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밥을 굶진 않았지만 먹고 싶은 걸 먹지는 못했다.


길바닥에 나앉은 적은 없지만 새 이불을 덮어본 적도 없다.


아주 어릴 때 이미 깨달았다.


우리 집은 가난하단 걸.


어떻게 보면 부모님의 치부였기에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재산보다 빚이 수십 배 많다는 건 뻔했다.


늘 돈이 없는 게 억울했다.


내가 죽도록 아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남들에게는 일상이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큰 박탈감을 안겨 줬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액수가 언급되는 순간마다 밀려오는 위화감은 언제나 날 숨막히게 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몇 배는 노력했고, 몇 수 앞을 바라보며 미래를 위한 신중한 선택을 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이 지난 지금, 난 20대 치고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수성가했다 말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앞으로도 쉬지 않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여러 가지 잡무가 시간을 꽤나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 뿐만 아니라 저녁은 어떤 메뉴를 먹을지, 무슨 제품을 살지 고민하는 데에도 수십 분씩 쓰게 된다.


그래서 내 삶을 관리해 줄 사람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내가 온전히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몇 주 고민해 봤지만,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았다.


다만 내 일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는 게 조금 꺼림칙할 뿐이었다.


뭐, 그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넓은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고용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다행히도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믿을 만한 녀석들이 몇 있었다. 


하지만 옛 친구들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기엔 그 녀석들의 자존심도 생각해야...


"아, 얀순이가 있었지!"


고등학생 시절 단짝처럼 붙어다니던, 장난삼아 약혼까지 한 사이다. 누구보다 얀순이를 잘 아는 사람으로써 말하건대, 이런 걸로 자존심 상할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30초가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고민을 마치고 바로 연락했다.


"얀순아, 취업 준비중이라 했었지?"


"응. 왜?"


"내 비서 할 생각 있어?"


"어...어? 어... 음.... 잠깐만, 조금 생각해보고 연락할게."


"오케이"


그리고 몇 분 뒤, 얀순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할게."


"어... 물어볼 건 없어?"


"응. 회사 위치만 알려줘. 내일부터 출근하면 되지?"


얀순이답달까, 날 전적으로 믿는 모양이다.


"헤헤, 나도 취업했다고 자랑해야지!"




다음 날 아침, 얀순이가 출근했다.


"오랜만이야!"


난 반가운 얼굴로 얀순이를 맞았다.

회사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마치고 나서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아, 그리고 내 개인적인 부분도 좀 관리해줬으면 해."


"응? 예를 들면?"


"별 건 아니고, 코디...는 어차피 항상 똑같고. 식단이라던가 하는 것들 말이야."


"뭐, 그 정도야 쉽지."


"연봉 5천. 어때?"


"콜."


얀순이가 애써 웃음을 감추머 말했다.


일주일, 이주일, 몇 달 만에 효과는 극적으로 나타났다.


다만 뭐랄까, 얀순이가 점점 더 사소한 것들까지 관리하게 되는 것 같다.


"얀붕아, 차라리 그냥 동거를 할까?"


"에? 그게 무슨 소리야? 뭐, 그게 편할 것 같긴 하다만... 그러면 부조리 아니야?"


"에이, 뭐 어때. 네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그러고 싶다는데."


"음.... 알겠어 생각해 볼게."


어느새 얀순이는 아파트 관리비까지 관리하고 있었다.


"참 나, 무슨 부부도 아니고."


어쨌든 얀순이가 유능한 비서라는 건 분명했다.

이젠 오직 회사만 신경쓰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얀순이의 '관리'는 점점 '집착'에 가까워져 갔다.

이젠 내 연애에까지 간섭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선 그다지 유능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을 수준이다.

솔직히 말해서 간섭하지 않는 편이...


"아, 조졌네."


문 앞에 도착하자 시곗바늘이 오후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얀붕아."


"아니 얀순아, 잠깐만! 잠깐만 들어봐줘!"


"말해봐."


"어.....잘못했어."


"....."


내가 데이트로 귀가가 늦어지는 경우에는 얀순이가 분노해버린다.


갈수록 이런 일들이 심해지는 탓에 오히려 얀순이의 관리가 스트레스를 주었다.


해고를 하기엔 여러모로 논쟁의 여지가 많은 상황.


결국 난 얀순이에게 사직을 권고했다.


"뭐...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하아..."


얀순이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더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커헉!"


주먹으로 내 복부를 강타했다.


"으윽, 뭐 하는 짓이야..."


아픈 배를 움켜쥐고 힘겹게 소리를 짜냈으나 얀순이는 여전히 화난 얼굴로 말했다.


"야, 이건 눈치 못챈 니가 잘못한거지."


"그게...무슨..."


얀순이가 내 턱을 잡고 끌어올리더니 내 얼굴을 마주보고 말했다.


"좋아해."


"그런 거였냐....."


두 대.

얀순이가 내 복부를 다시 한 번 가격했다.


"흐윽...큭..."


아파서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눈물이 흘렀다.


"근데 넌 뭐? 권고사직? 장난하냐?"


얀순이가 이렇게 화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나로써는 억울할 따름이다.


"내가 간섭하는게 그렇게 귀찮았어?"


지금까지 얀순이가 준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나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울먹이며 말하는 얀순이를 보자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으...그건..."


그러나 미안해할 여유는 없었다.


"하윽..."


세 대.

세 번이나 같은 곳을 피격당하자 고통에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잠, 잠깐만.....대화로 풀자.....크헉!"


네 대.

-퍽


다섯 대.

-퍽


다섯 대를 맞고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다가왔다.


여섯 대.

"미안, 내가 잘못했어!"


일곱 대.

"사, 살려줘..."


얀순이의 키와 체격은 나와 거의 비슷했다.


비슷한 피지컬이라면 내가 불리한 건 당연했다.


여덟 대.

"그만...제발 그만해..."


아니, 불리한 수준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폭행당하고 있었다.


아홉 대.

"으...윽..."


더 하면 장기가 터질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지 얀순이가 잠시 주먹질을 멈췄다.


"흐윽...켁...."


그리고 내 배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제발...그만해줘..."


기도가 눌려 잘 나오지 않는 소리로 간신히 발음했지만 얀순이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더 세게 목을 졸랐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체중이 실린 얀순이의 손을 떨쳐 내기엔 무리였다.


"사랑해, 얀붕아."


그래,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