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죽였더니 용사 파티에서 추방당했다.

 

100년 단위로 부활하는 마왕의 위협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 

영혼을 소멸시키는 대마법(흑마법)을 사용했을 뿐인데....

 

마왕이 영원히 부활하지 못하는 대가로 

모든 왕국 신민들의 목숨 정도면 충분히 값싸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파티원들은 나와 생각이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 - - - -

 

여전사는 내 목덜미를 붙잡고 으르렁거렸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여전사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쾌활하고 웃음이 많았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이렇게 나에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여전사는 내게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며 나를 저주했다

 

-여신이시여...여신이시여....!!!!!!!

 

성녀는 눈물을 흘리며 구토했다

 

항상 자애롭고 온화했던 그녀의 눈은

지금은 실망과 슬픔만이 넘쳤다

 

그녀는 나를 믿었고, 나를 따랐다

그러나 나의 행동은 그녀의 신념을 철저하게 깨트렸다

성녀는 나를 배신자로 여겼다

 

왕녀는 침묵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냉정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침묵은 내게 가장 큰 상처였다

그녀는 내게 왕족의 희생과 그로 인한 부담감을 항상 강조했었다

 

내가 너를 대신할 대속제가 되어주었는데

넌 아직도 얽매여있구나

 

나는 동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배척하는 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단 한 가지의 말만은 전하고 싶었으나,

도로 삼키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야 그게 무슨 소용이랴

 

마지막 지푸라기가 낙타의 등을 부러트리듯이,

내 말은 동료들에게 오히려 짐을 지울 뿐이다

 

난 파티를 뒤로 하고,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내가 희생시킨 왕국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졌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광야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비명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이 없기 때문이다

 

등 뒤를 타고 뱀처럼 기어 다니는 죄악감과 어둠,

희생된 왕국민들의 분노과 원망이 몸에 새겨졌다

 

내 죄가 그대로 있으매,

입이 닫혀버렸고

 

내 벌거벗은 수치로 인해,

눈이 멀어버렸다

 

등가교환.

 

난 모든 왕국민들의 목숨과 가능성,

내가 현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까지 반납하고 나서야 겨우 마왕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

 

그 반동으로 인해 

이러한 저주를 받게 되었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죽었어야 하지만,

용사의 신체와 흑마법으로 인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었다


여신이 알려준 대마법으로 세계를 구했건만,

여신조차 쓸모가 다한 나를 버렸다

 

한치 앞도 보지 못해,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고 깨지고

상처로 얼룩진 깨진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입이 닫혀 매일을 주리고 살 수밖에 없었다

 

괴로웠던 사나이


어두워 가는 밤하늘 아래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다 


- - - - - - -

 

여전사와 성녀, 왕녀는 탁자에 둘러앉아,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결국 길어지는 침묵을 참지 못한 여전사가 

먼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마왕 공략 때 얀붕이가 그 마법을 쓰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다 죽었을 거야

나도 마왕의 마법을 몇 번 버티는 게 고작이었고..

 

성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

 

-여신님께서도 마왕은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퇴치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어요

 

만약 공략에 실패했다면 이 세계가 마왕에게 지배당해,

인류는 가축만도 못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고까지..

 

왕녀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얀붕이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어

그의 행동은 용사라기에는 냉혹하고 무자비했어

 

신민들의 영혼을 희생으로 바친다니,

그런 건 영웅이 행동이 아니야

 

여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얀붕이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지금은 이해할 수 있어

그가 희생을 선택한 건,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서였으니까


성녀는 고개를 숙였다

 

-여신님께서도 그의 행동을 용서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얀붕이는 그 순간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안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을 거에요

 

왕녀는 탁자를 돌연 크게 내리치며

여전사와 성녀에게 증오스럽다는 듯이, 소리쳤다

 

-여전사, 넌 얀붕이를 저주했잖아

끝까지 추적해서 죽여버릴 거라며?

무고하게 희생된 백성들의 원한을 갚을 거라며?

 

성녀, 너도 얀붕이를 배신자라고

여신에게 저주를 내려달라고 며칠 밤낮을 기도했으면서

지금에 와서야 태도를 바꾸다니 역겨워

 

난 왕국이 사라졌어

내 가족, 백성... 

돌아가야 할 곳이 아예 사라졌다고!!!!

 

여전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왕녀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맞아 나는 얀붕이를 저주했어

그의 행위에 분노했고, 그를 이해할 수 없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가 죽어 있었을 거야

 

그건 사실이야


성녀도 눈을 감고 말했다

 

-저도 얀붕이에게 분노했어요

그의 행동이 냉혹하고 잔인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이해하니,

그를 탓하기 어려워요..

 

얀붕이의 선택은 아무도 원치 않았지만,

필요했던 선택이었어요

 

왕녀는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얀붕이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어

그가 어떤 이유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얀붕이의 선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어

 

왕녀는 그 말을 마치곤 자리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얀붕이와 자주 갔었던 언덕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했다

 

-사실을 마왕을 잡는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어

 

왕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날 쓸모없다 여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들이 날 사지로 내밀었어

 

거절하고 싶었어, 가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처음으로 기대를 받았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국민들은 그저 마왕을 잡을 동료가 추가됐다는 사실에만 열광할 뿐이었어

그들은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얼마나 부담감이 큰지 따위는 관심이 없었어

그래서 내 마음은 두려워 미칠 것만 같았고,

부담감이 넘쳐흘렀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얼마나 오래 갈까 

이걸 못 버틴다면 왕국과 가족, 국민들이 실망할 거야

신경이 곤두섰지

 

이 기대의 무게를 떨쳐내고만 싶었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휴식의 즐거움, 단순한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왕녀의 목소리는 허무함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 덕분에

난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데...

 

이 기분은 뭘까?

가슴 한 쪽이 뚫린 것만 같아..

 

너무도 허망하고 허무해..

 

- - - -


왕녀는 용사 파티에서 추방당한 얀붕이를 홀로 찾아 나섰다

얀붕이를 만나 그에게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얀붕이의 행적을 발견했다

그녀가 얀붕이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얀붕이의 모습은 왕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담했다

 

그의 눈은 멀고, 몸은 상처투성이였으며,

비쩍 마른 미라와 같은 모습이었다

 

왕녀는 울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얀붕이를 껴안으려 했다

 

그녀는 그를 위한 사랑과 후회, 그리고 죄책감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얀붕이는 왕녀를 피해 도망쳤다

 

그의 행동은 왕녀를 더욱 더 슬프게 만들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이제야 당신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는데,

어째서 나에게서 도망치는 거야?

 

그녀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왕녀의 마음은 얀붕이에 대한 사랑과

그를 잃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 - -

 

얀붕이는 왕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도망쳤다

 

그는 파티원들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

이곳까지 도망쳐 온 것이었다

 

얀붕이는 그녀들에게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왜 여기에 오셨나요, 왕녀님?’

 

얀붕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당신들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 

이곳까지 도망쳐온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얀붕이는 더 이상 왕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더욱 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도망가기로 결심했다

얀붕이는 왕녀에게 더 이상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더욱 슬퍼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얀붕이는 다시 한 번 도망쳤다

더 이상의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기에.

 

그러나 얀붕이는 왕녀로부터 멀어지려 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굶주림과 고통에 지쳐 있었다

 

왕녀는 쉽게 얀붕이를 따라잡았다

 

-얀붕아, 내가 그동안 잘못했어

 

왕녀는 얀붕이에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네게 평생을 속죄하고 살게 해줘

 

그리고 왕녀는 얀붕이의 닫혀버린 입에 키스했다

 

- - - - - -

 

그녀는 얀붕이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은신처로 데려갔다

그 곳은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소음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왕녀는 그를 감금하고, 얀붕이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여전사와 성녀와의 교류를 완전히 끊었다

 

이제 그녀의 세상은 오직 얀붕이 뿐이었다

 

-얀붕아, 이제 너는 내 가족이야

너와 나,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할 거야

 

왕녀는 얀붕이에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간절하고 사랑스러웠다

 

얀붕이는 팔다리가 묶인 채 눈물을 흘렸다

 

왕녀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울지 말아요, 얀붕이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이제 괴로움 대신 행복만이 있을 거에요

 

그렇게 말하며 왕녀는 입고 있던 옷을 한꺼풀 벗었다

 

- - - - -

 

여전사와 성녀는 연락이 끊긴 왕녀를 찾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 때, 왕녀를 따라갔어야 했나?

 

여전사는 성녀에게 후회어린 말을 했다

 

성녀는 여신에게 기도를 올려 왕녀의 행방을 찾아보기로 했다 

 

여신은 잠시 고민하다가 왕녀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여신은 무엇을 봐도 놀라지 말라고 경고했다

 

여전사와 성녀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여신이 가리킨 장소로 향했다

 

그 곳에 도착한 그들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자신들이 저주했던 얀붕이가 눈이 멀고 입이 닫히고,

온 몸은 상처투성이었으며, 

비쩍 마른 미라와 같은 형상으로 감금당해있었다

 

여전사와 성녀는 그 모습을 보고 일어서지 못했다

그녀들은 그를 저주하긴 했지만, 이렇게 비참한 모습을 볼 줄은 몰랐다

 

그녀들은 얀붕이의 고통을 보고 믿을 수 없었다

이는 여전사와 성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담한 상황이었다

 

-성녀! 빨리 얀붕이를 치료하라!!!

 

여전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눈에는 절박함이 가득 찼다

 

-하지만 이 저주는.. 너무 강력해요..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성녀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는 얀붕이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절망감을 느꼈다

 

두 여성은 얀붕이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며,

그녀들이 그에게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얀붕이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는 것에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얀붕아..

 

여전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적어도 네가 편해질 수 있도록...

 

그녀는 대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여전사는 얀붕이의 고통을 끝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의 생명을 끝내려 했다

 

그 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 - - - - - -


글 피드백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