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들어주는 은여우 님께서 (9)

 

 

 

 

““나는 혼자였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홀로 기다렸다.

 

언젠간, 분명 언젠간 빛이 보일 거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내게 그런 건 오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쳤다.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었고 내가 세상에 대해 아는 건 그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뿐.

 

그 누구도 내 행복을 바라지 않으니.

 

나도, 그들의 행복 따윈 빌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날 찾았어.”


그토록 오랜 세월 혼자였던 내게, 죽음을 바라던 네가 찾아왔다.

 

내 삶에선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너는 내게 영원을 가르쳐주었다.

 

영원한 사랑.

 

절대 잊지 못할 애정을.

 

죽음을 바라던 우리는, 서로를 만나 삶을 원한다고 말했다.

 

세상은 우리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 속해있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세상 따윈 필요 없어.”

 

자아, 어서 와.

 

이곳은 오직 행복만이 존재하는 세상.

 

너와, 나 둘뿐인 낙원에.

 

 

 

 

 

 

 

 

*****

 

 

 

 

 

 

 

 

나흘이 지났다. 나는 그제야 이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겉모습은 원래 세상과 완전히 똑같았다.

 

빌딩과 고층 건물들, 도로와 나무. 푸른 하늘까지, 전부 진짜 같았다.

 

그러나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곡아, 뭐해?”


“하늘을……보고 있었어.”

 

빌딩 옥상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던 중, 호은이가 말을 걸어왔다.

 

“하늘? 하늘은 왜?”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어.”


“괜찮아! 혹시 무너져도 내가 다시 만들어줄게.”

 

호은이가 내 손을 붙잡고,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우리는 8차선 도로 한 가운데에서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동차로 가득했을 도로가 텅 비어있었다. 

 

“이제 뭐할까? 어디 가고 싶어? 뭐하고 싶어?”


“딱히…….”


“맛있는 거 먹고 싶어? 자!”

 

호은이가 내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받아먹었다.

 

“맛있어?”


“응.”


“행복해?”


“……잘 모르겠네.”

 

이곳에 온 뒤로, 나는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꼈다.

 

분명 여기엔 행복만이 있을 것이다.

 

나를 불행케 만들 그 어떤 요소도 없으니, 나는 행복해야 했다.

 

“아직도 행복하지 않아? 음……그래! 건물 몇 개 무너트려볼까!?”


호은이가 팔을 힘껏 휘두르자, 고층 빌딩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보통 같으면 놀라 뒤로 자빠질 광경이었지만- 흙먼지가 눈에 들어가 따가울 뿐이었다.

 

“자! 재미있지?!”


“그냥 건물이 무너진 것뿐이잖아?”


“어……그렇지. 응, 그러네. 별로 재미없다.”


호은이가 다시 손을 휘두르자, 건물들이 원래 모습대로 돌아왔다.

 

“그, 그러면……뭐할까? 달리기 경주라도 할래?”


“아니, 괜찮아.”


나는 호은이를 뒤로하고 쭉 앞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뭘 하지?

 

아니, 앞으로 뭘 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텐데.

 

“……곡아.”


“왜?”


“내가 뭘 해야 웃어 줄 거야?”


생각해보니, 호은이 앞에서 웃은 적이 없었다.

 

왜일까?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 뭐든지 해줄 수 있어.”


“알아.”


“사람들을 잔뜩 죽여 버릴 수도 있고, 하늘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어. 여자 필요해? 그러면

 

얼마든지 만들어줄게. 맛있는 것도, 재미있는 것도, 잔뜩!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그래봤자 아무 의미 없잖아.”


말해버렸다.

 

이 모든 게 의미 없는 짓이라고.

 

나는 말했다.

 

“내가 뭘 바라냐고 물어봤지?”


“응…….”


“그럼, 전부 되돌려줘. 이걸 없었던 일-”


“안 돼!!”


그 외침에 세상이 흔들렸다.

 

나는 뒤로 넘어졌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지진이 지나간 것 같았다.

 

“저, 저 세상은 우릴 불행하게 만들어. 우릴 싫어해, 우린……우린 거기 속하지 못해.”


“호은아…….”


“있지, 뭘 해야 돼? 내가 뭘 해줘야 행복하다고 말해줄 거야? 어떻게 해야 웃어 줄 거야!?”


그 순간, 풍경이 변했다.

 

나는 처음 본 장소에 있었다. 아니……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나는 처음 본 장소였다.

 

여긴 그 옛날의 나와 호은이가 함께 살았던 집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나,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뭘 바라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호은이가 나를 껴안고 흐느꼈다.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


“네가! 네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나는- 웃을 수 없다.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이 모든 행복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정 그렇다면, 내 머리를 바꿔버리면 되잖아. 넌 할 수 있잖아.”


“할 수 있어…….”


호은이가 마음만 먹으면, 내 머릿속을 바꿔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 어떤 불행과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뇌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안 돼. 그건, 그건 네가 아냐. 내가 아는 네가 아니야.”


“……그래?”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방에 깔려있는 이불 위에 누웠다. 

 

“나는……내가 바라던 건…….”


내가 바란 건 고작 이런 거였던 건가?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행복을 누리는 게 내가 바란 거였나?

 

이딴 게 내가 바란 거라고?

 

그 때, 호은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 위에 올라탔다.

 

“내, 내 몸을 써줘…….”

“…….”


“나, 가슴도 크고……얼굴도 네가 예쁘다고 해줬으니까……안아줘. 날 범해줘.”


호은이가 옷을 벗었다. 

 

티 하나 없이 하얗고 보드라운 몸이었다. 

 

그녀가 내 손을 붙잡아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 했다.

 

“이제 행복해……?”


“그만해.”


“아직? 아직도 부족해?”


키스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더 필요해? 날 안아, 나를 더럽혀줘. 뭐든 괜찮아, 뭘 해도 좋아.”


“그만…….”

“네가 행복해질 수 있으면 날 죽여도 괜찮아!”

“그만하라고 했잖아!!”


나는 호은이를 밀쳐냈다.

 

도저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구역질이 올라와 견딜 수가 없다.

 

“왜…….”


“미안해.”

 

호은이가 울먹거렸다. 그런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이전의 나는 본 적 있었다. 죽기 직전에 본 그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야 돼? 난 뭘 해야 하는 거야?”


“이제 그만하자.”


여기서 끝내야한다.

 

이런 촌극에 의미 따윈 없었다.

 

“싫어.”


“계속 이래봤자 난 행복해지지 않아.”


“싫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계속 있어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싫어.”


호은이가 연거푸 고개를 저으며 웅크려 앉았다.

 

마치 여름 방학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어린 아이 같았다.

 

“또 너를 잃어버릴 거야.”

“…….”

 

“또 네가 내 눈앞에서 죽어버릴 거야.”


또 다시.

 

나는, 죽는다. 사람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혼자는 싫어!!”


애처로운 외침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에, 고집에, 집착이었다.

 

“혼자는 싫어! 혼자는 싫다고!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 다신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어두운 건

 

싫어. 싫단 말이야, 싫어! 다시는 그 어둠 속에 혼자 갇혀있고 싶지 않아!! 싫어!!”

 

내가 다가가려 하자, 호은이가 주변에 있는 물건을 마구 집어던졌다.

 

아이처럼. 떼를 쓰는 아기처럼, 울부짖으며 흐느꼈다.

 

“내 곁에 있어주겠다고 말해! 다신 사라지지 않겠다고 약속하란 말이야! 곡아!!”


“……나는 곡이가 아니야.”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다.

 

그건 옛날의 나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나는, 내가 아니다.

 

“네가 알던 곡이는 이미 옛날에 죽었단 말이야.”


“아니야!!”


“이래봤자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건, 너도 알잖아.”


“아니야, 내가 행복하게 만들 거야. 너를! 너의 행복을! 네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그 때, 예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은여우는 소원을 들어주고 인간의 행복을 바라는 존재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은여우는 인간을 불행케 만든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했다.

 

끝낼 수 있다.

 

내가 소원을 빌면, 호은이에게 ‘더 이상 네가 필요하지 않아.’ 라고 말한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미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은 다른 이름으로, 연민이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이 불쌍한 소녀를 가엾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호은아-”


그 순간, 땅이 크게 흔들렸다.

 

“……누군가 침입 했어…….”


“침입했다고?”


“아무도 우리 둘만의 세상에 들어올 순 없어.”


호은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우린 아까 전에 있던 거리로 돌아왔다.

 

“이거 참 화려하게 만들어놨네, 은여우 씨.”


“신 씨?”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는 거지?


여긴 호은이가 만들어 낸 세상. 침입할 방법 따윈 없을 터였다.

 

“이렇게 보여도 나, 꽤 경험이 많거든. 허위 공간에 침입하는 법도 알고 있지.”


“너, 돌아가.”


호은이가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네가 이걸 만드는 바람에 바깥이 난리 났거든.”


“네?”


“세상을 만들어냈는데 바깥에 아무 영향도 안 줄 거라고 생각해? 나 원, 곤란하단 말이지.”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겠어.”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은여우, 너는 선을 넘었어.”


그가 검을 뽑았다.

 

검붉은 검의 도신엔 뱀의 눈알이 수없이 박혀 있었다.

 

“사도(巳刀), 똬리.”

 

검이 쉭쉭거리며 둥글게 말렸다. 검이 마치 뱀처럼 움직였다.

 

“너를 애도하마. 그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는 가련한 괴물아.”


“닥쳐!!”


두 사람이 격돌하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누가 이기든, 이 이야기는 곧 끝날 것이라는 걸.

 

 

 

 

 

 

 

 

 

 

원래 설정 이야기는 되도록 안 하지만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낄 사람들을 위해 짧게 씀.

 

신(신 씨)은 반 인간, 반 영체. 그러니까 반요임. 영체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구천십지의

손자라는 설정. 순수 전투력은 호은이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난 뒤 인간으로서의 이름을 버리고 영체로서 살아가기로 함.

 

2. 예옥은 인형술사로, 지금 쓰는 몸도 인공적으로 만든 인형임. 고려 말~조선 초기 시절부터

몸을 바꿔가며 현대까지 살아옴. 강하진 않지만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다.

 

3. 견은 도깨비이며, 예옥에게 감화되어 그녀의 오른팔로 있음. 순수 완력은 어마어마하지만

현대까지 힘을 축적한 호은이보단 훨씬 약하다. 

 

4. 주인공의 선조는 예옥, 정확히는 예옥의 양자들 중 한 명임. 그 양자의 후손이 주인공.

 

5. 호은이는 주인공이 뭘 바란다고 하면 거부할 수 없음. 죽어달라고 하면 곧바로 죽음.

반대로 말하자면 주인공이 죽으라고 말하지 않는 한 죽일 방법도 없음.

 

 

다음 편에 완결냄. 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