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교황 노르베트는 왕 앞에 놓인 거대한 의자에 중년의 뚱뚱한 몸을 풀썩 눕듯 앉았다.

레우 교황청이 있는 이곳 신정국가 페나르의 왕 흰 머리가 힐끗 난 루빌라가 그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벌써부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교황님.”

 

노르베트는 코웃음을 쳤다.

 

“흥. 용사의 소지는?”

“각국에서 교황님의 명령으로 사명을 갖고 태어난 여자를 쥐 잡듯 뒤지고 있습……”

 

노르베트가 말을 끊었다.

 

“그건 당연한 거고. 내 말은 용사의 소지를 찾았냐는 거다.”

“아직은 본국에 연락이……”

“하. 아직도? 분명 이 세계에 태어났다고 예언이 내려왔거늘!”

 

루빌라는 황송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자란 단서를 제외하면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게 대체 무엇인지…….”

 

노르베트가 손잡이를 쾅 쳤다.

 

“이보게 루빌라.”

“예.”

“내가 성녀를 찾을 때 어떻게 찾았는지 아나?”

“…….”

 

루빌라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벌써 15년 전이네. 레우님께서 성녀를 찾으라는 말씀을 받은 게. 그때 내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어물쩡 찾으려는 시늉만 내던 왕들의 모습에 내가 답답해 3년간 대륙을 순회하며 마을에서부터 마을까지 잠도 안자고 뒤졌다네. 자네 지금 이 뚱뚱한 몸으로 그게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 아닙니다.”

 

루빌라가 말을 더듬었다.

 

“흥. 내 비록 경건한 몸은 포기했지만 마음까진 포기한 건 아니네. 아무튼 이름 없는 한 마을에서 드디어 아리아님을 찾을 수 있었지. 7살이었나. 그때부터 아름다움에 걸맞는 신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네.”

“아름다움과 신실한 마음 말입니까?”

“그래. 성녀의 숙명을 지니고 태어나신 분인데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이런 위치에 있는 나도 두 발 벗고 뛰어다니며 찾아냈는데. 뭐? 단서가 없다고?”

 

노르베트가 루빌라를 노려보자 그는 다시 말을 더듬었다.

 

“제,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들에서 볼멘소리가 나와서…….”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간 내가 단단히 찾아가겠다고 말해두게.”

“아, 알겠습니다.”

 

대륙의 신앙을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레우교의 위세는 한 나라의 왕이 감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루빌라는 심사가 불편해진 노르베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성녀님은 정말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노르베트가 하품을 했다.

 

“제가 듣기로 그 어린 나이에 교황청에 도착해 하루에 15시간을 기도실에서 보낸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녀라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12년동안 그런 삶을 보낸다는 게 저같은 사람은 도저히……”

 

노르베트가 불쾌한 얼굴로 말을 끊었다.

 

“이보게. 루빌라.”

“예, 예?”

 

예상과 다른 반응에 루빌라는 또 말을 더듬었다.

 

“숙명을 갖고 태어났지만 세상에는 그 숙명을 짊어지지 않으려는 자들이 더 많다네.”

“예,예. 그렇죠. 저나 교황님이나 성녀님은 특별한 숙명을 짊어지고 태어나 숙명을 감내하고 있죠.”

“그렇네. 그 말일세. 숙명에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네. 그것을 회피하려들면 강제적인 수단도……”

 

노르베트의 마지막 말은 끝을 흐려 들리지 않았다.

 

“……신도 날 용서하실 게지. 성녀님께서 20살이 되면 이제 완전한 성녀로 거듭나신다.”

“완전한 성녀 말입니까?”

“그래. 그때부턴 대외적인 활동도 겸할걸세. 마왕의 부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성숙도 필요하니깐.”

“…그를 위해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기도실에서…… 정말 대단합니다.”

“…….”

 

노르베트가 귀를 후볐다.

 

“그 애긴 됐고 이제 연회를 해야지? 앞으로 일주일간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꽉꽉……”

 

그때였다.

 

“큰일났습니다!”

 

사제가 알현실 문을 박차며 긴급히 달려왔다.

 

“성녀님이 쓰러졌습니다!”

“뭐라?!”

“범인으로 의심되는 자는 로타. 이번에 제 3성기사단 부단장으로 진급한 자입니다.”

“이 무슨…?”

 

노르베트는 뚱뚱한 몸을 일으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야 한다.

성녀가 쓰러졌다니 대체 무슨 일인가?

로타란 놈은 또 뭐고…?

 

 

 

********

 

 

 

하나밖에 없는 흰 테이블 위에는 면회실을 밝히는 전등빛이 방안을 둥그스름하게 밝혔다.

아리아는 마지막 남은 의자에 착석하자마자 바로 앞에 보이는 초췌한 몰골의 로타를 보고 말했다.

 

“나가세요.”

“하, 하지만…….”

 

면회실을 지키는 위병이 난처하듯 투구를 만지작거렸다.

7일만에 깨어난 성녀. 아리아.

그녀는 정신을 되찾자마자 독방에 갇힌 로타를 면회신청을 했다.

절차대로라면 행정처리까지 일주일이 걸리지만 누가 성녀를 기다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리아는 자애로운 눈으로, 한편으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위병에게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제가 말했죠? 로타는 저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고요. 그가 이곳에 갇혀 있는 건 부당한 처사예요. 면회가 끝나면 그를 석방시키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위병이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고 나가자 허름하고 작은 면회실에는 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

아리아는 그제서야 참아왔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됐다.

 

“흑흑흑흑… 흑흑흑…”

“서, 성녀님…?”

 

평소대로의 모습이었던 성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로타는 당황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햇빛이 들지 않는 독방에서 딱딱한 빵 몇 조각과 식은 수프를 먹으며 로타가 일주일간 느낀 감정은 걱정과 참회였다.

평생을 신과 교황, 그리고 성녀를 모시기로 다짐했건만 불현 듯 파쇄의 눈에 감지된 성녀의 이상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 행동이 불순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론적으로 성녀를 일주일이나 기절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울음을 터뜨렸다.

로타로썬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고서야 성녀는 고개를 들고 초조한 표정의 로타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상행동을 했다.

 

“풉.”

“?”

“푸하하하하하하…! 로타! 그 얼굴은 뭔가요? 후후. 하긴 당혹스럽긴 했겠네요. 당신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울음을 터뜨렸으니… 후후. 후후훗.”

“서, 성녀님?”

 

로타는 성기사단에 입단하고 먼 발치에서 방으로 돌아가는 성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결코 이런 경망스러운 웃음을 지을 분이 아니었다. 물론 그럼에도 옥구슬 구르듯 감미로웠지만.

 

“고마워요.”

 

성녀가 손을 뻗어 로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로타는 더욱 놀랐다.

성녀는 하루에 15시간을 기도실에 보내는 걸로 알고 있다.

보통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일과를 12년의 세월동안 그 숙명을 감내했다.

보통의 감정이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정도로 하나부터 열까지 몸과 마음과 행동을 레우 교의 교리에 맞춰져 있다.

이런 분이 성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 사제도 아닌 기사의 손을 직접 맞잡았다.

이건 레우 교의 교리에 어긋난다.

교법에 능통하지 않은 로타도 이 기본적인 교리는 알고 있다.

당연히 로타는 말을 더듬었다.

 

“서, 성녀님.”

“괜찮아요. 제 손을 놓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이, 이러시면…….”

 

로타가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했지만 그 부드럽고 따뜻한 아리아의 손이 그럴수록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다정한 눈길로 그를 계속해서 쳐다보자 로타는 할 수 없이 손을 포기하고 아리아의 말에 귀를 세웠다.

 

“고마워요. 로타.”

“어떤 게 말씀입니까?”

“제 머리에 새겨진 술책을 풀어줘서요.”

“과연 그건 제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군요.”

 

아리아는 달뜬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제가 운 건 사라져버린 지난 날에 대한 아쉬움때문이었어요.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이런 저를 구해준 당신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의 눈물이었기도 했고요.”

 

로타는 솔직하게 물었다.

 

“그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금 성녀님은 전과 달라보입니다.”

“당연하죠. 로타.”

 

아리아는 엄지로 로타의 손바닥을 꼼지락거렸다.

 

“그 전까지의 저는 가짜였으니깐요.”

“가짜?”

“네. 저는 제 의지로 성녀가 된 게 아니예요.”

 

성녀는 슬픈 듯 말을 이었다.

 

“그가 제 머리에 숙명을 세뇌시켰죠.”

“그라고 한다면 설마…….”

“네. 맞아요. 노르베트. 그 뚱뚱한 인간.”

 

성녀의 눈에서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성녀를 거부했던 어린 저를 납치하고 술책을 새겼습니다. 저는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죠. 성녀? 알게 뭔가요? 제 잃어버린 지난 삶은 누가 보상해주죠? 노르베트 그 인간을 죽이면? 아니면 신을 원망하면……?”

“성녀님!”

 

나는 그래선 안되지만 다급히 성녀의 말을 끊었다.

성녀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말들이 연속해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리아는 재밌다는 듯 내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당신이 책임지세요.”

“네? 뭐라고요?”

 

뚱딴지같은 성녀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존댓말을 까먹었다.

성녀가 더 재밌다는 듯 풋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세뇌된 채 살아가던 날 당신이 구해줬으니깐 로타가 날 책임지라고요.”

 

아니, 나 이제 부단장으로 승진했는데….

이제 훈련하는 기사단원들 매일 굴리면서 히히낙락할 생각이었는데….

존경하는 성녀와 교황의 미사를 보면서 마음을 늘 경건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아리아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책.임.지.세.요 로.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