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870



디스트로이어


"철혈 포획에 성공했다고?"


"응~ 작고 어린 꼬마녀석. 어려울 줄 알았는데 금방 포획에 성공했어."


M870 녀석, 디스트로이어라고 하지 괜히 돌려말하긴.

어쨌든 보스 개체의 포획에 성공했으니 축배를 들어야 할 판인가?


"수고했어. 모처럼 고생했으니 오늘은 특별 휴가를 주도록 할게."


"그런데 이번 건은 좀 이상했어."


"뭐가?"


"보통의 철혈 보스 개체는 그렇게 쉽게 포획되지 않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포격도 약했고 가는 길에도 특별히 저항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윽…"


"괜찮아? 수복실에서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이 정도 가지고 뭘, 냉장고에 사이다는 충분하지? 그거만 마시면 나을 거야."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수복실에 가서 진찰이라도 받아 봐. 행여나 이상이라도 있으면 다음 작전 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아, 그리고 여담이지만, 그 꼬맹이가 지휘관을 애타게 찾던데?"


그 디스트로이어가 나를?

과거 철혈의 보스 개체를 만나봤을 때도 별 이상은 없었지만, 호감을 얻는데 꽤 시일이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녀들의 숙소에 들어가는 데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는데.


"리프로그래밍 작업은 다 끝났지?"


"풉, 당연한 거 아냐? 덜렁거리는 지휘관님이랑은 다르다고."


"덜렁거리는 지휘관님이라니 말이 좀 섭한데."


"히히, 설마 토라진 거야?"


"자자. 말은 이쯤 하고 사이다 마시러 가. 나보다는 냉장고가 더 급하지 않겠어?"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다음 작전때 불러줘."


***


디스트로이어의 숙소 문 앞.


"어째서 나를 만나고 싶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비록 적이었지만, 처음부터 나에 대한 연심을 품고 있었다는가?

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네가 이 지휘부의 지휘관이구나."


"그렇긴 한데 으잉?"


길게 늘어뜨린 백발 트윈테일의 그녀가 내 앞에 섰다.

그런데 상태가 좀 이상했다. 콧잔등의 홍조도 그렇고 볼이 조금 발그레한 게

설마 이건…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니까 뭘?"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는 내 앞으로 바싹 다가가더니


"…"


고개를 끌어당겨 나와 입술을 포갰다.


"자, 자자자잠깐! 지금 뭐 하는 거야!"


"인사."


"인사치고는 너무 거친데. 아무도 그걸 인사라고 생각 안 할 걸?"


"하지만, 무척 만나고 싶었는걸. 그래서 표현해봤어."


"표현이 너무 음, 너무 한마음 되어 감사한 나머지 공중제비를 돌고 싶은 심정이지만! 정말로 좋지만! 그래도 난 지휘관이고 너는 철혈인형이고 지켜야 할 선은 지켜야…"


"지휘관은 내가 싫어?"


"음?"


"내가… 이러는 거.. 싫어?"


아니, 매우 좋아. 그러니까. 매우 좋은 나머지 공중제비를 돌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럽다. 원래 친했던 인형도 아니고 초면에 그것도 갓 잡혀온 철혈인형이 그런 반응을 보이면 나는…


"아니, 매우 좋아! 너무 좋아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 좋아한다. 지휘관이 나를 좋아한다…"


초점이 그녀의 눈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 기분 탓인가?

뭐 아무튼.


"어쨌든, 새로운 철혈인형은 언제나 환영이야. 으하하. 앞으로도 잘 해보자고"


"응!"


***


"이상해…"


수복실에서 돌아온 M870은 격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분명 이상은 없었다. 검사 결과 마인드맵은 지극히 정상이었고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어지럽다.

마치 감기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몸을 비틀거렸다. 몸은 달아오르고 어째서인지


"지휘관 생각이 나."


이상하다.

그에게 특별한 연심은 없던 터였다. 가끔 놀려먹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관과 전술인형의 관계일 뿐 M870은 지휘관을 이성으로 바라본 적이…


"그럴 리 없는데…"


자꾸 생각난다.

지휘관이 자꾸 생각난다.

생각난다. 머리를 헤집고 상념이 그녀의 마인드 맵을 파고든다. 달아오른다. 차오른다. 가슴에서 따스한 온기가 그녀를 잠식한다.

그리고 마침내.


"잠깐… 만나러 가볼까?"


음영을 드리운 얼굴에는 초점이 없는 눈동자가 빛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


볼 일도 끝났고 지휘관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야 하는데…


"흥~ 흐흥~"


이 녀석 기어코 지휘관실까지 따라갈 셈인가?

디스트로이어는 팔짱을 낀 채로 내 옆을 지켰다.


"볼 일은 봤으니까. 이제 네 숙소로 돌아가면 안 돼?"


"싫은데~ 베에~"


"만약 너가 숙소로 돌아가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으면?"


"내 크고 아름다운 브라키오사우루스가 너의 안을 헤집어놓을 거야."


처음 이 말을 했던 인형은 잠깐 이 기지에 방문햇던 HK416이었다.

그 말을 듣자 마자 이해한 그녀는 표정이 쿠킹호일마냥 어그러지면서 당장 꺼지라고 일갈했지.

말 그대로 꾸짖을 갈! 그 이후로 그녀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아- 추억이여.


"지휘관 그런 것도 있어?"


"물론! 아주 아름다운 흑공룡(?)이 자리하고 있지. 그걸 보고 싶지 않으…"


"난 보고 싶어."


음?!

어떻게든 그녀를 숙소로 돌려보내기 위한 필살기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막혀 버리다니

크윽, 이 녀석 설마 내 계책을 사전에 간파한 건가?

아니, 그나저나 디스트로이어가 원래 이런 인형이었나?

내가 아는 그 녀석은…


"여기서 보네."


M870인가? 수복실에 갔다가 사이다 마시러 간 줄 알았는데


"수복실에선 뭐래?"


"별 이상 없대. 그런데…"


"그런데?"


"왜 디스트로이어랑 지휘관이랑 같이 있어?"


나와 팔짱을 낀 디스트로이어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다. 마치 얼음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좀 전에 나, 그녀에게 뭔가 했나?


"안녕, 여기서 다시 보네."


디스트로이어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 명령만 아니었으면 이참에 박살을 내주는 건데."


"야, 너… 갑자기 왜…"


"몰라."


"대답을 해. 갑자기 왜 이런 격한 반응을 보이는데?"


"몰라."


"야!"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만 멍한 눈으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실례했습니다. 지휘관님."


그 자리에서 나를 지나쳐갔다.

하아.

저 녀석 갑자기 왜 저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