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입가에서 느껴지는 흙내음과 함께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지? 그는 거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침침한 눈가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잿빛으로 빚어진, 아니, 파괴된 세상이었다. 한 때 밭과 농장이었던 대지는 잔인하게 파괴된 채 유기당했다. 그는 포탄이 착탄한 크레이터 바로 옆에 쓰러져 있었다. 주변엔 그와 비슷한 군복을 입고있는 자들이 널부러져 있었는데, 대다수는 몸의 어딘가를 분실한채 떠다니는 고장난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크게 충격받진 않았다.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여긴 전장이었다. 맹렬한 살인 기계의 울부짖음과 찢어진 인간의 비명 없이, 오직 고요함만이 감돌고는 있었지만, 파괴와 공허만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기 그지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곳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생존 기한이 긴 사병 중 하나였다. 그는 온전한 사지를 천천히 놀려, 웅크렸다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옅은 크레이터에 빠져있는 전우의 시체에서, 잃어버린 방탄모를 찾아 꼈다. 운 좋게도 시체는 그 자신의 목숨 말고는 많은 것을 들고 있었다. 방독면, 소총, 탄띠와 군장. 지금의 그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마도 먼저 일어난 전우가, 그가 전사한 줄 알고 모든걸 긁어갔겠지. 그는 거기에 신경이 미치자 그제서야 자신의 목덜미에 군번줄이 남아있는지 확인했다. 꺼슬한 개목줄이 손에 잡히자, 그는 퍼슥거리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런 개같은 자식, 시체에서 군번줄도 안챙겨가다니.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체에서 군번줄을 챙기려 했다. 그가 군번줄을 챙기기 위해 시체를 끄집어내 물먹은 몸을 돌리자, 흰 눈을 뜬 채 죽어있는 시체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시체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젊은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젊은이었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스무살의 젊은이. '윌리엄 에서포트, 군번…….' 그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적힌 익숙한 군번줄을 매만지며, 충격으로 굳어진 머리로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나?


 그는 명령을 받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중위가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명령서를 전달받았다. 현 시각부로 우리 대대는-'


 아니, 그 보다 그 전에.


 이 지옥에 스스로 제 발길을 들인 이유가 뭐였었지?




 기억이라는 것은 오래될 수록 파편화되고 늘어지며, 구멍뚫린 양말처럼 변한다. 인간의 취사선택적인 성향에 걸맞게, 기억은 선택적으로 망각하며 싫은 기억이든 좋은 기억이든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오래된 기억은 한 여자에 관한 것이었다. 아름답고 도도했던 한 여자, 그가 영혼과 열정을 바쳐 사랑하고 흠모했으며, 그렇기에 가장 크게 추락하게 되었으며, 이 지옥에 스스로 발을 들이게 만든 이유였다. 그는 오랜만에 망각의 늪 아래로 익사한 그 기억들을 다시금 헤집어 꺼내기로 했다. 당장 지금 그렇게 해도, 누가 그를 방해하겠는가? 시체밖에 없는 고요한 무인지대는 그가 늪을 탐험하게 도와주었다. 그는 벨엄에 살았다. 정확히는 벨엄에 집이 있는 것은 아니였다. 그는 세들어 사는 것에 가까웠다. 그의 아버지는 집사였고 어머니는 하우스 키퍼였다. 그러니, 벨엄에 있는 그들 주인의 집에 같이 사는 것이었다. 둘은 귀족이자 상원의 구성원 중 한 명인 레드우드 백작가의 저택을 관리하는 자들이었다. 그의 부모님들은 백작가에서 만났다. 수습 집사와 신입 메이드였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의 일을 도우며 가까워졌고, 그렇게 둘은 백작 부부의 주례로 결혼했다. 백작 부부는 성실하고 유능하며 어딜 가서도 찾지 못할 인재들인 둘을 좋아했으며, 둘이 결혼한다면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둘 역시 백작가를 떠날 이유는 없었다- 백작 부부가 그들을 좋아하듯, 어질고 현명한 레드우드 백작 부부를 둘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결혼한 지 1년이 지나고, 장남인 그가 태어났다. 그리고 몇 년 후, 부부의 장녀 역시 태어났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백작의 화려한 금발과 백작 부인의 설탕 세공 같은 아름다운 외모를 물려받은 그녀는 걸어다니는 고급 프랑스 인형 같았다. 몸짓 하나 하나가 우아함을 타고났고, 목소리는 새가 지저귀는 것과도 같았다. 그와 그녀는 큰 나이 차이도 나지 않았고, 주변에 또래 아이들이라고는 서로 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그와 그녀는 같이 다녔다. 이상할 정도로 장난을 좋아하며 악동 같은 그녀와 무뚝뚝하고 남을 챙기길 잘하던 그는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던 계급 그 이상, 영혼에 남겨져 있는 주종 관계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 아가씨의 뒷바라지와 사고 뒷수습을 책임졌고, 백작 부부의 훈계 역시 대신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게 괜찮았다. 날이 가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그녀, 아가씨에게, 그는 완전히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슬픈 운명이었다. 꽃 한 떨기와도 같이 우아하기 그지 없고 아름답기 그지 없는 여인에게 푹 빠져버리는 것은 남자의 숙명이라고는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광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이야기 아니겠는가. 하지만, 한 여름의 화려한 햇빛처럼 번쩍거리며 빛나는 긴 금발과, 스위스의 가장 위대한 장인이 작업한 듯한 아름다운 사파이어 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사랑에 빠지지 않을 남자가 또 어디 있으랴?


 어찌 되었든,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지 못한 훈계는 아가씨를 점점 더 자만과 오만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젖살이 빠지고 아름다움을 갖추어가며 성숙해질수록, 아저씨는 점점 더 오만방자해지고 잔인해졌다. 가장 대표적인건 그를 대상으로 하던 장난들의 수위가 계속해서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엔 이성에 관심 있는 아이들이 그러 하듯 짖궂은 장난이었지만, 장난은 점점 더 에스컬레이틱해져 그가 갓 열아홉이 될 무렵에는 강제로 옷을 벗겨 촛농을 지져버리거나, 여러 하인들 앞에서 갖은 모욕을 주게 만들었다. 메이드가 식사를 들고올 시간에 맞춰서 벗어놓은 그녀의 구두를 개처럼 햝아 깨끗하게 해놓는다던가, 하는 행위들 말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러 차례 아가씨에게 그런 행위들을 멈추어 달라고 호소했지만, 오히려 아가씨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누가 믿을까요?'  단순한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뜻은 무거웠다. 그 후 그의 부모님은 그를 다른 가문으로 이직시키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아가씨의 광적인 방해에 의해 불가능했다. 그를 내려치는 망치는 가혹했으나 부어질 기름은 없었다. 그는 부서지고 있었고, 그리고 어느 날 완전히 부서졌다. 얼마나 강한 인간이든,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한 채 몇 년 동안 개처럼 대우받는다면 부서지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를 완전히 으깨버릴 사건이 1914년 7월에 일어났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지 1개월이 조금 안되서 말이다.








정말 오랜만에 글쓴다


 옛날엔 한시간만에 6천자 뽑아내고 그랬는데 지금 쓰려니까 2시간에 3천자도 못쓰겠네


 목표는 연재인데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사랑해 얀붕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