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화


[上] https://arca.live/b/yandere/8138413


[中] https://arca.live/b/yandere/8154581


얀데레 맛만 보고 싶으면 이전화 읽을 필요 없음


-----



드디어 도달한 마왕의 성, 우리는 다소 엉성하게 세워져 있지만 그 안에서 넘쳐흐르는 강대한 힘을 느끼고 몸을 떨었습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베어넘긴 마물들의 마릿수만 수천에 달하고, 그 중에서 정예 중의 정예들을 처치하며 고난을 넘어온 저희였지만.

성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정도로 마왕의 힘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랬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이 풍경이 익숙합니다. 마치 이전에 몇 번이고 이 장소를 찾아온 경험이 있던 것처럼 낯설지가 않습니다.

마왕이 자리잡기 전에 내가 이곳을 찾아왔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예로부터 이 장소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였으니까요.

저는 그렇게 기시감을 느끼면서 동료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깁니다. 성의 문으로 들어서면서도 어쩐지 본 적 있는 듯한 풍경이 계속됩니다.


"다들 잠시만요!"

"응? 세일라, 갑자기 왜 그래?"

"이상하다 생각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저 어쩐지 여기에 와본 적이 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상한... 기억이 떠올라요."


저는 동료들을 멈춰 세우고 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기시감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동료들은 제 말을 들으면서도 의구심을 드러냅니다.

함께 피바람이 부는 전투들을 치뤄온 저희 마왕토벌대는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않고 신중하게 경청해주는 동료들이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세일라가 그렇게나 말한다면 한 번 검토해봐도 나쁘지 않을 거 같긴 해."


양손을 깍지낀 채로 머리에 이고 있는 엘프, 다이애나가 제 의견에 먼저 호응해줍니다. 

그녀는 엘프인 걸 드러내기 싫어해서 얼굴을 가리고 다닙니다. 그리고 매우 까칠하고 엘프답지 않게 성정이 불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쌓아온 연륜도 분명히 존재해서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의견을 낼 때마다 이를 지지해주고 변호해주던 것도 매번 그녀였습니다.


"다이애나는 너무 세일라를 두둔하기만 하는군. 참고로 나는 반대다. 검증되지 않은 비현실적인 직감과 현상에 집중할 만큼 우리는 한가한 상황이 아냐."

"쯧."


역시나 반대의 의견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세게스 마일로스 루스, 최연소 궁정마법사인 그는 34살에 모든 마법을 깨우친 천재입니다.

다만 그는 스스로의 감과 지식, 그리고 현 상황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에 기반해서 반대 의견을 제일 많이 내십니다.

물론 마일로스씨의 의견이 억지이거나 틀린 적은 여태껏 단 한번도 없었기에 그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 마일로스씨의 말씀대로 저희는 지금 적 본진의 한가운데에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의 기시감을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이애나씨도 반박할 수 없는 의견에 그저 혀를 차실 뿐입니다.


"테오도르는 어때?"

"전 두 분의 의견이 모두 옳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하지만 중립을 지키겠습니다."


테오도르 아저씨는 거대한 방패를 들고 용병계에서 명성을 떨치셨던 멋지고 굳세신 분이십니다. 

용병 생활을 하면서도 무질서한 행동보다는 명령을 끝까지 수행하는 모습으로 신임을 많이 얻고 계신 분이기도 하십니다.

다른 아군들보다도 앞장서서 행동하고 방패로 적의 공세를 막아내는 테오도르 아저씨의 모습을 보면 그 든든함이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다른 분들과 갈등을 일으킨 적도 전혀 없으시고, 항상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시는 분입니다. 마일로스씨와는 반대되는 성향이에요.


"그럼... 대장의 의견을 들을 수밖에 없겠구만."

"언제나 이런 식으로 흘러가서 마음에 안 들지만... 대장의 의견에 따르는 데 이견은 없다."


아저씨가 중립을 선언하시자, 다이애나씨와 마일로스씨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합니다. 물론 저의 시선도요.

저희의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케이프와 망토의 중간에 위치한 천을 휘날리며 위풍당당함을 뽐내시는 용사님이 계십니다.

용사의 힘이라는 신비하고 강력한 힘을 다루시며, 마왕토벌대의 대장이시고, 세계의 희망을 짊어지신 멋진 분.

언제나 당당하시고, 강하시면서, 이를 뽐내지 않고 언제나 사람을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세라, 나는 대장으로서 신중하게 이 문제에 접근하고 싶어."

"유진씨..."


그리고 저, 세릴라는 용사 유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이고,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두 사람 다 눈에서 꿀 떨어지는 거 봐."

"대장... 후우..."


유진씨와 저는 마왕토벌대가 꾸려지기 전부터 인연을 맺고 서로 사랑을 확인해온 사이입니다. 

우연히 마주치고, 우연히 같은 던전에서 만나고, 우연히 같은 여관에서 묵게 되면서, 세 번의 우연이 필연이 되었을 때.

저희 둘은 관계를 맺고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으흠, 미, 미안하군 다들. 그러려던건 아닌데."

"죄송해요. 유진씨, 저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게 죄인 거겠지. 하하, 안 그래?"

"유, 유진씨...!"


저희 둘 사이는 마왕토벌대가 꾸려질 때부터 사전에 모두 공개가 되었기에 저와 유진씨의 관계를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지만, 왕의 공인까지 겹치면서 저희는 왕국 공인 연인이 되어버린 탓에 수습도 불가능합니다.

물론 싫다는 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손에 거머쥘 수도 있는 자리에 계신 유진씨가 여전히 저를 사랑해준다는 사실에 도리어 행복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유진씨를 위해 헌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장님이 참 부럽습니다."

"테오도르 아저씨도 좋은 사람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하하, 세릴라씨를 보고 눈만 높아져서 제가 좋은 여성을 보고도 놓치지 않을지 걱정이 되는군요."

"어, 어머나, 아저씨도 참..."


테오도르 아저씨의 농담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맙니다. 푸근한 인상으로 덕담을 하시는 아저씨의 모습에게도 좋은 사람이 생기시길.

그렇게 저희 파티의 분위기가 다소 훈훈해지는 가운데, 유진씨가 넌지시 저에게 묻습니다.


"그래서 세라, 네가 느끼는 기시감이 어떻고 대체 무엇이 보이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응, 듣고 놀리시면 안 돼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난 세라의 말이라면 뭐든 믿어."


유진씨가 제 손을 꼭 붙잡으며 저를 향한 신뢰를 보이니, 제 뺨이 절로 붉어집니다. 이런 저를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유진씨를 위해서라도.

저는 제가 느끼고 있는 기시감과 불안감을 모두 상세하게 털어놓아야겠지요.


"저, 이곳을 여러번 와본 것만 같아요.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고...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저는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리는 알 수 없는 광경들을 차마 입으로 꺼내기가 두려웠습니다.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노릇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하지만 말을 잇지 못하는 저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시고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용기를 내봅니다.


"너무 익숙한... 유진씨와 너무도 똑같은 존재가 보여요. 엄청난 힘으로 저희를 압도하는... 마왕 유진씨가..."

"세릴라, 그 말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군. 마왕 유진이라고? 저 안쪽에서 느껴지는 이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가 그냥 마왕이 아니고, 우리의 대장인 유진이라는 뜻인가?"

"...세릴라, 이번만큼은 나도 마일로스랑 똑같은 생각이야. 우리 대장이 마왕일리가 없잖아. 애초에 여기에 있는 사람은 누군데 그럼?"

"그건... 그러니까..."


역시나 가장 먼저 마일로스씨의 반발이 격하게 쏟아져 나옵니다. 항상 제 의견을 두둔해주시던 다이애나씨도 이번만큼은 고개를 젓습니다.

테오도르 아저씨는 침묵을 지키고 계시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함을 떨치실 수 없었는지 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순식간에 경직된 분위기에 저 또한 후회감에 휩싸이지만, 곧 제 어깨를 붙잡는 손이 느껴집니다.


"난 믿어."

"유, 유진씨."

"세라가 그렇게 보고 느끼고 있었다면, 나는 그녀를 믿는다. 세라가 가끔씩 보여주던 신묘한 예측과 그에 기반한 도움들로 우리가 목숨을 건진게 몇 번이지? 나는 지금 세라가 느끼고 있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어쩌면 세라의 알 수 없는 능력이 우리에게 다가올 위험을 경고하는 것일 수도 있어."


유진씨는 모두의 얼굴을 한번씩 바라보면서 그리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그의 신뢰에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부담도 됩니다.

만약 내가 착각한 것이라면, 마일로스씨의 말대로 믿을 수 없는 현상에 매달려서 시간낭비를 하는 것일 뿐이라면?

혹여나 이게 잘못된 선택으로 이어져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게 된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하죠? 그게 너무 두렵습니다.


"대장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마일로스씨는 유진씨의 말에 등을 돌리며 주문을 욉니다. 미리 위험에 대비하여 주문을 저장하는 것입니다.


"대장을 믿습니다."

"음... 유진이 그렇게까지 세릴라를 위해주는데 나도 반대는 못하겠네!"

"어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테오도르씨, 그리고 농담을 입에 담으시면서도 끝까지 유진씨를 믿고 따르겠다는 신뢰가 느껴지는 다이애나씨의 한마디.

유진씨도 자신을 믿는 동료들의 모습에 기분좋은 미소를 띄우고 제 손을 꼭 붙잡습니다.


"가자. 뭐가 됐던 이제 끝을 볼 때가 왔어. 3년이라는 시간이나 싸워왔으니, 좀 쉬어야지 우리도."

"유진씨... 음, 네, 맞아요.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쉬어요. 같이."


제 대답에 유진씨는 그저 미소를 지으실 뿐. 대답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미소가 그 어떤 대답보다도 확실한 답변이었음을 압니다.

그렇게 저희는 마왕이 머무르는 중심부까지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리고


어떤 반격도 취하기 전에 날아온 마왕의 파괴적인 일격이 저희 마왕토벌대를 먼지 한 줌 남기지 않고 휩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

...

..교..

..교..님.

...교주..님


"...교주님."

"...음? 아, 마일로스씨."


나를 깨우는 누군가의 목소리, 눈을 뜨니 앞에 계신 것은 엄숙한 모습으로 예를 갖추고 있는 대마법사 마일로스씨.

잠깐 쪽잠을 자던 사이에 꿈을 꾸다니, 그것도 너무나 그리운 꿈. 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에 그것은 꿈이라고 불리는 것이겠지.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꼭 전해야만 했습니다."

"괜찮아요. 마일로스 씨라면 뭔가 이유가 있었겠죠.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유진을 데려왔습니다."

"..."


신뢰하는 마일로스씨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섣부르게 행동할 수 없는 극비 중의 극비.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고, 손이 조금씩 떨려온다. 그리고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도 동했다. 유진을 데려오기 위해 많은 희생이 있었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마일로스씨의 이어지는 보고와 함께 자그마한 함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마법으로 세뇌하여 부리던 신도병들 수백이 죽었고, 테오도르는 끝까지 유진의 공세를 막아내고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테오도르의 희생을 통해 기회를 잡아낸 다이애나가 유진을 제압했습니다."

"그런가요... 테오도르 아저씨가... 부디 양지 바른 자리에 잘 묻어주도록 해요. 그런데 다이애나 씨는...?"

"다이애나는 이걸로 돕는 것은 마지막이라고 말하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이다."


다이애나 씨에게 감사한 마음과 함께 테오도르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식은 내게 큰 슬픔을 안겨다 주었다. 

하지만 이기적이게도 나는 테오도르 아저씨와 다이애나 씨의 희생보다 유진을 제압하고 안전하게 데리고 왔다는 점에서 슬픔보다 큰 환희를 느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기쁨과 그럼에도 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 등,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인다.


"그리고 여기 이 함에는 테오도르 씨의 유품이 담겨 있습니다. 고향에 있는 부모에게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그건 제가 나중에 직접 하도록 할 게요. 그럼 곧 의식을 시작해야겠군요. 신속하게 진행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마일로스 씨가 문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환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푸른 들판과 새하얀 눈이 내리 앉은 오지의 산맥이 신비롭고 초월적인 풍경을 그려내며 나의 마음을 위로한다.

이제 모든 계획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수도 없이 많은 실패와 죽음을 뒤로 한채 홀로 나아가기를 수백 년.


"사랑하는 유진... 당신을 꼭 구해드릴 게요.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요."


창밖의 풍경을 뒤로 한채, 발걸음을 옮긴다.

잠깐 시선을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보고는 모든 미련을 버린채 지하실로 향했다.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끝을 맺을 의식의 방으로.


수없이 많은 계단을 밟고 깊고 깊은 지하로 향할 수록, 미지의 기운이 더욱 짙어져만 간다. 그리고 그와 함께 느껴지는 용사의 힘.

내가 기억하던 수없이 많은 회차 이전의 유진과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 그에게 남아있는 용사의 힘은 너무도 작아져 있었다.

마왕이 그에게 건 윤회의 저주가 그의 용사의 힘을 흡수하고 있던 탓이다.


하지만 내겐 의문이 남아있다. 이토록 약해진 용사의 힘으로 마왕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를 말이다.

그리고 내가 마왕과 함께 윤회를 거듭하게 된 이유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온갖 추측을 해봤지만 그 중에 진실이 있을지 조차 의문이었다.

게다가 마왕은 강했다. 그것도 너무나도 강했다. 용사의 힘을 대부분 흡수한 마왕은 온힘을 다하면 세계의 법칙도 뒤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어째서 그토록 거대한 힘을 두고도 우리를 쓸어버리지 않고 용사의 검에 몸을 내어준 것일까.

어째서 여태껏 지나왔던 윤회처럼 단숨에 모든 것을 파괴시키지 않았던 걸까.


그 모든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채, 찝찝한 마음으로 지하실에 들어섰다. 그래,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며 그저 과거일 뿐.

오로지 현재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딴데 눈 돌릴 시간은 없다. 거기다 유진은 용사로서의 굴레와 윤회의 저주에 사로잡혀 있는 불쌍한 영혼.

나는 그를 사랑하기에, 그를 죽여 저주받은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내가 해야할 일을 할 뿐이다.


"교주님, 어서오십시오."

"마일로스 씨. 지금 상황은 어떻죠?"


지하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일로스 씨의 모습이 보인다. 그 외에 지하실의 중심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신도들도 보였다.

모두 마일로스 씨의 세뇌 마법에 걸려 자신의 의지를 거스른 채 명령에만 따르고 있는 불쌍한 자들. 하지만 내게는 그들의 힘과 피가 필요하다.

그래, 생각하면 할 수록 마일로스 씨를 매혹시킨 것은 훌륭한 판단이었어.


"모든 준비가 마무리에 들어섰습니다. 유진만 온다면 당장 진행 가능할 정도로."

"그럼 당장 시작하죠. 유진이 오자마자 바로 의식을 치룰 수 있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일로스 씨."


마일로스 씨는 고개를 조아리더니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신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무심코 그를 불러세우게 된다.


"네, 교주님. 말씀하시길."

"고마워요. 제게 많은 걸 베풀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셔서."

"...음, 교주님에게 무언가를 베푼 기억은 크게 없습니다만 그래도 교주님의 도움되었다면 저야말로 황송한 마음입니다. 그럼..."


그래요. 당신은 기억나지 않겠죠. 수없이 반복된 윤회 속에서 마일로스 씨의 제자로 억지로 들어가 마법을 전수받고, 전수받고, 또 전수받고.

이윽고 이런 의식까지 구비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준 것은 이전 회차들의 마일로스 씨 당신이었으니까요.

당신에게 배운 매혹 마법,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파고 들어가야 하는지, 어떻게 매혹을 무의식의 영역까지 새길 수 있는지.

모두 당신을 통해서 배우고, 시도하고, 배반하면서까지 익혀온 것들이니까요. 그래서 전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 밖에 드릴 게 없네요.

그 외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에요. 당신이 이전 윤회에서부터 왕국과 몰래 정보를 계속 주고받고 했다는 사실을 눈 감아준 거니까요.

이 의식 이후로 당신은 죽겠지만, 모두 유진을 위한 기꺼운 희생이라 생각하며 봐드리도록 할 게요.


"유진이 옵니다."


가까이 있던 간부 한 명이 다가와 속삭인다. 그와 함께 머리에 로브를 덮어쓰는 나와 신도들.

잠시 뒤, 지하실의 한쪽 구석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소란이 인다.


"이 자식들! 놔라! 이 광신도 녀석들! 너희를 모두 쓸어버리겠다!"

"시끄럽군. 용사 유진. 마지막까지 추하게 갈 생각인가?"

"...마일로스? 마일로스 루스 맞나? 대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유진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여전히 용사의 당당함을 품고, 내가 동경하고 사랑했던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믿었던 동료들이었던 테오도르 아저씨와 다이애나 씨의 배신에 정신이 크게 마모된 탓인지 예전의 침착했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나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망가뜨리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와 회한, 그리고 그에 대한 죄악감.

여러가지로 복잡한 감정들이 물밀듯 밀려와 어떻게든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던 내 각오를 세차게 두들긴다.


"대답해! 마일로스! 어째서 나를! 테오도르도! 다이애나도! 왜 나를 배신했는지! 그리고 세라... 세라는 어디있어!"

"마일로스 씨. 어서 진행하세요. 대답해줄 필요... 없습니다."


더는 내 결심이 무뎌지기 전에 의식을 빠르게 진행토록 했다. 그의 울분에 가득찬 목소리를 계속 듣다가는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게 될 테니까.

그만큼 내 마음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교주님의 뜻대로. 그럼 유진, 반가웠다.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군.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마일로스...! 마일로스! 마일로오오오스!!"

"가는 길에 알려주는 거지만, 네 애인은 내가 잘 받아가도록 하지."

"...으아아아아아!! 네 놈!! 반드시 죽인다!! 네 놈도!! 이 참극을 꾸며낸 네 놈도!! 전부 저주하겠다!! 전부!! 전부우우우우!!"


쿠르릉, 지하실 전체가 크게 흔들린다. 의식의 여파인가. 아니면 유진의 마지막 발악인가. 아니면 둘 다 일까.
순식간에 불온한 붉은 빛으로 가득해진 지하실은 의식이 진행됨과 함께 크게 격동하기 시작했다.

유진의 마지막 절규와 함께 그의 신체가 산산히 조각나는 광경이 시야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마지막 시선 속에는 지옥불 같은 복수심이 느껴진다. 그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두 눈을 꾹 닫고 말았다.


의식은 계속 진행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붉은 빛은 서서히 사그라들더니 이내 질척하고 어두운 기운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유진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것은 의식의 중심부에 흩뿌려져있는 핏조각들과 혈흔들 뿐.

나는 다시 한번 죄의식을 깊게 통감하며 의식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앗..."


잠시 뒤, 어두웠던 기운이 점점 빛을 환하게 발하더니 이내 곧 사라져갔다. 지하실에 정적이 흘렀고,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보였다.


"제가 먼저 확인해보겠습니다."

"아니요. 마일로스 씨 정지하세요. 이것은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일로스 씨의 행동을 제지하자 그의 눈빛의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매혹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것을 당장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의식을 진행하던 마법진으로 진입하여 의식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마법진은 정지하지 않고 가동 중인 상태였다.

이 이상 마법진 위에 있다간 위험할 수도 있어,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유진 씨의 영혼이 방출된 게 확실한지 감지해봤나요?"

"확실하게 외우주로 방출되었습니다. 이것은 제 모든 것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마일로스 씨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성공을 보장했다. 그리고 모든 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려던 찰나, 마법진에서 무언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마법진을 향해 몸을 돌렸고 상황을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때 등뒤의 불온한 기색을 느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윽...! 마, 일로스... 씨...?"

"드디어... 널 손에 넣었군."


점점 시야가 흐려져 갔다. 무언가 마법적인 피해와 함께 작용한 효과 탓인지 몸에 점점 힘이 빠져나간다. 

마일로스 씨가 매혹 마법을 어떻게 해제했는지 알 길도 없이, 나는 서서히 몸이 기울어져 갔다.


그래, 유진이 구원을 얻었다면 나는 어찌 되더라도 상관없어. 내가 저지른 죄업을 모두 내가 안고 갈게.

유진, 당신을 정말, 정말로 사랑했어. 미안했어, 고마웠어, 사랑했어.





"거기까지."


빛이 지하실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익숙한 기운이 내 몸을 휘감고 지나감을 느꼈다. 이와 함께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마일로스 씨에게 공격 당하고 의식을 잃었던 게 방금 같은데, 긴 시간이 흐른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두 눈을 감고, 비비고 해봐도 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


"네 놈은..."

"마일로스, 오랜만이군. 그래, 이곳 풍경도 너무 간만이야. 여기서 갈갈이 찢겨나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

"마왕?!"


내 눈앞에 서있는 게, 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겉으로만 보기에 그는 마왕이었다. 유진이 쓰러트렸던 그 마왕.

용사의 힘을 사용하던 그 마왕. 서로가 똑같이 수없이 많은 윤회를 거듭하며 보았던 그의 모습이 내 앞에 나타나 있다.

하지만, 어쩐지 그에게서 익숙하고, 가장 소중했던 사람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건... 대체 왜지?


"이제 마왕이라는 이름도 질리는구만. 내 진짜 자리를 찾을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렇게 불리면 억울하다고."

"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어째서 마왕의 모습을...!"

"마일로스, 네가 방금까지 의식으로 찢어죽인 인간이 눈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 건가? 그래, 생각해보니 믿기 힘들 수도 있겠어."

"개소리마라! 유진은 갈갈이 찢겨 죽었다! 내가 죽였단 말이다! 의식으로 영혼마저 외우주로 추방시킨 녀석이 이곳에 나타날리 없다!"


냉정함을 잃고 고함을 내지르며 닥치는 대로 마법을 남발하기 시작한 마일로스. 그는 믿을 수 없는 작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 내 눈앞에서 마일로스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가지고 노는 저 남자가 정녕 마왕인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는... 마왕이 아니었으니까.


"유진...!"


그는 유진이었다. 내가 그토록 구해주고자 했던 남자. 나의 손으로 의식을 통해 그 몸을 찢어내야만 했던 당사자.

그리고 내가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며, 그리워했던, 나의 진정한 연인.


나만의 용사, 유진이었으니까.


"마일로스, 너무 오만했군. 세계를 너무 만만하게 봤어. 내가 죽기 전에 뭐라고 말했지? 너를 죽이겠다고 했다. 저주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나. 난 내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

"으, 으으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내가 교단을 만들고 여기까지 이끌어 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이제 와서 네 놈 따위에게― 에에에엑! 아아아아악!!"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지. 잘 가라."

"아아아 아아아아아―!!"


그의 괴성과 함께 빛이 일었다. 그리고 주변의 공기가 일순간 크게 요동쳤다. 

폭풍이 일고, 눈앞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어 눈을 꼭 감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정말 유진이 살아서 돌아온 걸까. 대체 어떻게 돌아온 걸까. 그리고 그가 과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유진이 맞을까.

나는 마일로스에게 일어난 일은 뇌리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버린 채, 오로지 유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뒤, 괴성이 멎었다.


"눈을 떠."

"..."

"눈 떠 봐. 세라."

"...흑"


꾹 닫고 있던 두 눈을 나는 뜰 수 없었다.

갑자기, 믿기 힘든 현실에,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정말로 그임을 확신케 하면서도 나를 두렵게 했기 때문에.


눈시울이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서 인두에 지져진 느낌마저 들었다. 엄청나게 뜨거운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그리운 목소리가 나보고 눈을 뜨라고 해보지만, 뜨기 싫었다. 눈을 뜨면 모든게 허상인 것처럼 사라져 버릴까봐 두려웠다.

허상이 아니더라도, 그가 나를 보며 힐난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 고통 가득한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게 그를 사랑하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흐흑... 흑... 유진... 제가 아는 유진 씨가 맞나요? 정말, 정말로 제가 사랑하던 그 유진 씨 인가요?"

"...아니, 난 네가 아는 유진은 아닐 거야."

"흑, 흐윽... 죄송해요. 죄송해요, 유진 씨..."

"일단 눈을 떠, 그리고 이야기 하자."


그가 내 얼굴에 손을 뻗는 게 느껴졌다. 귓볼에 닿은 그의 손길이 무척이나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턱선을 따라 내려오더니, 곧 한손으로 내 뺨을 감싸기 시작한다. 엄지 손가락으로 내 뺨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내는 게 느껴진다.

이어서 다른 한쪽 뺨에도 손길이 이어지고, 곧 내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낸 그의 두 손이 천천히 나의 눈을 띄우기 시작했다.


"아, 아아..."

"정말, 너무 오랜만이야. 세릴라."

"유진... 유진...! 유진!!"


그렇게 우리 둘은 다시 재회했다. 수없이 많은 굴레 속에서 서로의 모습을 찾아 헤매던 미로같은 이야기의 종착점이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txt [끄으으읕]

다음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txt [진짜 끝]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사실 뒷내용이 좀 더 남아있는데

이건 후일담으로 빼도록 했음


다 넣어버리면 2만자는 찍을 삘이라 스크롤 내리기 버거울테니 나누기로 함

솔직히 상 중 하, 3편으로 나누는게 아니랴 그냥 장편 각재서 6편 정도로 썼다면 더 좋았을 거 같은데

그러기에는 중편까지 얀데레 요소가 하나도 안나와서 그냥 억지로라도 컷하는게 맞는거 같음


글쓰는 버릇이 어디 안가는지 자꾸 심리묘사에 집중하게 되고 억지 분량늘리는 거 같아서 맘이 불편함

담편에 떡신 꼭 넣으겟음 ㅈㅅㅈ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