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마왕의 앞에 도달한 용사여. 나, 지혜의 여신이 당신에게 축복을 내리겠습니다.

 

 

네. 여신님. 저에게 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당신의 믿음직스러운 동료. 마법사는 마왕이 죽으면 당신을 불태울 것입니다. 

 

 뼛가루만 남은 당신과 함께 돌아와, 그대의 죽음을 불가피한 희생으로 전하겠지요. 그녀는 당신의 명예로운 죽음과 함께 이 나라의 대마법사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법사를 두고 출발하십시오, 용사여. 

 

 

여신님. 괜찮습니다. 

 

그녀의 맹렬한 화염이 없다면, 마왕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없습니다. 

 

그녀의 누구나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없다면, 마왕의 발을 묶을 수 없습니다.

 

마법사가 없다면, 분명 마왕은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용사여, 그대의 시련은 이 것만이 아닙니다.

 

 파티의 전열, 전사는 그대가 죽으면 용사의 이름을 가로챌 생각입니다. 

 고귀한 숙명은 전사의 명예로 빼앗길 것이며, 용사의 이름은 전사의 것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빛을 잃지 않는 갑옷과 고결한 이만이 쥘 수 있는 검은 그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겁니다.

 

악을 멸한 전설의 용사의 이야기는 길이 전해지겠지만, 그곳에 쓰인 이름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전사는 두고 출발하십시오, 용사여.

 

 

 여신님. 괜찮습니다. 

 

 든든하게 앞에 방패를 들고 선 그가 없다면, 우리는 맹렬한 공격을 뚫고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검에도. 마법에도 쓰러지지 않는 전사가 우리의 앞을 맡아주지 않는다면,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 지나야 할 길고 어두운 길을 밝힐 수 없습니다.

 

 전사가 없다면, 분명 마왕은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용사여, 당신을 향한 악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달콤한 말을 들려주었던 성녀는 당신을 증오합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순결을 이유로 들어 매일 그대와의 입맞춤을 거부하는 그녀는, 스스로 순결을 황태자에게 바쳤습니다.

 

 

 …괜찮습니다. 여신님.

 

 그녀의 빛과 기적이 없다면, 우리는 마왕의 독기를 버틸 수 없습니다.

 성녀의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상처에, 출혈에, 고통에, 흔들림에, 환각에 상대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믿음과 헌신은, 흔들리는 우리에게 항상 길이 되어 주었으며. 왕국과의 인연은 지금까지의 고행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성녀가 없다면, 마왕은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여신님.

 

 

아.

아아.

용사여.

용사여! 

 

 …용사여. 이 세상에 당신을 사랑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왕궁으로 돌아간 순간, 당신은 그대의 존재를 질투하는 황태자에게 모역죄를 선고받아 모든 이가 당신을 욕하게 만들 것입니다. 길가의 어린아이조차 당신의 이름을 욕으로 사용할 것이며, 어디의 무덤에도 이름이 적히지 못할 것입니다.

 

  가장 천한 가축의 이름표에나 적힌 채, 그대의 이름은 빼앗기고, 목숨은 짓밟혀 추락할 것이며, 아무도 당신의 헌신을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가여운 그대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전 한평생 당신을 지켜봐 왔고, 사랑하고 있으며, 미래영겁 절대로 그대를 배신하지 않을 반려가 있는 곳으로 그대를 보내줄 수 있습니다. 지금 끄덕임 한번만 하면. 조금만 짐을 내려놓는다면. 자유롭게, 어디로나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왕은 누가 물리칩니까?”

 

 

 “당신이 꼭 하지 않아도, 새로이 운명을 타고난 용사는 다시 마왕을 쓰러트리게 될 것입니다. 그대 하나만이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누군가가 성스러운 검을 쥐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용사가 태어날 것이며. 그는 당신의 뜻을 이어 마왕을 쓰러트립니다. 마왕에게 도달키 위한 당신의 노고는 그의 입으로 다시 빛날 것이고, 세상은 당신의 이름을 사랑으로 노래하게 될 터. 그 누구도 손해보지 않으며,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십, 수백 년이 걸릴 지 모르는 일입니다. 여신님, 저는 보았습니다. 황금빛 밀밭이 불타 쓰러지는 모습을. 재가 되어 버린 이삭을 쥔 채 아사한 농부의 시체를. 악마에게 살해당한 상인과, 시체를 붙잡고 백치가 되어 버린 아내의 비명을 들었습니다.”

 

“용사여, 하지만...”

 

“저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학살이 지나간 후의 마을과, 그곳에서 풍기던 시취. 그 위의 어미에 안긴 채 죽은 갓난애의 무딤. 고통에 찬 사람들 모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끝내줄 누군가를, 용사를,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기다렸습니다. 진정으로 자유를 부르짖는 이들은 언제쯤 그 기다림을 끝마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수많은 마을에서 손가락질 당하며 전전한 고아는, 왕궁에서 살수로 길러져 고문과 고통을 견디며 살아온 용병은, 마왕을 죽이기 위해 희생양으로 꼽힌 용사는, 처음으로 마음을 준 친구들에게도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누구보다 혐오받는 너는!!”

 

 

언제쯤, 나의 기다림을 끝내주겠습니까. 

당신이 상처받을 때마다 내 마음은 찢어질 것 같은데.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제가 당신께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제가 있다고.

나 말고는 누구도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았는데. 왜.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여신님.”

 

“그렇다면 어째서 저만은 사랑에 답해주지 않습니까, 용사여. 왜…!”

 

“…그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봄이 한창 지나가 바람이 불던 때. 죽기 위해 산에 오른 저에게. 여신님의 신탁을 받은 성녀님을 통해, 당신은 다가오셨습니다. 꽃을 하나 꺾어서 주시며, 절 사랑하는 이가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샛노란 꽃은 정말, 정말로 예뻐서.“

 

그 눈부심에 홀릴 때부터 저는. 이 증오스러운 곳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사라지지 못한다면 나가게라도 해 달라고. 언제나 죽고 싶었던 나는.

 

 

“이곳에서 살고 싶어졌습니다.”

 

 

아.

아아.

 

 

 “손이 부러질 정도로 검을 쥐었습니다. 매일 밤 산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웃으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누구든 사랑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가르침이니까.”

 

 

사랑.

그것은 이 세상의 주신. 그녀의 뜻이며.

그녀의 아래에 있는 모든 이에게 그 보답을 돌려주지만,

 

“누구보다도 빠른 제 발이 없다면, 성스러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제 힘이 없다면, 부패한 왕국과 성국, 그 모든 곳의 증오를 받아도 나아갈 수 있는, 그들의 배신이 두렵지 않은 제가 아니라면. 마왕은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만은 배신감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당신은, 계속해서. 끝내 제 말을 듣지 않는군요.”

 

 

그래, 용사는. 당신은.

결국 내 사랑을 밀어내는 그대를 다시 데려오려면.

나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그 사랑을 나눠 주는 널 돌려받으려면. 언제나 날 배신하는 널 가지려면. 

 

 

늦은 밤. 신탁을 받는 용사와 여신을 달만이 비추고 있었다. 이제 마왕성까지는 겨우 한 걸음. 믿음직스러운 동료들과 그의 용기가 있다면,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수많은 고통과 비극의 사슬이 끊어지기까지 이제 한 걸음.


여신의 신탁을 듣던 용사의 뒤에서, 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히 뒤를 돈 용사의 뒤에 있어야 했을,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고깃덩어리만이 그의 눈을 비추고 있을 뿐. 

그 장본인으로 추측되는 눈앞의 상대방은 언제나처럼의 자애로운 미소가 계속해서 띄워져 있었다.

 

 

“여신님. 이게 무슨…?!”

 

“오랫동안 생각해봤습니다. 언제쯤 당신이 절 봐줄까. 아니, 사실 당신이 제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언제쯤 그 바보 같은 행동을 멈추고 스스로의 행복을 택할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요.”


 “너무도 오래 기다렸어요. 하지만 늘 같은 대답, 바보처럼 당신은 이곳을 사랑했고, 당신은 언제나 절 배신했습니다. 전 언제나 기약없이 당신을 보아왔지만, 이제야 깨달은 거예요.”

 


 처음부터 부숴버리면, 당신이 나 말고는 사랑할 대상 따위는 없다고.

 

 여신은 용사를 자신의 품으로 당겨 감쌌다. 이제 그의 눈은 그녀의 사랑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볼 수 없으리라.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여신의 분노. 마왕과 왕국,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을 향한 여신의 증오가. 그를 향한 사랑이 거대한 불덩이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조차도.

 

그래도 그는 행복할 것이다. 마침내 그는 사랑하고 사랑받게 되리라.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