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1)




리온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그의 아버지 뒤르켈은 어린 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아비가 몸이 약해서 너까지… 쿨럭.”

 

뒤르켈은 침대에 누워 기침을 토했다.

레스 왕국의 군인이었던 그는 폐에 검이 찔리고도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더 이상 뛸 수 없었다.

강제전역 당하고 뒤르켈은 고향으로 돌아와 그를 기다렸던 소꿉친구와 결혼했다.

그러나 아내는 리온을 낳고 죽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럼 나갔다 올게요.”

“그래. 잘 놀고 오려무나.”

 

리온은 뒤르켈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집을 나왔지만 사실 마을에 친구가 없었다.

마을 아이들은 몸이 약하고 내성적인 리온과 어울려주지 않았다.

리온은 언덕중턱을 올랐다.

조금만 걸어도 호흡이 가팔랐다.

 

“헉… 헉…”

 

중턱을 다 오르자 작은 마을의 전경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몸을 기댈 수 있는 나무가 있고 푹신한 잡초가 있는 이곳은 리온만이 알고 있는 비밀장소다.

리온은 나무에 기대 앉았다.

 

“후아 힘들다.”

 

숨을 고른 리온은 상념에 빠졌다.

 

‘아버지가 활동할 수 있는 시간도 고작 몇 시간... 그렇게 번 돈으론 우리 가족이 먹고 살기도 빠듯해. 내가 잘해야 해. 내가….’

 

하지만 리온은 아직 어리고 몸도 약했다.

적어도 뒤르켈의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면 몸부터 건강해야한다.

 

‘하지만 어떻게?’

 

바람이 불자 리온의 앞으로 강아지풀이 떼구르르 굴러왔다.

리온은 그것을 가만히 주웠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바람에 날릴 정도로 너도 몸이 약하구나. 호 불면 네가 갖고 있는 씨앗도 모두 흩어지겠지. 너도 그러길 바라지? 내가 도와줄게.”

 

리온이 호 불자 강아지풀의 씨앗이 마을을 향해 바람을 타고 날라갔다.

 

“우와!”

 

갑자기 위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온이 고개를 치켜들자 나뭇가지에 올라와있던 아이가 쿵 하고 내려왔다.

리온은 처음 보는 아이였다.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여자아이는 검은 원피스에다가 장갑이며 신발까지 모두 검은색이었다.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양말만이 알록달록했다.

리온은 궁금한 것을 참고 대답했다.

 

“어떻게 한 거라니? 무슨 말이야?”

“방금 호 부니깐 공중으로 날아갔잖아! 나 그거 처음 봐! 신기해!”

‘신기하다고? 그냥 흔한 강아지풀인데….’

 

리온은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지만 되묻지 않았다.

대신 주변에 있는 강아지풀을 하나 주워 소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강아지풀이라고 해. 여기에 달려있는 건 모두 씨앗이야. 일부러 바람에 날려지게 듬성듬성 달려 있는거야. 자손을 많이 퍼트리려고 말이지.”

“흐응. 강하지 않으니깐 그런 자구책을 쓰는 거구나. 그렇지?”

“어? 뭐 그런 셈이지….”

‘독특한 아이네. 내 또래인 것 같은데 외출이 많지 않았던 걸까.’

“호~”

 

소녀가 바람을 불자 강아지풀이 바람을 타고 언덕 너머로 날아갔다.

소녀는 손뼉을 치고 좋아했다.

 

“아하하! 재밌네!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어!”

 

소녀가 말하자 리온은 참았던 것을 물었다.

 

“처음 보는데 우리 마을로 이사 온 거야?”

“응! 누군가를 찾고 있거든. 아.”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리온도 따라 고개를 돌자 언제 왔는지 소녀의 일행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나무 뒤에 서있었다.

그도 소녀처럼 단안경부터 정장, 신발까지 모두 검은색 일색이었다.

소녀는 리온이 듣지 못하게 앞으로 다가갔다.

 

“루미아님. 여기 계셨군요.”

“뭐야~ 로스칼 왜 왔어? 인간 남자랑 놀고 있는데…”

“…저 남자아이 말입니까?”

 

로스칼이 차가운 눈으로 리온을 바라봤다.

그리고 단안경을 치켜올랐다.

 

“루미아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입니다. 그것보다 어서…”

“로스칼.”

 

먹구름이라곤 전혀 없는 하늘에서 순간 천둥이 쳤다.

콰콰쾅!

천둥은 주변 인근에 떨어졌다.

나무에 기대고 있던 새들이 놀라 달아난다.

천둥에 찢긴 나무에 불이 생겼다.

 

“이곳에서 나는 자유야. 아무것도 날 구속할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로스칼은 다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루미아님.”

“알았으면 가. 아니 일이 생겼네. 이 아름다운 자연에 불이 났잖아?”

 

루미아는 활활 타오르는 곳을 가리켰다.

 

“끄고 오도록 해.”

“예. 단숨에….”

“아니. 오로지 육체의 힘으로. 무슨 말인지 알지?”

 

로스칼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미아는 리온의 손을 잡았다.

루미아의 장갑 때문에 리온은 까끌한 감촉을 느꼈다.

 

“우린 가자! 리온이 알고 있는 모든 동식물을 소개해줘! 응? 그래 줄 거지?”

 

루미아가 환하게 웃자 리온은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 *

 

 

 

루미아는 괴물이었다. 체력 괴물.

시작부터 그랬다.

타고 올라가기 힘든 높은 나무의 나뭇가지에 앉아있었으니깐.

얼마 안있어 리온의 체력이 바닥났다.

 

“헉… 헉… 루미아 자,잠깐만.”

 

리온이 무릎을 잡고 숨을 고르자 루미아의 볼이 부풀려졌다.

 

“뭐야? 겨우 그거 뛰고 지친거야? 참. 한심한 남자네.”

“미, 미안해. 헉…”

“아니. 안심했어. 적어도 내가 찾는 사람은 아니라는 증거니깐.”

 

루미아는 거대한 돌에 걸터앉았다.

리온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

 

“방금 그 사람은 누구야?”

“아 로스칼? 내 하인이야.”

“하인? 그럼 루미아는 귀,귀족인 거야?”

 

큰일이다.

아버지나 오빠라고 생각했는데 하인이었다니.

귀족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죄가 되고 벌을 받는다.

만약 벌금이라도 내야 한다면……

리온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루미아는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안심해. 이곳에선 난 너와 똑같은 평민이니깐.”

‘다, 다행이다.’

 

리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루미아의 눈썹이 순간 치켜올라갔다.

 

“이름.”

“응?”

“내 이름만 음흉하게 듣고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잖아?”

“으,음흉하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흡.”

 

리온은 대답할 수 없었다.

루미아가 갑자기 내려와 리온을 덮쳤기 때문이다.

그 입을 말이다.

 

“무, 무슨…!”

“…가만히.”

 

루미아는 가만히 속닥이고 다시 입을 막았다.

연약한 리온의 힘으로 루미아의 강한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약하다고 해도 여자애가 무슨 힘이…!’

 

저항은 해봤지만 불필요하고 무의미했다.

그리고 처음해보는 입맞춤은 강렬하고 뇌를 녹였다.

그렇게 한 시간 같은 몇 분이 흐르자 루미아는 입을 가만히 떼어냈다.

점성을 띄는 침이 잠깐 이어지고 끊어졌다.

리온은 놀란 심장을 잠재우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루미아!”

“…음.”

 

루미아는 턱에 손을 짚고 생각했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나도 모르겠어. 순간 갖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거든.”

“뭐?”

“나도 이상하다 생각해. 난 아빠처럼 강한 남자가 취향이거든. 참 이상하다니깐?”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는 루미아에게 묻는 건 무의미한 행동이다.

리온이 고개를 젓자 루미아가 리온을 바라봤다.

 

“후후. 한 번 더할래? 기분 좋은데.”

“아, 아니! 됐어! 하지 말자!”

“아하하! 수컷이 암컷에게 기겁을 하고 도망가다니! 한심한데 왜 이리 귀여울까?”

‘와, 완전히 얕보이고 있다…. 도망가자.’

 

한번 덮친 상대가 무엇을 못할까.

리온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전력을 다해 달아났다.

타닥타닥.

뛴 지 얼마 안있어 다시 숨이 찼다.

리온은 뒤를 바라봤다.

 

루미아는 리온을 쫓아오지 않고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루미아가 씩 웃었다.

 

“!”

 

방금 소름 돋는 기척은 무엇일까?

마치 사냥개가 사냥감을 포착한 것 같은 기이한 느낌.

처음 느껴보는 확실한 공포.

아름다운 소녀에게 어째서 그것을 느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질 새도 없다.

리온은 소녀의 시야에 벗어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 * * * *

 

 

 

“다, 다녀왔습니다! 헉… 헉…”

 

리온은 작은 오두막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았다.

뒤르켈은 옷을 갈아입었는지 침대에서 일어나 있는 상태였다.

 

“더 놀고 오지 그렇게 헐떡이고… 무슨 일 있었니?”

“헉… 아무것도 아니예요! 헉… 아,아버지는 이제 일 가실려고요?”

“그래야지. 오전도 다 쉬었으니깐.”

 

그때였다.

톡톡. 톡톡.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뒤르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누가 올 시간이 아닌데…”

“아버지!”

 

리온이 뒤르켈을 막아섰다.

문은 계속해서 두드려졌다.

톡톡. 톡톡.

 

“손님이 왔으면 열어줘야지. 리온. 방해하지 말거라.”

“…예.”

 

톡톡. 톡톡.

뒤르켈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있는 사람은 검은 옷이 인상적인 소녀와 남자였다.

로스칼이 인상을 찡그렸다.

 

“감히 우리가 왔으면 바로 문을 안 열고 뭐하는…! 크악!”

 

콰직!

루미아가 로스칼의 발목을 차자 뼈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루미아는 쓰러진 로스칼에게 신경도 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 하인이 버릇이 없어 미안했다! 아니, 이 말투가 맞나…? 아, 존대를 해야 하군. 아하하! 미안하다.”

“…처음 보는 꼬마야. 무슨 일로 우리집을 찾아왔니?”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던 로스칼이 발끈해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게 지금 무슨 말투냐! 감히 마계의 공주…… 크악! 자, 잠시만요. 아,아가씨 크악! 크악!”

 

콰직!콰직!콰직!

루미아가 로스칼의 얼굴을 짓밟았다.

로스칼은 기절했다.

로스칼을 마무리한 루미아는 가져온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사를 왔으면 이웃에게 떡을 건네는 게 예의라고 배웠는데. 가진 게 돈밖에 없어서 이거라도 받아… 받으세요.”

 

뒤르켈은 루미아가 내민 바구니의 천을 열었다.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고, 골드? 그것도 어림잡아 시, 십 골드…”

“음? 부족한 것이냐? 그것보다 나만한 키에 하얀 머리칼 남자아이가 네 녀석의 아들이냐… 입니까?”

“리온! 어서 와라. 네 친구가 왔구나!”

 

숨어있던 리온은 뒤르켈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왔다.

루미아가 씩 웃었다.

 

“네 이름이 리온이구나.”

 

리온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