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전성기 하나 쯤은 있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별거 없어보여도, 자신에게 만큼은 더 없이 웅장한 업적이나 시기


당연히 나에게도 전성기는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당시의 난 객관적으로도 꽤 멋있었다 생각한다.


작고 약하던 반 친구가 괴롭힘을 당할 때 나서서 지켜주고 챙겨줬다. 이 정도면 꽤 멋있지 않나.


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초등학생때 까지 얘기다.


성장기가 남들보다 좀 빨리 와서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고등학생인 나는 아직 그 상태 그대로다.


작을거면 아예 확 작을 것이지, 어떻게 160 초반은 넘어서 군대는 끌려가게 생겼다. 


그건 진짜 좆같네 씨발.


어쨋던 간에, 6년 간의 짧은 전성기는 아마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거다. 


이런 몸으로 누군가를 그렇게 멋있게 지켜줄 일이 다시 있을린 없으니까


그리고 또


"아앗... 뭐야 너..."


"헉 미안해~ 작아서 있는지도 몰랐네, 다친덴 없어?"


남의 엉덩이를 대놓고 더듬어 놓고는 능청이나 떠는 모습 봐라, 뻔뻔한 년.


내 전성기를 도무지 잊지 못하는 이유 두번째는, 그때 내가 지켜줬던 얀순이랑은 그 뒤로 절친이 돼서 지금까지 같이 다니기 때문이다.


"됐네요... 그러는 넌 어째 더 커진 것 같다."


"흐음 그럴지도? 아니면 네가 더 작아졌거나"


얘는 꼭 미운 말을 덧붙여 진짜


작은게 하도 컴플렉스였던 탓에 누구에게도 무시받지 않을 만큼 튼튼해지고 싶단 열망을 가진 얀순은 그 뒤로 운동부 급의 엄청난 트레이닝을 거쳤다.


그렇게 내가 지켜줬던 작고 약하던 여자애... 는 지금 180을 훌쩍 넘는 키에 근육으로 온 몸이 단련된 괴물이 됐다.


한때나마 얘가 나 보다 작고, 여리고, 약했다는 사실은 아마 나 말곤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나도 그떄 걔가 맞나 싶긴 하다.


지금은 툭하면 내 반에 찾아와선 멋대로 날 자기 무릎에 앉힌 후 끌어안거나, 등하교 시간이나 주말만 되면 날 찾아와 끌고 다닌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너 진짜 좀 작아진 것 같은데? 으휴 어깨봐 남자 애가 왜케 작어"


그리고 그때마다 이렇게 나를 놀려먹기나 하고, 이럴려고 세졌나.


"에이씨, 맨날 나 괴롭히면 재밌냐?"


그 순간 얀순은 마치 같잖다는 듯한 웃음을 한참이나 흩뿌렸다.


"푸하하! 어이 없네, 내가 괴롭혀? 널? 언제?"


"그야 지금도 나 막 붙잡고..."


"내가 너 때리기라도 했어? 아니면 돈이라도 뜯었어? 하다못해 너보고 욕이라도 했어?"


"그건 아니지만 꼭 괴롭힌다는게 그런 것만 있진 않잖아..."


"하! 그럼 나 처럼 이쁜 애가 매일같이 찾아와서 놀아주는게 괴롭힌다는거야?"


그 말과 함께 얀순은 대뜸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푸흡, 얼굴 빨게진것 봐라"

솔직히, 얼굴은 정말 장난 아니다.


조막만한 크기에 이목구비를 한 가득히 채운데에다 피부는 투명해 보일 정도로 새하얗다.


그와 대비되어 더욱 진하게 자리잡은 속눈썹과, 시선을 죄다 빨아들이는 새카만 눈동자가 어우러진 외모는


성격도 피지컬도 잊게 할 만큼의 청초한 우수가 물씬 스며나오곤 했다.


"야... 너무 가깝잖아..."


"흐흥~ 그럼 다시 말해 보시지?"


"뭐, 뭘..."


"아니면 어디 본격적으로 괴롭혀 줄까?"


"아아아악!"


물론 그 감상은 얼마 가지 않았다.


손아귀에 핏줄 하나 움직이지 않을 만큼 살짝만 움켜쥔 것 같지만, 붙잡힌 내 어깨는 으스러질것만 같다.


"아, 아니야... 놀아줘서 고마워... 응..."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렇게 아귀 힘을 푼 얀순이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거의 머리 전체를 푹 감쌀 정도로 거대한 손, 꼭 불곰의 앞발 같다.


그렇지만 내 머리에 스치는 촉감은 또 희안할 만큼 부드러운게 참 신기하달까.

"너 오늘 학교 끝나고 할 거 없지? 같이 가게 기다리고 있어."


"에휴... 알았다..."


"대답이 왜 그래? 설마 나랑 같이 가는게 싫. 은. 거. 야?"


"아, 아냐... 악.. 아흐흑..."


사정없이 내 옆구리를 푹푹 찔러오는 두꺼운 손가락질


정말, 정신 나갈 것 같다.
---------------------------------------------------



'얜 지가 기다리라 해 놓고 어디 간거야'


교문 앞을 한참이나 서성여도 안 오길래 반 까지 가 보았지만 그곳에도 없다.


만약 못가게 되면 연락은 꼭 주었는데 그것도 없다. 그렇다고 까먹고 먼저 집에갈 애도 아니다.


'괜히 신경 쓰이네... 대체 어디 간...'


아 저깄네, 학교를 계속 돌아다닌 끝에 뒷쪽 창고 주변에서 겨우 발견했다.


하지만 나는 그 쪽으로 다가가기 보단 옆의 건물 뒤로 숨었다.


얀순을 둘러 싸고 있는 애들이 대여섯이나 되는게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심지어 다른 학교 교복도 몇몇 보인다.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 소리를 보아, 아무래도 원한을 가진 애들이 다구리라도 치러 온 듯 했다.


얀순은 먼저 남에게 시비를 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걸려오는 시비를 딱히 피하지도 않았다.


예전이면 모를까, 지금은 그렇게 시비가 붙은 상대를 일방적으로 혼쭐 냈지만


그렇게 당한 애들이 지금 복수의 칼을 부드득 갈아 온 모양이다.


'존나 찌질하네 저 새끼들...'


아무리 양아치는 가오에 죽고 살아 패배가 쪽팔린다지만, 1대1 도 아니고 여자애 하나 잡으러 우르르 몰려오는건 더 쪽팔리지 않나.


"에휴, 그래그래 내가 미안했어. 나중에 밥이라도 사 줄테니 지금은 그냥 가 줄래? 나 약속 있단 말이야"


"지금 그게 사과냐?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에이 씨... 기다리고 있을텐데..."


얀순은 짜증이 잔뜩 난듯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댔다.


나는 조심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은 그냥 신고를 하는 것 뿐이다.


일촉즉발의 상황, 더 늦으면 안된다.


-퍽-


"뭐, 뭐야!"


"에이씨, 먼저 쳤어!"


아 늦었네


양아치들은 참 무참하게도 쓰러져갔다.


낫이 지나간 풀때기 처럼, 태풍이 쓸어간 나뭇가지 처럼


물론 얀순이 여자애는 맞지만, 그냥 생물학적 암컷이다. 


암컷 불곰과 맨몸으로 싸워 이길 인간이 있을리가, 얘들아. 쟤는 우리랑 종이 다르다.


휴대폰은 집어넣었다. 지금 신고했다간 학교 폭력으로 잡혀가는건 얀순일 것이다.


"쯧, 싸움도 못하는 것들이... 세게 안 때렸으니까 적당히 누워 쉬다 집에들 가라. 이건 너네 차비 하고!"


쓰러진 양아치들 위로 천원 짜리 한 장을 집어던지다니, 진짜 인성질 장인이다.


뭐, 상황은 대충 마무리 된 것 같았기에 나 역시 몸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나왔다.


"응? 뭐야 너 여기 와 있었어?"


"그래, 하도 안 와서 찾아 다녔다."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짓던 얀순은 잠깐 멈칫 하더니, 다시금 환히 웃으며 내게 급 달려왔다.


"푸하핫! 싫은 척 하더니, 사실 나랑 같이 있고 싶었구나? 귀여운 자식"


"아 씨... 그만 들러붙어라 좀..."


그래 좀 그만 끌어안아


쓰러졌던 양아치 하나가, 돌 들고 일어났단 말이야.


지금, 니 뒤통수 뒤까지 왔어


"아이씨... 갑자기 팔은 왜 치고..."


"비켜!"


간발의 차였다.


하마터면 사람 주먹만한 저 짱돌이 얀순이 머리에 찍힐 뻔 했다.


미친새끼, 아무리 그래도 저런걸 휘두르냐.


아무리 얀순이라도 저런걸 머리에 맞았다간 위험했을거야.


피해서 다행이다.


-빠악-


아 내가 못 피했네


"아 씹... 이마..."


순식간에 눈 꺼풀 위를 잔뜩 적시는 이 시뻘건 액체가 다 피라는게 믿겨지지 않는다.


그래도 정통으로 맞진 않아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다.


날카로운 부분에 살이 좀 찢어진 정도였다.


"이 새끼가, 너 뭔데 쳐 끼어들어?"


돌을 놓친 양아치가 대뜸 내 멱살을 잡아 올린다. 


좀 밉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내 친구인데, 걜 잡고 싶다고 단체로 몰려오는 짓거리도 짜증이 났었다.


게다가 상황이야 어쨌든 나 까지 피해를 봐서, 또 짜증이 난다.


그런 탓인지 거의 반사적으로, 내 입에서 반응이 나온다.


"퉷"


양아치가 얼굴을 씰룩인 순간, 묻어있던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좀 웃겼던 탓에 또 한번 내 입이 방정을 부린다.


"왕창 와서 털리기나 하고, 병신들"


동시에 내 몸은 바닥에 내팽계 쳐졌다.


"윽... 아악..."


"이 씨발... 어디다가..."


방금 전에 얻어맞아 쓰러졌던 놈 치곤 각력이 너무 좋은데, 얀순아 좀 세게 때려놓지.


배랑 등이 미치도록 아프다. 일어나 반격을 해야하는데 도무지 힘이 안 난다.


에휴, 괜히 객기 부린 걸까. 발길질과 함께 다시 한번 천장을 보게 된 내 시야 위로


-콰앙-


나를 오지게 두드려 패던 양아치가 날아다닌다.


동시에 그를 쫓아가는 터벅 터벅 하는 묵직한 발 소리


"이 새끼가... 지금 누구를 건드려..."


나를 향한 눈빛이 아님에도 몸이 저릿하게 경직된다.


저렇게 살벌한 표정의 얀순은 처음봤다.


정말로 맹수 한마리가 나타난 살기에 등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넌 진짜 뒤졌어"


그 뒤로 한 참이나 들려오는 괴기스럽기 까지한 타격음, 조금 전의 가벼운 타격음이 아니다.


도무지 두고볼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을 때야, 간신히 난 얀순에게 다가갔다.


"그, 그만해! 그러다 진짜 죽어..."

-------------------------------------------------




"하루 이틀 정도는 되도록 물 안 닿게 해, 딱지 앉으면 떨어질 때 까지 가만 냅두고"


"넵,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히 가라"


다행히 양호 선생님이 아직 계신 덕분에 치료까지 마칠 수 있었다.


애초에 크게 심한 부상이 아니기도 했고


그렇게 교문 까지 오자, 얀순이 내게 다급하게 달려온다.


"야, 너 괜찮아? 병원 안 가도 돼?"


"병원은 무슨... 별거 아냐. 걍 살이 좀 찢어진거지"


내 말을 듣고도 한참이나 걱정스러운듯 나를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그래도 날 걱정해주고 있었다니, 좀 감동적이네.


"휘유... 놀랬네 진짜. 그러게 왜 껴들어서 다치고 그래"


"그럼 가만히 있어? 그랬다간 너 머리 빵꾸났을텐데"


"흥... 그깟거 상관 없거든..."


솔직히 그랬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맞은 사람이 수 미터를 붕 날아다니고, 벽 위로 주먹 자국을 새기기 까지 할 정도였으니 돌만 부서지지 않았을까


어쨋건 소동을 마무리 한 우린 같이 학교를 나왔다.


다만 평소답지 않게 얀순은 별 말이 없었다.


맨날 하던 것 처럼 내 어깨를 감싸거나, 멋대로 끌어안지도 않았다.


조금씩 드리워지는 노을 때문인가,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에 나도 말을 걸진 않았다.


"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얀순이 대뜸 걸음을 멈췄다.


"어?"


"오랜만이다... 네가 나 이렇게 구해준거..."


하긴 진짜 오랜만이다.


중학교 2학년 쯤 부터 얀순은 내 피지컬을 한참 웃돌기 시작해 더 이상 괴롭힘 받을 일도 거의 없던 데다


설령 있었더라도 초등학생 몸뚱이인 내가 뭘 도와줄 순 없었을 것이다.


물론 고등학생인 지금은 그 격차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은 어쩌다 그럴 일이 생겼지만,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거다.


적어도 신체적인 이유로는 절대로.


"뭐... 그게 왜?"


"넌 진짜 변함 없구나..."


갑자기 왜 공격이지.


어이가 없어서 얀순을 바라본 순간 살짝 놀랐다.


피부에 스친 노을 빛이랑 확실히 구분되는, 발간 홍조가 분명 얼굴위로 피어나 있었다.


그 미소띤 얼굴에 취해 있을 무렵, 얀순은 그 우람한 상체를 숙여 내게 다가왔다.


"윽... 너 뭐 하는거야"


그 커다란 덩치를 구겨넣어 내 품을 차지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는


"고마워"


난데없이 남의 심장을 잔뜩 간지럽히고 있다.


그리곤 내 허리에 팔을 휘감아 그대로 끌어안은 순간, 크고 폭신한 물체가 내 몸에 쏟아지듯 다가왔다.


몸에 근육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긴... 아니었구나.


"아니... 너 진짜 뭔데... 사람들 지나가잖아..."


"역시 너 뿐이야... 너 아니면 안 돼..."


알 수 없는 말만 되풀이 하며 얀순이 계속 얼굴을 부벼댔다.


정말이지, 얘 왜 이러는 걸까.


그나저나 이 자세도 참 오랜만에 가져본다.


어릴 때, 그러니까 내 나름 전성기때 이랬다.


내가 얀순을 구해주고 나면 꼭 이렇게 내 품에 안겨왔다.


'고마워 얀붕아...'


'뭘! 앞으로도 계속 도와줄게! 쭉!'


뭐 말만 그랬지 몇년 못 갔지만 말이다.


이왕 이렇게 된거, 나도 그때처럼 얀순의 등을 감싸봤다.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다시는 경험 못할줄 알았던  내 리즈시절을


어쩌다보니, 이렇게 재현하게 됐다.







"사랑해..."


"...? 너 방금 뭐라고..."


--------------------------------


크고 강하지만


사실 보호심리가 살아있는 얀순이


꼴리지 않나요?


근데 왜 아무도 안 써올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