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스스로를 희생해 세상을 구원하고 히로인들은 주인공의 무덤에서 울부짖는다... 너무 흔한 전개 아니야?"

분홍색의 귀를 쫑긋거리며 내 원고를 읽은 편집장이 말했다.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쓰였다는 뜻이고 많이 쓰였다는 뜻은 그만큼 인기있다는 뜻이죠."

"흠... 뭐, 네가 원한다면야 내가 말릴 수는 없지. 요즘 들어 별별 엔딩들이 나오다 보니 오히려 이렇게 흔한 엔딩이 그리웠거든, 역시 내가 사랑하는 현월이야, 후훗."

"...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몇번이나 말했을텐데요, 야에 편집장님."

"아직도 그러는거니? 이쯤되면 내 마음을 받아줄 때도 됐잖아?"

"..."

가능한 모든 힘을 담아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그저 귀엽다는 듯 입을 가리고 조신하게 웃는다. 언제까지 이런 실랑이를 지속해야 하는 걸까,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전 아직 누구와도 사귀고 싶지 않다고요.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에요?"

내 질문에 그녀는 웃음기를 없애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한테 왜 이러냐고? 몇번이고 말했잖니, 나 야에 미코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진실로 진실로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게 편집장님의 사랑입니까? 확실히 답하지도 않았는데 기자들에게 우리가 사귄다고 가짜정보를 뿌리고, 거리에서 멋대로 팔짱을 끼거나 끌어안아서 생긴 오해들을 해명하느라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하세요?"

"그래, 네가 고생한건 알지, 하지만 어떡해? 그냥 두면 다른 날벌레들이 꼬일텐데, 내 남자는 내가 지키는게 당연하잖아?"

...아무래도 더는 제대로 된 대화가 힘들 것 같다.

"하아...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장지문이 열린다. 추위가 가고 봄이 왔다는 것을 알리듯, 신사 외부는 만개한 벚꽃들로 가득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나의 몸을 스쳐 지나간다.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며 신사의 토리이를 지나려던 순간,

'어째서야...?'

'!'

순간적으로 귓가에 들린 목소리, 조금 전까지 들었던 골치아픈 목소리다.

'슬슬 단념해 주시면 좋을텐데, 나에게도, 편집장님에게도.'

귓가에 계속 맴도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나는 신사에서 내려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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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에서 내려와 이나즈마의 거리를 거닐며 봄기운을 만끽하다 보니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이제와서 말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다.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던 중, 불의의 사고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보니 이나즈마의 바닷가에 떨어져 있었다.


당장 살아남기 위해 온갖 일을 하다가 우연히 이나즈마에도 라이트 노벨 산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름 글 쓰는 재주가 있던 나는 원래세계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소설 하나를 만들었다.


놀랍게도 소설은 성공했고 그 후에 만든 소설들도 줄줄이 성공하면서 나는 이나즈마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부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정도면 눌러앉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원래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다. 어째서 간신히 얻은 부와 명성을 버리고 원래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냐면...


'내가 연이에게 고백했을 때도 이런 봄날이었지...'


나에게는 연인이 있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연인, 이나즈마에 떨어진 지 3년이 지났지만 하루도 연이의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연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갑자기 사라진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한시라도 빨리 연이에게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방법이 없다. 온갖 서적을 뒤져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봤지만 전부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하아..."


더 큰 문제는 야에 편집장님이다. 어째서인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게 호의를 표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사랑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몇번이고 거절의 뜻을 밝혔음에도 편집장님은 끝없이 공세를 퍼부었다.


"... 됐다, 됐어. 고민만 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오랜만에 시장에 들러볼까?"


안좋은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자연스레 우울해지는것 같다. 좋을리 없겠지, 기분 전환을 위해 간만에 시장에 들리기로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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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너무 많이 마셨나?"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시장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미유키씨와 토오루를 만나 반강제로 선술집에 끌려가 술을 들이킨 끝에 간신히 걷기만 하는 신세가 됐다. (돈도 내가 냈다.)


"그래도 도착은 했네..."


다행히 몸이 기억해서 길을 잃는 상황은 면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분명 아무도 없었지만 취기 때문인지 다녀왔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다녀왔어."


"어서와."


들렸다.


대답이.


뒤에서.


딱딱하게 굳은 몸을 간신히 돌려 뒤를 쳐다보니 그곳에는...


"... 편집장님?"


"꽤나 즐거웠나봐? 나는 네 생각에 잠도 못자고 있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미코가 내게 다가온다. 


"솔직히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데, 넌 나를 밀어내기만 하잖아. 너를 생각할 때마다 미칠 것 같은데, 넌 다른 사람이랑만 놀아나고 있잖아."


"편집장님, 그게 아니라..."


"시끄러워."


미코가 내 앞에 섰다. 생기없는 보랏빛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양이 우리에서 벗어났다면, 그걸 잡아 집어넣는게 양치기의 일이지."


미코가 무언가 알수 없는 주문을 말하더니 이내 내 몸을 전기로 된 끈으로 포박했다.


"편집장..! 이게 무슨..."


"이 년이지?"


'!!!'


온 몸이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나에게 미코가 들이댄 것은 나와 연이가 찍힌 사진이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네 책장에서 유난히 튀어나온 책이 있더라고? 이상해서 살펴보니 이 사진이 나온거야."


'대체... 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이미 술이 다 깬 머리를 돌리며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을 찾으려던 순간, 미코가 사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무 사진에만 신경쓰는거 아니야? 지금부터 더 재미있는 일을 할껀데."


'...?'


의문가득한 얼굴로 미코를 바라보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부터 네가 이 여자와 함께했던 모든 추억을 나와의 추억으로 덧씌울꺼야, 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내가 될 수 있게."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미코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다.


"난 너에게 충분히 기회를 줬어 현월, 내가 널 사랑한다 말했을 때 네가 받아들였다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꺼야. 아니, 이게 더 좋은것같네, 네가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건 정말 싫으니까."


"안돼요... 제발... 제발 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렴, 금방 끝날꺼야."


미코가 내 이마와 그녀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그 순간.


"아..아아... 아아아아...!!"


나와 연이의 추억이 뒤바뀌어간다. 


'처음뵙겠습니다. 저는 성연이라고 하는데요...'


'어머, 반가워. 나는 야에 미코야, 나루카미 신사에 온것을 환영해.'


첫만남부터


'네? 아니... 싫은건 아닌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내게 고백하는거니? 후훗, 여우요괴의 사랑은 질척하고 지독하단다. 감당할 수 있겠니? 그래... 그럼 이제부터 절대 놔주지 않을꺼야♡'


고백하던 순간


'여기야!! ...아, 미안해... 목소리가 너무 컸지... 첫 데이트라 너무 긴장되서... 응? 귀여웠다고? 고..고마워... 헤헤..'


'도착했어, 여기는 에이의 허락이 없으면 들어오지 못하는 장소야. 응? 너무 무리한거 아니냐고? 우리의 첫 데이트인데 이정도는 하는게 당연하잖아? 괜찮아, 여기에는 우리말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잔뜩 끌어안고 키스해도 돼...♡'


첫 데이트


'드디어 하게 되는구나... 서로의 처음을 바치는 거잖아... 너무 행복해...♡'


'오늘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옷인데... 어때...? 정말? 고마워... 응? 왜 웃어? 내가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본다고? 그야 어쩔 수 없잖아.네가 오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도, 사랑을 나눈 적도 없는걸. 그러니까... 오늘은 잔뜩 사랑해줘♡'


첫 경험


그리고...


'내게 와줘서 고마워 현월아. 우리의 사랑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제발 이 기억만큼은 남겨 주세요, 이것만큼은 안돼..."


'널 처음 만났을때 우리사이가 이렇게 될 꺼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사랑해 현월,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꺼야.'


"아...아아아.... 아.."


기억이 덧씌워지는 것을 보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

"끝났네."


기억을 덧씌운 후유증으로 쓰러진 현월을 쓰다듬은 후, 미코는 옆에 놓았던 사진을 주워들었다.


사진 속에는 현월과 그에게 안긴 자신이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제 나와 당신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제부터, 아니, 늘 그랬던 것처럼 내게 사랑을 속삭여줘...♡


현월을 끌어안으며, 그녀는 아름답고도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https://arca.live/b/yandere/95353129

이거만 올려놓고 누가 써줄때까지 존버하려 했는데 오늘 가엔슬 뚝배기도 부쉈겠다 신나서 그냥 휘갈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