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람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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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생활

1화 2화 3화(完)





"저 하인놈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그녀, 퀸 엘리자베스의 어이없는 목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려 퍼졌다


옆에서 듣던 워스파이트 역시 이번 전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두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벨파스트만은

내심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는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서함을 바꾸어 주기 바랍니다



그런 자신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 소동이

자신이 바랬던 결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충분히 타협할 수 있는 정도의 좋은 결말을 맞았기 때문이였다


비서함을 바꾸지는 않되 인원을 늘리기로 했다


결국은 그런 결론으로 끝내

늘어난 인원은 벨파스트가 메꾸게 되었다


눈앞의 여왕처럼 섬기는 주인의 곁에서

앞으로의 나날들을 보낸다는 미래는

그녀에게는 충분하고도 남을 행복할 미래였다



"....뭐, 결국은 로열메이드가 그 녀석을 돌보게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퀸 엘리자베스는 수긍하지 않는 건지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훈련 결과로 비서함을 정하다는 얘기가 들려왔었고

그녀는 그 미래에 대한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훈련에서는 로얄이 이 함대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

유니온 또한 승률엔 별 차이간 없긴 하지만, 그래도 로열이 강세였다


지금까지 대로만 계속한다면

반드시 자신의 부하가 그 자리에 앉는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제까지는 철혈을 가볍게 격퇴하고

그 다음 사쿠라를 이긴 유니온을 이기는 식이였다


솔직히 유니온과 로얄 모두 이제까지 그래왔기에

이번 훈련에도 똑같은 양상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




"........"



퀸 엘리자베스가 이번 훈련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오르려니

못 마땅한 표정이 다시 짙어졌다


이를 본 워스파이트도 주인의 뜻을 살피고,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첫 경험이였다


철혈이 이제까지 본 적도 없던 압도적인 힘차를 보여준 것은...


전방에 있던 함선들은 거의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가라앉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있던 주력함 또한 갈대마냥, 푹푹 쓰러지고 말았다



올드 레이디

그것은 퀸 엘리자베스의 별명

수많은 전장을 거쳤고, 주변과 비교해도 오랜 경력을 지냈기에

그 별명을 가지기에 알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별명이 무색하게도, 비참하게 패배하고 말아버렸다

너무나도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기 하기에 충분한 일이였다




일단 결과를 보면, 늘린 인원엔 벨파스트가 들어가게 됐다

시리우스는 비서함에서 해임받지 않고, 변함없이 맡게 되었다


아무런 변화가 없기는 커녕

로얄이 보다 지휘관의 곁을 굳히는 형태가 되어 기쁜 일



그러나 벨파스트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 옆에서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지 않는 함선도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퀸 엘리자베스는 말했다




"그런데 시리우스는 무슨 수로 비서함에 남아있는 걸까?"




시리우스는 이름이 불려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퀸 엘리자베스의 눈을 보고, 바로 고개를 젖혀버렸다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기에 말이다


하지만 폐하가 그것을 들어버린 이상, 숨길 순 없다

그녀는 시선을 되돌리고 나서야, 자신이 주인에게 했던 행동을 말했다



일찍 돌아온 그가 일부러 자기 방까지 와 준 것을

피곤한 주인이 자기 침대에 누워서 쉬었던 일을

이상한 생각없이, 옷에 주름이 잡힐까봐, 옷을 벗겨 드렸던 것을


그 얘기를 하는 동안

벨파스트는 언짢아했지만, 곧 다가온 말에 마음을 뒤바꾸었다



주인의 목덜미에 누군가의 키스마크가 붙었다는 사실

시리우스의 말에 모두가 말문이 막혔다



"정말이지, 그 바보 같은 놈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대뜸 입을 연 사람은 퀸 엘리자베스였다

그녀는 분노에 찬 힘을 발에 담아, 땅을 차 올리듯 의자에서 일어섰다

우아와는 거리가 먼 행동과 함께, 감정을 발산해나갔다


"본부에서 일한다길래 바래다 줬거늘!!

여자랑 노는게 일이였던거야!!"


시리우스는 그 말을 들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들음으로써, 그 화가 가라앉았으면 하고 경청할 뿐



"누가 내 하인을 건드려!!

그런 놈 처형이야!!"


"상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만, 모른다고 말씀하셔서..."


"뭐얏!?

논 여자의 이름도 모르는 녀석이라는 거야!?"



진정되기 보단, 오히려 더 해지는 감정

워스파이트도 진정시키려 했지만, 역시 그 상대가 마음에 걸렸다


벨파스트도 같은 심정이였다

사실 그녀는 폐하가 직접 지휘관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됐어!! 내가 직접 물어보고 올게!!"



엘리자베스는 벨파스트의 마음을 읽은 건지는 몰라도

작은 발걸음을 움직이며, 밖으로 향했다


시리우스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머뭇거리면서...


"이번에 론 씨와 함께 본부에 가셨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밤도 그녀와 같은 방에서 보냈다고 하고...

긴장돼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말을 들었는데

주인님은 그녀 때문에 잠을 못 자셨다는 뉘앙스를..."


"그렇다면 범인은 철혈의 신삥이내"


"...그녀가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철혈이란 말을 들으니,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는 걸음을 되돌리고, 의자에 난폭하게 앉으면서

깍지 낀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찔렀다


불규칙한 페이스로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뭐야!!"



훈련에서는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내게 안겨줬다

그리고 그 훈련 결과에 따라

자신의 부하들이 내동댕이쳐진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지휘관에게 키스마크를 부착했다


마치 자기들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다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시리우스는 어떻게 비서함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워스파이트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녀 또한 주인과 같은 감정이지만, 그 감정을 폐하 앞에서 보여 줄 순 없었다

말을 돌려,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물었다



"...그걸 보고 깜짝 놀라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주인님을 덮치고 말았습니다"



시리우스는 매우 낮은 목소리로 답변했고

그 말을 들은 벨파스트는 눈을 실룩실룩 움직였다

목구멍까지 자신을 탓하는 말이 나오려 하고 있었다


메이드로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용서되지 않았기에

일단 나중에 조치를 취하자고 다짐하며, 자신을 타일렀다




"흥!! 꼴좋네!!

잘했어, 시리우스!!"


퀸 엘리자베스는 조금 기분을 되돌리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로얄 이외의 함선에 손을 대다니, 용서할 수 없어!!

애써 인원을 쪼개면서까지 뒷바라지하고 있는데

다른 함선들을 보면 곤란하다고!!"



사실 지휘관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거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역시 용서할 수 없었다

비록 일방적으로 당한 일이라고 해도

그 자신이 눈치채지 못 했다고 해도...


다른 진영에 몸을 허락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몰아세웠다




"...뭐, 지휘관한을 덮친건 일단 놔두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됬어?"



워스파이트는 이 상황을 너무나도 알 수 없었다


시리우스처럼 후회하는 마음은 없었고

퀸 엘리자베스처럼 승리했다며, 기뻐하는 마음은 조금 있었고

벨파스트처럼 손을 댄 일에, 분노하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


복잡한 마음이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다음이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뒤, 지휘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지 결정하면 되니까



"그 뒤엔 비서함을 벗어나기 싫다는 말을 했어요

시리우스는 자랑스러운 주인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하니, 주인님이 잠시 고민하더니 어떻게든 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녀는 마지막엔 흐뭇한 듯이 말했다

웃으면서 자신을 찾아주던 주인의 얼굴이 생각난건지

신기하게도 미소가 새어나왔다

다소 어색하기도 했지만, 그건 기분 탓일 거라고 단정지었다

무의식적으로, 제멋대로 수정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은 대체 어떻게 비서함을 그 자리에 둔 걸까?"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비스마르크 님과 이야기한 결과, 잘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가"




결과만 놓고 보면, 로열은 승자였다

훈련에서는 비록 졌지만

가장 중요한 비서함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철혈도 마찬가지

지휘관 곁에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일부러 날려버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훈련으로 보여준 압도적인 힘 차이도 말이다



본인들은 최근 해역에서의 전투로 경험의 차이가 벌어졌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사쿠라에게 진 유니온들도 모두 뭔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힘에 이상한 위화감을...


정확히 뭐라 설명할 수 없었기에

승부에서 져버린 핑계로 여겨질 것 같아서

더 이상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열 순 없었다



"...뭐, 지금은 생각해도, 이미 끝나버린 일이네"



엘리자베스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생각을 멈추었다


비록 눈앞의 벽에 어떤 크기일지언정

자신의 우수한 부하들이라면 넘을 수 있다 

그렇게 믿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워스파이트"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시선만은 자신 앞에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창가의 저녘노을 하늘에 비춰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위에는 빛나지 않는 메일 한 장이 존재감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예"


워스파이트는 시선 앞의 메일이 뭔지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여왕과 그녀만 알고 있었던 것이였다


메이드장으로 메이드를 통솔하는 벨파스트도

지휘관 옆에 가장 오래 있었던 시리우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충실한 부하이자, 가장 신뢰하는 함선

이 내용을 다른 함선들에게 알릴 수는 없다


워스파이트는 퀸 엘리자베스의 시선에 몸을 받들어, 충성을 보였다

퀸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 잠시 다른 메이드들도 지휘관을 돌보게 하라"


"외랍됩니다만, 주인님께는 이미 벨파스트가 있습니다

다른 메이드가 없어도 당장은 곤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됐으니까!

그 녀석이 아무것도 불만을 느끼지 않도록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서비스를 철저히 해라!!

뉴캐슬과 상의해서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 보도록"


"알겠습니다"



벨파스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고, 그 지시를 받았다

그녀는 그 몸짓을 끝내고, 옆에 선 시리우스에게 말했다


"시리우스, 넌 지휘관님 곁에 더 있어 줘

앞으로 당신에게는 분명 다른 곳으로부터 험한 말을 들을 거에요

일부러 지휘관이 그 말을 굽히면서까지, 당신을 비서함으로 삼았는대

다른 곳에서는 당신이 매우 미워보이겠죠

하지만 그런 녀석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자랑스러운 로열 메이드의 일원

비서함도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도록 하세요!

일일이 패배자가 멀리서 짖는 소리는 들을 가치도 없으니까!!"


"앞으로도 자랑스러운 주인 곁에 있도록 정진하겠습니다"


시리우스 또한 벨파스트처럼 가볍게 인사했다

벨파스트처럼 우아하게 매혹시키려고는 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노력한 형성이 엿보였다


그 모습은 로열 함선들에게 있어선 흐뭇해 보였다


자랑스럽다고 칭하는 주인을 위해

그 곁에 있기 위해, 필사적으로 메이드로서의 책무를

완수하려는 모습이 말이다


비록 지금 곁에 있지는 않지만

그 모습을 지휘관에게 보여준다면, 몹시 높게 평가할 것이라고

퀸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그 녀석은 우리 거야"


이번 중얼거림은 옆에 있는 워스파이트에게도 들렸다

그래서 그녀도 작은 수긍으로 대답했다



"다른 함선들에게도 경험을 쌓기 위해

해역 순찰 강화차원에서 출격 기회

로열 간 훈련 증설을 지휘관에게 신청해야겠습니다

영광스러운 로열네이비로서 다음엔 안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저 또한 단련을 해야겠습니다"


"그래"



퀸 엘리자베스는 워스파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 영광스러운 로열은 갖고 싶은 것은 반드시 손에 넣고야 마는 법!!

지금같은 비참한 모습을 다시는 보여주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바보 하수인으로 하여금

로열이 함대에서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하는 거야!!"


그 구령과 함께 퀸 엘리자베스는 다시 일어섰다

그녀는 그녀의 시선 끝에 포착된, 그 편지에 맹세하듯 다시 중얼거렸다




"누구에게도 그 놈을 내주지 않을거야, 건드리지도 못할거야

그 녀석은 우리가 가져가는 거니까..."



그녀는 그것이 로열에 도움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키스로 만족한다니, 정말 바보 아니야?"


프린츠 오이겐은 이야기를 듣고, 놀리듯 웃으며

약간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그녀의 친구 비스마르크는 웃으면서


"좋아하는 상대가 키스를 하면, 누구든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대답에 겸연쩍다는 듯, 오이겐은 테이블로 시선을 피했다

테이블에는 비스마르크의 모자가 달빛에 비치고 있었다


오이겐은 그 불빛에 자신의 맥주도 비추어버리고, 잔을 좀 기울자

맥주가 흘러내릴뻔 해서, 허겁지겁 입가에 대고, 가볍게 머금었다


"그것도 한게 아니라, 그냥 키스를 시킨 거잖아"


"......난 당한 쪽인걸?"


"아.... 예예예"



오이겐은 약간 머쓱하면서도, 우스웠다

키스를 시켰으면서도, 키스를 일단 했다는 것에 집착하는 그 모습이

점점 더 아이로 보이는 것 같아서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나라면, 좀 더 과격한 부탁을 했을텐데"


비스마르크는 그녀의 말에, 약간 취기가 돈 상태에서 웃으며


"내가 너무 심한 부탁을 했다면, 날 싫어할지도 몰라"


"에이~ 고작 키스 가지고 되겠어?

좀 더 여자만의 여자다움을 가르쳐 줘야, 널 여자로 보겠지"


"...그런 거였나?"



오이겐은 어깨를 으쓱하는 비스마르크를 보며

자신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같은 여인의 모습을 한, 비스마르크의 풍만한 가슴을 보니

이제껏 방해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보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기는 필요해

전쟁터에서도, 연애에서도 말이지

상대가 항상 혼자만은 아닐테니까, 자신만의 특기를 파악해둬야지"


"나의 무기는 뭘까...?"


"네가 가진 것이란 가진 것은 모두 유효하게 써야겠지"



프린츠 오이겐은 속으로 네 가슴이지 뭐야, 라고 중얼거렸다




"비스마르크도 더 매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다른 함선에게 뺏길지도 몰라"


"......그건 곤란한데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해주길 바라는 것도 많아

하지만 난 아직 하나도 하지 못했어

이 목마름과 굶주림 같은 감촉을 제거해 줄 때까지

지휘관을 빼앗기는 것은 사절이야"


"그렇군"



오이겐은 짧은 대답을 하고, 다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자신의 목마름은 금방 채워지지만

눈 앞의 상대는 그것이 쉽지 않은 것 같았다

흉내 내듯 입에 머금고 있으면서도 

이런 것으로는 갈증을 없앨 순 없을 것이다


"그럼 더더욱 비서함을 내려 올 일이 없었잖아"


"............"



그 말에 대답은 없었다


"비서함으로 곁에 있었으면, 좀 더 거리를 좁힐 수 있었잖아

그랬다면 좀 더 자연스러운 거리에서 좋아했을 텐데

게다가 나도 당신이 비서함으로 있었으면

자연스럽게 지휘관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오이겐은 아쉬운 듯 중얼거리면서도,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녀의 말투는 뭔가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는 진지한 눈빛을 하며


"......바빠"


"뭐, 그렇겠지"



프린츠 오이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비스마르크는 철혈의 리더이다

그녀에게 오는 대부분의 일들을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그녀는 항상 시간에 쫓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거리를 채우는데는 시간이 너무 걸려서 결과가 안보여

그렇다면 인상에 남는 마무리를 하는 것이 좋겠지

게다가 곤란해하던 그를 도와준 것도 인상에 강하게 남을 거야"


"당신이 연애에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할 줄이야..."


"......암여우가 알려준거야"



암여우

프린츠 오이겐은 그 말을 들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철혈의 함선들에게는 그런 표현을 결코 하진 않았다

모두를 아끼는 그녀라면 결코...



"이번 건은 그를 골탕먹이기 위한 연극이였을까?"


"그랬는지... 그랬는지는 모르겠군

그렇지만, 불쏘시개는 로열 메이드

우리는 지휘관을 난처하게하는 그들에게 

한 번 혼을 내줬을 뿐이야"


"...그래?"



비스마르크는 아직 반이나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는, 맥주잔을 슬그머니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이제 끝이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지휘관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안되지

인기인인 그는 가뜩이나 바쁘기 때문에

우리 같은 이해자들이 잘 보살펴 줘야 하는거야

그래, 고삐를 항상 잡아두지 않으면, 언젠가 골칫거리가 될 거야"



프린츠 오이겐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알아줘야 해

이 세상에는 필요한 것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불필요한 존재로까지 손을 뻗친다면

불필요한 족쇄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 그가 무슨 선택을 할 때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

냉혹한 판단을 할 수 없는 그에게

우리가 미리 답을 알려줘야 해"


"철혈에는 지휘관이란 필요한 존재야


"그래, 필요한 것은 지킬 거야

더 이상 잃기만 하는 것은 싫어

이 세상에서만큼은 행복이란 걸 사수하고 싶어"



서로의 의식이 맞물린 것에 대해

둘은 신기해하며, 서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프린츠 오이겐은 웃으면서 방에서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조용한 방에 울리던 소리가 사라지자

비스마르크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지키고 싶은 것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뭐든지 하고있어

철혈의 모든 함선들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만은 언제까지나 네 편일거야

지휘관... 당신은 누구 편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니, 다시 문이 열렸다

누가 왔나 하고, 살짝 경계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문틈으로 조그마한 얼굴과 그 미소에, 긴장의 실이 풀렸다



"...론인가, 왠일인가?"



론은 살며시 방으로 들어가며

손에 든 큰 봉투를 그녀에게 자랑스럽게 내밀고 있었다


그 속을 가늠할 수 없는 비스마르크


내용을 묻기전에, 그녀를 자신의 앞에 앉도록 재촉했다



"후훗, 감사합니다"



론은 미소를 머금고,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

자신 앞의 빈 맥주잔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누군가와 술을 마셨나요?"


"아, 오이겐과 조금"


"비스마르크가 술을 마시다니요"


"오늘은 좋은 일이 있어서, 축하잔치를 하자고 했어"



친구들의 술김에 사용했을 뿐이지만

오랜만의 술이기도 해, 짧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느꼈다


실제로 즐거운 경험을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비스마르크는 론이 가져온 봉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이거요?

사쿠라의 한 함선이 비스마르크 씨에게 전해달라고 건네줬거든요~"


"사쿠라의 함선?"


"네, 워낙 구형이라 함력이 긴 편인 것 같아요

잘은 모르지만, 지휘관의 오랜 지인이라고 합니다"


"...그래, 그가 저번에 말했던 함선 같군..."



누가 보내왔는지는 솔직히 궁금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쿠라의 함선이 론을 통해, 보내왔다는 점

공적인 서류가 아닌, 사적인 내용을 가득 담은 것 


봉함을 뜯자, 수십 장의 종이가 나왔다

글자가 종이 양면에 새겨져 있었고

그 엄청난 양에 비스마르크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



아무래도 좋은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생각에 질리면서도, 처음부터 차례차례 훑어보았다



"그러고보니, 그 함선 오늘도 지휘관님 만났대요

일부러 저를 버려두고 함대로 가버리다니

기왕이면 돌아오는 여행도 즐겁게 보내고 싶었는데"


론의 말에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미 그 서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론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눈을 흘기며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 다른 함선들에게 보여주면 안 되겠는데요?

......보여준다면 반드시 폭동이 일어나겠지요"



비스마르크는 그 말에 반응하며

고개를 들어, 서류를 봉투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녀의 얼굴엔, 아까의 즐거웠던 기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양이 양이여서 말야

시간을 갖고 천천히 봐야겠지"


"그러세요

당분간, 비스마르크 씨와 사쿠라 함선 몇 명에게만 알릴 거래요"


"......사쿠라 함선들은 정말 아는게 많네"


"그래서 저쪽은 유니온이나 로열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내요~

뭐든 강제로 빼앗겨버리니까~"



론은 그렇게 말하고 쿡쿡 웃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웃고 있는지 궁금한 비스마르크


조금 전의 자신도 이렇게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에 대해 묻는다면,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솔직히 키스 받고 신이 나있다는 말을 어떻게 할 것이란 말인가



응답할 수 없으면, 대답해 주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론에게 물었다



"뭣 때문에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지?"


론은 그녀의 질문에 황급히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손으로 가리지 못한 눈은 즐거운 표정을 고스란히 담아 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니... 지금부터 즐거워질거라고 생각하면...

아 죄송합니다, 이것이 즐겁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스스로도 다 숨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론은 한 번 눈을 감고선

다시 열었을 때는, 감정을 감추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지휘관이 본부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았다고 해서

딱히 기뻐할 문제는 아니니까 말이에요"



지휘관이라고 불리는 그가

이제까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었는지 등

비스마르크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보고서의 시가만 읽어도 대충 짐작은 했다


세이렌 관계자 의심 등이라는 한 문장만으로


감금했다는 등, 뒤숭숭한 말도 시야 구석에 보였다


단지, 내용이 신경 쓰이는 것만은 사실

그가 관련자라는 의심에 대한 이유의 자세한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지휘관이라는 인간을 잘 알기 위해서도, 속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내용은 시간을 거듭해 읽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더욱 다져야 한다

방금 전에 말한 그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이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보다 분명히 해야 한다



"...후훗, 많은 적이 생기면

나도 이런 평화로운 세상에서 지루하지 않게 지낼 수 있겠죠"


그런 론의 작은 중얼거림은 생각에 몰두해 있던

비스마르크에게 들리지 않았다







*






비서함을 바꿔주세요


그런 말로 시작된 소동이 끝났다

그 다음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방에 있는 메이드의 무릎을 베고 깨 버린다


비서함의 인원을 늘린다

그런 억지같은 해결이라고 조차 할 수 없는 수단으로

막을 내린 소동을, 당연히 다들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침부터 여러 함선들이 내게 몰려와

벨파스트와 시리우스가 비서함이 된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것에 대해 나는 비서함을 늘려서

일손을 줄이는 대신에, 더 많은 함선들과 만나보는 시간을 갖겠다고 해명했다

시리우스가 비서함으로 존속하는 것은

철혈의 비스마르크에게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납득은 안 되지만, 마지못해 물러나는 함선


분노를 떠뜨리는 함선


역시 비서함은 시리우스에서 바꿔지지 않는구나, 하며

울먹이며 호소하는 함선




..............


정말 다들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마치 정말로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



또 한 명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온 함선이 왔다

이번에 온 함선도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나는 호통을 맞으면서, 오늘만 수십 번째 반복된 말을 했다


거기에 불만은 없었다


결국,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나 자신도 몰랐으니까

바꾼다든가, 바꾸지 않는다든가, 그냥 늘려버렸으니...

정말, 나는 무엇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주는 함선이 있는 것이 다행일지 모른다

곤란하게 만드는 함선도 있긴 하지만



방금 내게 온 함선은 이제야 화가 풀렸다

나는 몇 번이나 반복한 사과의 말을 거듭했다



사람 모습을 한 그녀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처럼 감정을 갖고, 사고를 한다

진짜 사람 같다

하지만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함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싸울 수 있을까, 싸울 수 없을까


어린아이 같은 함선마저도

나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무엇인가가 달랐기에

그러니까 사람이 아니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기분도 있는 동시에

그렇지만, 사람으로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이 아닌, 괴물일지도 모르는 존재

세이렌이라는 괴물의 힘에서 태어난 존재들

나는 오늘도 그들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겨우 돌아간 그녀의 등을 보며

나는 테이블에 놓인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벨파스트와 시리우스가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던 탓인지

나는 순간적으로 홍차를 내뿜을 뻔 했다


홍차를 끓여준 시리우스는 벨파스트의 눈치를 보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목이 조금 데인 와중에도, 그녀에게 고맙다고 전했다

그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를 짓는 시리우스



......아


왜 그럴까

함선들을 휘두르고, 휘들린 뒤라 그런가

신기하게도 뭔가 돌아오는 느낌이였다

그것은 바로 이곳에서 지내겠다고 각오를 다지기 전의 내가...



지금뿐이다



그러면서 홍차를 다시 입에 머금었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



나의 기분따윈 필요없다

일에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래, 미카사 씨에게 그렇게 배웠어



그래서 지금만

조금 있으면, 함선과 사람의 구별은 잊어버릴거야

늘 그렇듯 소파에 앉는 시리우스와 그녀가 만든 달콤한 홍차

차이가 있다면 벨파스트의 존재 정도일거야

그것도 곧 일상이 되겠지



다만 지금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흐뭇하게 웃는 그녀

사람인 자신보다도 압도적으로 강해서

그야말로 변덕스럽게 날 죽이는 일 따윈 쉽게 할 수 있겠지


나는 포기한 것마냥 웃으면서

입안의 달콤한 액체를 삼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기분 나빠"



다행히도 작게 중얼거린, 내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병든 KAN-SEN 제1장이 끝났습니다

제2장이 존재하긴 하나

작가가 딱 3화 연재하고 연중시켜버렸습니다

연중된지 7개월 정도가 지났고, 이미 다른걸 연재하고 있었으니

사실상 버렸다고 해도 무방하내요


번외편 3편 있으니 할거고

아무튼 무수한 떡밥을 남기고 이렇게 끝났습니다


유니온은 비중이 그냥 공기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