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히, 눈동자에 빛이 들어왔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시야에, 누추한 방의 천장이 비친다. 위에서 홀로서기를 한 백열등이 창백한 빛으로 내 눈을 찔러댔다.

 

그 탓인지 날카로운 두통이 일었다. 

 

흔들리는 시야만큼이나 머리가 울렁이고, 물속으로 잠수한 것처럼 부유감에 사로잡힌 사지육신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기억은 들쑥날쑥하고, 뇌는 몽롱하다.

 

어느 틈에, 내가 뭐하다가 잠든 거지?

 

습관적으로 몸을 일으키기 위해 몸을 굴렸다. 그러자 찰팍-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어렸을 적 소나기가 내린 뒤의 땅을 밟았을 때가 떠올랐다. 다만 당장에 들린 소리는 그것보다 무겁고 끈적했다.

 

손등을 진득하게 달라붙는,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드는 액체. 이어서 비릿한 철의 냄새가 비강을 파고들어 송곳처럼 뇌를 관통했다.

 

“아….”

 

내가 잠들기 전, 아니 기절하게 전에 했던 행위를 기억해냈다. 무심코 오른손을 움켜쥐자 각진 커터칼이 아찔한 존재를 과시했다. 

 

액체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손에 잡힌 칼보다도 날 선 두려움이 척추를 타고 추락한다. 비정한 현실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아니야. 이건 현실이 아니야.’

 

넋을 놓은 마음이 현실을 부정했지만, 눈을 감는다고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곤두박질친 온기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매일같이 내 정신을 빼놓던 약 기운은 피와 같이 흘러나갔는지 또렷해진 정신이 내 고통을 가속 시켰다.

 

“흐, 흐윽….”

 

한 호흡.

그사이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정말, 정말 힘들게 정신을 다잡았다.

상체를 일으킨다. 이런 간단한 동작에도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녹진한 젤리 뜯어지는 불쾌한 소리는 뒤통수에서 진실을 속삭였다.

기껏 품은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살그머니 눈을 떴다.

너저분하고 좁은 실내. 검붉은 피가 호수처럼 고여있다.

 

단말마 같은 비명이 정수리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아, 아아….”

 

다만 그것이 실제 육성으로 나오진 못했다.

목구멍이 바짝 마른 탓인지 아니면 충격을 받은 탓인지.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방바닥을 쏘다니는 바퀴벌레의 발자국 소리만도 못됐다.

허리의 힘이 풀려서 앞으로 굽혀졌다. 아무 소리도 없으면서, 나는 귀를 틀어막았고 절망했다.

 

‘늦었어. 언제나처럼. 늦었다고!’ 

 

그 저주받을 약. 그 약이 문제다. 당시 의사가 한 말 모두 똑똑히 기억했다.

 

‘부작용으로 사람을 약간 히스테리 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들 ‘수’도 있다니! 가능성일 뿐이라며! 

 

이건 그냥 약효가 돈 부작용이 날 죽인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피가, 이만큼이나 피가 나왔다. 살아날 가능성, 가능성이 없다. 

 

‘그, 그래도 일단 지혈을….’

 

나동그라진 옷들로 상처를 동여매기 위해 움직인 순간. 나는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내 조금 전까지 내 안에 있던 거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피가 가슴을 적신다. 자신의 피가 코와 입에 들어가는 건 남의 침을 마시는 일보다도 불쾌했다.

 

떨리는 손과 발. 움직이려 함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몸.

죽음이라는 영역에 발끝이 들이밀어 졌음을 직감했다. 

 

애초에 지혈한다 쳐도 3분은 더 살까? 그 안에 구급차가 올까? 구급차가 과연 이 깡촌을 가로질러 내가 죽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도착해도 그들이 날 100% 확실하게 살릴 수 있어? 

만약 되살아난다면 그 치료 비용은? 가족에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알리나?

 

입술을 깨물었다.

 

안 돼. 안 돼. 그것만은 절대 안 될 일이다.

내가 가족들과 연락을 끊은 이유가 무엇인데!

그래. 죽자. 어차피 죽기로 다짐한 거 아닌가.

죽음 따위 무서워할 대상이 아니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대상은…….

 

……한 명밖에 없다.

 

백열등의 빛을 받은 반지가 번쩍였다.

혼란스럽게 날뛰던 모든 생각이 일축되었다. 무의식적으로 기도하듯이 꼭 모은 양손에서 으뜸 돋보이는 건 그가 직접 내 약지에 걸어줬던 결혼반지다.

 

레스토랑도 아닌 야심한 밤. 

자기 방 침대 위에 앉은 내게 그는 무릎을 꿇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이후로. 의심하기도 했어. 헤어질까? 라고 생각하기도 했지. 하지만, 결국 난 너밖에 없는 것 같아. 이렇게 의심하는 주제에 말이지.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이 선택을 하게 된 거야.”

 

날 믿고, 널 믿게 만들어줘.

이 반지를 받아줘.

 

그는 반지 케이스를 내밀고 슬쩍 고개를 숙였다.

당시의 나는 그가 한 ‘의심’이라는 단어를 곱씹고 있었기에 몰랐지만.

떠올려보면 그는 부끄러움에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런 여자에게 청혼하면서도 그는 수줍음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정말로. 

바보 같은 사람.

 

“큭, 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바보 같은 사람! 나를 또 믿다니. 

그러니 또 배신이나 당하지. 머리 좋았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머저리 같은 거야? 

내가, 계속 너만 보고 살 거라 믿었어? 

네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수많은 남자와 어울린 내가?

 

정말, 정말로.

 

“병신 머저리야.” 

 

나란 여자는.

어디까지 추해질 생각이지?

알겠다고 한 주제에.

얼마든지 믿게 만들겠다고 한 주제에!

 

그가 의심했다고? 당연히 의심하지!

얄팍한 약속으로 네가 행했던 모든 부정을, 부정할 수 있을 거라 여겼어? 

그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말을 했어. 

그렇다면, 그렇다면 최소한의 보답으로 그가 의심을 안 하도록 노력했어야지!

 

난 어떻게 했어? 또 바람이 났어! 

그가 자신을 의심했다는 가벼운 핑계로 그만큼이나 가벼운 가랑이를 흔들면서.

그런 주제 뭐가 잘났다고 입을 꾹 다물었던 거야. 

 

“미안.”

 

왜,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 거냐고!

 

“미안해요. 여보.”

 

이혼 때 그가 말 하나 없어서 상심했어?

내 팔을 잡고 말려주기를 원했니? 하지만, 그가 침묵한 이유를 어슴푸레 알고 있었잖아.

 

“내가, 내가 잘못했어.”

 

그 사람은 네가 사과하길 원했어.

그는 이혼서류를 작성하는 내내, 도장을 찍는 그 순간까지도, 

간절히 나를 봤잖아!

 

“나, 나는.”

 

…너무 늦었다.

그러나 죽음이 내 뒤통수를 느긋이 바라보고 있는 지금. 바로 지금에서야 깨달은 게 있다.

나는 그에게, 고마워. 라고 말해야 한다. 당초에 그것이 순리였다. 

 

내가 그를 찾아서 그를 마주했을 때.

도망쳤으면 안 됐다. 

 

적어도…. 최소한….

 

“행복하게 살아.”

 

이 한 마디만은, 했어야….

 

그래, 그 사람에게 지옥 같은 삶을 선사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천만번 알고 있던 바다. 하지만.

 

‘이것밖에 없어.’

 

그에게 나는 마이너스. 불행한 기억을 준 여자밖에 안 되는 처지다. 

그걸 원점으로 돌리고 싶다.

 

피가 사라져 축 늘어진 근육에 힘을 줬다. 그저 꿈틀거릴 뿐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일어설 수는 없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고작 그거 움직였다고 호흡이 가팔라지고 머리가 핑-돌았다. 그러는 와중에 어떻게든 머리를 들어 주변을 탐색했다.

 

펜과 종이뭉치. 

이제 내가 그에게 무언가를 남길 건 유서의 이름을 빌릴 수밖에 없다.

하늘의 마지막 자비인지 다행히 그 둘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마지막 호흡까지 쥐어짜, 피를 질질 끌며 네발로 기어간 나는 필사적으로 그에게 할 말을 골랐다.

 

‘여자가 자신에게 만족 못 한 나머지 거듭해서 불륜을 저질렀다.’

 

이 최악의 기억을.

 

‘그 멍청한 여자는 결국 후회했다.’

 

이 수준으로 끌어올릴 말.

그것이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속죄….

아니, 이미 죽음이 목전인데 무얼 감추려고.

 

속죄니 뭐니 하는 말들, 전부 거짓말이다. 사실 다 자기만족에 불가하다.

떠올리기도 거북한 기억으로는 싫다.

 

난, 그에게서 아주 가끔 회상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남고 싶다.

 

그는 수요일 날 일을 끝내면 정기적으로 튀김을 하나 먹는다. 일주일의 절반을 무사히 넘겼다는 것에 대한 자축으로, 약간의 술과 함께.

 

이때 회상되고 싶다. 

 

특히 우리가 함께 행복했던 나날만은 꼭 기억해줬으면 한다.

호텔에서 신문을 줍기 위해 하반신을 수건으로만 가리고 나간 당신의 수건을 훔치고 등을 떠민 뒤, 문을 잠가 당신의 반응을 들으며 익살스럽게 깔깔거린 나를.

 

낭만적인 요트 데이트. 다른 승객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술에 취한 내가 당신의 멱살을 잡고 사랑한다, 소리치며 키스를 했던 날의 밤하늘을.

 

당신이 나에게 처음으로 고백했던 장소를.

내가 떨리는 심장 위에 손을 올리며 좋다고 대답했던 때, 바람을 타고 우리의 콧등을 간질인 꽃가루를.

 

기쁜 눈물을 흘렸던 주제에.

있지도 않은 알레르기를 들먹이며 애써 웃던 당신을 보며, 마주 웃어버린 나를.

 

서로 열정이 앞서서 코가 부딪쳐 버렸던 서투른 첫 키스. 

당신의 손을 잡고 어색하게 따라가기만 했던 첫 데이트. 

아픔보다 환희가 넘쳤던 첫 경험.

모두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기적이라 미안해. 바보 같은 여자라 미안해. 하지만 알아줘. 기억해줘. 나…….’

 

당신을 사랑했어.

 

끊어질 것 같은 목숨을 잡는 것처럼.

나는 펜을 집었다.

 

 

 

* * *

 

 

 

『죄송해요. 미안해요. 미안. 사랑해.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 미안해. 이럴 생각이 아니었어요. 미안해.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도망쳐서 정말 미안해. 사랑해. 행복해. 행복해. 안경 잘 어울려. 사랑해. 미안해. 행복해. 사랑해. 말하고 싶었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행복해. 좋아해. 사랑...

 

“이것이 유서의 전분입니다.”

“……그렇군요. 마지막의 저 검붉은 글씨는……….”

“손목에서 칼을 제외한 원형의 무언가가 관통상이 보였습니다. 발견 당시 펜의 잉크는 전부 소진된 상태였으며 첨단에 다량의 혈액이 발견되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글자색이 다른 이유는 분명…….”

“됐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살펴 가십시오.”

 

경찰서에서 나온 남자는 코로 숨을 내쉬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여름이 시작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하늘의 태양이 눈부시기도 하건만. 남자는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지피고.

 

스읍-

 

한계까지 연기를 빨아들인 그는. 

 

하아-

 

긴 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만든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두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아내와 딸이 걱정 담긴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때 잔잔한 바람이 하늘에서 내려와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바람을 탄 꽃가루가 코를 간질였다.

추억처럼 지나가는 향기에.

 

“너란 아이는, 끝까지 민폐만 끼치는구나.”

 

남자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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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오늘 쉬니까 밤샜음.

마지막 글자색 변화는 꼭 넣어보고 싶었다. 

얀데레의 전매특허잖음.


근데 역시 밤샘은 정신 건강에 안 좋나봄. 글이 영 탐탁치 않다.

문자 양도 얼마 안 되는데 그냥 하나로 통합할까.

형식상의 프롤로그는 여기가 이제 끝인데. 솔직히 여기서 완결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서 휘리릭 회귀해서 얀데레가 행복을 찾는 모습 보고싶음? 솔직히 우리 모두 참교육 좋아하잖아.

이걸로 참교육이 되었는지는 둘째치고.


솔직히 이제 어두운 분위기도 싫다.

좀 밝고, 명랑한, 안데레. 썅, 그런 얀데레가 있나. 

어쨌든 좀 밝은 걸 쓰고 싶어졌음.

그래서 마지막을 날림으로 썼나.


어쨌든 난 자러감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