강제로 일으켜 주먹으로 배때지를 갈겼고 헉 하며 이창훈이 고꾸라졌다.


"....지갑 찾아서 꺼내 봐."


 이창훈의 왼팔을 잡고 있던 해결사를 보며 정윤경이 고개를 까딱였고 해결사가 골목 벽에 던져져 있던 이창훈의 가방을 집어 지갑 2개를 찾아냈다.


 그중 하나는 그녀가 정유진에게 사줬던 지갑이었다.


"......."


 박수소리가 한번 더 났다.


"아윽.. 으에엑.."


 이창훈이 헛구역질을 하며 고통을 받아내는 동안 정윤경은 두 지갑 안에 든 돈을 세 보았다. 대략 8만 원쯤 되어 보였다.

 정유진의 지갑에는 돈 외에도 그녀가 줬던 카드와 쪽지 몇 장이 같이 나왔다. 쪽지의 글씨가 정유진의 것임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 전화번호...누구 거지?'


 그러나 그건 나중에 알아내도 된다. 정윤경은 정유진의 지갑을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많이도 뜯어냈네."


"제..죄성..함니다...잘모태씁니다.."


"나한테 사과하면 안 되지."


 하고 정윤경이 다른 지갑을 이창훈의 가슴팍에 던졌다.


"일단 네가 뜯은 돈은 벌금으로 우리가 압류한다. 그리고,"


 정윤경이 이창훈에게 다가가 다시 머리채를 잡아올렸다.


"니새끼가 돈 뜯은 애들한테도 네가 직접 사과하고 돈 돌려줘."


"ㄴ..네에에…."


 가진 용돈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막막했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는 없던 이창훈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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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교실 바닥을 달그락거리며 공기를 줍던 정유진이 한유나에게 물었다.


"어! 1박 2일로. 우리 삼촌이 펜션 하시는데, 주말에 우리 보고 놀러오라고 그랬거든. 유진이 너도 같이 가자."


"그래그래! 나 4명이서는 분신사바 안해봤는데 한번 해보고 싶다!"


"하..하지만 나 남자고.."


"에헤이! 너가 무슨 남자야, 너 고데기까지 써놓고 이제 와서 남자인 척 하냐?"


 민예지가 정유진의 머릿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정유진의 머리카락이 여자아이의 것처럼 찰랑거렸다.


"근데 얘 컬 완전 잘됐다. 예지보다 잘 먹은 것 같은데?"


"우우..."


"아니 그래서, 니들 올 거야 말 거야? 유진이! 너 올 거지?"


 정유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여행은 사치였다. 예전에는 가난 때문에, 지금은 정윤경 때문에 멀리 나간다는 것 자체를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의 여행은 단순한 외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여행을 나간다는 것은 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만큼 정윤경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면 탈출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것은 학교에서의 30분 따위에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기회였다.


'하지만.'


 문제는 정윤경의 허락이었다. 여행은 물론이고 그녀는 자신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정유진 단독으로 외출하는 것을 거의 허락하지 않았다.

 자기가 안심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며 8시 이후 집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정윤경이 자기 마음대로 정한 게 몇 주 전 이야기였던가.


 그렇다면 정유진 혼자서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정윤경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나는 안 될 것 같아."


"아 왜애!"


"나 통금 있어. 8시 안에 집에 안 들어가면 누나한테 혼나..."


"1박 2일로 간다고 하면 되지 않아?"


"그것도 누나가 허락 안 해줄 거야. 미안해."


"야, 무슨 그런 누나가 다 있냐? 뭐 동생 여행도 못 가게 시킨대."


"우리가 가서 따지자!"


"일단 누나한테 가서 얘기해 봐. 안 되면 우리가 얘기해볼게!"


"안 되면 그냥 몰래 나가! 누나가 설마 쫓아오겠어?"


 세 여학생들은 자기들끼리 그렇게 마음대로 결론을 지었고 그 말에 정유진이 어색하게 웃는 동안 아이의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윤경 누나]


"누나 왔나보다. 나 가볼게."


"가서 꼭 설득해야 돼! 남자잖아! 말싸움도 못 이기면 되겠어?"


"이럴 때만 남자 취급이야…"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정유진은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응, 누나, 나 이제 나가고 있어."


[누나 교문 앞에 있어. 천천히 나와.]


 정유진이 전화를 끊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으로 나오자 차를 등지고 작게 미소를 짓고 있는 정윤경이 보였다.

 아이의 가방을 받아 차 안에 넣는 그녀는 으레 묻던 '별 일 없었지?' 같은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아가 눈 감아 봐."


"....응."


"두 손 내밀고."


"..이렇게?"


 정유진이 공손하게 내민 두 손 위에 작은 물건이 얹혔다.


"이제 눈 떠."


"....?!"


 지갑을 본 정유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분명 이창훈이 훔쳐간 그 지갑이었다.


"선물이야."


"이..이건.."


"지갑 때문에 많이 걱정했지? 누나가 다시 찾아왔어."


"......"


 정유진은 이걸 기뻐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분명 탈출할 기회를 다시 얻은 것이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지만 이걸 도로 가져왔다는 건 정윤경의 방식을 이창훈에게 써서 돌려받았다는 얘기였다.


 대답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자기 손바닥 위에 얹힌 지갑만 바라보고 있는 정유진에게 정윤경이 손을 포개며 아이의 시선을 가져왔다.

 아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에 들어?"


"......."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널 지켜줄 사람은 이 누나밖에 없어. 그것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정윤경이 다시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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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안 보지만 괜한 오기 생겨서 계속 쓴다

그래도 시바 엔딩까지 다 짜놨는데 이대로 놔버리긴 너무 아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