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들어주는 은여우 님께서 (7)

 

 

 

 

“곡아, 곡아. 내가 재미있는 물건을 찾았어.”


“저번처럼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건 아니지?”

 

“아냐. 이거 좀 봐.”


누님이 내게 보여준 건 한 권의 책이었다.

 

그렇지만 책장을 넘겨도 글은 단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이 책의 어디가 재미있다는 거야?”


“이건 사람의 기억을 담을 수 있는 책이야! 신기하지? 이걸 읽으면 다른 사람의 기억이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한 번 만들어봤는데 성공한 것 같아.”

 

확실히 신기하긴 하다. 나는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너 줄게.”

 

“나한테? 왜?”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잖아.”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잘나신 양반들은 자서전 같은 걸 만든다고 들어봤다.

 

“좋아. 그럼 지난 5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적어볼까?”

우선 뭐부터 쓸까. 그래, 누님이랑 처음 만났던 일에 대해 썼다.

 

부모님을 잃고 숙부한테 학대당하다 도망친 끝에, 나는 누님을 만났다.

 

“그 다음에 그 못된 놈을 죽였어.”


“……그래봤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


또 뭘 적을까? 아, 그 때 지네랑 싸웠던 이야기를 쓰자.

 

“누님, 그 지네랑 싸운 거 기억나?”


“그 녀석 말이지! 히히, 그 땐 정말 재미있었어.”

“아니 근데, 난 죽을 뻔했어.”


“안 죽었으니 괜찮아. 그것도 써, 마을 사람들 얼굴을 다 똑같이 만든 거.”

“그건 조금 심했지…….”


우리는 재잘재잘 떠들며 책의 내용을 써내려갔다.

 

지난 5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수박과 호박에 발을 달아 달아나게 만든 적도 있었고, 옥황상제 흉내를 내고 고을을 

 

돌아다니며 사또를 쩔쩔 매게 만들었을 땐 배꼽이 뒤집어 질 정도로 즐거웠다.

 

하늘에 불덩이를 흩뿌려 산을 다 태워먹은 적도 있었다. 그건 재미있기보단 무서웠다.

 

아, 그것도 있지. 작년 즈음에 마을에서 제일 예쁘다는 규수를 데려와 노래를 시켰다.

 

“그 아가씨 기억나? 노래 엄청 잘 불렀잖아.”


“내가 더 잘 불러!”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쳇, 내가 더 오래 사니까 연습만 하면 그 정돈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어.”


“질투하는 거야?”


“아니거든!”


누님은 곧잘 질투하고 삐지는 성격이었다. 그래도 내가 칭찬 한 마디만 해주면 금세 풀렸다.

 

“얼굴은 누님이 더 예쁘니까 괜찮아.”

 

“……알면 됐어.”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여기엔 다 적지 못할 정도로, 신나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누님은 내게 부와 권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뭐든 원하는 것을, 남들은 상상도 못할 것을 줄 수 있다고.

 

“누님.”

“왜 불러?”

“누님이 바라는 건 뭐야?”


“네가 행복해지는 거.”


“누님의 행복은?”


나의 질문에, 누님은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됐어. 하고 싶은 일이 생겼는데 들어줄 수 있어?”


“뭐든지 말해.”


줄곧 생각만 하던 일을 실천할 때가 왔다.

 

“함께 갈 곳이 있어.”

 

 

 

 

 

 

 

*****

 

 

 

 

 

 

이 근방의 마을은 별 볼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한양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한양은 나도 처음인데. 누님은 와본 적 있어?”


“아니. 들어보긴 했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서.”


한양은……내 기대 이상이었다. 

 

일단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고, 산 근처의 마을과 비교도 안 되게 시끄러웠다.

 

“와……! 사람이 엄청 많네! 곡아, 여긴 왜 온 거야?”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따라와.”


사실, 그것보단 여길 둘러보는 게 먼저였다.

 

우리는 한양 곳곳을 둘러보았다.

 

먼저 남대문을 찾아갔는데, 내 평생 이렇게 큰 문은 본 적이 없었다.

 

그 주위로는 상인들이 짐을 실고 이리저리 분주하고 돌아다녔다, 확실히 수도라 그런가

 

화려하게 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과연, 요즘 양반들은 저런 걸입는구나…….

 

“곡아, 곡아. 저 사람들 귀에 은을 찼는데?”


“그러네. 오, 저건 좀 멋진데.”


한양에선 남자들도 장신구를 차고 다니는 구나……맨날 산골짜기 사냥꾼들만 보다가

 

파란 두루마기에 반짝반짝 빛나는 은고리를 차고 다니는 양반들을 보니 새로웠다.

 

“너도 멋지게 꾸며줄까?”


“응?”


어, 어라? 어느새 내 옷이……누님이 그 잠깐 사이에 요술을 부렸다.

 

“그럼 나도 예쁜 옷 입을래! 어디 보자, 저게 좋겠다!”


누님의 옷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어두운 홍색 저고리에 검푸른 치마였다.

 

“잘 어울려?”

“앞으론 그렇게 입고 다니는 게 어때?”


“좋아! 네 마음에 들면 뭐든 괜찮아.”


우리는 그 상태로 한양을 쭉 둘러보다, 근처 주막에 들려 밥도 먹었다.

 

그리고 또 걸었다. 그냥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어. 저기, 우리 여긴 왜 온 거야?”


“음, 저기 언덕까지 가면 말해줄게.”

 

“저기 말이지? 알겠어.”


누님이 그새를 못 참고 요술을 부렸다.

 

눈을 뜨니 방금 전에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 언덕이었다.

 

“하여간 좀 쉬엄쉬엄하지.”


“궁금하단 말이야! 자, 빨리 말해.”


……말해도 되려나.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옥반지를 꺼냈다.

 

“어라, 내가 그런 것도 만들었나?”


“이건 누님이 만든 게 아니야. 내가 누님 몰래 조금씩 돈을 모아서 정당하게 산 물건이라고.”


이것만큼은 누님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나도, 뭔가 해주고 싶었다. 

 

“지난 5년 동안 누님한테 너무 많은 걸 받았어.”

“별 거 아니야.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건데.”


“하지만 나도 남자야. 받기만 하고 살 순 없어……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주고 싶어.”


나는 누님의 손을 붙잡아,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줄곧 생각했어. 내가 누님한테 돌려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뭘까.”

“…….”


“난 인간이야. 아마 앞으로 50년도 못 살 테고, 누님은 그보다 훨씬 오래 살겠지.

 

하지만……그래도, 그 전까진 누님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곡아?”


“누님, 내 남은 평생을 누님을 위해 쓰고 싶어.”


노을에 반사된 누님의 붉은 눈동자가 물결쳤다.

 

누님이 우는 건 처음이었다. 적어도 나로선 처음 본 것이었다.

 

“그, 그건……나랑 결혼하자고?”


“응.”


“하지만 나 인간도 아닌데…….”

“상관없어. 누님 곁에 있을 수 있으면 뭐든 좋아.”


사실 이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까지고 누님의 뒤를 따를 테고, 누님도 그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떠난다고 말했으면 그것에 더 상처받았을 터였다.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누님한테 뭔가 해주고 싶었다.

 

보답. 그래, 나는 누님- 아니, 그녀에게 보답해주고 싶었다.

 

“싫어?”

“싫을 리가 없잖아.”


누님이 날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난 누님의 체온을 느꼈다.

 

“계속 같이 있어줄 거야?”


“언제까지든.”


“죽어서도?”


“죽어서도.”

 

“그럼, 나도 언제까지든 같이 있을게.”


이것이 내가 누님과 한 약속.

 

우리의 운명을 영원히 바꿔놓을 맹세였다.

 

 

 

 

 

 

 

 

*****

 

 

 

 

 

 

 

 

“으아아악!”


비명소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놀란 우리는 동시에 깨어났다.

 

“무슨 소리야!?”


“누군가 산에 올라온 모양이야. 가자.”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일이람? 문을 나서니 저 멀리 사람 그림자가 달빛 아래서

 

허둥지둥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늑대에게 물어뜯기고 있었다.

 

“내 영역에서 난리를 피워? 너희가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끼잉!”


그리고 누님은 순식간에 남자를 덮친 늑대들을 물리쳤다.

 

“거기 당신, 괜찮아?”


“가까이 오지 마!”


남자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절에서 사는 그 대머리들 말이다.

 

스님을 본 건 처음이어서 나도 누님도 당황했다.

 

“네 년이 바로 그……금강산의 은여우로군…….”


“날 알아?”

“당연하지. 널 모르는 사람도 있나?”


누님이 스님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을 빤히 보았다.

 

“……너, 우릴 감시했구나.”


생각 읽기. 누님은 나한테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겐 거리낌 없이 요술을 썼다.

 

“그렇다, 이 요물아.”


“너흰 뭐야?”


“너희 같은 영체를 처리하지. 그래……‘지나가던 사람들’이다.”

 

느낌이 영 안 좋았다. 나는 누님한테 그를 놓아주라고 말했다.

 

“왜 우릴 감시한 거냐?”


“흥, 너희가 한 짓은 생각 못 하나? 너희가 저질러놓은 짓 때문에 세상의 규율이

 

어지러워졌다. 그런 일들을 벌이는데 아무도 손을 쓰지 않을 거라 믿었어?”

 

누님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짙은 피 냄새가 났다.

 

이 남자- 대체 얼마나 많은 도깨비들을 죽인 거지? 

 

“하늘은, 인간은 너의 존재를 용납지 않는다. 은여우여.”

 

“…….”


“자, 나도 죽일 테냐? 어서 해라. 너 같은 요물이 하는 짓이야 뻔하지.”


누님이 손을 들었다. 나는 영락없이 그녀가 그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누님은 아무 짓도 않고 그를 풀어주었다.

 

“돌아가. 그리고 우두머리한테 정해. 몇 명이 오든 누가 오든 우릴 방해하면 죽이겠다고.”


“……남은 생애를 아끼는 게 좋을 것이다.”


중이 허겁지겁 산을 내려갔다. 

 

“그냥 보내도 괜찮겠어?”

“누가 와도 난 물리칠 수 있어.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정말……?”


하지만 이번엔 뭔가 느낌이 달랐다.

 

다른 도깨비들과 싸운 적도 있지만……이번만큼은 느낌이 안 좋았다.

 

“넌 내가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응…….”


누님이 말했지만.

 

나는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오래들 기다렸다. 기나긴 빌드업 끝에 제일 기대되는 파트를 쓰게 됐다.

얀데레끼가 부족했다고 느꼈다면 다음편에서 즐겨라

그리고 다음엔 마검을 지키는 기사 이야기 같은 걸 써볼까, 아니면 오크 이야기를

마저 쓸까, 그도 아니면 악의 간부들한테 역간당하는 마법소녀 이야기를 쓸까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