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자칼의 날 0장

"우릴 어디로 쳐 끌고가는 거지?"


자칼이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앞에서 걸어가는 중개인에게 물었다. 중개인은 답이 없었다. 이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벨트 뒤쪽 홀스터에 넣어진 자신의 피스톨을 만지작거렸지만, 제인의 만류로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제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여서,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다름아닌 공동 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공동이 아니라 6대 공동 중 하나인 '렘니안 공동' 안이었으니까.


"주둥아리 쳐 닫고 있지 말고 뭐라도 말해보지? 여긴 씨발 공동 안이잖아, 혹시라도 통수칠 생각이라면 명심해둬야 할게 난 언제든지 당신 대가리 뚫어버린 다음에 똘마니들도 같이 날려버릴 수 있어."


"긴장하지 말게. 당혹스러운 건 나도 안다만 그래도 안전을 위해선 여기가 최선일세."


"공동 안에서 안전 운운한다고? 내 귀가 이상해진건가?"


"곧 이해할걸세.", 중개인이 말했다. "내 말의 의미를 말이야."


자칼과 제인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중개인을 향한 서로의 의심을 품에 안은 채 두 사람은 언제든지 대응할 수 있도록 손을 무기 근처에 올려두었다. 일행은 공동 안을 한동안 돌아다니다가 이내 어느 빌딩에 들어섰다. 자칼과 제인이 이미 알고 있는 빌딩이었다.


"여긴... 발레 빌딩? 설마 여길 본거지로 쓰고 있는건가?", 자칼이 빌딩 겉을 훑으며 말했다.


"일종의 경유지로 쓰고 있는 곳이지. 본거지는 아니야."


"경유지?"


중개인의 말에 제인이 의아해하고, 중개인은 부하들과 함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빌딩 안으로 들어가 희안하게도 아직 작동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일행은, 이내 중간 층에서 내려 어느 문 앞에 섰다. 똑똑, 하며 중개인이 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호는?"


"웃기지 말고 문이나 열어. 나다."


"하, 하지만 정해진 암호대로 문을 두드려야지만 열라고-"


"지랄말고 열어! 내 목소리도 못 알아보는거냐?!"


문지기 남자의 목소리는 젊었다. 아니, 젊다기 보다는 어렸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변성기는 지난 것 같지만, 아직 소년무렵의 어린 티가 남아있는 목소리는 속일 수 없었다. 중개인의 타박에도 문은 열리지 않고 있다가, 이내 중개인의 떡대 큰 부하 중 하나가 문을 발로 차서 거칠게 열고 나서야 자칼과 제인은 마침내 그 안으로 발을 딛일 수 있었다.


"자, 잠깐? 이 두 사람은 누구죠?", 문지기는 중개인을 따라 들어오는 자칼과 제인을 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헬멧으로 가려져 있어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으니 확실히 갖 성인이 된 나이라는 것을 어렵잖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번에 말한 내 고객들이다. 이제 우리 형제가 될 이들이기도 하지... 둘 다 이 신참의 무례를 용서해주게, 보다싶이 융통성이 없는 녀석이라 말이지."


"너 이 자식, 짬도 없는게 암호 운운하면서 우릴 기다리게해?!"


문을 걷어찬 떡대가 문지기의 목덜미를 잡으며 금방이라도 손지검을 할듯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본 자칼이 반사적으로 나서려고 했으나, 제인이 그를 말렸다. 하지만 문지기에게 있어 운 좋게도 뜻밖의 구원자가 다가왔다.


"두 사람이 전에 말한 그 지원자인가?"


묵직한 목소리가 방 한쪽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굵직한 발소리가 리듬감있게 울려퍼지더니, 이내 집채만한 거구를 가진 근육질의 사내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농담이 아니라, 키가 180cm에 가까운 자칼마저도 고개를 크게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엄청난 몸집의 사내, 그가 바로 이들의 보스였다.


"그렇습니다, 보스. 이 두 사람이 저번에 말한 지원자인 자칼과 제인입니다.


중개인이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방금까지 문지기를 때릴 듯 주먹을 올렸던 떡대도 주먹을 내리고 문지기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주변의 일당들이 전부 고개를 숙이자, 제인이 자칼을 향해 눈치를 주듯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생각이 있는 듯,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다시 그 보스를 바라보았다.


"산사자파의 두목, 레이저인가? 이야기는 들었다."


자칼이 그를 올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보스는 그의 손을 잡지 않고 가만히 응시하더니, 이내 헬멧를 열어 찌푸려져 있는 인상을 내보였다. 야수같은 푸른 눈동자와 투박한 턱선, 오른쪽 얼굴에 난 커다란 흉터 하나. 한 조직의 보스라는 걸 증명하듯, 상당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무슨 의미지?"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의 악수지, 보면 모르나?"


"내가 잘못 기억하는게 아니라면, 산사자파에 들어오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걸로 아는데. 보스를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이지는 못할 망정, 손이나 잡자고 하는 건가? 초면부터?"


"초면이니까 이렇게 하는거지, 레이저.", 자칼이 꼿꼿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말을 잇는다.


"난 독립용병이라고, 그것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들이랑 척지고 있던 장본인 말이야. 내 활동구역에서 약을 퍼트리면 내 사업에 방해가 될까싶어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그쪽이 고용한 생쥐 아가씨가 날 잘 구슬려놨거든. 독립용병 생활도 지치는 와중에 타이밍 좋게 제안이 들어왔고, 나쁘지 않다고 판단해서 여기에 온거야."


"그런데?", 레이저가 당당한 자칼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에 자칼은 거리낌 없이 답한다.


"지금 난 이사하려고 어느 집이 좋을까 살펴보러 온 세입자라는 거지. 그리고 내가 계약하기 전까지 난 집주인한테 월세 낼 필요가 없고 말이야. 알아들어? 날 부하로, 적어도 용병으로 부리고 싶은 거라면 적어도 계약은 끝마치고 나서 날 부려먹을 수 있다고. 그 전까지는 우린 남남이고, 서로를 존중해 줄 필요가 있지."


"널 보스라고 부를 이유도, 초면부터 대가리 숙이라는 말에 따를 필요도 없다는 거야, 레이저.", 자칼의 말에 레이저의 인상이 크게 찌푸려졌다.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듯 싶었지만, 자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태도를 고수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인이 되려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해야할 정도로 숨막히는 광경이었다.


주변에 산사자파 일당의 숨통을 조이는 듯한 팽팽한 신경전 속, 먼저 꼬리를 내린 것은-


"...좋아. 첫단추를 좀 잘못 끼운 듯 하군... 사과하지."


-다름아닌, 보스인 레이저 쪽이었다. 그는 마지못한다는 듯 사과를 하며,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 것 같던 레이저가 먼저 기싸움을 멈추자 제인은 당황하며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쳐다보았다.


"산사자파에 어서와라, 자칼. 보기보다 훨씬 강단있는 녀석처럼 보이는군."


"독립용병 중에서 강단 없는 놈 있던가? 아, 저승에는 있을지 모르겠군."


"하, 재밌군."


헛웃음을 지으며 자칼과 제인을 안쪽으로 데려가는 레이저. 그는 중개인을 물린 뒤, 인적없는 한적한 방으로 둘을 데려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쪽이 제인이군, 이 용병을 구슬려준 해결사말이야."


"맞습니다, 보스 레이저.", 제인은 자칼과 달리 한 발자국 물러나, 그에게 존칭을 표하며 저자세로 들어간다. 자칼과 달리 저자세로 임하는 제인의 모습에 그의 인상이 한결 풀어진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이 녀석을 꾀어낼 수 있을까 의심했는데. 이렇게 직접 데려온 걸 보니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 말해봐라.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이 녀석을 꼬실 수 있었지?"


레이저의 말에 제인은 자칼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다음 순간 제인은 장난스러운 듯, 그러면서도 여성미가 넘치는 고혹적인 미소로 그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오는 제인의 모습에 자칼은 속으론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의 등뒤로 자연스럽게 걸어가 허리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그를 감싸고, 꼬리로 그의 오른쪽 허벅지를를 휘감았다.


"만족스러운 사람이죠. 전사로서도, 용병으로서도-", 그의 어깨 옆으로 머리를 빼꼼 내민 제인이 말했다. "남자로서도, 말이죠."


제인의 꼬리 끝이 그의 사타구니를 가르킨다. 그 모습을 본 레이저는 못볼 꼴을 봤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장난스런 웃음과 함께 그에게서 떨어지는 제인, 자칼은 그런 제인을 노려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방법이야 어찌되든 상관 없지. 아무튼, 산사자파에 너희들 같은 실력자들이 들어온다고하니 나로써는 기쁘군. 그 중 한명과는 첫인상이 그닥 좋지 않았긴 했지만 말이야."


"독립용병한테 뭘 봐라나?",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저에게 망설임없이 대꾸하는 자칼. 레이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우리 조직에 들어오려는 이상 내 명령에 따르고 내 부하로서 일해야한다. 자칼, 네가 방금같은 행위를 저질러선 안된다는 말이다. 난 이 산사자파의 보스고, 너희들이 산사자들의 형제가 되고싶다면 무리의 우두머리로 날 인정해야 된다는 그 말이다."


"우리 조건도 잊지 말라고. 제인과 나, 우린 간부 자리에 앉아야겠어. 우리 실력은 이미 다 증명했으니, 간부부터 시작해도 손해볼 건 없을텐데?", 자칼의 말에 제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어받아 말한다.


"자칼의 말에 나도 동감합니다, 보스 레이저. 설마, 저희같은 고급 인력을 단순 졸개로 부리시진 않으시겠죠? 그래서야 너무 수지에 맞지 않잖아요?"


"오늘 뉴스 보셨을거에요, 쓰론 구역에서의 추격전.", 제인의 그 말에 레이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희는 사방에서 쫓아오는 치안국을 따돌릴 수 있을정도로 도주와 은폐에 능하고, 전투력은 말해 뭐하나요? 제가 중개인을 처음 뵈었을 때 자신있게 덤볐던 떡대들을 가볍게 처리했고 자칼은... 말 안해도 아실테죠. 저희는 이미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보였습니다. 같은 짓을 두 번 하는 건 시간 낭비지 않나요?"


"...그래.", 레이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건방지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너희가 아직 증명하지 못한게 하나 있다."


"어머, 그게 뭐죠?"


"충성심.", 제인의 말에 레이저가 망설임 없이 답해준다.


"이곳은 나의 왕국이다. 신하가 되고 싶다면, 충성심을 먼저 드러내야하지. 너희 실력은 훌륭하지만, 너희들 충성심까지 훌륭할지는 모르지. 그러니, 내가 내리는 임무를 수행한다면 너희들의 충성심을 믿고, 곧바로 간부의 자리에 앉혀주도록하지. 산사자파에서 이제껏 없던 파격적인 제안이다."


"호? 그 임무가 대체 뭐지?", 자칼이 눈빛을 번뜩였다. 레이저는 이에 두 눈동자에 분노를 불태우며 답했다.


"산사자파가 치안국 내부에 심어놨던 내통자들이 대부분 발각돼서 더 이상 치안국의 동태를 파악할 수 없게 됐다. 우리 숨통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사업장도 줄줄히 발각되고 있는 실정이지. 등잔 밑이 어두운 줄도 모르고 헤매고 있던 치안관 놈들한테서 이제는 우리가 숨죽여 숨어있자니 속이 뒤집어지더군."


레이저는 핏줄이 돋아난 굵은 팔뚝 아래 있는 커다란 손을 주먹 쥐었다. 돌덩이를 쥐어주면 그대로 박살낼 수도 있을만큼 보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악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이 분노로 떨려오는 것을 보자 자칼이 말한다.


"그러시겠지. 본론을 말하자면?"


"치안관 한 놈을 잡아와. 이번에는 반드시 산 채로!", 레이저가 언성을 높혔다. "우릴 우습게 보면 치안국이든 뭐든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모두에게 보여주겠어!"


"스너프 비디오 찍으려고 하세요?", 제인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레이저가 정정한다.


"아니, 이건 경고다. 치안국 놈들한테 우리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고 하는 경고! 그러니, 너희들이 충성심을 보여서 간부의 자리에 앉고 싶다면 치안관을 잡아오도록 해! 이건, 명령이다!"


강압적이기 그지없는 말투에 두 사람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 없이 눈동자 사이로 대화가 오가고, 이윽고 둘은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말한다.


""Yes, My boss.""


두 사람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는 모습을 레이저는 만족스레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특히, 방금 전까지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던 자칼이 고개를 숙인 것에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좋아... 아주 좋아... 우리 계약은 성립됐다고 봐도 되겠지, 자칼?"


"물론입니다, 보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자칼에 이어 제인이 답한다.


레이저는 비열한 미소를 입에 담았다.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여준 그는 이내 두 사람을 데리고 어느샌가 모여있는 부하들 앞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그 뒤를 따라가며, 자칼은 레이저가 만졌던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털었다.


"모두 주목!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다. 나 레이저가 이끄는 산사자파에, 우수한 인재들이 새로운 형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독립용병 '자칼' 과 해결사 '제인 도' ! 이 둘은, 앞으로 우리 산사자파의 부흥에 큰 도움을 줄 것이며, 머지않아 그 충성심을 증명해 간부가 될 것이다."


"모두 새로운 형제들의 탄생을 축하하라-!", 레이저의 말에 산사자파 일당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소리를 드높혔다. 비록 마피아라고 할지언정, 확실히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레이저는 이내 그들을 진정시킨 뒤, 부하 한 명에게 조직에 대해 둘을 안내해달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자칼에게 속삭였다.


"네가 사업장을 불태운 장본인이라는 건 말하지 마라. 나랑 중개인 빼곤 여기있는 녀석들은 네 정체를 모르니까."


"기꺼이 그러죠.", 자칼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레이저가 사라진 뒤, 두 사람 곁으로는 산사자파의 일원들이 다가와 온갖 질문을 해왔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부터, 무슨 일을 했길래 보스가 그들을 간부로 승격시키겠다는 말을 하냐는 것과, 좋아하는 술과 주량은 어느정도냐는 말까지.


자칼은 둘러쌓인채 질문을 받는 것을 질색했지만, 그래도 잠입 중이니 지금은 그들 사이에 녹아들어가야 했다. 그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들의 질문에 답해주었고. 제인은 이런 일이 여러번 있었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로 그들의 질문을 받아쳐주었다.


"...흠?"


애써 피곤함을 무릅쓰고 질문에 답하고 있던 자칼의 시야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다름아닌 산사자파의 일당 사이로, 아까 보았던 문지기가 중개인의 부하인 떡대들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자신을 둘러싼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 발걸음을 옮겼고, 떡대들을 따라 구석진 곳으로 향한다.


"너 이 자식, 요즘 건방지게!"


"커흑...!"


떡대가 문지기의 배에 주먹을 내다꽂았다. 커다란 주먹이 복부를 치자 문지기는 버틸 기운도 없이 그대로 무너져내렸고, 그런 문지기를 다른 떡대가 걷어차며 벽으로 날렸다.


"신참이라고해서 언제까지고 봐줄 줄 알아?! 선임 목소리는 기억해놓고 문 밖에서 '나다' 하고 말하면 곧바로 문을 처 열어야 될 거 아니야!"


"크흑... 죄,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보스 명령이라-"


"내 명령은 말 같지도 않다 이거야!?"


문지기의 얼굴을 걷어차는 떡대.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다른 떡대는 낄낄대며 비웃고, 걷어차이며 헬멧이 날아가 문지기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갈색 투블럭 아래 홀쭉한 뺨과, 어른이라는 걸 애써 증명하려는 듯한 턱 아래의 수염, 날을 세워보여도 여전히 둥근 눈매까지. 소년 시절의 어린티가 남은 모습이었다.


문지기는 맞으며 터진 코피를 손으로 막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다음에는 더 잘할게요...!"


"다음다음! 도대체 어느 다음에 할 건데!? 너 이 자식, 고아로 나고자라 학교도 제대로 못 나와서 대가리에 든 것도 없는거냐!? 제 할일도 못하는 놈따위를 우리가 형제로 인정할 것 같아!?"


떡대가 문지기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리며 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짚는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강한 한방을 날리려고 주먹을 뒤로 당기고 그걸 본 문지기가 기겁하며 두 눈을 질끈감는 순간-


"그쯤하지?"


떡대의 주먹을 붙잡으며 자칼이 어느샌가 그들의 뒤로 다가와 있었다. 두 떡대는 당황하며 갑자기 나타난 자칼에 당황하고, 문지기는 떡대의 손에서 풀려나 바닥으로 떨어진다. 문지기를 붙잡았던 떡대가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오늘 들어온 신참이잖아? 지금 이 형님이 후배 교육 중이니 오지랖말고 가서 쉬고 있어."


"여기가 무슨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라도 되는 줄 아나? 잘못은 지적하고 고쳐야 마땅하지만, 왜 쓰잘데기 없이 폭력을 쓰면서 굳이 어려운 방법을 고집하나?"


"그리스? 스파르타? 뭐야 그게?"


"어쨌든, 우리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신참.", 다른 떡대가 말했다. "네 갈길 가. 이 녀석 버릇을 좀 고쳐주려고 할 뿐이니까."


하지만 자칼은 물러서지 않았다.


"듣자하니, 문지기는 보스의 지시를 따랐을 뿐인데... 그럼 잘못이라고 할 게 없는거지. 근데 너희들끼리 잘잘못을 따지면서 애를 죽여패려는 건지 모르겠군."


"뭐라고!?"


"굳이 그게 잘못된 것 같으면 보스를 직접 찾아가서 보안 절차가 까다롭다고나 하소연해 볼 것이지, 왜 말단 꼬맹이 하나를 붙잡고 힘을 빼냐는거지. 아니면 뭐야, 설마 직접 보스에게 직접 찾아가서 말하기는 무섭다고 아무런 힘 없는 꼬맹이한테 힘자랑이나 하고 있던 거야?"


"너 이 새끼, 신참 주제에 말 다했어?!"


신경을 살살 긁어놓는 자칼의 말에 두 떡대는 격분하지만, 자칼의 입은 멈출 줄을 모른다.


"내가 틀린 말 했나? 내 말에 논리적으로 틀린 부분이 있다면 근거와 이유를 들어 반박이나 할 것이지, 왜 화부터 내는거지? 아, 설마 둘이 성인 ADHD인가? 그런 거라면 너무 걱정 마. 사실 청소년기때 ADHD를 앓으면 대부분 성인 시절까지 이어지기 마련이거든. 부끄러워할 거 없어. 보기보다 흔한 질병이니까 말이야. 보스한테는 내가 잘 말해서 너희 둘을 각별히 케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줄게."


"이 씨발 새끼가 보자보자하니까!", 결국 떡대 중 한 명이 자칼의 도발을 참지 못하고 격분한다. 아까 전 문지기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의 멱살을 붙잡았고, 그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위압적으로 가져다댔다.


"보스가 간부 운운하니까 아주 위아래도 없나본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네 선임이다! 아가리 간수 똑바로 안 하면 앞으로 나 볼 때마다 아주 불편하게 만들어주겠어, 알겠냐-!?"


위협적인 목소리가 방에 울려퍼졌다. 다른 떡대는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자칼이 당할 꼴을 기대하며 비웃고, 쓰러진 문지기는 걱정스레 자칼을 쳐다보았다. 떡대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내 몸에, 손대지 않는 게 좋을거야.", 자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떡대가 코웃음을 치며 답한다.


"그래? 안 그러면 뭐?"


"멱살 잡는 거 보아하니 왼손잡이 같은데, 안 그러면 내가 널 강제적으로 오른손잡이로 '교정' 시켜줄 수 밖에 없거든."


"교정? 하! 교정이라..."


"네 치아 교정기나 찾아봐 이 씨발놈아-!!!", 멱살을 붙잡은 떡대가 자칼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그걸 본 문지기의 눈동자가 커지고, 다음 순간-


자칼의 멱살을 붙잡았던 떡대의 팔이, 기괴한 각도로 꺽여 있었다.


"...어...?"


눈에 보이는 광경에 떡대는 순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샌가 자기 손에서 풀려나 차가운 눈빛으로 자길 바라보는 자칼과 함께, 그 팔을 통해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가장 끔찍한 고통이 온 신경을 덮쳐오자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떡대가 뒤틀린 제 왼팔을 붙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떡대는 제 팔을 부여잡으며 쓰러졌고, 옆에서는 문지기와 다른 떡대가 당혹스런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 비명소리에 모여든 산사자파의 일당들이 그들의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 사이에는 제인 또한 있었다.


자칼은 묵직한 발걸음 옮겨 쓰러진 떡대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 위로 자신의 오른 다리를 올려 무게를 실었다. 평범한 살과 뼈가 아닌 더 단단한 무언가로 만들어진 오른 다리를 고통 속에서 느낄 수 있던 떡대에게, 이윽고 자칼이 무게감있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읊어주기 시작한다.


"말했잖아. 오른손잡이로 '교정' 시켜 준다니까... 내 말을 듣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조용히 해결했으면 애당초 이런 문제 안 생겼을거잖아."


"안 그래?", 자칼의 눈동자가 다른 떡대에게 향하자 그는 곧바로 굳어버린다. 헬멧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순간 발동된 눈동자 덕분에 자칼은 두 사람이 느끼는 공포의 색을, 그 검은색을 볼 수 있었다.


"들어라!", 자칼은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산사자파의 모두에게 전하듯 목소리를 높히며 몸을 돌렸다. 모여있는 산사자파 일당을 마주보는 자칼, 그가 말했다.


"난 너희들 같은 밑바닥이랑은 달라. 왜냐면, 그 밑바닥에서 겨우 올라와서 독립용병이 된 거거든. 너희들이 겪었고,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을 모든 건 내가 이미 경험해 본 거다! 나는 그 시궁창에서 단신으로 올라와서 혼자 전설이 됐고, 지금은 바로 너희들 앞에 이렇게 당당하게 서 있다! 너희들 모두 보다야 내가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앞으로 이따위 지랄 집어쳐!"


"또 내 앞에서 혹시라도 그 따위 시덥잖은 힘자랑을 하고 싶은 놈이 있거든-", 그가 자신의 굵은 허벅지를 앞으로 내밀며 힘을 주었다. 그러자 널널하게 맞춘 전술 바지 너머로도 그 우람한 근육이 다 드러났다. 그것이 위협이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내가 기꺼이, 상대가 되어주마. 프로의 싸움이 뭔지 제대로 가르쳐주지."


"히이익...!"


쓰러진 떡대가 기겁을 하고, 그 선언을 들은 산사자파의 일당 모두가 얼어붙는다. 일부는 헬멧을 벗고 맨 얼굴을 보이면서 경의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기도 했다. 제인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채로 그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고, 그 사이 그는 쓰러진 문지기를 일으켜준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선 문지기는 두 눈동자에 존경어린 마음을 담아 그에게 미소띈 얼굴로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자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 없이 문지기를 쳐다보고 있다가, 등을 돌려 그에게서 떨어졌다.


"제인, 가지. 돌아가서 계획을 짜보자고."


"음? 아아, 그래."


"보스한테 오늘은 이만 돌아간다고 전해라.", 그가 산사자파의 말단 중 하나에게 말했다. "명령을 수행할 계획을 짜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이지. 연락처는-"


"아, 알겠습니다. 보스께는 제가 알리겠습니다. 여기 캐럿-"


"따로 챙겨뒀다. 그럼 이만."


그렇게 두 사람은 빌딩을 나가, 공동의 거리를 걸었다. 주변에는 에테르 수정들만 가득할 뿐, 에테리얼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평화로운 풍경. 걷는 동안 자칼은 말이 없었고, 제인은 그런 자칼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당연하게도, 그 눈빛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자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뭘 말하고 싶어서 그리 입이 근질거리나?"


"그냥. 아무것도... 방금 전에 진짜 짐승같았구나 싶었어. 솔직히 당신은 평소에는 조용한 남자잖아? 그런데 갑자기 그런 박력넘치는 모습을 보여줘서 솔직히 놀랬달까?"


"짐승 새끼들 사이에 끼어들려는데 짐승 가죽 뒤짚어써야지 어쩌겠어. 짐승들 세계에선 기싸움에서 지면 곧바로 밀려나니까 약하게 보일 수야 없지. 어때, 좀 악당같아 보였나?"


"100%, 너무 악당같아서 반해버릴 정도였어."


"취향 참 안 좋네. 어쨌든, 고생했어. 이제 배후를 밝혀냈잖아. 파우스트가 남긴 말 덕분에 우리가 언질해주지 않아도 치안국에서도 벌써 조사가 시작됐을거고. 녀석들이 잡히는 것도 이제 시간 문제겠군."


"하지만, 저 발레 빌딩조차 경유지라고 말하는 걸 보면 본거지는 따로 있다는 얘기야. 본거지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계속 숨어있을 틈을 주게 될텐데, 어떻게든 본거지로 들어갈 방법을 알아내야 해."


"좋아. 작전 짜면서 그것도 생각해보자고."


"근데 그 전에, 중요한 물음거리가 있는데 말이야.", 자칼이 발걸음을 멈추고 제인을 바라보았다. "진짜, 중요한 질문이야. 솔직하게 답해.", 눈빛에서 풍겨져오는 무거운 분위기를 느낀 제인이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가 무슨 질문을 할 것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계획을 논의할 은신처도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는 말이다.


그녀가 마른 입술을 혀로 햝았다. 그 눈빛에 목이 바짝 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에일이랑 라거, 둘 중에 뭐가 좋아?"


다음 순간, 제인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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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하니 맥주를 싫어할 줄은 몰랐네.", 자칼의 은신처 안. 제인이 편의점에서 사온 음료수와 보드카를 섞은 칵테일을 마시며 말했다. 푸른색 칵테일이 그녀의 손 위에서 찰랑거렸고, 자칼은 그와 반대되는 붉은색 칵테일을 자기 앞에 둔 채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칵테일에선 딸기 향이 풍겼다.


"난 탄산있는 건 대부분 싫어해. 마실 때는 목 아프고, 마시고 난 뒤에는 속에 거품끼고, 더부룩해서... 그게 난 싫더라. 그래서 탄산음료도 입에 안 대지. 술도 목넘김이 부드럽고 거품 없는 걸로 마시고."


그렇게 말한 그는 살짝 드러난 복면 아래 입으로 자신의 칵테일을 한모금 마셨다. 입안에서 퍼져나가는 딸기향을 느끼며 그는 술의 온기가 몸 안으로 퍼지는 걸 느꼈다. "후-", 하며 열기어린 한숨을 내뱉는 자칼. 그 모습에 제인이 웃었다.


"약속은 꼭 지키는 남자구나, 당신? 솔직히 말하면, 쓰론 구역에선 분위기 풀려고 농담한 건 줄 알았거든."


"난 약속은 꼭 지켜. 난 용병 쓰레기일지라도 나름대로 선은 있다고. 게다가 고비를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너무 일만 하다보면 무리가 가기 마련이야. 이렇게 긴장을 풀 수 있는 상황도 있어야 컨디션이 유지될 수 있잖아."


"어머, 섬세해라. 나 감동받았어. 그래도, 솔직히 데이트 신청 했을 때 난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한 잔 하자는 건 줄 알았거든. 샴페인 잔을 서로 부딪치고, 실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뭐, 알다싶이 뜨거운 밤을 보내는거지."


"헛소리. 우린 지금 쓰론 구역에서 벌인 일로 1급 수배 상태일 걸? 지금 쯤이면 전단지가 사방에 붙어 있을텐데, 그런 상황 속에서 팔자좋게 호텔을 찾을 순 없는 노릇이지. 이 일이 끝난 뒤면 모를까."


"그래줄래?", 제인이 웃었다. "어디까지나 술만 사는거다.", 자칼 또한 드러난 입가에 미소를 걸치며 칵테일을 마저 마셔버린 뒤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잠깐 멍하니 있는가 싶더니, 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범죄행동학 전문가라고 했지? 치안국이 외부 고문을 고용해서 갱단에 잠입시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는 건 네가 처음이야."


"첫경험을 내가 가져가 버린거네? 기분이 어때, 흑기사 씨?"


"헛소리.", 자칼이 말했다. "네 일에 대해 조금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말이야. 답해줄건가?"


"글쎄, 당신하는 거 봐서."


"술김에 농담 따먹기 하는 거라고 생각하자고. 고급 호텔에서 샴페인을 터트릴 순 없지만 그래도... 수제 칵테일을 들이키면서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 순 있잖아?"


제인의 말을 인용하며 반격하자 한방 먹었다는 듯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항복을 선언한다.


"그래, 알겠어 흑기사 씨. 묻고 싶은게 뭔데?"


"힘들지 않나?"


"하, 독립용병한테 그런 소리를 듣다니-"


"난 잠입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야.", 그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깔렸다. "당신 인생에 대해 말하는 거라고."


자칼의 말에 제인은 순간 얼굴을 굳혔다. 이내 다시 미소를 띄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자칼의 눈에 엿보인 그 광경을 지울 수는 없었다.


"우리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조금 무드가 부족하지 않은가 싶은데..."


"말하기 힘들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난... 궁금했거든."


"제인 도... 그거 진짜 이름 아니잖아?", 그가 말했다. "신원미상의 여성을 임시로 지칭할 때 쓰는 이름이지. 그리고 당신은 스파이고. 그렇다는 건, 자기 일을 위해서 본명도 포기했다는 소리인데... 힘들지 않나?"


"왜 힘들거라고 생각해?"


"아무도 당신을 기억해주지 못하니까."


"그건... 외롭고 힘든 일이지.", 제인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방심했던 순간에 곧바로 정곡을 찔려버린 기분이었다. 그의 복면 너머의 그 눈동자는 진지했고, 방 안의 공기에는 무게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자칼은 다소 성급했다고 판단했는지, 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 조금 성급했던 모양이네. 굳이 말 안해줘도 돼. 그냥 술김에-"


"아니, 당신 말이 맞아.", 제인이 말했다.


"이 일은... 당신 말대로 무척 외롭고 힘든 일이야. 어떤 사람의 곁에도 오래 있을 수 없고, 위험에 처하더라도 도움을 바라는 것도 힘들어. 참 고독한 일이지... 어떤 의미에서는, 독립용병인 당신이랑 같은 처지야."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때려칠까 고민도 많이 했어.", 제인의 말에 자칼이 조심스레 묻는다. "근데 왜 계속하는거지?"


"나도 모르겠어. 그냥... 그냥 내가 좀 힘들어하는 걸로 평범하고 죄없는 사람들이 조금 더 안전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그 사람들이 밤마다 안심하고 잘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더라. 그 모습을 보면, 그만둘래야 쉽게 그만둘 수가 없어져... 무슨 저주같이 난 옭아매지."


"그래도 여전히 혼자있는 밤마다 옆구리가 시리긴 하지만.", 제인이 분위기를 환기시켜보려고 장난스레 말하긴 하지만, 자칼은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묘하게 달라붙는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자칼은 지금 이 순간, 약해진 그녀의 모습에 잠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니, 보다못한 제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뭐라도 말 좀 꺼내봐. 나만 부끄러운 이야기하게 해놓고 가만히 있을 생각이야?"


"미안, 그..."


"이봐, 제인 그냥... 그냥 이거 알아뒀으면 좋겠어.", 자칼이 미간을 한번 짚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존경할만한 여자야. 당신이 하는 일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고귀한 일이라고. 넌 조금 더 나은 삶을 잘 자격이 있어. 자기 행복을 찾아서 제 갈길 가도 아무도 뭐라할 수 없다고."


"아, 칭찬 고마워. 한번씩 들었던 말이야-"


"알아, 하지만...!"


"제인, 넌 나랑 달라.", 그 말에 제인이 자칼을 쳐다보았다. "넌 결코 독립용병이랑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이야. 난 돈을 쫓는 용병이지만 넌 영웅이라고,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혼자 짊어지고 있잖아. 나랑 비교하면서 우울해질 필요 없어. 넌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니까!"


제인이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고, 그때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 한구석에선 석연찮았던 대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무언가가 달랐다. 그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달랐다. 비록 복면으로 가려져 있어도 그의 눈빛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설령 당신이 이제껏 만난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몰라 볼지라도... 내가 반드시, 반드시 당신을 기억해둘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이 앞으로 무슨 이름과 모습으로 있더라도 절대로 당신을 잊지 않을게. 이 뉴 에리두의 영웅을, 제인 도라는 여성을 내가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게."


"약속해. 당신을 찾을게.", 그의 모습에 제인은 마음 한 구석이 뜨거워졌다. 결코 장난스럽지 않은 감정이 마음 한구석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자칼은 낯뜨거운 발언을 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자기 얼굴을 매만지면서 손사래를 친다.


"그... 좀 부담되는 말이었나?"


"아냐, 아냐... 그, 자주 들었던 말이야. 하지만..."


"...고마워, 흑기사 씨.", 제인이 그와 눈을 마주보며 웃었다.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자칼은 뒷목을 쓰다듬으며 애써 그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그 모습 참 귀엽게 느껴지는 제인이었다.


그렇기에, 꼭 해줄 말이 있었다.


"하지만, 날 위로해주려고 너무 스스로를 깍아내리려고 하지 않아도 돼."


"무슨 소리야?"


"저번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제인의 그 말은 창고에서의 첫만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맨틱하지도 않고, 따지고보면 엄청 살벌했던 첫 만남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짧지만 함께한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돌아보니 조금 어이가 없기도한 자칼이었다.


"그래. 어떻게 잊겠어."


"저번에 당신 말대로 난 당신의 뒤를 한동안 조용히 밟았어. 당신 정체를 알아내는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당신이 그 옷을 입고 어둠 속에서 자기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지.", 그 말에 자칼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건채, 말을 이어나간다.


"우리 주연 팀장님... 그 사람이 일을 하러 나갈 때마다 당신은 그 사람의 부모의 뒤를 쫓아다녔어. 먼 건물에서, 그림자 사이에 스며들어 조용히. 처음에는 협박거리를 찾으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두 사람을 지켜주려고 한 거였더라?"


제인의 머릿 속엔 건물에 숨어 주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시하는 자칼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에 수상한 자는 없는지, 무기를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장보는 루트에서 평소와 다른 점은 없는지. 낮에는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지켜보고, 밤에는 마약의 배후를 쫓아 사업장을 부수기 바쁜 그였다.


"난 당신 앞에 나타나기 전에도 당신이 누군지 알았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협조 중인 치안관이라고 한들, 그 사람 부모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까진 하지 않을 거잖아?"


"그 둘은 사건이랑 아무 관계가 없었으니까.", 자칼이 말했다. "게다가 부모가 잡혀서 그걸로 협박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치안관 나리랑 내 공조도 무너질 거였으니, 사전에 차단해두고 싶었을 뿐이야."


"정말로 그게 다야? 뭐 더 숨기는 거 없어?"


"뭘 숨긴다는 거야.", 자칼은 뻔뻔하게 말해보지만 제인은 범죄행동학자.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따져들고 분석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 여성을 상대로 뭔가를 숨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신은 모르나본데, 당신이 뭔갈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면 오른쪽 새끼 손가락이 떨려."


제인의 말에 자칼이 다급히 자신의 오른손을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 작게 경련하듯 떨리고 있는 새끼손가락. 그는 서둘러 왼손으로 오른손을 붙잡아 그것을 감췄지만, 이미 제인에게 들켜버린 뒤. 그는 제인을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면서 복면을 내렸다. 그의 입가가 가려지고, 말을 꺼낸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알겠지?"


"...당신이 좋아하는 그 치안관 나리한테도?", 주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칼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음... 나는... 그러니까... 음..."


운을 어떻게 땔지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한 자칼.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제인이 미소를 지었고, 잠시 뒤 마침내 그가 첫 마디를 내뱉는다.


"나한테는 여동생이 하나 있거든."


"여동생?"


"그래. 이제 18살이 된 아이인데... 우린 제로 공동이 폭주할 당시에 부모를 잃었어. 그 당시 수두룩하게 생겨난 시대의 고아들 중에 하나였지. 그때 그 아이는 고작... 여섯 살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


"나는 그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키웠어. 마치 아버지가 제 친딸 키우듯.", 제인은 자칼의 복면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나약하고 부드러운 모습이라니.


"그 아이는 나와 달리 착하고 평범한 아이로 커줬고... 나는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 내가 한 일들 중에서는 가장 자부심이 드는 일이었지."


"...그래서 팀장님 부모님을 지켜주려고 한거야? 부모를 잃어버리는 마음을 당신이 알아서?"


"아마도...", 자칼이 스스로도 확답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어중간한 답변에 제인이 의아해했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무언가를 숨길 기색도 없이, 피곤에 찌든 기운이 잔뜩 묻어나왔으니까. 마치 체념이라도 한듯한 말투였다.


"난 그 애가 이제... 어디 좋은 대학 같은데나 가주길 바랬는데... 친구도 사귀고 평범하게 살면서..."


"그랬는데 말이야...", 말을 잇지 못하는 자칼. 그는 양손을 깍지 낀 채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고개를 저으며 눈 앞에 아른거리는 광경을 애써 지우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에선 고통이 묻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자 제인은 측은한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말하기 힘들다면, 굳이 꺼내지 않아도 돼."


"어느 날 밤이었어...",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분위기 때문에 차마 입을 닫을 수 없던 것일까. 자칼은 물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그날 있었던 끔찍한 악몽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고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어... 아랫층에서 난 소리였는데... 그게 내 동생 목소리였어. 난... 난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갔고, 거기에 가보니까 그 아이는... 그 아이는 피 흐르는 손을 부여잡은채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 눈이 풀린 남자가 손에 칼을 든 채로 서 있었어..."


제인을 말을 잃었다. 그의 목소리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목소리의 균열은 커져만 갔다.


"난... 난 그 뒤가 잘 기억이 안나... 그냥 시야가... 시야가 새까매져서... 온몸이 뜨거웠어... 정신을 차려보니, 난 바깥에서 치안관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동생은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어. 칼을 들었던 그 남자는... 그 남자는 피투성이가 돼서 구급차에 실려갔고..."


"...자칼."


"후우... 후우...", 그는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총탄에도 칼날에도, 몽둥이에도 굴하지 않던 그가 겨우 한 여자아이 때문에.


잠시 뒤, 그는 겨우 평정심을 되찾은 것인지 떨리는 목소리를 나름 안정시킨 채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나중에 들으니 그 남자는 마약에 취해 있었어... 산사자파 놈들이 뿌리고 있던 그 마약에..."


"그래서 이 일을 시작했구나.", 제인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그 애가 다치기 전엔 세상의 종말이니 어쩌니, 그딴 건 신경 안 썼어. 이 형편에 그냥 동생만 잘 살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지. 애가 대학 졸업하면 그냥 독립용병이건 뭐건 다 때려치우고 평범한 일하면서 살려고 했는데..."


"그 애가 피를 흘리자 그제서야 깨달았지. 내가 총을 손에서 놓쳐선 안될 이유를 깨달았어.", 그가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팔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여기있는거야, 제인. 난 그 애가 평범하게 살았음 좋았으니까. 그 애는 내 유일한 가족이니까, 그리고 가족은... 가장, 중요하지."


그의 말을 듣고있던 제인은 무어라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위로를 하든, 그가 지고 있는 짐을 함께 짊어질 수는 없으니까. 그가 독립용병인 이상, 그가 정체를 숨기는 이상은.


"...그런거야. 가족이 제일 중요하다, 뻔한 이야기지."


"뻔하다고 해서 가볍다는 건 절대 아니야.", 분위기를 해소시키려는 듯 애써 자신이 짊어진 짐의 무게를 가벼히 말하려는 그에게 제인이 반박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아 어루만졌다. 그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지만, 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두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내가 그 끝을 보게 해줄게. 이 일의 끝까지 같이하는거야."


"...고마워."


포개진 제인의 손 위로 그 또한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 손으로 서로의 온기와 진심이 오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밤은 그렇게 깊어져갔고, 두 사람의 관계 또한 한층 더 깊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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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해, 섹스는 안 했거든."


"안 궁금해!", 제인의 말에 니콜이 외쳤다. 여전히 제인이 불만스러운 듯 날선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는 엔비와 네코마타. 빌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하는 듯 하품을 내지른다.


그 모습을 본 제인은 웃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 슬슬 오늘 이야기를 끝내야 하는 순간이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이제 집에 돌아가서 잠깐 눈 좀 붙이고 오도록 해. 내일은 나도 일이 일찍 끝나니, 오후 1시 이후에 찾아오면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줄게. 이제 얼마 안 남았거든."


"후우... 정말 3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어떻게 나는 여지껏 모를 수가 있었지?"


"너무 자책하지 마, 분홍머리 아가씨. 원래 자기 관심 밖의 일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게 사람이니까."


"이봐, 생쥐 스파이. 그쪽은 그 바보랑만 알지 몰라도, 난 그 바보 동생이랑 친구 사이였다고! 못해도 2년 전부터는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그 녀석은 나한테 그때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어! 그냥...!"


"젠장, 머리가 어지러워...!", 머리를 숙인 채 양손으로 감싸는 니콜.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엔비의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위로해주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책어린 눈동자를 지울 수 없었다.


니콜은 벨의 절친이었다. 그렇기에 서로 만날 때마다 투닥거리면서도 바보처럼 웃을 수 있었는데,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 화가 나고 한심했다. 게다가 여지껏 와이즈는 그 일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녀와 친해지기 전부터.


'그 녀석이랑 가까워졌다고 느낀 건 정말 내 착각이었던 걸까?'


저번에 물은 질문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는 니콜. 하지만 그런 니콜의 어깨 손을 올리고 뼈 있는 한마디를 날린 것은 엔비나 네코마타, 빌리가 아니라 다름아닌 제인이었다.


"설령 당신이랑 그 사람이 가까워졌다고 한들, 그 사람이 바른대로 있었던 일을 말해줬을 것 같아?", 제인의 말에 니콜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절대로 말 안하겠지. 널 걱정시키고 싶게하지 않았을테니까."


"그런 남자라고, 흑기사 씨는."


제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있던 소파로 돌아가 풀썩, 주저앉는다. 그 모습을 본 엔비는 이야기의 끝이 다가올 수록 그녀의 낯빛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던 것을 눈치챈다. 그녀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그 순간, 제인이 한 말을 떠올렸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거, 해피엔딩은 아니야.'


그 결말까지 이 이야기를 들으려고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옳은 일인가 엔비는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모두의 관심은 이 이야기에 집중되고 있었다. 설령 그녀가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있지 않겠지. 게다가, 엔비도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 또한 자칼... 와이즈의 친구로서 이야기의 끝을 들어야만 했다.


"...니콜."


"하아... 일단, 모두 돌아가자. 내일 이 이야기에 끝을 보자고."


니콜의 말을 따라 교활한 토끼굴은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방을 나가 교활한 토끼굴의 아지트로 향한다. 모두가 나간 뒤 제인 혼자만이 남은 방, 그녀는 그 날 자칼과 함께 했던 밤을 떠올렸다. 그때는 커피 대신에 칵테일이, 설탕과 우유 대신 안주거리가 테이블에 놓여져 있었다.


'당신은 고기 냄새가 싫다면서, 마른 야채 같은 걸 씹어댔지.'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인에게 있어 그 순간은 추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홀로 있는 이 순간이 괴롭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놓치지 말걸, 있는 힘껏 대시해서 함락시킬 걸.


그녀는 양다리를 품에 안고 그대로 고개를 다리 사이에 파묻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걸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건지,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는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었다.


밤이 점점 깊어졌다. 이야기의 엔딩에 닿기 전의 마지막 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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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