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산길에 밤안개가 자욱했다.

하얗게 쌓인 눈들 위에, 핏방울이 여우의 걸음을 따라 퍼지고 있었다.

가쁜 숨소리가 몰아쳤다.
이름 없는 여우는 살기 위해 뛰고 있었다.

불길한 요괴.
그들은 그리 말했다.

여우는 그것이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눈이 그 희미한 뜻을, 속에 감추어진 것을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었으니.

적막한 산길에 풀을 헤치는 소리가, 분노에 찬 그들의 외침이 저 먼 곳에서 사방으로 울렸다.

여우는 그들이 벌인 일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탐욕을 이해하기엔 여우의 살아온 세월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저,
…오래간 조용하던 곳에 환희에 찬 함성이 들렸고, 피가 튀었고, 귀를 찢는듯한 비명이 감정을 짓눌러서.

깊은 상처를 감싸며 언젠가부터 여우는 그렇게 도망하고 있었다.

더는 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던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그들의 무서운 외침도, 스쳐가던 바람 소리도 점점 흐릿해져 들리지 않게 되었다.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피로 적신 얼굴을 안았다.

무력했던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이 온 몸을 옥죄왔다.

산길조차도 길 잃은 여우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여우는 차디찬 눈 속에서 미약한 체온만을 간직한 채 눈 속을 의식없이 뒹굴고 있다.




* * * * *




차갑게 식은 백여우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따뜻했다.

사방에서 매섭게 몰아치던 눈바람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와 따스한 온기, 마침내 작고 여린 여우는 눈을 떴다.

저를 깨운 것은 쓸쓸한 눈의 소년이었다.

여우는 경계심에 일곱 꼬리의 털을 곤두세웠으나 이내 이어진 손길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다.”

소년은 입을 열었다.

다행이라는 말의 의중을 여우는 몰랐다.
다만,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상처가 있던 자리는 찢어진 옷가지가 감싸고 있었다.

소년의 시선이 여우의 상처를 향했다.
무리를 해한 악인의 눈빛이 떠올라, 여우는 급히 일어나 뒷걸음질쳤다.

소년의 복장은 마른 핏자국이 만연했다.
여우는 마른 피에서 풍겨오는 냄새가 저를 쫒던 추격자들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돌아볼 수 없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이 덮쳐왔다.

눈물이 흐른 자리는 어느새 굳어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둠 속으로, 더 짙은 풀내음 속으로.

모든 것을 잃은 여우는 그렇게 다시 아픔을 뒤로하고 달리고, 또 달렸다.

여우는 제 무리가 저를 도망시키며 보이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여우는 살아야 했다.




* * * * *




여우는 미지가 두려워 산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우를 구한 소년의 터전 역시 산이었으므로, 그 둘이 다시 마주치는 것은 필연이었다.

여우는 먼발치에서 소년을 관찰했다.
그 날의 냄새가 소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어렴풋이 깨달은 후였다.

저를 구해준 인간, 다만 여우는 아직 인간이라는 종이 두려웠다.

소년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았다.

배가 고프면 식물들의 뿌리를 캐 먹었고, 목이 메이면 개울을 찾았다.

봄이 오면 봄꽃들의 틈바구니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고, 겨울이 오면 쌓인 눈으로 신기한 모양을 뚝딱 만들어내기도 했다.

여우는 어느새 소년의 곁에 있었다.

여우와 함께하게 된 소년은 언제나 화사했고, 여우는 그의 화사한 미소가 저를 달래줌을 느꼈다.




* * * * *




생명은 온 몸으로 세월을 맞는다.
여우는 인간이 세월을 맞는 정도가 과하다는 것을 소년을 통해 배웠다.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었고, 여우는 꼬리가 여럿 늘었다.

구미호가 구슬의 형상을 명확히 할 수 있을 즈음부터, 남자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찾아가 생활에 필요한 것을 교류하기 시작했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에게 음식이란 불필요했다.
허나, 남자에게는 음식이 필요했다.

세상과의 교류로 남자의 식단은 다채로워졌으나 그는 정도 이상을 탐하지 않았다.

“아씨께서 오늘은 값을 많이 쳐 주셨구나. 기분이 꽤나 좋아 보이셨어.”

인간과의 교류는 남자를 위해 필요한 일임을 구미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구미호의 마음에 들지 않음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아, 곧 잔치가 열린다 했다. 함께 가겠니?”

캥─.

남자가 아닌 다른 인간들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구미호는 그저 남자로 족했다.

하하호호 떠들며 제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를, 구미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리던 소년은 남자가 되었다.
지금도 늦었을 것이나, 언젠가 제 짝을 찾아 사랑을 하겠지.
제 짝과 함께 화목히 늙어가며 미래를 가꿀 테다.

그 미래에 제가 설 곳이 있을까.
구미호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여우는 소유욕이 강하다.

남자는 저의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쟁취할 방법으로 그녀는 둔갑을 택했다.





* * * * *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둔갑을 이루었다.
요력을 쓸 때 튀어나오는 꼬리는 채 숨길 수 없었으나, 일상을 누릴 때만큼은 완벽히 인간 여자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구미호는 비로소 여자가 되었다.
이제 이 모습을 남자에게 보여줄 때였다.

터전으로 향하는 걸음은 경쾌했다.

너는 나의 모습을 알아볼까.
많이 놀라겠구나.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듯 웃어주겠지.

그녀가 남자에게 품은 연정이란 깊고 또 짙었으므로, 남자가 저와 같은 마음을 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터.
그러니, 지금은 그 웃음으로 족했다.

오늘 그가 지어줄 웃음은 새로운 관계의 첫 걸음이 될 것이었다.

“…음?”

구미호는 걸음을 멈췄다.

불쾌한 냄새.
불안한 감각에 신경이 곤두섰다.

구미호가 익숙치 않은 걸음을 빨리 할수록 냄새는 짙어졌다.

남자는 오늘 잔치에 간다 했다.
공기 중에 퍼져오는 짙은 피 냄새는 분명히 남자의 것이었다.

점점 타는 냄새가 혈향을 잠식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그것을 확신한 순간 구미호는 달렸고, 눈 앞에 펼쳐진 잔혹한 참상을 두 눈으로 직면해야만 했다.




* * * * *




거칠게 타올랐던 화마는 반나절을 넘게 내리는 빗줄기에도 쉬이 꺼지지 않았다.

그 불바다의 중심에 짙게 남은 잿더미,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거머쥐었다.
 
사랑하는 이가 죽었다.
그가 아끼던 모든 것이 덧없이 스러졌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불이 사그라들 즈음, 여자는 남자가 자주 찾곤 했던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아씨께서 당과를 챙겨 주셨단다.’

……양반 계집.

‘향이 참 좋지? 내일 아씨게 전해드릴 꽃이란다.’

남자는 여우에게 그 년에 대해 자주 말하곤 했다.

불쾌했다.

그 때의 여자가 둔갑을 이룰 수 있었더라면 무슨 수를 쓰든 백 번이라도 남자를 저의 것으로 만들었을 터였다.




* * * * *




마을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산신이 노했다. 요괴가 천벌을 받았다 등.
같잖은 입소문의 틈에서, 여자는 저가 원하는 것을 들었고 이내 그 소문의 주인공을 찾았다.

남자가 아씨라 부르던 양반 계집.

그것은 불꺼진 산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네년이었구나.

네가 남자를 연모하였기에 너의 식솔이 죄없는 남자를 벌하였구나.

그럼에도 너는 감히 여우의 남자를 놓지 않았구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요괴의 분노는 마을 하나를 집어삼키기에 충분했다.

짙은 혈향이 코 끝을 간지럽혔다.

몇이나 죽어나갔는지 구미호는 그것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
저들이 여우의 반려를 태워 죽였으니, 저들을 모조리 집어삼키면 될 일이라.

구미호의 걸음이 잔혹히 훼손된 여인의 시신 앞에 멈췄다.
같잖은 몰골이었다.

저것이 남자를 홀리려 했던가.
고작해야 그것 때문에 남자가 죽어야 했던가.

구미호는 그것이 참으로 역겨워, 여인의 시신을 천천히 지르밟았다.




* * * * *




벚꽃이 떨어지고, 이름모를 들꽃이 피어난다.

수많은 계절을 지나쳤다.
잿더미는 어느덧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고, 그을린 흔적만이 남았다.

고국은 전쟁의 상흔에 절로 무너져 새로운 나라가 되었고, 망국을 딛고 일어났던 것은 또다른 망국이 되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산이 깎여나가 만들어진 들판 위에는 높은 석재 건물이 생겼고, 남자와의 추억이 있던 자리엔 푸르른 정원이 생겼다.

윤회(輪廻).

여자가 기다리는 것은 단지 그것이었다.

수없이 많은 세월을 흘러보낸 그녀도 고작해야 두어 번을 목격했을 뿐.
여자에게 윤회란, 그리도 실날같은 희망이었다.

어느덧 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을 흐리게 만든다.
그러나 여자는 그 상실 속에서도 남자에 대한 것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는 세차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태어났구나.
너는, 다시금 나를 향해 오는구나.

여우는 하나의 령이 되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 * * * *




온통 새하얀 풍경이었다.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넘실대는 곳이었다.

모든 생명은 하얗게 태어난다.
여우는 인간에 대한 증오와는 별개로, 인간이 그 처음부터 악하지 않음을 어느새 인정하고 있었다.

때 묻은 자들과, 때 묻지 않은 갓난쟁이들.
악취와 향이 공존하는 병원에서, 여우는 제 본능이 이끄는 곳을 향해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며 걸어갔다.

또랑또랑한 눈이 제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륜이라.
남자는 천 년의 시간이 흘러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

이곳의 누구도 령을 인지하지 못할 터.
여우는 아이에게로 다가가 저가 오래간 기다린 얼굴을 눈에 담았다.

“다행이란 말의 의미를 알았다.”

“네가 내게 주었던 그 모든 말들을 오랜 시간동안 되뇌었다.”

“언제 다시 올까. …얼마나 많은 세월을 견뎌내야 네가 내게 주었던 것들을 돌려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여우의 혼잣말이 아이에게 닿았을까.
아이는 제 어미에게 향하던 눈동자를 여우에게 돌리더니 이내 방긋 웃었다.

그리도 기다리던 웃음이었다.
그리도 염원하던 재회였다.

아이가 저를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알아도, 여자는 그저 기쁠 뿐이었다.

인간의 시간은 순식간에 흐른다.

갓난쟁이는 어느새 어미의 손을 잡고 제 또래의 어린아이들과 놀게 되고, 해맑게 놀던 아이는 금세 바삐 공부하는 학생이 되며 결국 성인이 되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지금은 여자를 마주하지 못할지라도, 윤회자의 운명은 남자를 여자에게로 이끌어줄 것이었다.

전생이든 현생이든.
어쩌면 저 아득히 먼 미래마저도.

그는 영원히 여우의 반려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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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아씨까지 윤회시켜서 집착 터트리려다 유기했던거ㅇㅇ..
버리기 아까워서 가져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