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 가난하지만 밝고 씩씩한 얀순이의 역키잡이 존나게 보고 싶은 오후...

엄마는 아빠의 술주정과 폭행에 못이겨 어릴 적에 도망치고 아빠는 허무하게 음주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

좆도 없는 보험금도 보험금이지만, 할머니는 교통사고로 발생된 손해에 대한 돈을 물어주느라 결국 다 써버리고.

여전히 할머니와 단 둘이 다 쓰러져가는 단칸방에서 살아가는 얀순이...

그리고 바로 아래 반지하방에서 사는 30대 아저씨 얀붕이.


사실상 유일한 주수입원이 단칸방집에 딸린 반지하방이라서 얀순이의 할머니는 얀붕이에게 아주 집착 조지게 해서 월세를 받아 먹음.

행색도 추레하고 머리는 물론 수염도 안깎고 다녀서 동네 사람들한테는 김씨 할머니네 반지하방에 성범죄자 산다고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지만.

할머니에게 격세유전으로 집착성을 물려받았는지 얀순이도 얀붕이에게 처음에는 낯가리면서 피해다녔지만.

점점 얀붕이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감.


"아저씨! 할머니가 계란말이 남는다고 아저씨 먹으라고 갖다주래요!"

"아저씨! 보일러 저번에 고장난거 오늘 고치러 온데요!"

"아저씨! 이번달 방세 내일 내는거 잊지 마세요! 할머니요? 우웅... 오늘 병원 다녀오셔서 허리 아프신가봐요! 누워계셔서 제가 직접 왔어요!"

"아저씨! 에? 네? 밥이요? 아뇨! 올라가서... 아저씨랑 같이 먹자구요? ......호, 혹시 소시지 있어요?"


여름이 흘러가고 가을이 되고 추운 겨울이 되고 다시 봄이 오기까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된 얀순이가 아저씨 얀붕이와 친해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가까워진 두 사람의 관계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갔음.


말수없고 언제나 어두운 반지하방에서 살며, 밤이면 대리운전을 나가거나 아니면 대충 택배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며 살던 얀붕이에게.

어느새 얀순이는 얀붕이의 잿빛처럼 어둡고 일그러진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빛이나 다름 없었음.

얀순이의 할머니는 얀순이가 얀붕이와 가까워지는 걸 알고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르니 가까이 가지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얀순이는 얀붕이가 실은 집앞 길이 어는 것을 막기 위해 연탄재도 뿌려주고 눈도 치워주고.

할머니가 힘들지 않게 대신 무거운 짐이나 쓰레기도 처리해주고.

심지어 얀순이를 위해 가끔씩 밥도 챙겨주는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에 별 말안함.


똑똑똑-


"아저씨! 혹시 수학 문제 풀 줄 아세요? EBS 보고 푸는데 모르겠어서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열어보니, 얀순이가 수학문제집을 들고 해맑게 웃으며 얀붕이에게 와서 말하는거임.

얀붕이는 자르지 않은 긴 머리카락 사이의 눈동자를 꿈뻑이다가 집으로 들어오라고 말하고.

얀순이에게 좋지 못한 말주변이지만 푸는 법을 알려주고 마저 화장실의 전등을 갈러가는 얀붕이.

식탁에서 공부하던 얀순이는 무심결에 옆에 아저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반지가 놓여져있던 것을 발견하고 만지작거림.


'아저씨... 결혼했었던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 거? 엄마꺼?'


얀붕이의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얀순이는 얀붕이에게도 어찌됐든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음.

화장실 쪽을 한번 쓱 돌아본 얀순이는 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거려서.

그러면 안되지만, 자신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한번 끼어보기로 함.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야릇한 기분에 얀순이의 심장이 쿵쿵 뜀.

얀붕이의 소중한 반지를 자신의 왼손약지에 낀 얀순이는 왼손을 쫙 피고.


"헤..."


아버지에게 따뜻한 부성애를 느껴본 적 없는, 이제 갓 중학교를 졸업한 얀순이에게.

30살이 넘은 얀붕이의 친절과 배려는 그야말로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어른'을 향한 환상의 실현이자 빛나는 동경이었음.

얼마나 험한 일을 하다 왔는지 두 손은 항상 굳은살과 상처의 흉터로 가득했고.

자신이 묻지 않으면 말 한마디 없이 언제나 무표정하고 무심하고 무감정한 눈동자와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얀순이는 얀붕이의 마음 속에 서린 다정함을 느낄 수 있었음.


그래서.


"뭐해?"

"...네? 아, 아저씨."


반지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에 화장실 전등을 갈고 나온 얀붕이가 얀순이의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발견하고 정색하며 말함.


"그 반지. 왜 니가 끼고 있는건데."

"앗... 그.. 그게... 죄송해요. 훔치려고 한건 절대 아니에요.


오해가 생겼다고 생각한 얀순이가 급히 반지를 빼며 해명을 하려고 했지만.

얀붕이는 얀순이가 훔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음.

다만.



"반지 내려놓고. 나가."

"아, 아, 아저씨... 죄송-"

"나가라고."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멋대로 만져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소중한 물건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얀붕이는 얀순이의 행동이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차갑게 말해버림.

얀순이는 자신이 도둑으로 몰렸을지도 모른다는 억울함과.

자신의 해명을 듣지도 않고 차갑게 말하는, 180도 달라진 얀붕이의 싸늘한 태도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결국 문제집을 챙겨들고 방을 나섬.


그리고 그렇게 얀순이가 얀붕이의 방에 들어서는 날은 오지 않았음.


얀순이가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그해 초봄.

중학교는 여자중학교였지만. 남녀공학은 처음이었던 얀순이.

화장하지 않아도 아름다움과 귀여움이 공존하는 외모와 새하얀 피부. 그리고 밝은 성격 덕에 얀순이는 학교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음.

2학년 3학년 선배들도 얀순이의 존재를 알아차릴만큼, 얀순이는 찬란함을 빛내며 학교생활에 열중함.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반 아이들과 두루두루 친한 덕에 담임선생님도 얀순이를 예뻐함.


그러나.


"콜록.. 아이고.."

"할머니. 괜찮아? 약 아까 먹었지?"

"어어.. 먹었어.. 에고고.. 할미는 괜찮으니께 얼렁 자... 기침 때문에 시끄러워 못자니께 할매는 저기 문 밖에서 이불 깔면 되니께."

"안돼! 아직 춥잖아! 그냥 자도 되니까 할머니가 여기로 와. 여기가 더 따뜻해."


할머니의 지병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사실상 기초생활수급비에 얀붕이의 반지하월세비까지 합쳐도 할머니의 병원비를 내기도 어려워짐.

정부에서 지원하는 돈도 이제는 횟수가 초과되거나 더 이상 신청할 수 없는 등 악재가 휘몰아치고.


"얀순아. 아무리 그래도 수학여행은 고등학교 3년 중에서 딱 한번인데..."

"아니에요. 제가 가면... 할머니를 돌볼 가족이 없어서요! 전 괜찮아요! 나중에 졸업하고 취업하면 제주도쯤이야 마음대로 갈 수 있을거에요!"


결국 고등학교 1학년 첫 수학여행도 포기하고 할머니를 돌보고 병원에 모시고 감.


"......"

"......"


얀붕이와의 그 일 이후, 둘 사이는 서먹서먹해짐.

밖에서 마주치거나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도. 얀순이는 왜인지 아는 척하기 싫었음.



왼손 약지에 꼈던 얀붕이의 반지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함에도.

그걸 꼈을 때 느꼈던 야릇한 감정이 아직도 선명함에도.

얀순이는 애써 모른 척, 얀붕이를 모른 척하며 지나감.


방세도 10만원 더 올려달라는 부탁에 아무 말 없이, 현금 10만원을 더 넣은 봉투를 가져다 주던 얀붕이는 할머니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음. 얀순이와의 사이도 멀어지고, 할머니와의 사이도 솔직히 좋다고는 여길 수 없었으니까.

결국, '예전'처럼. 얀붕이는 또 다시 혼자가 되어 반지하방에 갇혀 홀로 시간에 몸을 맡긴채 외로이 살아가게 됨.


"야. 김얀순. 너 또 아르바이트 가?"

"응. 이제 나 야자 못해~ 그건 좋더라?"

"피... 그래도 야자하는게 더 좋을 것 같은데? 너 요즘에 1교시 2교시는 수업도 못듣고 맨날 자더라? 안피곤해?"

"...피곤해도 해야지! 내가 없으면 우리 할머니는 누가 돌봐. 나 갈게? 요약노트 빌려줘서 고마워?"


할머니의 병원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얀순이는 어린 나이지만 아르바이트를 뛰며 돈을 범.

학업에, 아르바이트에, 할머니를 돌보느라 몸이 두개 세개여도 부족했지만.

얀순이는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만.


"......"


결국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인 얀순이에게 삶은 너무나 가혹했음.

청소년이라서 최저임금도 못받고, 심지어 할머니의 병세까지 나날이 악화되며 병원에선 대학병원에 가서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아야한다는 말까지 나옴.



돈. 돈. 돈.


어린 얀순이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가혹하고 고통스러웠음.

성적은 나날이 떨어지고, 점점 학교 생활을 따라가기도 벅찰 지경이었음.

얀순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점점 사라지기를 얼마.


"야. 너 1학년 1반 김얀순. 맞지?"

".......네. 그, 그런데요?"


평소 불량학생으로 소문난 3학년의 무서운 선배언니들이 김얀순에게 옴.

얀순이가 어려운 생활로 인해서 알바 때문에 야자도 째는 등 학교 내에서 소문이 자자했음.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 얀순이에게 접근한 선배언니들은 얀순이에게.


"너 돈 필요하다며? 불판 닦아서 언제 돈 모으려고?"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그래도 생각보다."

"됐고. 너 일 하나 해볼래? 돈 존나 많이 주는데. 지금 받는 것보다 거의 5배는 더 받을걸? 너 하는거 따라서 10배도 씹가능이야."


얀순이의 직감에 분명 이걸 거절해야한다고 했지만.

선배언니들이 들고 다니는 고가의 명품 지갑이나 파우치를 눈에 발견한 얀순이.

선배들의 말대로 지금 자신이 버는 돈의 최소 5배에서 10배까지 받는다면.

할머니는 물론, 이 답도 안보이고 끝도 안보이는 생활에서 조금이나마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


그 일을 수락해버리고맘.

수락한 바로 다음날 저녁.


"할머니. 나 저, 알바 있어서 먼저 나가볼게. 밥 해놨으니까 먼저 먹어!"

"어디 가는겨? 밥도 안먹고?"

"알바! 나오지마. 기침도 심한데."


서둘러 집을 나서는 얀순이.

큰길가로 나서서 차를 기다리다가 봉고차 한대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


드르륵-


"니가 김얀순?"

"네.네..."

"오호. 타."


금목걸이를 한 남자가 얀순이를 위 아래로 흘겨보더니 씨익 웃으며 봉고차에 타라고 함.

얀순이는 무서워도 꾹 눌러 참고 봉고차에 탐.


그리고.


그런 얀순이의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얀붕이.

얀붕이는 얀순이의 얼굴에 평소에 하지 않았던 화장이 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옷도... 본 적 없는 짧은 치마에 마치 성인 여성처럼 차려입은 복장. 입은 걸 본 적이 없는 사복이 남의 것이라고 직감한 얀붕.



하지만.


애써 모른 척 다시 고개를 돌려 집으로 돌아감.



얀순이가 향한 곳은 번화가에 위치한 룸형 술집이었음.

원래 미성년자를 고용하면 불법이지만, 암암리에 성행하는 불법적인 일 전부를 막기란 불가능이었음.

조직폭력배들이 운영하는 술집이라서 무서운 사람들도 많이 오고, 대놓고 관계를 전제로 밖에 나가는 일들도 비일비재할 정도였음.


"너가 윤정이가 말한 김얀순이냐?"

"...네..."

"야. 씨바 표정 좀 펴라. 손님들 술맛 떨어지니까. 오늘 처음이니까 다른 애들 하는 거 보고 잘 배워."



얀순이는 정말 너무나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음.

그렇게 처음 룸에 들어가서 중년 아저씨들의 접대부를 하며 술을 따르는데.

당연히 예쁜 외모의 얀순이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음.

얀순이를 눈독 들인 VIP급인 중년이 실장한테 넌지시 얀순이와 따로 2차를 하고 싶다고 함.

실장은 얀순이가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거액의 현찰을 바로 다이렉트로 받아버리고 결국 얀순이에게 따로 이 손님을 접대하라고 얘기함.


"몇살이야?"

"대, 대학생이요."


개인실에서 중년남성과 단 둘이 독대하게 된 얀순이.

가까이 붙어서 얀순이의 몸을 더듬고 만져대고.


"어디 대학교인데?"

"야, 얀챈대...다녀요..."

"아 그래? 얀챈대면 공부 잘해야 갈 수 있는 학교 아니야? 왜 이런 일을 하고 그래? 아저씨가 너만한 딸이 있어서 그래."

"...그..게..."


잔뜩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얀순이를 보며, 중년남성이 술잔을 들이키며 말함.



"너 고삐리지?"

"...네?"


얀순이가 소스라치게 놀라자, 중년남성이 비릿하게 웃으며 얀순이의 귓볼을 살살 매만지며 말함.


"크크큭. 맞네. 딱보면 알아. 아무리 화장해도 숨길 수 없는 젖살이 보여. 너같은 애들한텐."


겁에 질린 얀순이가 중년 남성의 손을 뿌리치고 덜덜 떨며 일어섬.


"......죄, 죄송합니다. 저 못할, 안, 안할래요. 죄송해요."

"너 나가면."



중년남성이 코웃음을 치며 말함.


"니가 다니는 학교에 죄다 퍼뜨린다. 고삐리년이 술집에서 몸팔고 다닌다고. 니 면상이랑 다 까발려서 인생 박살날 줄 알아라. 니 부모 피눈물 나는 꼴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던가."

"......."

"경찰에 신고해봐라. 나야 뭐 몰랐다 잡아떼면 그만이지만. 넌 인생 앞으로 길게 살아야지. 시집은 못가더라도."



얀순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림.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만큼 무섭고 두려워서.

중년 남성은 얀순이의 손을 잡고 강제로 자신의 옆에 앉히며 말함.


"한번만 눈 딱 감고 하면. 아저씨가 용돈도 줄게. 안무섭게 해줄테니까 긴장 풀어라. 어? 아. 맞다. 이거."


실장이 몰래 준비한 최음흥분제가 탄 술잔을 들어 얀순이에게 건네는 남성.


"이거 마시면 긴장 풀리는 약이야. 그, 뭐야. 핫식스나 커피 같은 거라고 생각해."

"흑...흑흑......"

"울지말고. 마시라고."

"흑흑... 흑..."


협박에 못이긴 얀순이가 결국 술을 한모금 마시고.

홧홧하고 알코올 냄새나는 술이 위로 넘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얀순이의 정신이 몽롱해짐.


'할머니...'


머릿속에 할머니가 떠오름.

할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런 위험한 일을 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할머니는 너무나 고통스러워할 것이 분명했음.

결국 비밀을 지키고 자신만 참고 견뎌내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저씨.....'


자신의 몸을 더듬는 중년남성의 손길에.

최음제로도 차마 가려지지 못하는 공포 속에서.

자신에게 따스한 마음을 보여주었던 아저씨가 떠오름.

어째서 이 순간에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얀순이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지만.


"아이 씨발. 입 좀 벌려봐. 좀."


얀순이의 볼을 험상궃게 우겨잡으며 욕설을 내뱉는 중년남성.

강제로 입을 맞추려고 탐욕스러운 혀를 내밀던 그 순간.



- 으아악!

- 야 씨발 막아!


우당탕! 챙그랑!


- 으악!

- 컥!



개인실 밖에서 무엇인가 깨지고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옴.


- 으으으- 여, 여기요! 여기로 들어갔어요! 아악!


실장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쾅!



아저씨가 문을 강제로 따고 쳐들어옴.

중년남성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소식을 들은 조직폭력배들이 우르르 몰려와 얀붕이의 뒤를 치려고 달려듬.


"씨발새끼가!"



슉!


문을 바로 닫아 뒤로 몸을 숨겨 조직폭력배의 둔기를 막아낸 얀붕이가 손을 잡아 꺾어버림.

빠드득. 뼈가 부셔지는 소리와 함께 조직폭력배의 비명이 질러지고.

순식간에 급소를 타격해 무력화시킨 얀붕이가 그 뒤에 있던 다른 조직폭력배를 향해 달려듬.


"씨발!"

"으악!!!!!"


빠그작- 퍽!


회칼을 들고 달려든 대머리 조직폭력배의 공격을 피하고 손을 잡아 비틀고 목울대를 강타하거나.

휘둘러지는 손도끼를 피하고, 팔꿈치로 얼굴을 가격하고 무릎을 발로 걷어차 다리를 비틀어버리고.

공격을 피하기 위해 팔을 잡아 꺾고 다른 조직폭력배의 뒤로 숨었다가, 빈틈을 보고 달려 들어 다시 급소를 공격하는 등 한명한명씩 각개격파함.


쉭- 퍼억! 퍼억! 빠그작!


"아아아아악!!!"


손도끼를 뺏어 마치 야차처럼 십수명의 조직원들 사이에서, 날이 아닌 반대편 뭉툭한 도끼머리로 닥치는대로 조직폭력배의 신체를 다짐육으로 만들어버리는 얀붕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살상무술로 깍두기들을 무력화시킨 얀붕이가.

놈들의 피가 튀어 흥건한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너머로.


"......."

"흐이악!?"


얀순이에게 못된 짓을 하려던 중년 남성을 살기가 넘실거리는 소름끼치는 눈동자로 바라봄.

최음제 때문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얀순이를 대충 버려두고, 소파 뒤로 도망친 중년 남성이 핸드폰을 꺼냄.


"씨, 씨발! 다가오지마! 다가오지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겨, 경찰 부르면 다 좆되는거야!"

"....."


얀붕이는 중년남성을 바라보다가 손도끼를 버리고, 몸을 가누지 못한 얀순이에게 다가감.

그리고.


"아...저...씨......?"

"......"


겨우 의식의 끈을 부여잡고 자신을 부르는 얀순이의 목소리에.

얀붕이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안아 들며 말함.


"겪어봐."

"....뭐?"


중년 남성의 얼빠진 목소리에.

얀붕이는 중년 남성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함.


"인생이 나락에 처박히는게 얼마나 좆같은건지... 겪어봐."

"......"


위이이이잉-!

위이잉-!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개인실까지 들려오고.

얀붕이는 얀순이를 안아들고 그대로 자리를 벗어남.

개인실 너머 복도는 물론 엘리베이터와 숨겨진 전용통로인 비상계단까지.



부러지고 피가 흩뿌려지고. 바닥에 반병신이 되어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수십명의 조직폭력배들.


그 사이사이를 밟고 지나가며, 얀붕이는 얀순이의 상태를 확인하며 재빠른 걸음으로 건물 밖을 빠져나감.

밖은 이미 얀붕이가 부른 경찰과 구급대, 심지어 지역 방송사 기자들까지 전부 진을 치고 있었음.


"야 안으로 들어가! 얼른!!!"

"기자들 다 막아!!! 뭐해 씨발!"

"안에 지금 지들끼리 패싸움을 했는지 죄다..."


주변 상인들과 인파들까지 죄다 몰려 시장통이나 다름 없었음.

얀붕이가 미성년자 성매매 및 마약투약 등등 온갖 강력범죄로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일부러 부풀려서 신고한 덕에.

보통 출발할 때보다 배는 많은 인력들이 현장에 급파된 상태였음.

마찬가지로 얀붕이의 제보로 인해 지역 기자들까지 재빠르게 튀어나와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고.


"어!!! 저기, 여자애 안고 나오는 남자 찍어!"


얀붕이가 얀순이를 안고 나오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지만.

아랑곳 않은 얀붕이는 구급대원에게 얀순이를 부탁함.


그리고...


"......"


다음날 아침. 정신을 차린 얀순이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다름 아닌 병원의 새하얀 천장.

그리고 팔에 꽂힌 링겔이었음.


꿈처럼 흐릿한 기억 속에서. 끔찍한 일을 당하기 직전에 왕자님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얀붕이를 떠올린 얀순이는.


사실 이 모든게 꿈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만큼. 얀붕이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음.


정신을 차리고 몸 구석구석을 확인해봐도 다행히 다치거나 해를 입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안 순간 얀순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림.


할머니를 위해 이렇게 무모한 결정을 해버리고, 삶이 끝장날 뻔한 큰일을 겪었고.


얀붕이가 자신을 구하러 와주었다는 기적같은 일에 고마움을 느끼며 조용히 흐느낌.



"얀순아! 아이고 우리 얀순이... 으흐흐흑!"


"하, 할머니..."



병실 문이 열리고, 경찰의 연락을 받고 달려와 밤새 손녀의 곁을 지켰던 할머니가 얀순이에게 달려가 눈물을 터뜨림.



"요것아! 요것아! 아무리 이 할미 병원비 때문이라도 그렇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그런 일을 하고 있어!"

"흑흑... 할머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어..."

"이 할미가 미안혀.. 이 할미가 미안혀.. 죽어야지.. 늙으면 죽어야지.. 우리 하나 뿐인 손녀 잃어버렸으면 이 할미 어떻게 살라구.. 아이고..."


귀한 손녀를 꼭 끌어 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의 울음소리에.

얀순이는 그제서야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17살 소녀 본연의 모습으로 펑펑 눈물을 흘림.


얀순이와 할머니가 눈물의 재회를 끝마친후.

형사들이 들어와 얀순이를 조사함.

얀순이는 엄연한 미성년자 알선수재의 피해자에 성폭행까지 당할 뻔했기에 형사들의 태도는 극히 조심스러웠음.

이미 오늘 아침에 유력 조간신문들과 지역 언론지에 조직폭력배와 지역 사업가, 정치인과 공무원 등이 얽히고 설킨 부패의 온상이라는 헤드라인으로 보도되고 뉴스에 도배된 상태였음.


얀순이에게 나쁜 짓을 저지르려던 중년 남성은 다름 아닌 지역의 유명한 부동산 건설 사업자이자 조직폭력배의 돈줄이었고, 정치인과 공무원에게 뇌물을 먹여 사업을 따내고 온갖 비리를 저지른 개쌍놈이었음.

얀순이의 혈액검사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약물을 사용하는 등 아주 개씹좆같은 짓거리를 저지른 상태였고

이미 실장이나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전부 불어버리고 장부까지 건져낸 덕에.

중년남성은 물론 얀순이에게 이 일을 소개한 고등학교 선배언니들까지 전부 체포되어 경찰조사를 받고 있다고 했음.


"......저, 형사님."

"음? 네?"


조사를 끝마치고, 자리를 뜨려는 형사들을 향해 얀순이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용기를 내어 물음.


"혹시.. 김얀붕... 아저씨, 그러니까. 절 구해주신 아저씨도... 경찰서에서 조사 받고 계시나요?"

"네. 조사를 받는 중인 걸로 압니다. 자세한건 수사중이라 저희도 따로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요."

"아...... 네..."

"아니, 그럼 형사님. 그럼 그 반지하방 청년은 감옥에 가는거에요? 우리 손녀 구해줬는데?!"


오히려 얀순이보다 할머니가 더욱 분개하며 침상을 팍팍 손바닥으로 내려침.

형사들은 당혹스러워하며 일단 정당방위나 긴급피난같은 것이라고 해도 폭행상해가 너무 중해서 처벌을 피할 수 없다고 설명함.

하지만 할머니는 이런 경우가 어딨냐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얀순이가 겨우 할머니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사태는 일단락됨.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면서.


얀순이는 몇번 더 경찰조사를 받고, 기자들에게 지겹도록 인터뷰나 취재 요청을 받는 등 짜증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


얀붕이는 아직 반지하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음.

얀순이가 얀붕이를 기다리는 것을 아는 할머니는 지역 봉사단체와 각 지역에서 얀순이의 소식을 언론으로 전해듣고 온정의 손길을 보내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며 손님들을 맞이함.


"이번에 저희 봉사단체에서 성금을 모아서 우리 할머니랑 얀순 학생의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드렸습니다. 시내의 투룸 빌라구요! 장학금에 병원비까지 전부 저희가 마련해드렸으니 부담가지실 필요 없어요."

"......감사합니다."


얀순이는 마지못해 감사인사를 전함.

근처 이웃 주민들도 험한 일을 당할 뻔한 얀순이를 독려해주는 등 시간이 흘러갔지만.


"아저씨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안나와..."


어느 신문이나 뉴스를 보아도.

조직폭력배 간의 알력다툼으로 인한 패싸움으로 취재가 될 뿐.

얀붕이에 대한 소식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있었음.

얀붕이가 자신을 안고 건물을 나서는 사진 한장만이 맨 처음 언론기사에서만 뜰 뿐.

이상하게도, 얀붕이에 대한 소식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음.


"....."

"콜록콜록- 아고고, 뭐햐? 얀순아."

"할머니? 할머니, 그거 무겁잖아~ 내가 들게!"

".......그 반지하 청년 기다리는겨?"


무심한 할머니의 물음에 박스를 건네받던 얀순이가 멈칫하다가 고개를 격렬하게 저으며 소리침.


"어? 아, 아니야! 기다리긴... 그냥, 우, 우리 이사가서 이 집 아무도 없는데 반지하방도 어떻게 해야하잖아. 아직 세입자가 있는데... 우리 나간다고... 전해주기도 해야하고..."

"......"

"...아저씨가 나 구해준거 맞잖아. 근데... 뉴스에는 한마디도 안나오고... 형사님들한테 물어봐도... 다 아무 말도 안해주고... 아저씨랑은 연락도 안되고... 그래서... 고맙다고... 고맙다고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는데..."


풀이 죽은채로 얀순이가 말하자, 할머니가 얀순이의 머리를 쓰담쓰담해주며 말함.


"시간이 약이여... 뭐든지간에... 기다리면 때가 다 오는겨."

"......"


그날 저녁. 얀순이는 아무도 없는 빈 반지하방에 들어감.

여분의 열쇠가 있어서 들어간 집에는 얀붕이의 온기는 없고 먼지가 내려앉은 상태였음.

얀순이는 빗자루와 물걸레로 얀붕이의 집을 깨끗이 청소함.

그러다가 문득, 식탁이 아닌 방 한켠의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 놓은 반지를 발견함.


"......"


깨끗하게 관리된 얀붕이의 반지.

얀순이는 분명 이 반지가 소중한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함.

이리저리 반지를 들여다보다가...


"흐..."


입술을 살며시 잘근거리는 얀순이.

도대체 얀붕이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이러면 안되지만 문득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몰려옴.

그러면 안되면서도, 얀순이는 방 구석구석을 뒤져서 마침내.


"하아."


옷장 구석에 놓인 사진첩 하나.


그 사진첩을 떨리는 손으로 펼쳐본 얀순이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짐.


그 사진첩에는 얀붕이의 고등학생 시절과 함께 군복을 입고 있는 사진이 있었음.

부사관정복인지 아니면 장교정복인지 어린 얀순이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한 때 군인이었던 것으로 짐작 가능했음.

특이하게도 어린 시절의 사진은 없었고, 언제나 사진을 찍는 얀붕이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음.

항상 웃는 대신에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웃을 줄 알잖아..."


아름다운 여성.

웃는 모습이 얀순이처럼 밝고 환한 예쁜 여성과 함께 서울 경복궁이나 부산 등에서 사진을 찍은 모습을 볼 수 있었음.

언제나 베일에 가려져있던 얀붕이에게도 이런 웃음을 짓던 때가 있었구나 싶었지만.

사진첩은 중간도 채우지 못하고 더 이상 사진이 채워지지 않았음.

그렇기에 얀순은 직감함.


"......"


얀붕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얀붕이가 사랑하는 사람의 반지가 바로 저 책상에 놓여진 반지이며.

얀붕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모종의 이유로 잃고 난 이후, 자신을 구하기 위해 싸운것이 분명하다고.


"아저씨....... 아저씨...... 흑흑... 아저씨..."


얀순은 얀붕이를 향한 고마움과 인간적인 연민, 그리고 이유 모를 뜨거운 감정을 느끼며.

다시 한번 사진첩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림.

그동안 이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었는데도 알지 못했기에 아쉬웠던 감정들이 둑이 터지듯 밀려나왔음.

한참을 울던 얀순은 다시 사진첩을 옷장안에 고이 넣어놓고.


아저씨를 위해서. 얀붕이를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맹렬히 고민함.


얀붕이가 경찰조사를 받던 아니면 다른 모종의 이유로 이 집에 오지 못해 이대로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로 영영 헤어지게 됨은 자명한 일이었음.

얀순이는 아저씨, 얀붕이라는 은인을 절대 잃고 싶지 않았음.


"...아저씨가 날 다시 찾아오게 하려면..."


자신과 얀붕이의 사이를 이어놓을 단 한가지.

영영 곁에 붙들어 놓을 수 있는 단 한가지.

얀붕이가 자신을 멀리하지 않고 다가오게 만들 단 한가지는...


"죄송해요, 아저씨. 하지만... 『고마움』을 전하려면 이 방법 밖엔 없어요."


얀순이는 책상에 놓인 반지를 조심스럽게 왼손 약지에 끼고, 종이 하나를 책꽂이에서 꺼내 펜으로 뭐라뭐라 글을 써내려감.


그리고...


시간이 흘러 2주가 지나, 사건이 일어나고 한달이 다되갈 무렵.

마침내 이사준비를 끝마친 할머니와 얀순이는 슬픈 추억이 서린 집을 떠남.

얀붕이는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상태여서 어쩔 수 없이 치우지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음.


깔끔하고 새로 지은 신축 투룸 빌라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된 얀순이와 할머니.


아직 따뜻한 사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만큼, 가구는 물론 컴퓨터와 TV등 가전제품과 얀순이가 공부하는데 필요한 각종 책, 그리고 할머니의 병원비까지 봉사단체와 지자체의 도움으로 마련해줌.


지역 보건소에서 얀순이의 심리치료까지 돕고, 얀순이도 다시 학교에 등교하게 되고.


"야! 김얀순!!!!"

"초희야... 흑흑!"


같은반 친구들과 눈물겨운 재회도 하게 됨.

다행히 험한 일을 당한 얀순이의 소식을 뉴스로 접한 친구들은 얀순이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힘써줬고.

얀순이도 다행히 학교에 다시 잘 적응하며 학업도 그리고 성적도 제자리를 찾아가며 평화로운 날을 보내게 됨.


"얀순아. 너 남친 생겼어? 그 반지 뭐야?"

"헐. 커플링 아니야? 커플링이 근데 무슨 결혼반지처럼 생겼어!"

"얀순이 정도 되니까 알아서 커플링 가져다 바치는 남친도 있구나... 부럽다..."


친구들이 얀순이의 약지에 낀 반지를 보며 한마디씩 거들자.

얀순이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반지를 매만지며 말함.


"남친...은 아니고... 응. 『소중한 사람』 꺼."

"헐... 미친 대박!!!"

"꺄아아아~ 뭔데뭔데!!!"

"소중한 사람!? 누구?! 너 진짜 남친 생겼어!?"


모든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실 그대로.

이 반지는 소중한 사람의 것이므로.

얀순이는 그저 말을 아끼며 웃을 뿐이었음.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무더운 날.

영어학원을 다녀온 얀순이가 밀린 집안일을 하기 위해 두팔 걷어붙였는데.


띵동-


초인종소리에 카메라에 비친 사람이 누구인지 보는 얀순이의 눈이 크게 놀라 뜨여짐.


바로...


"아, 아저씨!?"


얀붕이였음.

긴 머리카락이 아닌, 군인처럼 짧아진 머리.

수염도 깔끔하게 밀고.

정리되지 않은 머리칼 너머로 흐릿한 얼굴은 남자답게 선이 굵고 잘생긴 30대 청년이 서있었음.


얀순이는 당황했지만, 이내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음.


"......"

"......"


문을 열자 두 사람은 몇달만에 마주친 사람답게 어색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얀순이의 시선에는 애틋함이.

얀붕이의 시선에는 반가움이.

숨기지 못하는 표정처럼 여실히 잘 드러나 있었음.


얀붕이는 쓴웃음을 짓고 조용히 사온 음료수 선물세트를 얀순이에게 건넴.


"잘 지냈지."

"...네. 감, 감사합니다."

"......."

"......."


맴맴맴-


두 사람의 대화 대신 매미소리가 울리기를 잠시.

얀순이는 음료수 병을 매만지다가 얀붕이에게 집에 들어오라고 함.

얀붕이는 잠시 거절했지만, 결국.


"손..님 세워두는거 아니라고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꼭 대접해야한다구..."

"......그래. 고마워."


말수 없는 얀붕이는 결국 하는 수 없이 집에 들어옴.

예전에 살던 그 허름한 단칸방이 아닌 깔끔하고 깨끗한 신식 투룸.

거실도 넓고 TV도 좋고. 화장실도 깔끔하고 부엌도 깔끔했음.


정장차림의 얀붕이는 잠시 집을 둘러 보다가.


얀순이가 허겁지겁 갖고온 음료수와 과자가 차려진 상을 보고 바닥에 앉음.


"......"

"드, 드세요! 아저씨."

"....고마워."


얀붕이는 잠시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이내 얀순이의 왼손 약지에 끼여진 반지를 응시함.


하지만 바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학교는... 어때? 할머니는... 괜찮으시고?"

"네? 아... 할머니는 입원치료 받으시고 많이 괜찮아지셨구, 친구들이랑도 잘 지내구...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헤헤..."

"......그래."

"저, 아, 아저씨는요? 잘... 지내셨어요? 연락을... 드리려고 해도 전화도 안받으셔서... 그, 반지하방은..."

"잘 해결했어... 너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

"...네... 다행이다..."


내심 얀붕이가 감옥에 가면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이 날 때마다 조마조마하고는 했던 얀순이.

다행히 얀붕이도 감옥에 가지 않은 것 같고. 무사히 이곳까지 찾아왔으니 마음 졸일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얀붕이가 결국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은.


자신이 남긴 쪽지를 확인했다는 것.


얀순이는 자신의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멋대로... 이 반지... 가져와버렸어요... 쪽지를 남겨드렸지만... 그래도 아저씨가 아끼시는 반지인데."

"...그 반지..."

"......"

"소중한 사람이 끼던거야."

"아저씨..."


얀붕이는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슬픈 눈동자를 들어 얀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키지 못한 소중한 사람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었던 소중한 소녀에게.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되돌려받기 위해서.


"이제... 돌려주지 않을래?"


그러나. 얀순이는 얀붕이의 눈빛에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음.

이대로 이걸 준다면, 얀붕이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얀붕이의 소중한 사람의 물건이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하지만.


얀붕이도 얀순이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얀순이는 왼손 약지에서 반지를 살며시 빼고, 얀붕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돌려드릴게요... 대신에..."

"...?"

"아저씨한테 물어볼게... 있어요. 물어봐도 되나요?"

"......"


얀붕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얀순이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 반지를 손에 꽉 쥔채로 말했다.


"그 날... 제가 나쁜짓을 당할 뻔했을 때... 아저씨가 절 구하러 와주셨죠?"

"......그래."

"어떻게... 아신거에요? 제가... 그런 나쁜 일에 휘말릴 뻔했다는거..."

"......"


얀붕이는 잠시 고개를 돌려 베란다 밖 풍경을 바라보고.

얀순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함.


"너가 봉고차에 타는 걸 봤어... 평소랑 다른 모습에... 화장까지 해서..."

"......"

"처음에는...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


얀붕이의 시선이 반지를 쥐고 있는 얀순이의 왼손을 향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자만이 보이는 눈빛.

그 때의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얀붕이는.

얀순이를 구하기로 결심했다.

숱한 의문을 극복하고서.


"아저씨에게...... 저는 『소중한 사람』이 맞죠?"

"......"


얀순이의 눈에 눈물이 서서히 차올랐다.

마치 떠오르는 달을 흐려버리는 밤안개처럼.

서서히.


"맞죠? 아저씨? 그래서... 절 구하러 오신거잖아요?"

"...그래."


얀붕이가 끝내 입을 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말의 긍정을 놓치지 않은 얀순이는 잠시 고개를 숙여 손에 쥔 반지의 촉감을 느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째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아저씨가... 절 구하러 왔을 때...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지금도 선명해요... 제가 떠올랐던 얼굴이."

"......"

"가장 무섭고 도망치고싶을 때 떠올린 사람이... 할머니가 아니라 아저씨였어요."

"....."

"아저씨가 저한테... 『소중한 사람』으로 남았다는 걸 그때가 되서야 깨달았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절 구하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그래서... 너무 감사하고 기뻤어요. 너무 기뻐서..."

"...얀순아..."

"아저씨에게 저도... 제가 느끼는 거랑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얀순이는 천천히 손에서 반지를 놓아 상 위에 놓고 말했다.


"이 반지... 제 손가락에 끼려고 가져왔어요... 저에겐 아저씨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

"저도, 아저씨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얀붕이는 얀순이의 눈물어린 고백을 듣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반지하방에 돌아왔을 때. 반지를 책상에 놓고 그냥 나온 것을 생각하고 책상을 보았을 땐.

반지를 자신이 챙겨가니 집주소를 적고 찾아와달라는 얀순이의 쪽지가 놓여져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얀순이가 반지를 멋대로 끼는 모습을 보고 화를 냈을 때와는 정말 상반된 감정이었으므로.

얀붕이 본인조차도 자신의 이런 상반된 감정에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얀순이와 마주한 지금.

얀붕이가 느끼는 감정은 '난처함'이었다.


이 아이는.

얀순이는.

자신을 옆집 아저씨, 목숨을 구한 사람 이상으로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아버려서.


"얀순이 너에게... 나란 놈이 그렇게 소중한줄 미처 몰랐어."

"......"

"...하지만... 네가 느끼는 지금 감정은... '빚을 갚기 위한 마음'이야... 여러 일을 겪어서... 아직 어려서... 자기 감정이 멋대로 튀어버리는거... 나도 겪어서 잘 알아."

"...아저씨..."

"얀순이 넌... 나에게 이젠 잊지 못할 소중한 사람이 맞지만... 그 반지와는 조금 달라... 그 반지는... 니께 아니니까."

"......"


얀붕이의 차분하면서도 슬픈 목소리를 듣던 얀순이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지만.

얀순이는 기어이 포기하지 않았음.


"그래요...? 제게 아니라서... 아저씨가 사랑하는 그 여자를 못잊어서... 그런거라면... 제가 될래요."

"...얀순아."


얀순이는 반지를 들어 다시 자신의 왼손약지에 끼고, 얀붕이를 직시하며 말했다.


"절대 드릴 생각 없어요. 아저씨 입으로 방금 그러셨잖아요. 저도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럼, 제가 껴도 되는거잖아요. 맞죠?"

"...얀순아. 억지라는 거 알잖아. 난ㅡ"

"필요 없어요!!!"


얀순이의 새된 비명이 집 안에 울려퍼졌다.

쥐죽은듯 고요해지는 집안.

얀붕이가 잠시 얀순이를 바라보고.

얀순이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함.


"아저씨랑 다시 만났는데... 이대로 아저씨 못보내요... 흑흑... 저한테 아저씨가 와줬는데... 아저씨한테 제가 있는데... 흑흑..."

"......"

"아저씨 만나면 자랑하려구... 공부도 열심히하구... 아저씨랑 이야기하려구... 매일 밤마다.. 잘 때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다 생각하구.. 그랬어요... 아저씨한테... 반지 주기 싫어서... 억지로... 잡는거라는거 알아도... 그래도... 저한테 아저씨가 제일 먼저 웃어준 사람이니까... 소중한 사람이니까..."


얀순이가 무릎을 꿇고 두손으로 얀붕이에게 싹싹 빌었다.


"아저씨. 저 버리지 말아주세요... 아저씨... 저 정말 잘할게요... 저 구해주신거... 저한테 잘해주신거... 제가 다 잘해서 갚을게요... 그러니까... 저 버리지 말아주세요... 네? 흑흑."

"얀순아."


오히려 놀라 식은땀을 흘린 얀붕이가 얀순이의 두 손을 잡고,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었다.

일단 얀순이를 달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지만.

얀순이가 받아들이는 의도는 전혀 달랐다.


"좋아해요. 아저씨... 나 버리지 마요... 제가 더 잘할게요..."

"......"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얀붕이는 얀순이를 떼어내고 딱 잘라 말해야했지만.

얀붕이는 그러지 못했음.

얀순이의 말대로.


사랑하던 그녀를 잃고, 아무것도 없이 그저 폐인이 되어 세상과 단절된 자신을.

이어주고 보살펴주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줬던 사람은 얀순이 뿐이였고.

그래서 얀순이를 구하러 갔던 것이고.


얀순이와 다시 만나기 위해.


최소 20년이라는 형량을 없애주는 대신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다시 되돌아가기로 선택했다는 것도.


소녀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치기를 선택했던 자신이 너무나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와중에도.


"....."

"흑흑..."


얀붕이는 얀순이의 눈물이 그치기를 바라기 위해 거짓으로라도 알겠다는 말을 하려고 하고 있음을.

이미 깨달았음.


소중한 사람의 웃음과 똑같았던 얀순이의 미소.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트라우마를.

얀순이를 지키기 위해 앞뒤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던 자신의 기억을 떠올린 얀붕이.


"...대학..."

"흑... 네?"

"......"


눈물콧물 범벅이 된 얀순이가 고개를 들어 얀붕이를 올려바라봄.

얀붕이는 입술을 꽉 깨물고,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듯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말함.


"네가... 대학에 들어가서도... 똑같은 감정... 생각이 유지된다면..."

"...아저씨?"

"네가 대학에 들어가면... 반지를 다시 가지러 갈거야..."

"......"


얀붕이가 무슨 말을 할지 얀순이는 단숨에 눈치챘다.

얀붕이는 지금 다시 유예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반지를 가져가려고 하는 날. 얀순이 그녀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그녀의 눈물이 얀붕이의 강철같은 마음을 녹여버린 것이다.


"아저씨!!"

"윽!"


너무나 기쁜 마음에 얀붕이의 목에 양팔을 둘러 꽉 끌어안은 얀순이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돼요. 대학까지는 너무 늦어요! 졸업식 때 찾아와주세요! 약속해요... 절대... 절대로..."

".....뭐?"


얀붕이를 바라보는 얀순이의 눈동자가 무채색의 빛을 한없이 발했다

비로소, 소중한 존재가 생겨 그것을 절대 놓지 않으려는 한계 없는 끈기와 집념이 동공 속에서 일렁거렸다.

그 눈빛을 확인한 얀붕이가 잠시 멈칫거리며 단서조항을 붙이려고 했지만.


"읍!"

"!?"


얀순이의 돌발행동이 더 빨랐다.

고등학생. 그것도 아직 미성년자에게 입술을 허락했다는 사실에 얀붕이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지만.

이제 거리낄 것이 전혀 없어진 얀순이는 얀붕이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약속도장... 미리 받아갈래요!"

"......"


사선을 뛰어 넘으며 싸워온 얀붕이었지만.

얀순이의 당찬 기습 약속도장에 그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음.

이것이 맞나 수십번씩 되뇌이고 되뇌여도.


『소중한 사람』을 잃고 기적처럼 다시 찾아온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의 웃음에.


얀붕이는 하는 수없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함.


그렇게.


"아이고!? 여긴 어떤일로 왔디야? 아이고 신수가 훤하네 그려. 몰라보겠구만?"

"할머니! 아저씨랑 나랑, 읍?!"

"...밀린 월세입니다. 제가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이고... 줄 필요는 없는디..."


일단 돈은 받고 보자는 할머니와 입이 막힌 채로 발을 동동구르는 얀순이.

그리고 얀순이의 입을 막은채 식은땀을 흘리며 얀순이에게는 절대 말하지말라고 눈빛을 보내는 얀붕이.


얀순이와 헤어진 후 다음 날.


납골당을 찾아가 이제는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그녀에게.


"......"


반지를 다시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하다 속으로 사과하고.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상처받지 않도록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이 어린 얼굴로 고민하지만.


"아저씨!"

"......"


추운 겨울. 목도리를 한 채로 자신을 찾아오는 얀순이.

기나긴 기밀임무가 끝나고, 봄이 되서야 연락을 한 자신에게.


"아저씨... 걱정했어요. 너무 늦게 전화하지 마시라구요!"

"...미안..."


주민등록번호가 말소되고, 새 신분이 생성된 그였지만.

여전히 얀순이에게는 소중한 아저씨, 얀붕이였음.


"아저씨! 여기요."

"왠... 초콜릿?"

"헤헤... 많이 늦었지만, 발렌타인 데이 선물!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


얀순이가 직접 만든 초콜릿을 보며 미소를 짓는 얀붕이.

그리고.


"아저씨. 저 오늘 고백 받았는데요!"

"......."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2학년이 되었으면 학업에 더욱 열심히...

근데 어떤 놈이 도대체...

잠깐.. 왜 내가 얀순이의 저런 말을 신경쓰는것이지?

결국 대학에 가면...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솔직하지 못한 아저씨에게.

얀순이는 조용히 나긋한 목소리로 말함.


"걱정마세요. 사귀는 사람 있다고 거절했으니까요?"

"...........걱정한적 없어."

"히히. 거짓말!"


장난기 가득한 얀순이의 웃음소리에.

얀붕이는 일부러 차가운 얼굴을 유지하다가도.


"훗..."


결국 웃게 되고.


시간이 흘러 얀순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

"아저씨!"


꽃다발과 졸업장을 품에 안고,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저씨에게 달려간 얀순이.

다시 몸이 아파져서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대신해서.

얀붕이는 얀순이를 보러 학교에 온 것이었음.


추운 겨울.

흐린 하늘에서 눈이 솔솔 내려왔지만.


얀순이는 전혀 춥지 않았음.


반지를 낀 왼손으로. 얀붕이의 왼손을 꼭 잡아준 얀순이.


"졸업 축하한다고 안해주는거에요?"

"......축하해."

"에~ 말로만요?"

"......"


얀붕이의 눈이 흔들렸지만, 얀순이가 얀붕이의 품에 뛰어들듯 안기며 말함.


"좋아해요."

"....."


대답 대신.

이 아이를 위해서.

결국 오른손을 들어 얀순이의 등을 토닥여준 얀붕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진심어린 행복의 미소를 가득 지어보였다.



***



얀순이가 대학에 들어가고.


다시 임무를 수행하느라 3개월 동안 연락하지 못한 얀붕이.

마침내 이번에도 살아돌아온 얀붕이는... 가장먼저.


"......잘 다니고 있어?"

"네!"


얀순이를 찾아감.

대학교에 진학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을 꾸미기 시작한 얀순이.

처음 봤던 밝고 예쁜 소녀는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어가고 있었음.


벚꽃이 피고 지는 봄...


예쁜 얀순이가 얀붕이 들으라는 듯이.


"동기중에 남자애들이 자꾸 저한테 따로 톡보내는거 있죠? 거절하느라 진땀뺐거든요?"

"......"

"헤헤. 질투? 짜증나요? 화나요?"

"......"

"우흐흐~ 저에겐 아저씨 뿐인걸요? 걱정하지마세요! 저번에 아저씨가 가르쳐준 호신술! 매일 안까먹으려고 연습하거든요!"

"......"

"술도 조금만 마시구요! 남자애들 합석하는 술자리는 꼭 친구들이랑 같이가구요!"

"......"

"에~ 아저씨. 화풀어요~ 네? 응? 쪽쪽쪽-"

"......"


얀붕이는 조용히 반지를 낀 얀순이의 왼손을 매만지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줘... 이렇게... 오래 헤어지는 일도... 조금만 기다리면 다 해결될거야."

"......"


얀순이는 얀붕이가 국가에 소속되어 군대에서 '위험한 일'을 하고 있음을 어느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음.

그래서 얀순이는 얀붕이가 항상 무사히 돌아와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었으므로.

미소를 지은 얀순이는 얀붕이의 품에 안기며 말함.


"기다릴 수 있어요. 아저씨만 저를 놔두고 가지 않으면 되요. 그것만 있으면 되니까..."

"....."

"그리고..."


꽈악-


얀붕이의 멱살을 힘껏 매어잡은 얀순이가 스산한 눈빛으로 말함.


"저랑 오래 못만났다구...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그러잖아요? 일하다가 다른 여자랑 눈맞으면... 진짜 아저씨 죽이고 나도 죽을거에요. 정말로."

"......"


식은땀을 흘려버린 얀붕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함.

그리고 그런 안 좋은 말은 하지말라고 신신당부함.


그렇게 얀순이가 대학교 3학년, 4학년이 되어.

24살이 되던 해.

마침내 얀순이는 졸업을 하게 되고.


다시 한번 졸업식이 되어.


"......"

"얀붕오빠!"


24살. 공기업에 합격한 얀순이와.

40살. 마침내 '일'을 마무리하고, 국가로부터 '내근직'을 허락받은 얀붕이.


16살 차이인 두 사람이지만. 선남선녀인 두 사람을 흘깃흘깃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은.

나이차가 조금 나는 커플이라고만 여기며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 생각함.


얀순이가 취업하자마자, 두 사람은 혼인신고서를 작성해 신고하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납골당에 인사를 드리러 가는 등 어엿한 『부부』로서 할 일을 마침.


"하아~ 이제 다 끝났다~"

"....."

"아니지. 이제 다시 시작인건가? 취업한다구 다 끝이 아니잖아. 그치?"

"...그치."

"응... 우리 결혼했으니까 새로 신혼집으로 쓸 아파트도 알아 보고. 결혼식에. 우아? 아기까지!"

"......."

"할 일이 태산이네요? 그렇죠?"

"......"


얀순이의 왼손을 꼭 잡은 얀붕이가 걸음을 멈추고 얀순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그것을 열고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란 얀순이가 잠시 아무말도 하지 못하자.


"....프로포즈는, 하지 못한게 마음에 걸렸어."

"......아, 아저씨....."


너무 놀라 말버릇처럼 아저씨라고 부른 것도 모를만큼.

얀순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울먹이며 얀붕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 괜찮을거야. 나도. 너도. 행복한 미래만 남았어. 그러니까."

"......"

"나랑 함께 평생... 살아줄래?"


얀순이의 왼손 약지에서 반지를 빼내고, 새로운 약속을 하듯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주는 얀붕이.

다시.

다시 한번 새로이.

『소중한 사람』을 가슴에 품은 얀붕이와.

사랑하는 얀붕이에게 유일무이한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얀순이에게 하여금 너무나 큰 감정으로 다가와서.


"응... 흑... 살래... 아저씨랑... 같이 할머니할아버지 될때까지 살래... 으아아아앙!"

"윽!"


여전히 배려심 없는 다이빙 포옹에.

얀붕이는 미소를 지으며 얀순이를 꽉 끌어 안고 웃음.


허름한 단칸방 소녀와 반지하방에 세들어사는 아저씨.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고.


마침내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가 되었음.




*




번외1.


"......"

"......"


임신한 얀순이는 매우매우 화가 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얀붕이를 노려보았다.

새로 이사한 신혼집에.

미모의 유튜버가 사는 건 둘째치고.

어째서!


"왜 앞집까지 가서 전등을 갈아주는건데?! 저 여자는 손이 없대!?"

"...미안."


화장실 전등만 갈아주고 왔는데 왜 혼나는것인지 알수 없지만, 얀붕이는 일단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얀순이는 얀순이대로 아주 화가나 미칠 지경이다.


'앞집 저 여우년이... 우리 아저씨를 그딴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어떻게 참아.'


여자이기에 알 수 있다.

저 빌어먹을 개년이 자신의 아저씨를. 나만의 아저씨를. 내 뱃속아기의 아빠를.

굉장히 순수하지 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생긴 얀붕이의 외모를 잠시 망각한 자신의 잘못이다.

차라리 어렸을 적 긴머리로 대충 폐인마냥 살던 시절이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휴. 다음부턴 주의해, 아저씨! 나 말고 다른 여자들은 다 여우야. 다 속이 씨꺼매!"

"......"


어쩐지 해야 할 말이 뒤바뀐것 같지만.

얀붕이는 어쨌든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공감했다.


"아무래도 수를 써야겠어."


저 개같은 년이 매일밤마다 다른 남자를 자기 집으로 불러 멋대로 갈아치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얀순이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주일 후.


모 언론사를 통해 뷰티 유튜버 A씨의 남성편력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며.

그 중에 몇명은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A씨는 유튜브와 인스타 계정을 지우고 잠적했다.



번외2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얀순이의 친구들은 선이 굵고 남자답게 잘생긴 얀붕이를 보며 주접을 떨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얀순이가 출산하고 산후조리후 집으로 돌아온 후.

딸 얀희의 백일을 축하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온 친구들.


결혼식 이후 처음 보는데...

이제 마흔이 훌쩍 넘었다는데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중후하고 남자다운 멋진 매력이 숙성해서...


"너희."

"응?!"

"엑?!"


얀순이의 싸늘한 목소리가 친구들의 정신을 붙잡았다.

딸 얀희를 안고 있던 얀순이는 차가운 눈빛으로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 얀희 보러온 거 아니었니?

"맞, 맞아! 그랬지! 까꿍~ 우리 얀희~"

"얀희야 이모야 이모~"

"따아아앙~!"


친구들은 다급히 얀순이의 눈치를 보며 재롱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얀희는 좋아했다.


"......"


얀붕은 깔깔 웃는 얀희를 보며 생각했다.


둘째를 갖고 싶다고.


그렇게 1년 후.


얀순이는 다시 임신했다.


둘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얀붕이만 한 것이 아니었고.


얀붕이는 2달 동안 쥐어짜이며 처음으로 몸무게가 3kg이 빠지고 말았다.



청명한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