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회가 끝나고 로타는 시간이 좀 지나 석방됐다.

일주일 사이 햇빛 없는 방과 볼품 없는 식사 때문에 로타는 눈에 띄게 초췌해졌지만 지금 그를 당혹시킨 건 육체적 고통이 아닌 심리적인 어떤 것들이었다.

 

‘아리아님은 여지껏 세뇌당했다. 현 교황에 의해.’

 

아리아를 족쇄시킨 술책은 자신의 손에 의해 파쇄됐다.

하지만 그 이후는?

로타는 자신의 손을 들어올려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보고 책임지라니… 하지만 그럴 수는…….’

 

아리아는 그 말을 한 직후 내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성녀로선 절대로 해선 안될 말을 말이다.

 

“후우.”

 

감옥을 빠져나오자 지상의 햇빛이 자신을 따사롭게 반겼다.

죄수복이 아닌 평상복이 이렇게 낯설고 부드럽게 느껴질 줄이야.

하지만 마음은 무겁다.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이 안되지만 로타는 자신의 그 소용돌이 중심에 서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일단 복귀해야지.”

 

지하 감옥은 교황청 바깥에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정원과 분수대가 곳곳이 설치된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구에서 수속을 밟아야 한다.

로타가 그쪽으로 걸어가자 입구를 경비하고 있는 성기사단원이 두 명 중 한 명이 자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로타!”

 

로타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성기사가 옆에 있는 남자를 꾸짖었다.

 

“반말이 뭐야! 반말이! 이제 로타님이라 불러야지!”

“아, 그렇지. 부단장으로 승급했지. 이야 저 나이에 벌써….”

 

로타가 다가와 두 성기사의 숄더를 두드렸다.

 

“오랜만이네. 월마,몬셀.”

““오랜만입니다! 로타님.””

“안으로 들어갈게. 별 일 없었지?”

 

월마에게 한 소리한 몬셀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 일이 없긴요. 로타님이 성녀를 음해하려했다는 소문이 쫙 퍼져서 교황청에 있는 사람들이 한동안 발칵 뒤집어졌는데요. 저희야 로타님이랑 같이 지내봤으니 대부분 헛소문이라 여겼지만…….”

 

월마가 말을 이어받았다.

 

“장기간 출타하기로 했던 교황님이 지금 복귀해서 돌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순간 로타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두 성기사는 로타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타는 속내를 감추고 말했다.

 

“그렇겠군. 성녀님이 쓰러지셨으니 놀랄만도 하시겠지.”

“그러시겠죠.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데려와 키우셨으니 딸같다고 여기시겠죠.”

“……딸이라.”

 

로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두 성기사는 로타를 너무 잡고 있으려 했단 걸 깨달았다.

월마가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오늘은 주말이라 훈련도 없습니다. 따끈한 욕조에서 맥주 한 잔…… 아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가? 하하하.”

 

몬셀이 그를 다시 꾸짖었다.

 

“쓸데 없는 말 하지마라. 이제 우리와 같은 직급도 아니니깐. 너가 그렇게 건방지게 굴면 나중에……”

 

로타가 그를 말렸다.

 

“그건 됐고, 단장님께서 혹시 내게 남기신 말 없어?”

 

동료의 잔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월마가 말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만 지금 단장님 방에 가셔도 없을 겁니다.”

“뭐 구보라도 뛰러 간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월마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성녀님이…… 단장님을 기도실로 비밀리에 호출한 것 같습니다. 이건 저랑 몬셀이 근무교대 중 본 거라서 아는 사람은 저희들 뿐일 겁니다.”

“…….”

 

성녀가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로 사람을 호출한다.

그런 일은 여태껏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건 세뇌의 영향이었다.

세뇌 상태의 성녀는 교리를 명백하게 지키는 말 그대로 성녀였으니깐.

로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 준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잠깐 쉴려고 했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

 

 

 

로타가 단장의 방에 들어가 그녀를 기다린 지 한참이 지나 침묵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하하하하하하하!”

 

시원한 인상의 그녀가 모처럼 함박 웃음을 짓자 보기 좋았다.

하지만 로타는 그런 엘나르를 보고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뭐가 그리 웃깁니까? 단장님.”

“응? 언제 출소했냐. 더 독방에 틀어박혀있지. 크크크.”

 

엘나르는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집무실 책상을 사이를 두고 로타와 엘나르가 마주 보게 됐다.

 

“성녀님이 무슨 일로 단장님을 부른 겁니까?”

 

엘나르는 로타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새끼들. 내가 못 본 척 하라니깐 기어코 말을 나불거렸군.”

“저와는 친하니깐요. 그들을 나무라지 마세요.”

 

엘나르가 검은색 가죽 바지를 입은 다리를 꼬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팔짱을 끼자 회색빛 상의 한 가운데가 도드라졌다.

언제봐도 대단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독방에 자고 있을 때 꿈에서도 한 번 나왔다. 저 가슴이 말이다….

 

“뭐… 알 것 없다. 이건 죽어서도 무덤 속에 가져가야 할 비밀이라서.”

“비밀 말입니까?”

 

엘나르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나저나 내가 성녀님을 잘 못 봤나보구나.”

“…무슨 애깁니까?”

 

그녀는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네놈은 알 것 없다. 하지만 내가 성녀님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저나이엔 당연한 것인데…….”

 

……

회상이 끝났다.

현실로 돌아오자 자신의 품 안에 흰 성녀복을 반쯤 벗은 아리아가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로타.”

“네.”

“누구인지는 밝히지 못하지만 이번에 성교육을 받아서 말이야.”

“네?”

“……역시 네 품 속으로 파고드니깐 ‘그게’ 커지는 구나. 흐응.”

 

아리아가 바지을 뚫으려 하는 내 몽둥이를 손으로 매만지려 하자 나는 급히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엘나르!!! 그게 웃겨서 웃은 거구나!’

 

속으로 그녀를 저주하고 아리아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 고민했다.

시간이 밤중이라서 그런 걸까? 말투는 노골적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제 세속적으로 이해하고 이용할 줄 안다. 순결을 잃는 것으로 성녀를 집어던지려는 순진한 의도도 간파했다.

창문에는 보름달이 밝고 청명하게 내 방에 있는 우리 둘을 밝혔다.

두 손을 움켜쥐고 눈을 바라보자 황홀하기 그지 없는 아리아의 눈빛 속 너머로 심정이 전달되어온다.

12년의 세월을 송두리째 뺏겼다.

그녀는 성녀가 되기를 거부했다고 했으니 가족의 품에서 교황에 의해 강제로 이곳에 끌려온 것이니라.

가족도 시간도 모조리 뺏기고 남은 것은 억울함과 울분뿐.

그녀가 성녀를 집어던지려는 이 행위도, 신을 저주하는 것도 교황을 욕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나는 숙고했고 숙고했던 문제를 끄집어내기로 했다.

 

“아리아님.”

“…로타. 손 좀 놔줄래? 언제까지 내 뜻을 거부할 거야?”

 

아리아는 웃었지만 눈빛과 웃음은 그저 슬퍼보였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자신을 책임져달라는 말은 결코 허투루 한 말이 아니었다.

갈피를 못 잡는다. 깨어났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 당연하다. 꼭두각시로 살아왔으니.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아님께서 제게 책임져달라는 말… 책임지겠습니다.”

 

그러자 아리아가 반갑게 말했다.

 

“정말이야?! 나 처음인데 처음할 땐 그게 엄청 아프다고 하더라고? 그다음 뭐더라? 월경일에는 임신이……”

 

로타가 고개를 저었다.

 

“그 뜻이 아닙니다.”

“응?”

“노르베트 교황을 제가 죽이겠습니다.”

“……뭐?”

 

아리아의 얼굴이 그 순간 차갑게 식는다.

그녀는 알고 있다. 내 말이 얼마나 무모한 말인지 말이다.

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그는 모든 나라를 수족처럼 부리고 있어. 신앙심을 자신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야. 그의 곁에는 너보다 뛰어난 기사들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습니다. 검을 뻗을 기회조차 없을 수도요. 하지만 아리아님. 지금 제가 아리아님의 순결을 뺏고 성녀를 박탈해봤자 당신은 신성한 육체를 버린 죄로 십자가에 박혀 돌팔매로 죽을 겁니다. 그것이 교리니깐요.”

 

아리아가 듣기 싫다는 듯 소리쳤다.

 

“도망칠 거야! 너랑 같이!”

“불가능합니다. 주변은 온통 도시 뿐이고 보는 눈이 많고 이곳은 특히 잘 훈련된 병사들뿐입니다.”

“그럼 죽으면 돼! 죽어줄 거지? 나랑 같이? 응? 아니면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이상하네… 엘나르는 나 정도되는 외모면 모든 남자들이 기어올 거라고 했는데…… 왜,왜 로타는 매정하게 날 밀어내는 거야?! 응? 날 구해줬잖아! 구해줬으면서 왜 계속 냉정하게! 날 밀어내는 거냐고! 이럴 거면……흑흑…… 이럴 거면 구해내지 말지……이럴 거면…… 흑흑.”

 

아리아는 내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나는 그래선 안되지만 이번만이라는 생각으로 아리아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괜찮습니다. 아리아님. 당신은 지금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울분을 풀어내기에 급급해서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있지 못할 뿐이예요. 해결법은 간단합니다. 잠시만 몸을 추스르세요…….”

“흑흑흑흑… 미안해. 로타. 내가, 내가 제멋대로라서…… 흑흑흑흑.”

 

마음이 아팠다.

내 품에 있는 건 성녀가 아니었다.

갑자기 19살이 되어버린 소녀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나서야 아리아는 겨우 진정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제멋대로였네. 사과할게.”

 

나는 그녀를 쓰다듬던 손을 뗐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노르베트가 곧 돌아온다고 합니다.”

“……정말 듣기 싫은 소식이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성녀님은 내일 거짓된 예지를 하나 받았다고 하면 됩니다.”

“예지?”

“성녀만이 용사를 찾을 수 있다는 예지 말입니다. 수행원은 저와 엘나르 단장으로 하고요.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교황청에서 바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아리아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되면 좋겠지만…… 그게 통할까?”

 

나는 나도 모르게 성녀의 어깨를 차분히 두드렸다.

교리는 이미 몇 번이나 어겼지만 이 사단을 일으킨 가장 큰 죄인은 노르베트 교황이다.

 

“괜찮습니다. 분명 통할 겁니다. 아리아님은 평소 행동 했던대로 표정을 짓고 무던히 말씀하십시오. 감정을 내보이지 마세요.”

“…응. 알았어. 그럼…….”

 

쪽.

아리아가 내 입술에 갑자기 입을 맞췄다.

그녀의 얼굴은 복숭아처럼 급속히 달아올랐다.

 

“구해줘서 고마워.”

“…….”

“구해내지 말라고 했던 말은 취소야. 아니 오히려 로타가 날 구해줘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리아는 눈을 감고 싱긋 웃으며 자신의 가슴 쪽으로 손을 모았다.

 

“난 이 세상이 어떤지 몰라.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어. 로타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아마 여기서 평생 박혀서 살아가고 있겠지. 진실을 알고 구해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 앞으로 난 내 모든 걸 당신에게 맡길 거야. 의존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깐.”

 

아리아가 눈을 떴다.

그 눈은 무거웠다.

 

“앞으로 로타가 하라는 대로 할 거야. 이제 걱정따위 없어. 로타를 믿으니깐. 내일 기대된다. 그치? 이만 가볼게. 내일 내가 무덤덤하게 말해도 상처받지 마? 후후.”

 

아리아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입술에 닿았던 감촉을 슬쩍 만져봤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는 아리아의 말과 그 눈이 신경쓰였다.

뭔가 스위치가 잘못 눌린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나는 잠시동안 떨쳐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