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지상에 좀 올라가야겠다."



망자들을 다스리는 지하 세계의 여신 하데스. 그녀는 자매인 제우스와 포세이돈만큼은 아니었지만, 명색이 여신인만큼, 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지만 지상을 자유롭게 누비며, 마음에 드는 인간 남자들을 탐하고 다니던 두 자매와는 달리, 매일 어두운 지하 세계에 머무른 채, 생기라곤 전혀 없는 망자들만을 보던 하데스는,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이용 할 일도, 강제로 인간 남자를 탐할 일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하데스님, 하데스님의 관할 영역은 이 명계가 아닙니까?"



하데스의 말을 들은 부관은 늘 그렇듯, 하데스가 이 지하 세계에 갇혀 있는 걸 답답해하는걸 알기에, 이번에도 밀린 업무를 땡땡이치고 지상으로 나가려는 걸 막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내가 지금 농땡이라도 부리려 한다는 것이냐? 내가 지상으로 올라가려는 이유는 내 반려자를 찾기 위해서다."



하데스가 내뱉은 뜻밖의 발언에, 부관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려자 말입니까?"



"내가 이 지하 세계의 주인이 된 뒤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자매인 제우스나 포세이돈과는 달리, 난 곁에서 날 보필해줄 반려자가 없지 않느냐?"



"그래도 지금까지 홀로 잘 해오셨잖습니까?"



부관의 말에, 하데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미 망자가 된 넌 잘 모르겠지만, 난 이 어두컴컴하고, 햇살 하나 비추지 않는 지하 세계가 너무 외롭고 싫다. 지금까지 말 없이 묵묵히 버텨온 것도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자리라는 구실이 있기 때문이고. 아마 조금만 더 이곳에 있다면, 난 미쳐버릴지도 모른단 말이다."



하데스의 말에, 부관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쩌겠는가. 자신의 군주가 저렇다는데. 더 이상 대화를 나눠봤자, 자기만 하데스의 눈에 안 좋게 비춰질 뿐이지.



하데스 역시 대화의 분위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반려자만 찾으면 앞으로 지상 얘긴 꺼내지도 않을테니 걱정말거라. 난 단지 내 옆을 채워 줄 반려자가 필요한 것이니."



"알겠습니다. 그럼 지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부관의 말에, 하데스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아니. 이번엔 나 혼자 다녀오겠다."



부하들을 데리고 가봐야 눈치만 보이고, 분명 반려자를 찾는데도 간섭을 할 게 뻔하니...



"그동안 밀린 업무를 부탁한다. 부관."



"......"



그렇게, 안 좋은 표정의 부관을 뒤로 한 채, 그야말로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이 지나, 아주 오랜만에 지상에 발을 딛은 하데스.



"흐음- 역시 지상의 공기는 최고구나. 제우스나 포세이돈이 부러울 지경이야."



자신이 다스리는 지하 세계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생명. 꽃과 풀, 살아 있는 나무, 밝은 하늘과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 흘러가는 물까지. 이 모든 것을 하데스는, 마치 어린 아이가 장난감을 보는 듯, 신기하고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으힉!"



하데스가 한창 지상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그런 하데스의 뒤로, 짧게 들려오는 어린 소년의 비명.



하데스 역시 이를 듣고 뒤를 돌아보니, 자신보다 한참 작은, 꽤 예쁘장한 남자 아이가, 머리에 꽃으로 만든 왕관을 두른 채, 두려운 눈빛으로 하데스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런, 이런. 나를 보고 놀란 것이냐?"



"죄... 죄송..."



자신이 잘못 하지 않았는데도, 벌벌 떨며 사과를 하는 소년의 모습에 움찔거린 하데스는, 소년이 겁 먹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겁 먹을 거 없다. 난 그저 이 아름다운 지상의 풍경을 감상 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아름다운 하데스가 미소를 지어서일까, 아니면 다정하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서 일까. 벌벌 떨던 소년은, 이내 떨림이 멈추고,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 없이 하데스를 쳐다보았다.



"내가 오랜만에 지상으로 나와 마주한 첫 아이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페... 페르세포네 입니다..."



페르세포네. 그 이름을 들은 하데스는, 이전에 자신의 남매인 데메테르에게서 소개 받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거 같은데...



"데메테르의 자식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런 우연이 있나. 난 하데스라고 한다.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여신이지."



"모,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하데스 님!"



하데스가 자신을 소개하자,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는 페르세포네. 하지만 하데스는 그저 웃으며, 페르세포네를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단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당장 명계로 끌고 갔겠지만 말이야. 후후."



하데스의 농담에 다시 한번 울상이 된 페르세포네. 그런 페르세포네를 하데스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풀어주었고, 그 뒤 한동안 함께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던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아, 벌써 시간이..."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른 채 즐겁게 하데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페르세포네는 어느덧 노을이 지는 것을 보았고, 이를 본 페르세포네는 혼잣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데스 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아버지께서 절 찾고 계실테니, 전 이만 아버지에게 돌아 가봐야겠습니다."



"그... 그러냐?"



페르세포네의 말에, 하데스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생각보다 자신과 잘 맞고, 외모와 체형도 자신의 스타일인데다, 어린 나이 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것 역시 매력 포인트였기에.



'끄응... 데메테르의 자식만 아니었다면 당장 끌고 가서 반려자로 삼았을텐데...'



이대로 자신이 제우스나 포세이돈처럼 페르세포네를 납치한다면 이후에 벌어질 결과는 뻔하기에, 하데스는 그저 헛된 망상을 마음 속에만 꾹꾹 눌러 담아야만 했었다.



한편, 우연히 발견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를 저 멀리, 풀숲에서 몰래 지켜본 한 신이 있었으니.



"호오... 천하의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탐낸다고? 완전 미친년아니야?"



에로스. 제우스조차 벌벌 떠는 사랑의 여신. 평소 장난끼가 많았던 에로스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보여준 이 광경을 보고, 킥킥 웃으며 사악한 장난을 계획중이었다.



'안그래도 하데스 이 년 꼴보기 싫었는데. 이 참에 제대로 한 방 먹여줄까?'



끼기긱-



생각을 마치고 당기는 활시위. 그 활시위에 걸려 있는 화살의 촉은, 하데스를 향해 있었다.



팡-!



잠시 후, 에로스가 활시위를 놓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화살.



"아윽!"



에로스의 예상대로 화살은 하데스에게 명중했고, 갑작스러운 작은 통증에 하데스가 자신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내지르자, 돌아가려던 페르세포네가 깜짝 놀라며 하데스를 향해 다가왔다.



"하, 하데스 님! 괜찮으세요?"



생각보다 통증이 있는지 화살을 맞은 부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하데스.



"괘, 괜찮다. 내 걱정은 말거라."



슥-



하지만 말이 끝난 후,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자신을 걱정하는 페르세포네를 쳐다보던 하데스는, 어째서인지 말 없이, 멍한 눈으로 페르세포네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하... 하데스님... 왜 그렇게... 쳐다보시..."



이에 또 다시 불안해진 페르세포네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치며 하데스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덥썩-



그런 페르세포네의 팔을 거세게 붙잡은 하데스는, 단번에 페르세포네를 자신에게 끌고와, 자신의 품에 안겼다.



"사랑한다. 페르세포네."



"...네?"



고개를 들어, 하데스의 눈을 쳐다보던 페르세포네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총명하게 반짝이던 하데스의 눈은, 어째서인지 탁해진 채, 그 자리엔 사랑을 의미하는 하트 문양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한텐 너 밖에 없다. 페르세포네. 내 반려자가 되어 주지 않겠니?"



"시, 싫어요! 이거 놔주세요!"



거세게 발버둥을 치며 하데스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해본 페르세포네였지만, 그럴수록 하데스는 자신의 가슴에 페르세포네를 더욱 파묻을 뿐이었다.



"페르세포네... 너도 잘 알고 있잖니? 명계의 여신인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 아버지... 아버지가 기다리세요... 어서 아버지에게 가봐야 한다구요..."



페르세포네의 말에, 하데스는 혀를 찼다.



"그래, 맞아... 데메테르... 하지만 난 널 포기할 수 없다. 페르세포네."



"자, 잠깐...! 꺄악!"



데메테르가 눈에 불을 켜고 페르세포네를 찾을 거라는 생각에 하데스는 잠깐 생각하더니, 갑작스럽게 자신의 마차를 소환해, 페르세포네를 반강제로 태우고, 어디론가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디 가는 거에요! 제발 저 좀 놔주세요!" 



하지만 페르세포네의 말에도 하데스는 묵묵부답.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동안 달려 도착한 곳은...



"제우스!"



신들이 머무는 올림푸스 산의 최정상. 그곳에서 하데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콰르릉-!



그런 하데스의 바로 앞에 벼락이 내리치더니.



"어머, 하데스. 오랜만이야."



그곳엔 어느샌가, 아름다운 여신 하나가 서서 하데스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번에도 연락 없이 지상으로 올라왔구나. 그래, 어디 보자... 이번엔 무슨 일로 지상으로 올라온걸까? 또 망자가 너무 많다고 불평이나 하러 온 거야?"



"닥치고 이 아름다운 아이를 봐라. 제우스."



그러더니, 자신의 뒤에서 떨고 있는 페르세포네를 자신의 앞에 내세우는 하데스. 제우스는 페르세포네를 보더니, 적잖게 당황했다.



"이 아이... 페르세포네잖아? 데메테르의 자식. 왜 네가 페르세포네를 데리고 있어? 데메테르는?"



"잘 들어라. 제우스. 나... 페르세포네를 반려자로 삼을 거다."



"뭐? 이 미친년아?"



에로스가 그렇게 생각했듯, 제우스 역시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제우스는 데메테르가 페르세포네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페르세포네를 납치해서 뜬금없이 결혼을 하겠다고? 그것도 모두가 멸시하는 명계의 여왕 하데스가? 데메테르가 이를 들으면 기절 초풍할 일이었다.



"너 미쳤어? 데메테르가 허락을 해줄리가 없잖아!"



"데메테르의 허락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너한테 온 거고."



"나한테? 왜?"



이후, 페르세포네를 다시 자신의 뒤로 숨긴 하데스는, 제우스의 어깨에 한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네가 나와 페르세포네의 사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면, 아무리 데메테르라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 밖에 없겠지. 다른 신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네가 스틱스 강에 걸고 공식적으로 나와 페르세포네의 사이를 인정해줘야겠다."



"내가 미쳤냐? 나같아도 너같은 미친년한테 페르세포네를 넘기기는 싫어! 그리고 내가 왜 너 때문에 그런 위험한 맹세까지 해야 하는데!"



"페르세포네만 넘겨주면, 앞으로 올림포스에 와서 망자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고, 평생 조용히 명계에만 쳐박혀 있을게. 스틱스 강에 걸고 맹세하지."



하데스의 솔깃한 제안에, 제우스의 두 눈이 흔들렸고, 이후, 제우스는 하데스를 쳐다봤다.



"...정말?"



"그래. 만약 끝까지 페르세포네를 넘겨주지 않는다면, 매일 여기 와서 너한테 온갖 지랄 다 부릴거다."



꿀꺽-



제우스에게 있어서 하데스의 제안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안그래도 신들의 대표로써 할 일이 많아서 정신도 없는데, 하데스가 자기 스스로 평생 명계에 쳐박혀 있겠다고 한다면...



"좋아. 나, 제우스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사이를 공식으로 인정한다. 스틱스 강에 걸고 맹세할게."



"아... 아아..."



이를 듣던 페르세포네는, 저절로 눈물이 흐르며, 탄식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 명계로 끌려 가, 사랑하지도 않은 하데스와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미안해. 페르세포네. 하지만 하데스도 알고보면 괜찮은 년이야. 나나 포세이돈과는 다르게 여러 남자 건드리지도 않고..."



"닥쳐라. 제우스. 난 이만 가겠다."



그렇게 제우스를 뒤로 하고, 이젠 하데스의 거처인 명계로 움직이기 시작한 하데스의 마차. 그 안에서 하데스는, 흐느끼고 있는 페르세포네를 껴안은 채, 페르세포네의 모든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넌 공식적으로 내 반려자다. 페르세포네."



"흐윽... 윽..."



"아이는 몇 명 정도 낳을까? 우리도 제우스처럼 많이 낳아볼까?"



"아버지... 흐윽..."



"난 널 절대 놓치지 않을거다. 페르세포네. 제우스가 와도, 데메테르가 와도."



점점 명계를 향해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하데스의 마차. 이후, 앞으로 벌어질 일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