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자칼의 날 0장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자칼이 청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문 근처 벽에 기대서 복도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주의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오면 곧바로 알아차려 상황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네가 나한테 뭘 물어보는 건 처음이네.", 청의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뭔데?"


"협력 중인 와중에 할 말은 아니겠지만... 뭐랄까, 넌 나에 대해 유독 처음부터 우호적이였지. 안 그래? 주연은 처음 만났을 때 날 경계했지만, 넌 그러지 않았어. 그때 널 도와준 상황과 치안국의 내통자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더라도,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군."


"날 그토록 믿은 이유가 뭐지?", 자칼의 말에 청의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마치 호기심 많은 어린 손자에게 물음을 받아 답을 해주려는 할머니의 모습과 비슷했다. 실제로도, 그녀는 할머니에 가까운 나이였고 말이다.


"오래 살다보면... 사람이 어떤 눈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대충 알게되지. 심지어 오토마톤처럼 기계 공정으로 만들어진 존재일지라도, 그 사람의 눈을 보게 된다면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거야."


"연륜에서 오는 눈썰미로 내가 뭐하는 녀석인지 알아차렸다, 뭐 그런 얘긴가? 나이가 많다고 자백하는 걸 엄청 돌려서 말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오토마톤 어르신."


"건방지네. 이 어르신에게 예의를 갖추렴 얘야."


청의가 반쯤 놀리듯이 받아치자 자칼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농담에 웃은 것과는 별개로, 아직 그는 납득하지 못한 듯 고개를 저었다.


"진지하게 좀 말해줘. 이 일이 끝나면 두 번 다시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르는데, 정답을 모르는 채로 계속 혼자 생각하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온다고."


"이 일이 끝나면 떠날 생각이야? 의외네."


"왜 의외라고 생각하는데?", 자칼의 물음에 청의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주연이 있잖아. 네가 주연의 곁을 떠나리라곤 생각할 수 없는데 말이야."


청의의 말에 자칼은 흠칫하며 그녀의 시선을 스리슬쩍 피한다. 하지만 청의는 이미 그것을 눈치채고 그를 지그시 쳐다보기 시작했고, 자칼은 뻘쭘하게 물었다.


"...주연이... 그, 말했나?"


"스모크하게 풍겨오는 담배향이 잊혀지지 않는다던데. 주연과 네 건강을 위해서라도 담배를 끊는게 어때?"


"크흠... 흠!"


복면에 가려져 있어도 그의 얼굴이 그녀의 말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한눈에 보였다. 청의는 짓궃게 웃고, 자칼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잇는다.


"아무튼 간에, 빨리 대답해. 왜 날 그렇게 믿는거지? 네 말처럼 우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남이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내심 널 경계하긴 했지. 솔직히 너도 거울로 스스로를 보면 알겠지만, 그 차림의 남자를 의심하지 않는게 더 이상하잖아?"


"그럼 왜...?"


"10단지, 그 구질구질한 아파트에서 주연이 못씁 짓을 당하려던 순간 끼어들었잖아? 만약 단순히 네가 자신만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거라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지. 위험해지니까."


"그건...", 청의의 말에 자칼은 흠칫 몸을 떨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목소리가 왠지 낮아져 있었다.


"그럼 내가 그 둘을 죽이는 걸 봤을텐데... 그걸 보고 믿는다고?"


"그거야."


"아니, 대체 무슨-"


"둘을 죽였다는 걸 기억하고 있잖아.", 청의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거든."


그녀의 말에 자칼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청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제 의견을 이어서 말한다.


"죽인 사람을 기억하고, 그 둘을 죽인 걸 회피하지 않고, 그게 잘못 되었다는 걸 알고 있지. 실제로도 그렇고. 너에게는 확실한 선악 구별이 있는거야. 그렇기에 스스로가 한 행위에 괴로워하지. 그때 그 아파트에서 네 손이 갑갑한 듯 떨리는게 봤어. 죄책감의 신호지."


"겨우, 겨우 그런 걸로 날 믿었다는 거야?", 그가 혼란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 혼란이 청의의 의견을 이해하지 못해 생긴 것인지, 아니면 정곡을 찔려서 생긴 것인지는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 나도 어느 정도는 너의 생각과 행동이 옳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법을 집행하고 수행하는 자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법의 테두리 안에 종속되지. 만들어진 시스템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거야. 하지만 너는 우리들 같은 치안관이 아니었기에, 우리와 다른 수단으로 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어."


"그래서 우리가 바로 여기 있는 거고.", 청의가 양팔을 펼쳤다. "바로 여기, 적들의 턱밑까지."


"하지만, 내 위험하고도 유연한 생각만이 너를 믿게 만든 게 아니었어. 내가 지켜본 너는, 네가 끌어들인 내 후배에게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졌고, 그녀를 지켜주려고 했어.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가족들조차."


"그러니 믿지 않을 수 없었지. 네가 선한 인물이라는 걸.", 청의의 말에 자칼은 혼란스러운 듯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멀찍이 떨어진다. 등을 돌렸기에 그 복면 아래의 얼굴을 읽을 순 없었지만, 어떤 표정일지는 예상이 갔다.


"...나는 용병이야. 사람들의 피와 살을 금으로 바꿔 배를 채우는... 놈이라고..."


"내가 몇 십년을 살며 알아차린게 있지. 선한 사람조차 때에 따라 악을 저지르며 살 수 밖에 없는 게 이 세상이라고. 가장 악한 자에게 조차 순수하고 인간성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고. 사람은 인형이 아니야, 단순하게 살 수가 없는 존재지."


"스스로에게 너무 박한 평가만을 내리지 마.", 청의의 말에 자칼은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것 같았다.


방안은 그렇게 침묵 속에 갇혀져 있다가, 이윽고 자칼이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별말씀을.", 청의가 웃었다.


"일단은 계속 기절한 채로 있어. 제인이랑 같이 더 상의를 하고 올테니까. 너랑 세스, 그리고 얼떨결에 붙잡힌 재수 옴붙은 여자애까지 다 데리고 나갈 방법을 찾아볼게."


"그리고 청의?", 그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말했다.


"...우리는 모두 화학작용의 산물이야. 이 우주의 모든 게 그렇지. 하지만 삶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곱씹으며 살아갈 수 있는 건 오직 사람 뿐이야. 어떤 다른 생명체도 그럴 수 없지. 당신도 분명... 마찬가지야."


그의 말을 듣는 청의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녀의 코어가 크게 덜컹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자칼은 이윽고 자기가 한 말이 쑥스러워진 것인지 고개를 저으며, "갔다올게." 라는 말을 남긴 채 방을 나간다. 그가 나간 방문을 한동안 지켜보던 청의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문을 나간 직후, 자칼은 괜시리 낯뜨거운 말을 했다며 스스로를 질책하며 제인을 찾아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문을 나가자마자 보이는 문지기의 모습에 그는 멈칫하며 그에게 물었다.


"거기서 뭐하지?"


"앗, 자, 자칼 형님..."


자칼의 물음에 황급히 무언가를 등 뒤로 숨기는 문지기. 그 모습에 의아해진 자칼이 그에게 다가가 뭘 숨겼냐 추궁하고, 순감 흠칫한 문지기는 이윽고 등 뒤로 숨겼던 것을 꺼낸다. 페트병에 담긴 물 한 병이었다.


"모, 목이 말라서요... 자, 자리를 비우면 안된다는 거 알지만 너무 갈증이 나서..."


"콜록, 콜록-!"


문 너머에서 소녀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자 문지기는 사색이 되며 자칼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조용히 문지기의 뒤에 자리잡은 문과 문지기를 번갈아 주시하더니, 이내 말 없이 문지기가 지키듯 선 문을 열어젖혔다.


"자, 잠깐만요-!", 문지기가 자칼을 막아보려고 하지만 한손으로 손쉽게 저지되고,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소녀가 겁먹은 눈빛으로 자칼을 쳐다보았다. 그가 소녀를 쳐다보자 소녀는 연신 기침을 해대기 시작하고, 문지기는 자칼의 앞으로 나서서 변명하기 시작한다.


"주, 중요한 인질이잖아요-?! 혹시나 중간에 탈수로 죽거나, 기침 때문에 숨 막히면 안되니까... 그, 그래서 물만 조금 주려던 거에요, 다른 의도는 전혀-"


"다른 누가 아나?", 자칼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문지기는 흠칫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물 준 다음에 잠깐 걸으면서 얘기나 하자."


"네... 네?"


"들었잖아. 빨리 물 먹이고 와. 얘기 좀 하게."


"어, 저기 그...", 문지기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말했다. "...화, 안내세요?"


그의 말에 자칼이 억지로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왜. 화내줘?"


"아, 아니요! 금방 물 먹일게요...!"


문지기는 이윽고 소녀에게 다가가 뚜껑을 열고 물을 건내주었다. 소녀는 물을 받아들자마자 벌컥벌컥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서 크게 기침했고, 문지기는 소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한다. "천천히 마셔. 기도로 들어가면 안돼."


소녀는 그렇게 천천히 다시 물을 마셨고, 순식간에 페트병은 텅 비어버린다. 페트병을 가지고 돌아가려던 찰나, 자칼이 문지기에게 말했다.


"병은 놨둬."


"네? 그냥 둬요?"


"따로 화장실에 못 보낼 거 아니야... 혹시 모르니 그냥 둬."


"아..."


자칼의 말을 이해한 듯 머쓱하게 뒷목을 쓸어내리며 병을 두는 문지기. 소녀는 자칼의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윽고 얼굴이 새빨게지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다소 부드럽게 말해줬어야 하는 건 자칼도 알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촉박했으니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었다.


"얼른 나와. 문 닫고.", 자칼의 말에 문지기는 문을 닫았다. 그리곤 함께 복도를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너 지금 한 열 아홉은 됐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목소리 보면 딱 알아 이 녀석아. 이런 일에는 어쩌다가 발을 담근거야?"


"어... 그게..."


순간 말을 흐리며 시선을 피하는 문지기. 비록 헬멧으로 가려져 있어 정확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좋은 표정을 아닐 것이라고 자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미안하다. 조금 갑작스러웠나보네. 너한테도 사정이 있을테니, 말하기 힘들면 굳이 말 안해도 돼."


"어... 진짜요?"


"다른 녀석들이랑 달리, 난 남의 사생활을 캐는 거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 말이야. 네가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아니면 그냥 있으면 된다."


자칼의 말에 문지기는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 그러니까, 산사자파의 단원들은 모두 강압적이고 사생활 따위는 존중하지 않는 무뢰한들이었다. 밝히고 싶은 것, 그렇지 않는 것들을 모두 공유하고 감내해야 했다. 심부름꾼 노릇을 하듯, 봉 노릇을 하듯... 콤플렉스를 찔러대는 그 모든 걸 홀로 견뎌야 했다.


하지만, 자칼은 달랐다. 그저 네가 원할 때 말하면 된다는 그의 행동에, 문지기의 마음은 빠르게 열렸다. 거센 북풍에는 겉옷을 더 짖게 눌러쓰지만, 따스한 태양에는 겉옷을 제 손으로 벗어내리듯이.


"...다른 사람들한테 말 안하실 거죠?"


"혹여라도 누가 엿들어서 퍼트릴려고 하면 줘패서라도 다물게 만드마."


"그, 그렇게까진 안 하셔도..."


잠시의 침묵, 한 번의 심호흡 후... 문지기가 말한다.


"저... 고아였거든요. 위탁 가정에 몇 번인가 맡겨졌는데... 별로, 화목하게 지낼 수가 없어서..."


"그래서 가출해서, 산사자파에 들어왔다?", 자칼의 말에 문지기는 고개를 저었다.


"가출한 건 맞지만... 몇 년 동안 거리를 헤매면서 여러가지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좀 거친 일을 하니 산사자파를 알게돼서 가입 권유를 받았고요. 대부분 거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필요할 때는 제대로 절 지켜주기도 하고, 돈도 제대로 주고... 밥도..."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떡대 두 명이 널 샌드백마냥 후드려 패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자칼이 미간을 찌푸리며 얼마 전 일을 언급하자 문지기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 그때는 제가 융통성 없게 굴었으니까요... 제대로 일을 해내면 칭찬도 해주세요. 무엇보다..."


"...무엇보다?"


자칼의 시선이 문지기에게 느긋히 향한다. 문지기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음 속에 가장 무겁게 자리잡은 말을 꺼내듯 입을 연다.


"...이 사람들한테는 빚을 졌어요... 몇 번이나 구해지고... 도움을 받았으니까... 제... 가족인 걸요..."


"가족?!"


자칼이 어이 없다는 듯이 언성을 높혔다. 문지기는 당황하며 움츠려들고, 자칼은 문지기와 얼굴을 마주하며 그의 앞에 선다.


"대체 어떤 놈들이 제 가족한테 그렇게 손지껌을 한다는 거야? 넌 그때 싸운 것도 아니고 그냥 무력하게 처맞고 있었어, 놈들이 교육 운운하는 동안!"


"그, 그건 제가 잘못해서-"


"아니, 놈들은 그냥 제 분풀이를 하려고 했던 것 뿐이야. 넌, 막내라서 만만한 먹잇감이 됐을 뿐이고. 제대로 된 가족은 절대로 그 따위로 교육하지 않아, 난 독립용병이지만 그건 잘 알고 있지."


"하, 하지만... 전 가족한테 빚을-!"


"꼬맹아-!", 자칼이 문지기의 헬멧 위로 양 손을 얹었다. 그의 손길에 문지기가 멈칫하자, 그는 천천히,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헬멧을 벗기고 그의 두 눈을 마주보았다. 떨리고 불안한 눈동자, 그 눈동자에는 공동체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아직은 소년으로 있는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 어떤 가족도, 빚을 쌓아두고 계산하지 않아. 가족은, 어떤 상황에서든 서로를 챙겨줘. 돌아오는게 없어도, 설령 때때로 못난 모습을 보이더래도... 절대 그걸 빚으로 쌓아두지 않고 그냥 돕지. 그게 진짜 가족이니까."


"빚이 있기 때문에 가족을 떠나지 못하는 건 아닌거야.", 자칼의 말에 떨리는 문지기의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그의 눈빛을 제대로 쳐다볼 용기가 없던 모양이다. 그런 문지기의 마음을 이해한 자칼은, 다시 그에게 헬멧을 건내준 뒤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해준다.


"잘 생각해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네가 원하는 선택을 해. 남들이 원하는게 아니라."


그런 말을 남기곤 자칼은 복도를 떠나 제인을 찾기 시작했다. 문지기는 그 자리에 남아 멍하니 멀어져가는 자칼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이윽고 문지기는 헬멧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없이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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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은 자칼과 떨어져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다. 이 경유지로부터 탈출할 루트는 네 개나 찾아뒀지만, 더욱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다. 혹시나 폐건물에서 처럼 무언가 비밀 통로가 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뒤져보지만 수확은 없었다.


"곤란하네... 이래서야 정면으로 돌파하는 수 외에는 없는건가?"


무리는 아닐지도 모른다. 일단 사자굴의 위치가 특정된다면 더 이상 정체를 감출 필요가 없으니 청의와 세스의 도움을 받아 달려드는 산사자파 일당을 처리하고 도주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실력 좋은 용병인 자칼도 있었으니 정면 돌파 또한 하나의 정답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잡혀들어온 노숙자 소녀가 문제였다. 몸상태도 그닥 좋아 보이지 않고, 전투를 할 수도 없다. 조금 냉혹하게 말하자면 짐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절대로 두고갈 순 없었기에 최대한 위험을 피하는 루트를 고르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외진 곳에 있는 문을 여니, 무언가 천막에 가득 가려진 물건들이 제인의 눈에 보였다. 제인이 의아해하며 다가가 천막을 거두자, 그 아래에는 침식 저항제 및 방어 도구, 그리고 생필품이 가득 채워진 상자들이 있었다. 최소 몇 달은 버틸 수 있는 비축물자들이었다.


'여기도 창고들 중에 하나인가? 이런 외진 곳에...'


'창고로 쓸 방이었다면 한쪽 구역에 몰아넣기나 하지' 라며, 제인은 방 지정을 잘못한 산사자파를 향해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다 문뜩 의아함이 들었다. 산사자파의 인원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다량의 침식 저항제와 생필품을 쌓아둘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나 이내 그런 의문에 생각할 틈도 없이, 창고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제인은 서둘러 창고 안에 몸을 숨기며, 문을 살짝만 열어놓고 바깥을 살폈다.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보이는 것은 보스인 레이저, 그는 험악한 얼굴을 구기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발걸음을 멈춰선 그는, 분을 삭히는 듯한 표정으로 근처의 벽을 제 커다란 주먹으로 쳤다. 쾅- 거리며 벽이 내뱉는 비명소리가 복도 안에 둔탁하게 울려퍼진다.


"자칼... 그 버르장머리 없는 애송이가...! 감히 내 부하들 앞에서 날 대신해 대장이라도 된 듯 행세를 하다니...! 사자굴에 도착하는 순간 가르쳐주마...! 주제도 모르고 출세에 목을 매면 어떻게 되는지...!"


'저 녀석...!'


레이저는 이내 씩씩거리면서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자칼이 한 행동이 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서 분을 풀려 잠깐 외진 곳을 찾은 모양인 것 같았다. 그 속좁고 옹졸한 소인배의 말에 제인은 침을 삼켰다. 그의 말대로라면 사자굴에 들어서는 순간 자칼이 위험해질 것이었다.


'아니, 잠깐.'


'어쩌면-', 그러나 다음 순간 제인의 머릿 속에서 떠오르는 하나의 계획. 자칼이 다소의 리스크를 짊어져야 되긴 했지만, 제대로 된다면 인질들에게 가해지는 시선을 돌리고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사람 입장도 물어봐야 될 것 같긴 한데..."


제인은 생각했다. 자칼에게 이 계획을 말해주면 뭐라고 말할까?


약 3초정도 생각한 그녀는, 어렵잖게 자칼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뭐해? 빨리 진행 안 하고.'


그 모습을 떠올리자 제인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녀는 상자 안에서 침식 저항제를 몇 개 꺼내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레이저의 뒤를 쫓았다. 그녀가 잠깐 보스와 면담을 나눌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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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자 소녀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붉은 자켓을 입은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오고, 그의 손에는 통조림과 에너지바 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다. 문지기는 문을 닫고 소녀에게 다가가 음식들을 건내주었다.


"배고프지? 자, 어서 먹어."


"고마워..."


문지기에게 음식을 받아든 소녀는 말없이 통조림을 따서 내용물을 먹기 시작했다. 산사자파에 잡히기 전까지도 며칠 동안 변변찮은 음식을 먹지 못했던 소녀였기에 통조림조차 고급 요리로 느껴졌다. 배려심 좋게도 문지기는 숟가락도 가지고 와줘서 더러워진 손으로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됐었다.


"...음...?"


하지만 통조림을 몇 숟갈 뜨다 말고 소녀는 문지기를 바라보며 위화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문지기는 헬멧을 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딘가...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소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조금... 조금 생각할 게 생겨서..."


"생각할 거...?"


문지기는 고개를 숙이고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비록 소녀는 문지기의 정확한 생각까진 읽을 수 없어도, 굉장히 답을 내기 힘들어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문지기가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가족, 있어? 엄마라든가... 아빠라든가... 형제 같은 거."


"...엄마랑 아빠가 있었어..."


"있었다는... 건...?"


"돌아가셨어.", 소녀가 고개를 숙였다. "제로 공동이 폭주하던 날에..."


소녀의 말에 문지기는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무어라 대답해줘야 할지, 무엇으로 위로해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윽고 소녀가 고개를 숙인 채 숨죽여 울기 시작하자, 소년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문지기는 부드럽게, 그리고 무척 상냥하게 소녀의 어깨를 껴안더니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울릴려던게 아니었어..."


"흑... 흐윽..."


"괘, 괜찮을 거야. 내가, 내가 너한테 무슨 일 안 일어나도록 사람들이랑 잘 이야기 해볼게. 자칼 형님한테도 얘기 해볼게..."


"그러니까 울지 마...", 소녀의 모습에 문지기는 더 이상 소녀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뭐든지 해볼 것이었다. 설령 그 일로 인해 선배들이나 믿고 따르는 자칼에게 배척받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소녀에 대해서 만큼은 스스로가 원하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그것이 소년이 지금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였다.


덜커덩-, 문이 거칠게 열리자 문지기와 소녀는 당황하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자칼이 이내 안쪽으로 들어왔고, 두 사람을 보고 턱짓하며 말한다.


"가자."


"어, 어디로요?", 문지기가 물었다.


"사자굴."


문지기는 침을 삼켰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문지기를 보며, 자칼이 이어서 말한다.


"그 계집애도 데려간다."


"네? 아니, 이 애는 왜요...?!"


"가면 저절로 알게 될거야. 빨리 데리고 나와."


자칼의 말에 소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를 따라간다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아는 듯 보였다. 문지기 또한 그것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었고, 문지기는 자칼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 안돼요! 이, 이 애는 아무 잘못 없이 그냥 휘말린 거잖아요! 그냥,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내주세요. 네?"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거 알잖아. 계집애를 데려가야 해."


"제, 제발요 자칼 형님! 이렇게, 이렇게 빌게요...!"


무릎을 꿇고 머리마저 조아리며 간곡히 부탁하는 문지기. 자칼은 그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이윽고 그를 지나쳐 소녀에게로 향했다. 소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깃들고, 그의 손이 소녀의 손목을 붙잡으려는 순간-


"안돼-!"


자칼의 앞을 다시금 문지기가 가로막았다. 양손을 펼쳐 자칼에게서 소녀를 지키듯이, 그의 손 끝은 공포를 숨길 수 없는 듯 떨려왔지만 비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 안돼요... 이, 이 애는...!"


"괜찮다.", 자칼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음색의 목소리에 문지기는 순간 당황하고, 그런 그에게 자칼이 말한다.


"...믿어라. 저 애도, 너도... 괜찮을거야."


"가자.", 그의 말에 문지기는 순간 말을 잃고 자칼과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잠시 방안에 침묵이 감돌고, 그 사이 생각에 빠진 듯한 문지기는 이윽고 자칼에게 말한다.


"제가... 제가 데리고 갈게요..."


"...그래, 알겠어. 잘 챙겨보고."


그렇게 문지기는 소녀를 달래면서 그녀를 데리고 자칼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자칼은 청의와 세스를 독방에서 꺼내 끌고가고, 얼마안가 다른 구역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인과 마주친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그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었어, 자칼. 그리고... 치안국의 신선한 제물들도?"


"흐음..."


"젠장...!"


제인의 시선에 절망하는 세스, 청의는 다소 덤덤한 표정이긴 했지만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들이 선 복도 너머 깊은 곳에는 커다란 균열이 기다리고 있고, 이윽고 그들은 발걸음을 내딛어 그 균열을 통과한다.


피부를 스치는 에테르 에너지의 이질감, 찾아오는 미약한 고통. 그리고,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여, 여긴...?!"


자칼이 보기 드물게 목소리를 높이며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친다. 회색빛의 칙칙한 콘크리트 폐허 사방에서 솟아나 있는 에테르 결정과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부서진 건축물들. 그는 그곳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그곳을 알고 있었다.


"제로 공동...!?"


"놀랐나?", 균열을 통과하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칼과 일행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먼저 균열을 통과했던 레이저가 있었고, 그는 자칼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법이라고 하지, 겁쟁이 같은 치안관들과 달리 우리는 산사자니까 말이다."


"과연... 동반 공동과 제로 공동을 잇는 안정적인 균열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거군. 그래서 놈들의 시선을 피해 이곳에 숨을 수 있던거고."


자칼은 그제서야 왜 치안국이 기를 써도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차릴 수 없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제로 공동에 본거지를 틀고 숨다니, 보통 배짱이 아니고서야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까딱 잘못하는 순간에는 에테리얼로 변이할 지도 모르는데도.


"배짱은 인정하죠, 보스... 그래서? 제가 일을 처리할 방은 어디있습니까?"


"제인이 준비해 둘거다.", 레이저가 제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제인은 미소지으며 날선 눈매를 지어보았다.


"자칼, 치안관들을 이리 넘겨... 아, 그리고 거기 있는 문지기 꼬마랑 여자애도 날 따라와."


"치안관은 그렇다치고 두 사람은 왜 데려가는거지?", 자칼이 물었다.


"나중에 알게 될거야. 자, 어서들."


제인은 청의와 세스, 그리고 문지기와 소녀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런 제인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던 자칼은 이윽고 레이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자칼, 저 치안관들을 처리하기 전... 먼저 네가 간부가 되기 위해 먼저 거쳐야 할 일이 있다."


"승급 시험입니까? 따분하군요, 제 실력은 이미 잘 알고 계실텐데요."


"그래. 하지만, 이건 성스러운 행위다. 네가 비로소 우리들의 진정한 형제가 된다는 의식같은 거지. 모든 간부들은 예외없이 이 행위를 거쳤고, 너 또한 그래야 한다. 그게 규칙이야."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저도 따를 수 밖에 없군요. 그래서, 해야할 일이 뭡니까?"


"따라와라.", 자칼은 레이저의 말에 그의 뒤를 따라 어느 건물 안으로 향했다. 이전에는 무슨 쇼핑몰 같은 곳이었는지 넓찍한 장소였는데, 그 중앙에는 무슨 투기장처럼 넓게 뚫려있는 구덩이가 있었다.


"여긴?"


"사자굴의 심장이다. 나는 이곳에서 이전 보스를 이겨 지금 이 자리를 차지했지. 그 후로, 모든 간부들은 이곳에서 서로의 실력을 겨루며 스스로를 증명해왔다. 자칼, 너 또한 이곳에서 간부에 오를 자격이 있는지 마지막 시험에 들 것이다."


"장비를 내려놓고 들어가라.", 레이저의 말에 자칼은 수상쩍은 느낌을 눈치챘지만 일단 순순히 그 말에 따르기로 한다. 그는 근처 상자 안에 자신의 벨트와 하네스를 풀어서 던져놓고,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 자칼을 내려다보며 레이저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곧 네 상대가 올테니."


자칼이 잠시 몸을 풀며 구덩이의 벽에 기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덩이 너머로 익숙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재빠른 형체가 순식간에 구덩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흡-!"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날아든 칼날을 맨손으로 받아내는 자칼. 기묘한 형태로 되어있는 나이프가 자칼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서 멈춰서 있었고, 그 나이프의 손잡이를 잡고있던 것은 다름아닌 제인이었다.


"...제인, 무슨 개짓거리지?", 자칼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말했다. 그러자 제인이 능글맞게 받아친다.


"승진하려는거야."


자칼이 오른다리를 들어올려 휘둘렀지만, 차여지기 전 제인은 몸을 뒤로 빼며 물러섰다. 자칼은 맨손이었지만, 제인에게는 명백히 무기가 있었다. 자칼이 날선 눈빛으로 레이저를 째려보자, 레이저는 그를 비웃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자칼, 너는 훌륭한 용병이다. 좋은 기술과 날카로운 감각을 겸비하고 있지. 너를 형제로 받아들였을 때 난 치안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이나 말하지? 무슨 상황인지 대강 감이 잡히니까."


자칼이 비꼬듯이 말하자 레이저의 미간이 다시 찌푸리다 끝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들개는 들개로 있어야지, 감히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를 노려서는 안됐다. 내 주변에 대장 노릇을 하려는 들개새끼 따위는 필요 없어. 널 잃어버리는 건 꽤나 뼈아픈 손실이겠지만... 여기는 나의 왕국이고, 내가 바로 이들의 알파(우두머리)다."


"내가 바로 산사자란 말이다-! 누구도 내 자리를 탐낼 순 없어-!!!", 레이저의 오만한 외침이 투기장에 울려퍼졌다. 그러자 어느새 모였는지 모를 산사자파 일당들이 투기장 주위에 모여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칼은 제인을 당황스레 쳐다보고, 제인은 곧바로 다시 달려들 자세를 잡으면서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하지만... 알지? 우리들은 원래 이렇게 산다는 거."


"너무 원망하지 말아줬음 좋겠어.", 제인의 말에 자칼은 콧방귀를 꼈다. 그는 여유롭게 몸을 푸는가 싶더니, 이내 양손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내가 칼이나 총이 없다고 나랑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어떻게 독립용병으로 있으면서 살아남았는지 모르는 건가?"


"잘 알지. 어디 한번 보여주지 그래?"


자칼과 제인이 대치하는 한편, 구덩이 위로 레이저가 외쳤다.


"산사자들이여! 오늘 이 사자굴의 심장에서, 오직 한 명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 들개인지, 아니면 생쥐인지! 잘 지켜보도록 해라-!!!"


자칼과 제인이 서로에게 달려들며, 구덩이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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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굴 진입, 피날레 스타트.