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베르크 가문엔 마탑주의 피가 흘렀다.

오래전 이야기다.

그 강력한 마나의 힘은 수 없는 세대를 거쳤음에도 발현되지 않았다.

그런데 드디어.

 

“내 피에….”

 

이리아는 포탈 센터로 가는 기차에 올라 창문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어머니도, 할머니도 모두 가지고 있는 재능이 변변치 못해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은 무려 차석입학생이다.

이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수석이 아니라니….”

 

전해 듣기론 다른 수석입학생은 평민이라고 들었다.

분하다.

그 더럽고 미천한 피에게 자신이 밀리다니, 아니 그 아카데미에 입학한 귀족들이 모두 밀리다니.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그 재능의 힘을 두 눈으로 보지 않고선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로웬.”

“예.”

 

자신의 대각선에 앉은 하인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이리아는 창문에 얼굴을 고정한 채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냥 심심풀이로 묻는 건데, 날 왜 좋아한 거야? 솔직히 말하면 혼내지 않을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이리아가 하인의 기생오라비같은 얼굴을 바라본다.

얼굴은 봐줄만 하지만 저렇게 몸이 여자처럼 가늘어서야…

 

‘쯧.’

 

이리아는 속으로 혀를 차고 답변을 기다렸다.

 

 

 

************

 

 

 

‘하. 안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나한테 지랄하네 저거.’

 

솔직히 말하면 혼내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뭘 대답하든 날 벌 줄 생각이다. 저건.

그래서 그냥 나도 대충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이전의 일로 생각을 정리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

 

“사랑에 이유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쩌다보니 반하게 됐습니다.”

“하긴. 나도 사랑에 대해서 잘 모르니 네 멍청한 대답을 듣고 이해할 수 없을 지도.”

“예.”

“로웬.”

“예.”

“네 면상이 꼴보기 싫어졌으니 2시간 동안 바깥 바람 좀 쐬고 와.”

“…예.”

 

‘얼굴만 이쁜 년. 심사가 뒤틀린 년.’

 

속으로 이리아를 욕하고 체감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기차밖을 나왔다.

집사 복은 보온기능이 약하다.

창문 따위 없는 라운지에 벌 서는 학생마냥 서있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의자에 머리를 기댄 이리아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이리아의 눈꼬리가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덜덜덜덜.

급격한 추위에 몸이 반응한다.

여존남비의 세계라는 걸 몸으로 지독하게 느낀다.

차라리 페미에 점거된 한국이 나았다.

배부르게 먹고 등따시게 누워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 자유의 나라니깐.

이곳은 죽을 수 있다. 한순간 한순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찬 바람을 맞자 좋은 점은 있었다.

복잡했던 머리가 순간 차가워진 느낌이다.

 

-리메이크가 시작됩니다! 작가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방향성이 조정됩니다.

 

‘이리아는 내 뜻대로 등을 돌렸어. 그런데 무언가가 개입됐다. 이리아의 분노를 자극해 내가 한 말이 이루어졌다.’

 

빙의된 첫 날에 혹시나 싶어 외친 상태창이 안 뜨길래 없구나 싶었다.

둘째 날엔 백작의 방에 끌려 갔고 셋째 날엔 지금 이 꼴이다.

 

‘작가… 작가라….’

 

빙의되기 전 그 새끼가 지껄였던 말이 이제야 퍼즐처럼 모아진다.

 

->아니 작가님. 주인공이 갑자기 각성하는게 개연성에 안맞는데요? 넌지시 복선이라도 주셔야죠.

-->네? 아, 죄송해요. 그대로 쓰긴 했는데 별..로였나요?

 

그대로 썼다.

 

->늘 여자에게 피해받는 당신에 의해 쓰여진 망상이니깐요.

 

글을 읽고 나면 항상 자기 전에 다음 화를 예측하며 잠들었다.

그리고 항상 예측한 대로 스토리가 흘러갔다.

인기가 없는게 당연하다. 난 작가도 뭣도 아니니깐. 스토리에 재능이 없는 흔한 독자니깐.

 

‘내 생각을… 읽고 그대로 글을 썼다는 건가?’

 

내 신상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그 새끼는 나를 작가라고 불렀다.

스킬인지 뭔지 싶은 ‘리메이크’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방향성이 조정된다라….”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 새끼의 정체도, 정체모를 스킬도, 이 몸에 깃든 마나의 정체도 모두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

 

고개를 들어 슬쩍 이리아를 쳐다봤다.

과연. 그녀는 지루함을 못 견뎌 잠을 자고 있었다. 한 번 잠 들면 쉽게 못 깨어날 거다. 그런 설정이니깐.

나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라운지를 빠져나와 따뜻한 안으로 들어왔다.

 

“으…으… 이,이게 행복이지. 따,따뜻하다. 후아….”

 

주변에 시선이 느껴졌다.

의자에 곤히 앉아있는 하인들이 날 불쌍한 시선으로 응원의 눈빛을 보내주고 있었다.

씨발. 서럽다! 거기서도 여기서도 여자에게 당하는 내 처지가.

 

‘확 스토리 엎어버려…? 아니야. 냉정해지자. 뭐하나 삐끗하면 주워담을 수 없으니깐. 일단 조용히 모든 상황을 파악하자.’

 

1시간 동안 기차안에서 몸을 녹이다가 다시 라운지에서 10분간 몸을 추위로 만들었다.

2시간이 되자마자 이리아의 곁으로 다가가 좌석에 앉았다.

때마침 이리아가 잠에서 깼다.

 

“음? 왜 벌써 들어 온 거냐? 로웬.”

“2시간이 됐습니다. 이리아님.”

“벌써? 잠드느라 못 봤다. 1시간만 더 서고 와라.”

 

‘야이 #@$@#$#@$@#’

 

얼굴에 경련 일어나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니. 스킬을 시험해보자.’

 

속으로 생각하는 건 아무 소용 없다. 이리아를 쫓아가게 만든 건 입 밖으로 뱉은 내 거짓말이었으니깐.

 

“이리아님 나가기 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라운지보다 이곳에 앉게 하여 벌을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는 추위보다 따뜻한 것이 더 무섭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 날 우롱하는 것이냐? 로웬…!”

 

이리아가 분노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때처럼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첫 번째. 기본적인 논리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귀중한 정보지만 대가를 바로 치뤘다. 

 

“3시간 동안 서있어라! 내 똑똑히 지켜보겠다!”

 

‘시발년. 두고 보자…. 너.’

 

하긴, 무능한 성별의 남자가 자신을 사모했단 이유로 데려가서 괴롭히겠다고 공헌했으니깐.

이 정도 괴롭힘은 어느 정도 예측했다.

덜덜덜덜.

1시간쯤 추위에 맞서며 서있다가 다행히 기차가 멈춰섰다.

이리아가 기차를 내렸고 급히 들어가 위에 올려놓은 짐을 양손에 지고 따라 내려갔다.

 

 

 

 

**************

 

 

 

 

포탈을 이용해 아카데미로 넘어갔다.

거대한 땅을 하늘로 띄운 이곳은 포탈이 아니면 절대로 올 수 없는 곳이다.

내일 있을 입학식에 이미 많은 학생들과 하인들로 아카데미 바깥은 북적였다.

이리아가 입구에 들어가며 말했다.

 

“여관에서 대기해라. 이곳에서만 파는 물건이 있으니 쇼핑하고 오지.”

“예. 알겠습니다.”

“…….”

 

찌릿.

이리아는 내게 눈을 한 번 흘기고 쇼핑센터로 걸어갔다.

나는 지도를 따라 ‘백마의 집’이란 고급 여관으로 들어가 예약을 확인하고 짐을 넣고 나왔다.

나한테 대기하라고 했지만 그 말을 순순이 들었다간 마나를 체크하는 검문소에서 마력이 있다는 걸 들키게 된다.

 

‘우선 숨겨야 한다.’

 

가지고 있는 돈은 얼마 없다.

내가 빙의한 이 엑스트라 캐릭터는 번 돈을 흥청망청 쓰는 스타일인가 보다.

 

‘14실버라….’

 

우선 겉모습이 번지르르한 넓은 연금술 가게로 들어갔다.

화려한 근육의 남자 직원이 내게 꾸벅 인사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마나의 단약’을 찾고 있습니다. 얼마죠?”

“하나에 50실버입니다. 지속시간은 24시간이고요. 몇 개나 드릴까요?”

“…아닙니다. 다음에 다시 오죠.”

 

설정한 그대로의 가격이다. 혹시나 싶었지만 확인됐다.

짐에 들어있는 아르베르크 백작의 돈을 건들였다간 머리가 잘릴 것이다.

하인이 귀족의 재산을 건들이는 건 즉결처분이니깐.

 

‘그 방법밖에 없나. 할 수 없지….’

 

나는 터덜터덜 골목길로 들어갔다.

 

 

 

 

*********

 

 

 

 

“가, 갑자기 짐을 빼지 말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자 땅주인 할망구가 버럭 소리질렀다.

 

“계약서 봐! 여기에 내후년까지라고 적혀있잖아! 갑자기 가게 빼면 계약 위반이야!”

 

계약서를 자세히 보니 아래 작은 글씨로 삐뚤 써져있다.

양갈래를 둥글게 만 베나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이건 사기예요! 이럴 수 없어요! 신고할 거예요!”

 

할망구가 비릿 웃었다.

 

“그래. 재판까지 가보자. 근데 너 내일 입학하지 않니? 변호사 고용할 돈은 있고?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잘 나오지도 못할 텐데 변론을 어떡할래? 못 나오면 너한테 불리하게 돌아갈텐데…. 흐흐.”

“그, 그럴 수가…….”

 

어쩐지 월세가 싸다 했더니… 이럴 목적이었구나!

베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이곳에 작은 가게를 열어 몇 년동안 돈을 모았다.

아카데미 생활은 돈이 많이 든다. 입학비부터 비싼 물가와 생활비까지.

물론 재능이 넘쳐나는 학생은 전면 무료지만 베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카데미로 들어가 열심히 배워 돌을 황금으로 만든다!

모든 연금술사의 꿈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악덕 사기꾼에게 잘못 걸렸다.

물론 재판까지 하면 이길 자신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재판소에 출석은 해야 정당한 판정이 이뤄진다.

아카데미 입학이 재판의 연기나 불출석 사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할망구의 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니 잘못 걸렸구나 싶다.

땅주인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10골드만 내.”

“네?”

“10골드만 내면 가게 빼는 거 봐줄게.”

 

할망구가 음흉히 웃었다.

베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그렇게 큰 돈은 없어요!”

“왜 없어? 입학비가 그쯤 될 텐데.”

“그걸 내면 전 입학은 어떡하라고요!”

“그래. 특별히 미성년자지만 내가 대출해줄게. 연 이자는 118%지만.”

“…118%프로요?”

“그래. 너니깐 싸게 주는 거야.”

 

베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출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성년자가 대출을 받을 순 없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미심쩍어도 바로 거절할 수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볼게요.”

“그러려무나. 저녁때까지 내 집에 있을테니 찾아오거라. 호호호.”

 

집주인은 계단을 올라 지하 가게를 빠져나왔다.

뚝.뚝.뚝.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남작이란 허명만 남은 가난한 귀족.

가족들은 온갖 허드렛일하며 하루를 보내기 급급했고 그렇기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연금술사를 꿈꿨다.

그런 자신을 위해 가족들은 모아놨던 돈을 자신에게 맡겼고 덕분에 바로 가게를 열어 돈을 조금씩 모을 수 있었다.

 

‘어떡하지…? 입학을 포기 해야하나? 하지만 그럴 순 없어. 잘 되고 있다고 매일 편지 보냈는 걸….’

 

가족들의 희망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있다.

거기다 입학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나이를 먹으면 아무리 돈이 많고 재능이 출중해도 아카데미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연 이자 118%…면 일 년에 10골드를 내야하는건가… 학원 안에서 돈은 벌 수 있다고 들었는데….’

 

하루에 잠을 3시간만 자고 연구에 열을 쏟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자신은 천재가 아니지만 지금보다 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급작스러운 어려움에 그간 쌓아왔던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쉴새없이 흘렀다.

갑자기 손님이 들어온 건 이때였다.

 

“마나의 단약 파나요?”

“흑… 네. 흑흑….”

 

남자 손님인가보다.

베나는 얼른 눈물을 닦아내려했지만 눈물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쪽팔린다. 내 꼴이.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창피하다.

자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얼마예요?”

“흑… 하나에 10골드요….”

“뭐라고요?”

 

앗.

말이 헛나왔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돈에 집착하다보니 실수했다.

베나는 얼른 정정했다.

 

“죄,죄송해요. 흑. 40실버예요. 얼마나 필요하세요…? 끅.”

“10골드 드릴게요. 베나 씨.”

“네?”

 

이상한 말에 베나의 얼굴이 들어졌다.

여자처럼 곱상한 외모에 가늘한 신체.

바지를 입은 집사 복이 아니었다면 여자로 착각할 뻔 했다.

베나의 입이 삐쭉 튀어나왔다.

 

“…뭐예요. 지금 저 놀리는 거죠?!”

 

남자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제게 그런 돈은 없지만…… 실버를 골드로 만들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면 어떨까요?”

 

남자는 테이블에 10실버를 올려놓았다.

베나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