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죽여라.”

 

대륙에서 강대한 제국 중 하나.

베리아의 여제는 반란을 일으키다 잡힌 일당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다음은 누구지?”

“이번 반란의 주모자이자 지휘관입니다.”

“솥에 기름을 끊여라. 그전에 간 큰 놈의 얼굴을 봐야겠다.”

 

손발이 포박된 남자가 병사의 손에 이끌려 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여제가 일어나 복면을 벗겼다.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그런데 여제의 동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

 

[호감도가 맥스가 됐습니다!]

[창조물이 창조주에게 끌려 사랑에 빠집니다.]

[여제 에리카가 이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폐하?”

“생각이 바뀌었다.”

“예?”

“당장 고통스럽게 죽이기보다 내 곁에 둬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헉.

에리카의 곁엔 모기 하나 서성이지 않는 다는 말이 있다.

황위에 오르는 동안 수 많은 피를 봤고 그 잔인함은 모든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저 청년에게 이로울 텐데! 얼마나 분노하셨으면….’

 

“병사와 대신들은 모두 나가라. 이 자와 할 말이 있다.

”예, 예!“

 

철컥.

소란스러웠던 알현실이 두 명만 남자 조용해졌다.

에리카는 어째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고 말했다.

 

”이름이 뭐지?“

”요한이다.“

”평민인가 보군. 왜 반란을 일으켰지?“

”…정신차리고 보니 그렇게 돼있었다.“

 

‘이상한 말이군. 마치 고의로 그런 게 아니란 말처럼 들리는데….’

 

”나라를 위협하는 반란자는 모두 칠족을 멸한다. 그럴 각오로 한 것이 아닌가?“

”해봐라.“

”…뭐?“

 

남자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도저히 황제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그런데 그 태도가 밉지 않았다.

점점 곁에 두고 관찰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건방지군. 좋다. 사형이 결정될 때까지 짐의 수발을 들거라. 이것도 거절하겠느냐?“

”아니. 알겠다.“

”흥. 이럴 땐 고분고분하군.“

 

에리카는 볼이 상기된 걸 모른 채 알현실을 나갔다.

잠시 후 병사들이 등장해 몸의 포박을 풀어줬다.

목욕탕에 가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의복으로 갈아입자 몰라보게 변했다.

요한은 상황이 정리되자 깊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빙의되자마자 목이 잘려질 뻔 했군.’

 

30권 분량의 『크로미스 대륙 전기』를 완결시키고 자고 일어났더니 빙의가 됐단 소설같은 이야기다.

다른 소설에서 보면 낯선 천장부터 시작되는데 빙의된 요한은 지나가다 목이 잘려지는 엑스트라 같은 등장 인물.

정신 차리고 보니 음모를 들켜 이곳까지 끌려왔다.

 

‘이 특성이 아니었으면 분명 기름에 달궈져 죽었을 거다.’

 

「창조주의 페로몬」: 히로인들이 당신과 눈을 마주치면 사랑에 빠집니다.

 

어찌 보면 사기적인 특성이다.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남용되면 남용될수록 위험하다는 뜻이다.

사랑의 다른 말은 소유욕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여황께서 부르신다. 따라와라.“

 

요한은 병사를 따라 알현실에 들어갔다.

포로의 신분이 아닌 시종의 신분으로.

에리카는 요한의 달라진 인상을 보고 급히 얼굴을 돌렸다.

 

”…나쁘지 않군. 내 옆에 대기하라.“

 

대신들은 요한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곧 리사아 제국의 세실리아 여제께서 도착하십니다.“

”그 계집애가 무슨 일이지?“

”일전에 있던 마법 도구 대여료에 대한 독촉입니다.“

”아 산을 날려버렸던 그거? 돈은 내지 않았는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실무에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합의가 되지 않아 직접 오신다고….“

”그런가. 알겠다. 짐이 말을 나눠보도록 하지.“

 

잠시 후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주위의 보좌를 받으며 도착했다.

세실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에리카! 오랜만에 봐도 키가 작은 건 여전하구나!“

 

뜨끔.

컥컥 요한이 갑자기 기침을 하자 에리카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지병이 있나?“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다. 조용히 하도록.“

”…예.“

 

모든 대신들이 물러났지만 요한이 남아있자 세실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시종은 언제부터 생긴 거야? 너 남자라면 지독하게 싫어하지 않았어?“

”…반란군의 수괴였다. 내 옆에서 지독한 괴로움을 주려고 시종으로 임명했지. 

“흐응.”

 

요한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세실리아가 웃었다.

 

“예의가 바른 친구네. 저기,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을래?”

 

에리카는 세실리아가 요한에게 관심을 가지자 왜인지 불편했다.

 

“…내 시종을 보러 온 건 아닐 텐데? 세실리아.”

 

그러자 세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요한은 들키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그치 그치. 들어봐. 에리카! 우리의 첨단고대병기를 빌려서 산을 날리고 덕분에 길을 뚫었잖아?”

“고맙게 생각한다. 합의한 대로 돈은 지불했다.”

“호호호! 그건 포 한 발의 값이었어. 그런데 몇 발을 싸재꼈길래 고철덩이가 돼서 돌아온 걸까? 수리 기간이며 수리비는? 사용하지 못하는 동안의 합의금은?”

“그것에 대해선 이견이 있다. 우리는 포를 빌렸다고 했고 성능도 충분하지 않았다. 몇 발 쏘고 고장 날 거라면 우리에게 하자가 있는게 아니라 물건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그것을 덮어씌우는 건가?”

“리사아의 마법 공학을 무식한 베리아 놈들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지금?”

 

분위기는 한순간에 험악해졌다.

이 일로 양 국가는 험악해지고 에리카와 세실리아의 관계도 금이 가며 결국 전쟁이 일어나는 단초가 됐다.

내 소설의 중요한 프롤로그 장면 중 하나였다.

 

“무식하다니… 그 말 취소해라. 그리고 전사의 명예를 더럽힌 것을 사과해라.”

“공식적으로 사과받을 사람은 나야. 역시 말이 안 통하는 건가. 베리아 놈들 하고는….”

 

일촉즉발의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저기.”

““음?”“

”리사아의 첨단고대병기에는 하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원체 오래된 물건이라 사용법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류가 있었고 그것이 물건을 망가트렸다는, 그런 설정입니다.“

””…?“”

“포를 빌렸다는 것도 양 국가의 오해가 있습니다. 리사아 입장에서는 당연히 마법병기를 한 번 쏘고 몇 개월을 기다리는 게 당연하단 인식이 있지만 베리아는 자기들 무기처럼 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 결국 문제가 일어난 거죠.”

“아….”

 

누군가 깨달았다는 듯 탄식을 흘렀다.

요한은 말이 너무 많았다는 걸 깨닫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터벅터벅.

세실리아가 에리카의 앞까지, 아니 요한의 앞까지 걸어왔다.

 

“…확실히 듣고보니 그렇네. 결국은 소통의 문제라는 건가. 에리카 넌 어떻게 생각해?”

“알아볼 여지가 있다. 책임자를 물을 테니 기다려 주겠나?”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그것보다…”

 

요한의 머리 위로 세실리아의 진한 시선이 닿는게 느껴졌다.

 

“아까 반란군의 수괴라고 했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에리카 성격으로 바로 죽이지 않는다니… 진짜 정체가 뭐야?”

“세실리아. 내 물건에 관심을 두지 마라. 떨어져라.”

 

그러나 세실리아는 그 말을 무시하고 요한의 턱을 집어 강제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

 

[호감도가 맥스가 됐습니다!]

[창조물이 창조주에게 끌려 사랑에 빠집니다.]

[여제 세실리아는 이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세실리아!”

 

에리카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치며 세실리아를 요한과 떨어뜨렸다.

하지만 진정으로 당황한 건 세실리아였다.

 

“어? 어…?”

 

세실리아는 충격을 받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몸을 기울었다.

그 광경을 보며 에리카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돌아가라. 세실리아. 이건 경고다. 다음 번엔 이런 만남은 이제 없다.”

“…….”

 

세실리아는 고개숙인 요한에게 한 번 시선을 주고 어기적어기적 몸을 끌며 알현실을 나갔다.

에리카는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요한. 방금 전 잘해줬다. 생각지도 못 했던 부분을 짚어줬군.”

“아닙니다. 도움이 돼서 다행입니다.”

“아니, 네가 생각한 것보다 큰 일을 해줬어. 외교라는 게 자칫 이런 트러블 하나로 전쟁으로 벌어질 수 있다. 나도 아직 황제라 불리기엔 완벽하지 않은 모양이야. 그보다…”

 

에리카가 일어나 요한의 턱을 잡았다.

 

“방금 놀라지 않았나? 그 더러운 손으로 네 턱을 잡다니… 막지 못해 미안하다. 요한.”

 

그러면서 자신의 손으로 깨끗하게 해주겠다는 듯 계속해서 문질렀다.

 

“괜찮습니다. 폐하.”

“이름을 불러도 좋다.”

“에리카님… 계속 그러시면 간지럽습니다.”

 

그 말에 에리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굴을 붉히고 큼큼 헛기침을 냈다.

 

“…요한. 난 남자들을 싫어한다. 내 아버지부터 오빠들까지, 모두 쓰레기같은 놈들이었으니깐. 죽이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을 거다. 그래서 죽였다.”

“…예.”

“하지만 어째선지 넌 싫지 않다고 느껴진다. 방금같은 유능함을 네게 느껴서일까? 어째서인지 아나?”

 

요한은 에리카의 진지한 물음에 답했다.

아직 사랑을 깨닫기엔 할 일이 많다.

속박되는 게 싫기도 하고.

 

“저는 에리카님의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죽어도 억울하지 않은 그런 죄를 지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편안함과는 좀 다른 느낌인데… 알겠다. 네 유능함을 믿어보지.“

”감사합니다. 폐하.“

”이름으로 부르도록.“

”…예. 에리카님.“

 

그렇게 시종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