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때와 다름없는 금요일 저녁.


다른 이들은 불금이다, 주말이다 하며 술집에 가서 취할때까지 몸에 술을 들이 부으면 일주일간 쌓여있던 회포를 풀겠지만.


난 편의점에서 담배한갑과 맥주 한캔, 과자 같은 간단한 안주를 사고 야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


나도 젊을적 남들처럼 술자리는 좋아했지만 나이가 드니 몸이 받쳐주지 않게 되면서 점점 그런 자리와는 멀어졌고

본질적으로 늙고 병든 이 재미도 없는 아저씨와 술을 마셔줄 사람은 없었다


그저 늙어서 그런거라며 자기합리화를 하며 집에 가던 도중,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등골 시리운 비명소리가 들린다.


“살려주세요!!!”


무슨 일이 일어난지 생각도 하기 전에 몸이 움직인다.


비명의 근원지로 찾아가보니 온 몸에 얼룩을 뒤집어 쓴 앳된 여자 애 앞에 검은 후드티를 입은 남자가 하나 있는 가로등에 반사된 빛에 반짝이는 식칼을 들고 있었다.


“ 아 씨발…”


남자는 무슨 볼일이냐면서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오지만


나는 얼음이 된 채로 그저 어버버 하고 있다.


칼든 상대를 보면 맞서지 말고 그냥 도망가라고 들었는데

구해줘야할 상대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하지?


“ 에라이 썅 모르겠다 ”


남자는 커서도 애라고 했던가. 남자 특유의 알수 없는 자신감이 발동된 나는 일단 질러보자 싶은 심정으로 함께 달려든다


나를 향해 찌르는 동작을 읽은 나는 팔꿈치로 칼을 든 손을 쳐내며 카운터를 먹인다


“ 이게 되네… 웹툰에서 본건데 “


하지만 만화는 만화일뿐 내 약하디 약한 주먹을 맞은 남자는 잠시 뒤로 물러나더니 다시 칼을 겨뉜다


이번에도 쳐낼 수 있을까 싶은 찰나 피하려던 내 늙은 몸이 느렸는지 칼이 내 복부에 빗겨 찔려진다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고통에 그대로 고꾸라 질뻔 했지만 앞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님 그냥 생존 본능인지 찔린 상태에서 그대로 박치기를 가한다 


이번엔 제대로 들어갔는지 날 찌른 녀석은 그대로 뒤로 고꾸라지고 나는 칼에 찔린 고통에 벽에 기대 쓰러진다.


“꺄아아악 아저씨!!”


쓰러지기가 무섭게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여자애는 순식간에 내게로 와서 칼에 찔린 부위를 작디 작은 손으로 누른다


“아저씨 괜찮아요!?!? 119! 119..!”


벌벌 떨리는 손으로 폰을 꺼낸뒤 119를 불러 빨리 와달라고 소리친다


“아저씨 왜 그랬어요?!?! 칼 든 사람이랑 싸우지 말라는거 못배웠어요?!?”


방금 전까지 자기가 어떤 눈으로 다 쉰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했는지도 잊은 채 울음섞인 분을 내게 푼다


“몰라… 그냥…아니다.. 너 얼굴도 고운데 왜 이런 치안도 안 좋은 곳에 있어…가출했으면 집으로 곱게 들어가.”


“아저씨 정신좀 차려요!!”


눈이 감긴다. 여자 한번 사귀어 보지도 못한채 이리 죽는 건가 싶어 울고 싶었지만 눈물 나올 힘도 없다.







“…”


낮선 천장에 눈이 뜬다

여기가 어디지? 병원? 나 산건가?

살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무섭게 내 상태를 확인하러온 간호사가 깨어난 날 보고 놀란다


“얀순씨!! 환자분 깨어나셨어요!!”


밖에서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애가 다크서클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본다


그리고선 안도감에 다리가 풀렸는지 풀석 주저 앉는다


“하아…다행이다…진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집에서 가출하고 없는 돈으로 그 치안 안 좋은 동네에 단칸방을 얻어 생활하다 그런 변을 당했다고 하더라


“그니까 왜 가출 같은건 쳐 해가지고…”


“그래도 아저씨가 구해줬잖아요…애같은건 피차일반인데 뭐…”


“야! 그게 어른한테 할소리냐!”


범인은 그대로 잡혀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단다

상습범이여서 이번엔 무기징역이 확정이라나 뭐라나


“쨋든 너, 이제 이러지 말고 집에서 얌전히 살아.”


“네에…”


그렇게 병원 생활동안 계속 얀순이와 지냈다


학생이니까 학교는 가라고 했지만 그건만은 싫다면서 내 수발을 들어주고 있다


그렇게 어느정도 걸을 수 있게 되고 난 병원비 수납을 위해 수납처에 갔다


“어? 보호자 분이 다 지불 하셨는데?”


“네? 정말요?”


돈도 없이 가출한 애가 병원비를 냈다는 사실에 의아해 하면서 병실로 돌아오자 얀순이와 나이를 먹은 남자가 내 병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 몸도 안 좋으면서 어디 갔다 왔어요!?”


“아…잠깐 수납처 좀..근데 옆은…”


남자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한다


“자네가 내 딸을 구해준 얀붕군이군. 고맙네 정말 난 얀챈 그룹 회장 얀철이라고 하네.”


나는 어색하게 악수를 받은 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닙니다..사람된 도리로서 할일을 했을 뿐입니다…”


“병원비는 물론 내가 따로 보상도 지급해 주겠네. 이 늙은이는 자리에 방해만 되니 이만 나가도록 하지.”


그렇게 남자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자리를 뜬다


“저분이 아버지..? 늦둥이 였구나 너..”


“응…그래서 날 너무 집에만 있게 해서 가출했던 거야…”


늦둥이에다 부잣집 딸인 애가 복에 겨운줄 모르고 할 말을 듣자 힘이 풀린다


“이 꼬맹이가 좋은 줄도 모르고… 아니다”


“치…”


그렇게 잠깐 말씨름을 하다 다시 편하게 쉰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퇴원까지 하고 병원 밖으로 나서니 한 고급 세단이 내 앞에 선다


“아저씨!! 여기 타!! 아빠가 퇴원 기념으로 밥 한번 먹제!”


갈 곳도 없던 난 아무렇지 않게 뒷좌석에 앉는다


“이야…너 진짜 부잣집 딸이구나..”


“크크 그럼 아닌 줄 알았어?”


“아니 난 그냥..”


그렇게 차를 신기한 눈으로 구경 하면서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앉아있다 차가 멈춘다


“내리시지요 아가씨.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기사가 열어준 문을 나오자 궁궐같은 저택이 보인다.


얀순이는 벙쪄있는 날 보고 웃기다는 듯 미소를 짓곤 내 팔을 잡고 집으로 들어간다


“어서오십시오 아가씨”


저택에 있는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허리를 숙여 맞이하자 난 또다시 그 자리에 벙찐채로 선다


“빨리가자 아저씨 우리 이모 요리 맛있어!”


그렇게 벙쪄있는 날 이끌고 큰 식탁이 있는 방으로 안내한다


아무것도 못한채로 얀순이 옆자리에 앉자 일전에 봤던 회장이란 사람이 내게 인사한다


“오랜만이군 얀붕군. 퇴원하고 정신도 없을 텐데 이리 불러서 미안하네. 어서 들지”


그렇게 오랜만에 먹는 진수성찬에 허겁지겁 식사를 하다 

남자가 내게 묻는다


“입에는 좀 맞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급하게 먹느라 주위도 안보던 나는 황급히 대답한다


“아 넵 맛있어서 황홀할 지경입니다.”


“그럼 다행이네. 보상은 어떻게 해줄까 생각을 해봤는데.

두가지 선택지를 냈다네.”


“네? 선택이라면….”


“하나는 그저 돈으로 받는것. 그 돈은 평생 놀고 먹고 살아도 부족함 없이 지낼 정도로 주겠네 또 다른 하나는 자네가 다니던 회사, 우리 기업의 하청이더군. 그 기업의 임원급 자리를 줄까 하는데. 어떤가?”


난 기대도 안한 엄청난 보상에 당황한다


본래 돈을 받는게 편하겠지만 다니던 회사의 임원이라..

날 갈구던 최부장, 이과장들이 내게 굽실대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두군거린다. 어차피 임원급 자리면 돈도 많이 들어올텐데…그럼 선택지는 하나다


“그럼…임원급 자리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얀순이 기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진짜?? 진짜지?? 아저씨 무르기 없기다??”


“어? 어? 그,그럼 근데 왜 너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얀순이가 나보다 더 기쁜듯 좋아하는거지? 의문이 드는 순간 회장이 말을 건다


“알겠네. 자네 자리는 준비하도록 하지. 오늘 퇴원하느라 피곤 할텐데 우리 집에서 푹 쉬는게 어떤가? 손님방이 준비가 되어 있다네.”


“아 그럼 감사히 묵겠습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직원이 데려다준 방에 들어간다


피곤했던 난 그 자리에 눕고 이게 현실인가 생각하며 행복하게 잠이든다







불편함에 눈을 뜨니 손발이 묶여있다


“뭐야..이게 무슨..”


이해안되는 상황에 머리가 굳은 찰나 방으로 얀순이 들어온다


“야 이게 무슨..”


“아저씨…나 아저씨가 돈 안받는다고 했을때 너무 기뻣다..?”


“그게 뭔..”


“아빠가 아저씨가 자리받는다고 하면.. 아저씨랑 결혼해도 좋다고 했거든..”


“야 그게 무슨..”


“근데 오빠가 도망가버리면 안되니까..기정사실 하나 정돈 괜찮지..?”


갑자기 닥쳐오는 엄청난 정보량에 당황하던 찰나 그녀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가만히 있어.. 발버둥 치면 아프다..?”




칼을 찌른건 그 남자가 아닌, 내 눈 앞의 여자였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